2007년 6월호

1987년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 의원의 ‘그해 6월’

전두환, 직선제 수용 건의에 “노태우를 설득하라, 특명이다”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7-06-08 09:5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6·29는 ‘항복’ 아니라 ‘결단’과 ‘수용’
    • 6·10항쟁 현장에서 확인한 민심…“직선제밖에 없다”
    • 안기부장, 당 사무총장 “직선제? 쓸데없는 소리”
    • 군·경찰·청와대, 1987년 6·14 계엄령 논의 회동
    • 군부는 직선제 개헌 반대 쿠데타 기획
    • 6월18일, 목 내놓고 직선제 수용 건의 보고서 올려
    • 고도의 정치공학 “김대중 풀어놓으면 직선제 해도 이긴다”
    1987년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 의원의 ‘그해 6월’
    대한민국 민주화의 기점으로 1987년 6월을 꼽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좀더 정확하게 6·10민주항쟁인가, 아니면 6·29선언인가를 물으면 그 대답은 일치하지 않는다. 1987년 당시, 거리에서 ‘호헌(護憲)철폐’를 외친 사람들은 당연히 6·10민주항쟁을 민주화의 시발이라고 말한다. 반면, 시위로 점철된 혼란 정국을 수습해야 했던 정권은 6·29선언이 기점이라고 주장한다. 5공화국의 실세들에게 6·10민주항쟁은 아직도 ‘소요사태’로 통용된다. 그들에겐 6·29선언이 ‘용기 있는 결단’이자 ‘구국의 선택’이다.

    그 중심에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金容甲·71) 의원(한나라당)이 있었다. 김 의원은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1980~85)을 거쳐 1986년 1월 청와대 민정수석이 됐고, 1987년 6월 직선제 수용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의 사면복권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6·29선언을 탄생시키는 데 동참한 게 더없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5월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김 의원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6·29선언에 관심을 가져줘 고맙다. 5·6공의 도덕성 문제 때문에 6·29정신이 훼손되고 잊히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6·29선언의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평가받기를 바랐다. 김 의원은 오는 6월29일 6·29선언 20주년을 맞이해 재평가 세미나를 마련할 계획이다.

    6·29선언의 의미

    “누가 뭐래도 6·29선언은 민주화의 분수령이자 밑거름이었습니다. 민주화의 시발점이었지요. 대통령 직선제, 정치금지법 폐지, 정치인의 사면복권, 지방자치제 도입, 언론의 완전한 자유 보장 등 현재의 정치적 기반이 모두 그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습니까.”



    ▼ 6·29선언의 주역이 누구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지요.

    “누가 주도했느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단지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제대로 평가하는 게 중요해요. 네가 했다, 내가 했다 공을 다툴 게 아니라 제대로 올바른 평가를 받자는 겁니다.”

    직접 표현은 안 했지만 김 의원은 박철언 전 의원(6·29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을 겨냥한 듯했다. 박 전 의원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6·29선언의 주역인 것처럼 써놓았기 때문이다. 박 전 의원은 6·29선언문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된 사실은 없다. 또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를 중심으로 한 당시 민정당 정세분석실과 이종찬 전 의원도 6·29선언을 적극 추진했던 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6·29선언의 실질적 주역을 놓고 설왕설래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 6·29선언에 동참한 데 대한 자부심이 무척 큰 것 같습니다.

    “통치권자인 대통령의 참모로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요. 거기에 동참했던 한 사람으로서 영광스럽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6·29선언이 왜곡 또는 왜소 평가되거나 무시당하며 잊히는 게 안타깝습니다. 5·6공 수구 꼴통이라고 할까봐 지금껏 제대로 말을 못했는데 20주년이 되면서 욕을 먹어도 평가는 제대로 받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6·29선언 20주년 세미나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정치사적으로 6·29가 민주화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집중 조명할 생각입니다.”

    ▼ 6·29선언은 국민의 저항에 부딪힌 군사정권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 아닌가요.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져왔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쪽에서는 ‘항복’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상황을 수습하는 처지에서 본다면 전두환 대통령의 용기 있는 결단과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이자 대표위원이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결연한 수용, 이 두 가지가 맞물려서 가능했다고 봅니다.

    1987년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 의원의 ‘그해 6월’

    1987년 6월29일 기자들에게 6·29선언을 발표하는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는 다릅니다. 결국 국민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습니까. 박 대통령은 삼선개헌으로 집권을 연장했지만 전 대통령은 그럴 마음이 애초에 없었죠. 국민은 믿지 않았지만…. 대통령은 이런 불신을 늘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어차피 대통령은 물려줘야 하고 그렇게 하기로 한 이상 국민의 요구대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선에서 이기면 더없이 좋고, 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물론 그렇게 권력을 인계한 뒤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지만.”

    역사 물꼬 튼 ‘민심동향 보고’

    ▼ 직선제 수용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 같은데요.

    “대통령은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시위에 대한) 해결방법이 여럿 있었죠. 비록 비극으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평화롭게 수습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어요. 그때 어떤 방법을 선택하는가는 전적으로 청와대와 민정당의 판단에 달려 있었습니다. 역사는 늘 선택의 연속 아닙니까. 국민의 요구를 정책적 대안으로 선택하는 용기, 그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 ‘여러 방법’에는 무력진압도 포함됐습니까.

    “계엄령, 쿠데타, 국민투표안, 직선제 총선 연계안 등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뒤에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하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1987년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김 의원은 6월민주항쟁의 발단을 1986년 전두환 대통령의 개헌논의 허용에서 찾았다. 1985년 중순부터 시작된 개헌논의는 김대중씨 가택연금, 정치활동 중단 등 정치관련 금지법의 서슬이 퍼런 가운데 재야단체와 야당 일각을 중심으로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1986년 1월 개헌논의가 합법화하자 직선제 국민 서명운동이 벌어지는 등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박철언 전 의원은 회고록에서 ‘86년 말 전두환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통해 국회를 해산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으나 이 또한 확인되지 않았다.

    “1987년 6월 ‘소요’는 1986년부터 예고됐습니다. 개헌논의에 불이 붙은 게 그 때니까요. 1986년 1월14일 민정수석으로 임명됐고 그해 4월24일 대통령에게 처음으로 민심(民心) 동향보고를 올렸습니다. 그 무렵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차 유럽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야당에서 개헌논의를 시작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었습니다. 저는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현장에 몰래 들어갔습니다. 대전 실내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집회에는 당시 야당 총재이던 이민우씨가 나왔고 김영삼씨가 고문으로 참가했죠. 2만여 명이 모인 거대 집회였습니다. 개헌과 관련한 집회나 논의가 일절 금지돼 있을 때였죠. 전 대통령과 여당인 민정당은 내각제를 추진하려 했고, 야당과 재야에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습니다. 대통령에게 1시간에 걸쳐 특별 동향보고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 대통령은 당시 민정수석이 야당의 집회에 몰래 간 것에 놀라 ‘이거 큰 사건이군, 잡히면 큰일인데’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때 와이프와 함께 갔는데, 30분 만에 못 나오면 경찰에 신고하라 하고 들어갔죠.”

    ▼ 동향보고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군중집회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렇게 계속 시간을 끌면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아예 대통령 직선제 개헌논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대통령이 평소 같으면 ‘네가 뭘 알아’라고 나무라고 끝냈을 터인데 민정수석이 집회 현장을 다녀온 것에 쇼크를 받았는지 ‘그래 알았다’고 했습니다. 며칠 후인 4월30일 개헌논의를 공식화하는 담화가 발표됐지요. 현장 상황을 캐치한 제 판단을 대통령이 믿은 겁니다.”

    박종철 사건, 청와대도 속았다?

    ▼ 그로부터 1년 후에 4·13 호헌 조치가 나왔는데요.

    “개헌논의 허용 이후 격렬한 싸움이 계속됐죠. 정부와 여당은 내각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야당과 재야에서는 직선제를 하자고 연일 집회를 하니 타협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1년의 시간만 흘려보낸 것이죠. 대통령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4·13 호헌 조치 발표는 당시 정무1수석이던 김윤환씨 소관이었습니다. 저는 민심 동향보고만 충실하게 했습니다.

    발표 이전에 내부적으로 개헌논의를 했지만 도저히 결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1987년 3월14일 개헌논의 중단을 발표하고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곧이어 4·13 호헌 조치가 나왔고요. 결과적으로 야당과 재야, 학생들의 대(對)정부 투쟁에 불을 지피게 됐지만 청와대로서는 1987년 말 대통령선거 일정이 있으니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후보 지명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6월 초 민정당의 건의를 대통령이 수렴하는 식으로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후보로 지명하려는 계획을 짜놓고 있었습니다. 후보 지명 전당대회가 6월10일로 잡혀 있었는데, 그 무렵 공교롭게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죠. 이 두 사건이 합쳐지면서 정국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 의원의 ‘그해 6월’
    ▼ 박군이 고문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습니까.

    “저는 민정수석으로 민심 동향 파악이 주업무였고, 경찰과 행정파트는 강우혁 정무2수석 소관이었습니다. 강 수석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군이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고 보고하길래 제가 ‘어이 강 수석,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라고 나무랐죠. 정치 담당이던 김윤환 정무1수석과 박영수 비서실장 등 모두들 못 믿겠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경찰의 보고는 초등학교 학생도 못 믿는다’고 했죠. 강 수석도 ‘나도 못 믿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경찰에서 그렇게 우기는데’라며 답답해했습니다. 박군 사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애초부터 직감했습니다. 취조과정에서 쇼크사했거나, 실수를 했거나 뭐 뻔한 것 아닙니까.”

    ▼ 당시 수사를 맡은 안상수 검사는 박군 고문치사 은폐가 청와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는데요.

    “내가 아는 한 청와대의 지시는 없었습니다. 청와대에서는 말도 안 되는 보고라고 나무랐고, 정확한 사인(死因) 조사를 지시했습니다. 검찰은 자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겠지만, 담당 수석비서관인 강우혁 수석 자신이 펄펄 뛰고 그랬는데 그게 감춘다고 감춰질 일인가요. 깊숙하게는 모르지만 안기부가 어떻게 연관됐다는 것은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고. 결국 경찰의 뒤를 봐주다 문제가 생겨 장세동 안기부장이 그만두는 일이 벌어졌죠.”

    “계엄령은 절대 안 된다”

    ▼ 전국적 시위가 있었던 6월10일 상황을 들려주시죠.

    “6월10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가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치러지고 있을 즈음 저는 시위가 한창이던 서울 시내에 있었습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죠. 최루탄 무서운 줄 그때 알았습니다.

    당시 김옥조 민정비서관(전 중앙일보 정치부장)을 비롯한 민정비서실 식구 20여 명 전부가 종로, 명동, 시청 앞에 나가 있었습니다. 여기저기를 둘러봤는데, 명동의 다방에도 들어가고 지나가는 행인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아, 민심이 완전히 돌아섰구나. 민심을 다시 회복하려면 대단히 어렵겠구나’ 하고요. 그래서 그날 모종의 결심을 했죠.”

    ▼ 경찰이 명동성당 포위를 푼 것도 김 의원의 작품이라고 하던데요.

    “10일 밤 경찰이 명동성당을 원천봉쇄했는데 3000여 명이 성당 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죠. 다음날인 11일 아침 경찰에 통보하지 않고 명동성당에 들어가봤더니 농성자 대부분이 배고픔에 시달리며 진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뒤편으로 통로를 열어주면 좋겠다고 지휘부에 안을 냈습니다. 그러자 대다수의 농성 학생이 빠져나가고 200여 명만 남았습니다. 제가 성당 안에서 빠져나오자 경찰이 그때서야 알아보고 인사를 하더군요.”

    ▼ ‘모종의 결심’이란 게 뭡니까.

    “국민의 여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었지요. 결심을 굳히고 6월12일 안무혁 안기부장,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을 만나러 롯데호텔로 갔습니다. 민심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를 의논하던 중에 저는 ‘직선제를 받아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직접화법을 선택한 것이죠. 그랬더니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내가 장난 삼아 그런 이야기를 한 줄 안 모양이에요. 그날 논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 당시 정권 핵심부에선 다른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었던 겁니까.

    “6월14일 청와대 녹지원에 대통령비서실장과 정무·공보수석, 군 수뇌부, 치안관계 장관 등이 모였습니다. 일요일인데도 전 대통령이 이들을 급히 불러 모은 것은 계엄령을 선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의논하기 위해서였어요. 전 대통령은 실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대통령은 생각만 있었을 뿐, ‘계엄령’이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습니다. 치안본부장이 경찰력으로 수습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

    ▼ 김 의원은 왜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쪽(병력이나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는) 라인에 있지 않았죠. 어쨌든 그 소식을 접하고 바로 청와대로 들어갔습니다. 회의는 이미 끝났다고 해서 급히 비서실장과 공보수석, 정무1, 2수석을 불러서 비서실 입구 조그만 방에서 제 복안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방법을 바꾸는 게 좋겠다, 우선 절대로 계엄령을 선포해서는 안 된다, 그건 수습이 아니라 정국 혼란을 확산시키는 방책이다, 그 다음엔 국민이 원하는 것을 받아주자, 일단 받아주고 최선을 다하면, 즉 국민의 진정성을 이해하면 충분히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 수석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모두 다 어리둥절했죠. 대통령이 개헌논의 중단하고 직선제 안 한다고 했는데 참모라는 사람이 반대로 이야기를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박영수 비서실장만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제가 이야기한 것을 적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메모를 해줬죠. 후일에 알았지만, 박 실장은 제 의견을 대통령에게 귀띔한 모양입니다.”

    김윤환의 3개 정국수습안

    ▼ 사실 정국의 해법을 찾는 것은 민정수석의 몫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민심의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게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지요. 수석회의 다음날인 6월15일 김윤환 정무1수석을 찾아갔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물었죠. 당신에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요. 김 수석은 세 가지 방안이 있다고 했습니다. 88올림픽 이후 직선제 수용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안, 대통령선거를 한 후 13대 총선(88년 1월) 결과에 따라 내각제냐 직선제냐 선택하는 방안, 4·13 호헌 조치 자체를 당장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안이었습니다. 이들 안은 결국 민정당의 안과 같았죠.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당시 상황으로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김 수석에게 ‘이걸 안이라고 내놨습니까. 내가 들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국민이 이해하겠어요? 이대로 하면 결국 지게 됩니다.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습니다’라고 쏘아붙였죠. 그러고는 ‘그러지 말고 직선제 받아주지요, (선거에)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김대중씨 가택연금 해제와 정치인 사면 복권도 같이 하자며 제 복안을 다시 설명했지요. 그랬더니 김윤환씨는 ‘전통(全統)이 내각제를 하자는데, 누가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합니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 하겠습니까’라고 맞받아쳤습니다. 그래서 ‘방울은 내가 달겠습니다. 일단 내가 전통에게 이야기할 테니 김 수석을 불러서 이야기하면 지원을 해 주소’라고 부탁했습니다.”

    김윤환씨는 그후 6·29선언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김용갑이한테 물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 그래서 어떻게 ‘방울’을 달았습니까.

    “설득 끝에 김윤환 수석도 ‘전 대통령만 납득시키면 그 방법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박영수 실장은 이미 공감을 표했고. 그래서 김옥조 민정비서관에게 대통령에게 설명할 보고서를 만들라고 지시했지요. ‘4·13 후유증 극복을 위한 근본 대책 검토’가 그것인데, 지금 보면 제목이 좀 촌스럽지요? 김 비서관은 지시를 받고 깜짝 놀라더군요.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하고요. 저는 ‘아니야, 이 방법 밖에 없어. 받아들일지 말지는 대통령의 선택이야’라고 안심시켰습니다. 김 비서관은 제 생각을 틀로 해서 공식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그 보고서를 지금도 갖고 있냐는 질문에 김 의원은 “보고서는 없지만, 당시 상황을 매일 깨알같이 적어놓은 노트가 있다”고 했다. 노트를 공개할 수 있냐고 묻자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뭔가를 보고 있었는데, 그 노트에서 필요한 내용을 발췌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기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다

    ▼ 민정당 노태우 후보 캠프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6월16일 낮 12시10분 청와대 인근 식당에서 노태우 캠프에 있던 민정당 의원들을 만났습니다. 현홍주, 유홍수…. 최병렬씨가 그때 있었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네요. 제 생각을 말했더니 유홍수 의원은 아무 말도 안하고 현홍주 의원은 ‘대통령이 받아줄지가 걱정이다. 일단 이에 대해선 보안을 유지하자’고 하곤 헤어졌습니다. 그쪽도 별 대안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이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혔죠.

    그런데 민정당 의원들을 만나기 전날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민방위훈련이 있는 15일이라 청와대 수석들이 평소처럼 지하 벙커에 내려가 훈련을 하고 있는데 전 대통령이 거기로 내려왔어요. 그러더니 ‘민정수석, 너 말이야, 미리 겁 먹고 시시한 보고나 하고 말이야… 앞으로 그런 보고는 하지마’ 하고 딱 지목해서 기합을 주는 거예요.

    전 대통령이 평소 저를 무척 신뢰했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김 비서관이 만든 대책 문건을 아직 보고하지도 않았을 때였거든요. 그래서 박영수 실장에게 써준 메모가 전해졌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그 부분은 아직도 의문입니다. ‘앞으로 민심 동향 보고 하지마’란 대통령의 꾸지람에 일단 ‘예’라고 대답하고 저 혼자 가만히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곤 ‘이 문제에 대해선 내 목을 걸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보고서 올릴 준비를 했습니다.”

    ▼ 직선제 수용에 대한 공식 보고는 언제 했습니까.

    “6월17일 대통령에게 특별면담을 신청해놓고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그날은 대통령의 일정이 꽉 차 있어 못 했습니다. 이튿날 면담을 했죠. 6월18일 오전 9시20분. 첫마디가 ‘각하, 1시간 정도 걸리겠습니다’였죠. 제가 전 대통령에게 불쑥 남은 임기를 묻자 대통령은 당황하는 기색이었습니다.

    ‘각하, 지금 임기가 얼마나 남았습니까. 8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지금 그 시간 안에 민심을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특단의 방법이 나오지 않는다면 지금 상태에선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민심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만 하면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 해결책은 국민의 요구대로 수용하는 것뿐입니다. 국민과 야당이 직선제를 원하니 그들의 요구를 일단 들어준 후에 최선을 다해 싸우고, 지면 깨끗하게 정권을 이양하고 야당 하면 됩니다. 그래야 역사에 남을 수 있습니다. 무리하게 수습하다 실패하면 이승만 대통령 때처럼 어려워집니다. 각하가 보안사령관 시절 사무실에 걸어둔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문구를 생각해보십시오. 죽을 각오로 모든 것을 다 던지면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죽 설명을 하자 대통령은 듣고만 있었습니다.”

    ▼ 전두환 대통령과 무척 가까웠나봅니다. 그런 보고를 다 하고….

    “전 대통령이 소령 때 제가 중위로 알고 지냈고, 안기부장대행 시절 안기부 기조실장을 했으니까 인연은 있지요.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현장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보고할 때는 정신없이 했습니다. 참모의 임무를 다했을 뿐이죠. 당시 정보 보고는 안기부와 경찰의 보고를 짜깁기한 것인데,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대통령에게 ‘땡전 뉴스’에 대해서도 말했고, 전경환씨를 되도록 빨리 잘라야 한다고도 보고했습니다.

    당시는 정말 너무 심했죠. KAL기 추락사건으로 269명이 죽었는데 방송의 저녁 9시 뉴스 첫머리에 대통령이 새마을 청소하는 게 나올 정도였죠. 영부인도 너무 자주 나왔고. 그래서 국민의 정서를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후 공보수석에게 시정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고 여론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양반이 기분은 나쁜 게 분명한데 저를 끝까지 데리고 있었습니다. 후일 백담사에 갔을 때 그러더군요. ‘바른말 한 사람은 김용갑밖에 없다’고.”

    노태우 캠프와 안기부의 반발

    ▼ 다시 대통령 면담으로 돌아가서, 결국 전 대통령이 김 의원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까.

    “직선제 수용과 함께 김대중씨의 연금을 풀고 정치인들을 사면 복권시킨 뒤 정부는 선거의 공정한 심판자로 남자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정국이 불안하니 안정을 바라는 국민도 많을 것이고, 최선을 다하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했지요. 실패한다고 하면 받아주지 않을 테니까요. 그때 대통령이 말을 끊으며 ‘야 그러면 니 지금 당장 노 대표에게 가서 나한테 한 이야기를 그대로 설명해라. 특명이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그분 성격 급한 것은 모두가 알죠.”

    ▼ ‘대통령이 다 됐다’고 생각했던 노태우 민정당 대선후보의 반응이 냉랭했을 것 같은데요.

    “회의를 하던 노 대표에게 전 대통령의 특명임을 전하고 조그마한 회의실 옆방에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 양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내가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160만 당원에게 내각제만이 살길이라고 외쳤는데 어떻게 갑자기 말을 바꾸겠냐, 힘들다’고 했어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지요. 노 대표는 ‘안무혁 안기부장과 안기부장 특보 박철언, 이춘구 사무총장과 상의해서 하겠다’고 말한 후에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어요.

    민정당사에서 나오는데 청와대 경호실에서 안가(安家)로 바로 가라는 긴급 연락이 왔습니다. 대통령이 벌써 그곳에 안기부장과 민정당 사무총장을 불러놓았다는 거예요. 갔더니 식사가 준비돼 있었는데 육사 동기생인 안현태 청와대 경호실장이 먼저 와서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대충 설명한 뒤였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두 사람 모두 굉장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이런 중대한 이야기를 대통령에게 보고하려면 먼저 자기들에게 상의했어야 하지 않냐는 것이었어요.

    내가 안기부장이었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었습니다. 이춘구 총장도 당에서 내각제를 추진한 책임자로서 황당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죠. 일단 미안했습니다. 또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도 그들의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참모로서 아이디어를 준 것뿐이다. 결단은 대통령이 내린다. 그러면 당신들에겐 다른 수습방안이 있는가’ 하고 물었죠. 저는 이 방법 외에는 쾌도난마식 해결책이 없다고 주장했죠. 서로 옥신각신하다 밥도 못 먹고 헤어졌습니다. 경호실장은 분위기가 이상하니까 가버렸고요. 다른 방법이 없어서 제가 절충안을 냈습니다. 그쪽에선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를, 청와대에선 김옥조 민정수석실 비서관을 실무 책임자로 해서 계속 의논하자고요.”

    전-노 합의 돌파구 뚫은 원로 회합

    ▼ 내부적으로 꽤 진통이 심했군요.

    “다음날인 19일, 다시 대통령을 찾았습니다. 오후 2시20분이었습니다. ‘각하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지체하면 다른 방법을 아무리 써도 안 됩니다. 만일 지금 계엄령을 내리면 국민은 탱크 위에 올라탈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민심이반 현상이 심각합니다’고 말하자 대통령은 ‘노 대표의 반응은 어떠냐’고 물었어요. 저는 차마 ‘어둡다, 부정적이다’라고 할 수가 없어 그냥 ‘검토 중인 모양입니다’라고 답했죠. 그랬더니 바로 비서실장을 불러 ‘오늘 저녁 노 대표와 스케줄 잡아’라고 지시했어요.

    그날 저녁 두 분이 어디선가 만찬을 하며 논의를 한 모양입니다. 이튿날인 20일 아침 대통령이 집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저를 찾았습니다. 전날 밤 노 대표와 나눈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더군요. ‘충분히 이야기했는데 직선제는 어렵지 않겠냐고 하더라. 정치 지도자의 정치 노선이 왔다갔다하면 되겠냐고 하던데…’라고. 이야기를 듣고보니 대통령이 뭔가 헷갈려 하는 것 같아 바로 받아쳤죠. ‘아니, 각하 지금 나라가 망하는데 정치 노선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나라를 살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자 대통령은 또 금방 마음이 바뀌었는지 ‘그렇지. 지금 정치 노선이 중요한 게 아니지’라고 했습니다. 대통령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던 거죠.”

    ▼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이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쿠데타를 기획한 집단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중 누군가가 제게 그 이야기를 해주길래 뜯어말렸지요. 그들은 직선제를 수용한 것에 대한 반발이 심했습니다. 대통령에게는 차마 말을 못했지요. 일파만파의 일이 벌어질 테니까요. 설득말고는 방법이 없었어요. 뒷수습은 제가 했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병력을 동원해 장군들을 잡아들이겠어요?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지, 정말 역사의 죄인이 될 뻔했습니다. 당시에 나의 설득을 믿고 따라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했습니다.”

    ▼ 어떻게 돌파구를 찾았습니까.

    “국가 원로들의 의견을 듣자고 제안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계 원로와 김영삼씨도 만났죠. 6월22일에는 노태우 대표가 김영삼씨를 만났습니다. 모양새를 갖추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이후 청와대와 노태우 캠프 간에 합의가 이뤄지고, 6월26일 선언문 초안이 작성됐습니다. 선언문 발표자가 노태우 후보였으니까 선언문은 그쪽에서 만드는 게 당연했지요. 초안은 노 대표가 박철언에게 작성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박철언은 당시 법무부에서 청와대에 파견돼 비서관을 맏고있던 강재섭 검사(현 한나라당 대표)에게 실무를 맡겼지요. 최근 강재섭 대표에게 확인했더니 자기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그냥 (시키는 대로) 작성했다고 하더군요.”

    격정의 눈물과 회한

    ▼ 6·29선언에 김대중씨의 사면 복권이 들어간 것은 대선 때 야당 표를 분산시키려는 포석이었나요.

    “우리가 보기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씨 간에 절대로 후보 단일화 합의가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뭐, 되면 할 수 없고…하는 심정이었지요. ‘김영삼씨만 대선에 나가면 위험하다.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을 풀어줘야 한다’고 대통령께 보고한 것도 사실이고요. 정치공학적인 계산이 다 있었던 것이지요.”

    ▼ 6·29선언을 노태우 정권의 군부독재 연장을 위한 포석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래도 노태우 대통령이 민주화의 완충작용을 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물태우’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말입니다. 물태우라는 말도 어떻게 보면 민주화 과정에서 통제가 어려우니 나온 말일 테고요. 여소야대 국면에서도 6·29선언의 공약을 다 지켰지 않습니까. 이후에 김영삼씨도 대통령이 됐고 김대중씨도 대통령이 됐습니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면 다 알 겁니다. 일부 386 의원들도 6·29선언이 민주화의 시작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 6·29선언 20주년을 앞둔 감회가 남다르겠군요.

    “1987년 6월29일, 6·29선언이 있던 그날 저는 반포 집 근처의 한강변을 뛰고 있었습니다. 제 할 일은 다했으니까요. 혼자 만세를 불렀습니다. 벅찬 감동으로 눈물을 흘렸지요. 저는 오늘도 그때처럼 10km를 뛰고 나왔습니다. 아직도 제 가슴엔 그날의 감동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6·29의 의미가 퇴색하고 잊히는 게 안타깝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에 밑거름이 됐는데도 수구 꼴통이라는 말이나 듣고 있으니…. 사실 저는 국가보안법이나 안보 문제에 대해서만 그렇지, 다른 부분에 대해선 굉장히 플렉시블합니다. 청와대에 있을 때 개혁적이었던 만큼 지금도 개혁적입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