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호

이병철처럼 사각사각 박정희처럼 또박또박

메모의 정치학

  • 이종훈 | rheehoon@naver.com

    입력2015-09-23 14: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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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모. 별것 아닌 듯해도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메모는 디테일을 살려주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잊지 않게 해준다. 이런 것들이 훗날 우리의 경쟁력을 높이고 삶을 윤택하게 한다.
    이병철처럼 사각사각 박정희처럼 또박또박

    1979년 8월 30일 전북 도청에서 메모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메모를 하여서 무엇 하나, 성화를 받치어 무엇 하나, 속상한 일이 하도 많아, 놀기도 하면서 살아가세, 니나노~

    메모할 새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많은 사람은 “안 적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다”고 말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매일 무엇인가를 기록한다. 대다수 사람은 ‘적어두지 않으면 안 되는 일’에 부딪혔을 때만 수동적으로 가끔 메모한다.

    안 적어도 사는 데 지장 없다?

    그러나 메모와 관련해 ‘열혈 활용파’와 ‘적당 무시파’ 중에선 전자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실제로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 중 상당수는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메모=정보, 정보=(지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이라 다 아는데 왜 메모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맞는 말이다. 다만, 사람은 다 아는 일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하루 동안 한 일과 생각 중 90%는 망각된다. 이 가운데는 나중에 긴요하게 쓸 내용이 많다. 메모는 뇌의 보조 기억장치로서 매우 요긴하다.



    ‘젊은 날의 초상’을 쓴다면

    예컨대 이문열 같은 작가가 ‘젊은 날의 초상’ 같은 자전적 소설을 쓴다고 치자. 메모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면 유년 시절이나 대학 시절에 대해 쓸 내용이 풍부해진다. 글의 깊이도 달라진다. TV 드라마 작가 중 상당수는 드라마 시나리오를 집필하기 전에 드라마에 들어갈 내용을 충분히 취재해 기록한다. 이를 위해 먼 외국을 여행하기도 한다. 이런 내용이 드라마를 감칠맛 나게 한다.

    디테일에서 갈린다

    대중을 상대로 일하는 사람은 일반상품과 명품이 ‘디테일’에서 갈린다는 점을 안다. 메모는 디테일의 품질을 높여주는 좋은 방법이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메모 습관까지 갖고 있으면 금상첨화다. 범재에게 메모 습관은 천군만마의 동맹군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메모 대왕’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최고의 애장품이 수첩이라고 할 정도다. 깨알 글씨로 빼곡히 쓴 것도 모자라 다른 종이까지 덧댄 두툼한 수첩들이다. 그래서 김 전 대통령의 말은 교과서였다. 정확한 수치와 풍부한 인용으로 이뤄진 그의 말은 곧 글이어서 그대로 받아 적으면 기사가 됐다는 것이 기자들의 평가다. 전문가들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그와 면담하면 오히려 강의를 듣고 나오기 일쑤였다. 그렇게 치열하게 읽고 들은 것을 기록해 고졸 학력을 극복한 결과, 대통령의 꿈을 이룬 것이다.

    淸, 군사혁명, 어머님 대구행

    지난 3월부터 서울시가 개방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당동 가옥엔 1961년 5월 달력 사진이 걸려 있다. 1961년 5월 16일, 역사적인 그날엔 ‘청(맑음)’ ‘군사혁명’ ‘반공’ ‘어머님 대구행’이라는 메모가 있다. 박 전 대통령도 메모광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을 방문한 이들은 벽을 가득 채운 지도와 그의 메모에 압도됐다. 아버지를 닮아 박근혜 대통령도 메모광이다. ‘수첩공주’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런 메모를 바탕으로 ‘깨알 지시’를 내리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삼성전자와 메모

    삼성그룹을 일군 이병철 전 회장 역시 꼼꼼한 메모로 유명하다.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모르면서 그냥 넘어가는 게 부끄러운 것’이라는 지론을 가진 이 전 회장은 본인이 이해할 때까지 질문하고 또 기록했다. 삼성전자를 설립하고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 당시 팀장급인 최준명 씨(후에 삼성전자재팬 대표 역임)에게 “RAM이 뭐냐” “ROM이 뭐냐”며 질문을 쏟아냈다. 90개 항목의 사업성 검토서를 매뉴얼로 정착시킨 이도 이 전 회장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무조건 성공하려면 김대중처럼, 박정희처럼, 이병철처럼 메모광이 되는 게 좋다.

    최근 흥행 돌풍을 일으킨 영화 ‘암살’의 최동훈 감독 역시 영화계에서 메모광으로 회자된다. 시나리오집 여백을 가득 메운 깨알 같은 글은 전설처럼 전해진다.

    스마트폰에 메모하기

    성공의 보증수표 같은 메모,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방식은 수첩이나 다이어리, 노트에 기록하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널리 활용되는 방법이다. 쓰기 쉽고 보기 쉽고 장기간 보존도 가능하다. 요즘은 휴대전화의 메모 또는 음성 녹음이 이 기능을 대체한다. 별도로 수첩을 휴대하지 않아도 된다. 스마트폰에 쓰면 자동으로 저장된다는 장점이 있다.

    분실하거나 교체해도 안전

    휴대전화를 분실하면 모든 메모를 잃어버릴 수 있다. 물론 수첩이나 노트도 분실의 위험이 따른다. 요즘 네이버 같은 곳은 휴대전화의 메모 기능과 연동되는 애플리케이션을 제공한다. 휴대전화의 메모에 기록하면 네이버의 메모에도 함께 기록되니 휴대전화를 분실하거나 교체하더라도 내용은 네이버의 메모에 그대로 남는다.

    메모는 일상 메모, 기밀 메모로 나눌 수 있다. 일상 메모는 다시 아이디어 메모와 기록으로 구분된다. 아이디어 메모는 떠오르는 생각을 써두는 것이다. 기록은 업무 지시, 토의 내용, 일정 등 사실적 정보를 써두는 것이다. 기밀 메모는 비밀스러운 내용을 나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써두는 것을 말한다.

    상품에서 철학 사조까지

    메모는 창작과 전략의 출발점이다. 전직 대통령, 기업인, 예술인은 아이디어 메모를 주로 활용한다. 아이디어 메모는 개인의 성공에 기여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일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상품과 서비스, 정치 혁명, 철학 사조까지 다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하찮은 생각 하나도 그냥 무시할 일이 아니다.

    기하급수적 증식

    이병철처럼 사각사각 박정희처럼 또박또박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메모에 메모를 더하면 가속도가 붙는다. 하나의 아이디어 메모는 새로운 메모를 유발하기 마련이다. 실로 무서운 일이다. 메모로 남겨지지 않는 생각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휘발해버린다. 반면 메모된 생각은 오래도록 남아 존재를 과시한다. 뇌에 더 각인됨에 따라 새로운 후속 아이디어를 촉진한다. 이런 식으로 아이디어는 메모라는 매개체에 의해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한다.

    생각의 빅뱅

    이 속도는 때로는 바이러스의 전파 속도를 압도한다. 생각의 빅뱅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아이디어의 분출, 생각의 빅뱅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날은 흥분돼 잠도 오지 않는다. 당장 회사원은 신규 사업 기안서로, 학자는 논문 계획안으로, 정치인은 새로운 선거 전략으로 구체화해보고 싶어진다. 이런 통찰과 열정이 깃든 일련의 활동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에너지다.

    우리는 메모해두면 좋을 생각이나 정보를 놓친 경험을 갖고 있다. ‘나중에 적어둬야지’ 했다가 까먹고 마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진다. 안타까운 일이다. 메모할 땐 주저해선 안 된다.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서라도 곧바로 기록해야 한다.

    기자들이 잘하는 일

    메모는 기자들이 특히 잘한다. 이들은 언제나 적거나 녹음할 준비가 돼 있다. 일반인도 이런 자세는 배울 필요가 있다. 취재하는 기자처럼 생활하면 이 세상엔 상상 이상으로 건질 게 많다.

    그런데 써놓기만 한 메모는 무의미하다. 기록은 비교적 활용도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아이디어 메모는 시한이 정해진 과업과 관련된 것이 아닌 한 묻혀버리기 일쑤다.

    예를 들어 보고서를 쓴다거나 프로젝트를 완수해야 하는 경우에는, 관련 아이디어 메모를 열어보게 된다. 그러나 뜬금없이 떠오른 창업 아이디어나 신상품 아이디어는 메모해뒀다 하더라도 당장의 필요성이 떨어지다보니 잘 안 보게 된다. 역시 메모는 활용할 때 비로소 진가를 드러낸다. 다시 찾지 않는 메모는 솔직히 낙서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무슨 뜻?

    어떤 사람은 자신이 써놓은 메모를 못 알아본다. 이런 일은 허다하다. 내용과 내용 사이의 맥락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이해를 잘 못하는 것이다. 날림 글씨로 쓰면 더 몰라본다. ‘내가 왜 이런 글을 남겼지?’ 계속 고민하게 된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메모 또한 낙서에 지나지 않는다. 종이에 기록할 땐 가능한 한 또박또박 써야 한다. 받아쓰기를 해야 해 어쩔 수 없이 날려 썼다면, 받아쓰기가 끝난 다음에 곧바로 보정작업을 해두는 것이 좋다.

    주제별 메모 노트

    우리는 가끔 중요한 메모를 찾기 위해 몇 년 전 수첩들을 뒤지기도 한다. 한참 찾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한다. 그 메모를 찾았더라면 배가됐을 업무 의욕이 갑자기 꺾여버린다. 메모의 활용도를 높이려면 미리 찾기 쉽게 분류해두는 수고로움을 더해야 한다. 스마트폰에 메모한다면 주제별로 메모 노트를 각각 달리 쓰는 게 좋다. 예컨대 업무와 관련된 메모와 취미생활과 관련된 메모, 인간관계와 관련된 메모를 한 군데에 뒤섞어놓으면 나중에 원하는 정보를 찾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메모할 땐 여백을 충분히 남겨둬야 한다. 메모는 임시 기록이라는 인식 때문에 여백에 대한 고려 없이 빽빽하게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후속 메모를 할 때 이것은 장애로 작용한다.

    아이디어 메모의 경우 필경 후속 아이디어를 메모해야 할 일이 생긴다. 기록 메모도 첨언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기록과 아이디어를 더해야 할 때도 있다. 이를 대비해 여백을 충분히 남겨두는 것이 좋다. 이 여백은 또 다른 생각의 공간이다.

    펜 들고 샤워실로

    세계적 디자인 컨설팅기업인 아이디오(IDEO)의 데이비드 켈리 대표는 샤워실에 화이트보드용 펜을 들고 들어간다고 한다. 샤워 도중 떠오른 생각을 샤워부스 유리벽에 적기 위함이다. 화장실이나 샤워실은 의외로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르는 공간이다. 우리의 뇌는 24시간 365일 쉬지 않는데, 좋은 생각은 비교적 단순노동을 하는 중에 잘 떠오른다. 산책할 때, 색종이를 접을 때, 정원의 잡풀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다. 메모지는 항상 휴대하는 게 좋다. 요즘은 휴대전화가 이를 대신할 수 있다.

    이병철처럼 사각사각 박정희처럼 또박또박
    이 종 훈

    성균관대 박사(정치학)

    국회도서관 연구관

    CBS 라디오 ‘이종훈의 뉴스쇼’ 진행자

    現 아이지엠컨설팅(주) 대표, 시사평론가

    저서 : ‘정치가 즐거워지면 코끼리도 춤을 춘다’ ‘사내 정치의 기술’


    기밀 메모는 기본적으로 나만 볼 수 있게 적은 것이지만, 본의 아니게 공개돼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잘 보관해야 하지만, 때로는 공개해 활용해야 할 때도 있다. 가끔 비밀 장부나 살생부가 만천하에 공개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데 작성자가 일부러 흘린 경우가 적지 않다.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군가로 하여금 나를 보호하도록 만들려는 목적에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기밀 메모는 가능한 한 만들지 않아야 하고, 설령 만들었어도 곧바로 제거하는 게 화를 줄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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