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호

셰리 블레어, ‘영국판 힐러리’ 될까?

‘자서전 정치’로 몸값 올리기…

  • 성기영 신동아 영국 통신원 sung.kiyoung@gmail.com

    입력2008-07-09 11: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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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부인 셰리 블레어는 힐러리 클린턴 못지않은 경력을 지녔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변호사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바람기 많은 남편을 둔 힐러리와 달리 단란한 가정도 꾸렸다. 그가 최근 자서전을 출간했다. 여기에서 그의 정치적 야심을 엿보는 눈길이 많다. 노골적으로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고, 우파로 변한 고든 브라운 현 총리를 비판한 것은 향후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시각이다.
    셰리 블레어, ‘영국판 힐러리’ 될까?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44대 미국 대통령을 노렸던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의 도전은 일단 좌절로 끝났다. 그러나 결과에 관계없이 자연인 힐러리 로드햄 클린턴이 보여준 정치적 야심과 도전은 대통령 부인이라는 역할에 새로운 이미지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힐러리가 보여준, 대통령 부인이자 직업여성으로서의 역할 모델은 슈퍼모델 출신 가수로 프랑스 엘리제궁의 안주인이 된 카를라 브루니로 이어졌다.

    유교적 전통이 지배해온 아시아 국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마잉주(馬英九) 대만 신임 총통의 부인 저우메이칭(周美靑)의 퇴직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빚어졌을 때도 대만 유권자들은 ‘총통 부인이 되더라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필요가 없다’는 데 더 많은 표를 던졌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직업여성들 역시 대통령 주변의 조연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주연으로 발탁되려고 나서는 경우가 늘어날 전망이다. 스스로의 정치적 비전으로 정면승부를 거는, ‘제2의 힐러리’를 목표로 뛰는 퍼스트레이디가 더 많이 생겨날 것이라는 얘기다. 그 대표적 인물이 지난해까지 10년간 영국 노동당 정부를 이끈 토니 블레어 총리의 부인 셰리 블레어 여사다. 셰리는 정치적 이력이나 대중적 지명도에서 ‘제2의 힐러리’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잠재능력을 갖췄다.

    힐러리보다 못할 것 없다?

    셰리는 여러 면에서 힐러리와 비교된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젊은 나이에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셰리가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공관에 입성한 것은 43세가 되던 해였다. 클린턴이 취임했을 때 함께 백악관에 입성한 힐러리도 45세에 불과했다.



    두 사람 모두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언론과 대중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의 소유자라는 데에도 별 이견이 없다. 호탕하게 웃고 대중 앞에서 자신감 있는 제스처를 쓴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더욱이 ‘정치적 야심이 큰 유명 변호사 출신’이라는 공통점에 이르면 세계 언론들이 셰리에게 ‘영국의 힐러리’ ‘제2의 힐러리’라는 별명을 붙인 것도 지나치지 않다.

    게다가 셰리는 힐러리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따뜻한 어머니’ 이미지도 갖고 있다. 힐러리는 바람둥이 남편의 외도 때문에 화목한 가정을 이끄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이에 비해 셰리는 블레어 총리를 뒷바라지하면서도 4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냈다. 가끔씩 뜨개질로 자녀들의 옷을 만들어 입히는 장면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셰리는 ‘영국 여성들을 가장 스트레스 받게 하는 여성’이라는 말도 들었다. 고액 연봉의 변호사 업무와 자녀 양육 두 가지 모두 완벽하게 해내 직업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많은 여성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토니 블레어의 현직 총리 시절부터 이렇게 언론의 조명을 받던 셰리가 다우닝가 10번지를 떠난 지 1년이 채 안 돼 최근 자서전을 펴냈다. 제목은 ‘나 자신을 말한다(Speaking for Myself)’. 셰리는 이 책에서 블레어와의 결혼 생활, 아이들과의 관계 등 사생활은 물론 노동당 내 정치역학, 특히 블레어가 물러나기 직전까지 갈등을 빚은 고든 브라운 현 총리와의 권력암투 비화 등을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자서전 정치’

    현직 총리 부인 때부터 튀는 행동으로 언론의 관심을 끈 셰리가 400쪽이 넘는 두꺼운 자서전을 펴냈으니 신변잡기에 열광하는 영국 신문들이 이를 그냥 놓아둘 리 없다. ‘더 타임스’와 ‘더 선’ 이 연재에 나섰고 공영방송인 BBC 라디오도 며칠에 걸쳐 자서전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자서전에 대한 영국 언론들의 총체적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특히 혹평의 대상이 된 것은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한 직설적 묘사와 표현. ‘스코틀랜드 여행길에 피임도구를 챙기지 않아 마흔다섯에 막내아들을 가졌다’거나 ‘그날 이후 남편 토니를 더 잘 알게 됐다’는 등의 에로틱한 표현들이 구설에 올랐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서평란에서 ‘셰리 블레어가 정치적 폭로를 예고해놓고서는 정작 성적인 암시를 통해 책을 팔려고 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셰리 블레어, ‘영국판 힐러리’ 될까?

    전 총리 토니 블레어(오른쪽)와 현 총리 고든 브라운(왼쪽)은 정치적으로 자주 대립했다.

    선정적 보도를 일삼아온 타블로이드 신문 ‘더 미러’조차 셰리를 ‘돈에 굶주린 여자’로 묘사했다. 이 신문은 과거 셰리가 총리실에 대한 언론의 선정적 보도를 문제 삼으며 사생활 보호를 내세운 일을 거론하며 ‘셰리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내세운 원칙을 언제든 포기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식으로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이른바 ‘자서전 정치’를 통해 과거 자신의 정치적 보스를 비판하거나 권력 무대 뒤편의 비화를 폭로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챙기는 관행은 미국, 영국 할 것 없이 현대 정치에서 일반적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더욱이 영국에는 이들 뉴스메이커에게 막대한 현찰을 안겨주며 신문연재를 유혹하는 거대한 미디어산업이 존재하고 있어 자서전 정치’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영국 언론들은 셰리가 이 책 판매를 통해 대략 100만파운드(약 20억원)가량의 수입은 무난히 거둬들일 것으로 내다본다. 이렇게 되면 블레어 부부는 총리실을 떠난 후 두 사람의 자서전 출간만으로도 수십억원의 수입을 올리며 현역 시절에 버금가는 부와 명예를 누릴 판이다.

    “거짓말쟁이!” 발언 파문

    물론 셰리의 자서전 출간 목적이 돈뿐이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셰리가 의도한 ‘자서전 정치’는 책 출간 및 판매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됐다는 얘기다. 셰리는 이 책에서 고든 브라운 총리와 그의 부인 사라 브라운을 직접 거론하며 듣기 거북한 말들을 여과 없이 쏟아내 이러한 해석에 더욱 무게를 싣고 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와 고든 브라운 현 총리 사이의 정치적 암투와 갈등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1993년 노동당 당수이던 존 스미스의 급서로 인해 그의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한 당내 권력투쟁에서부터 지난해 블레어 총리의 사퇴 시기를 둘러싼 힘겨루기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은 정치적 고빗길마다 노동당 지도부 구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막후 경쟁을 벌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암투에서 브라운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선 것이 블레어 본인이 아니라 부인 셰리였다는 사실이다. 영국 유권자들은 2006년 여름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브라운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 셰리의 ‘거짓말쟁이’ 발언 파문을 잊지 않고 있다. 당시 전당대회는 이미 임기 중 퇴진을 약속한 블레어가 노동당수 자격으로 참석하는 마지막 전당대회였다. 당연히 노동당 지지자들은 물론 정치권 전반의 관심은 블레어가 언제 브라운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줄 것인지에 쏠려 있었다. 언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측근들의 입을 빌려 블레어-브라운 불화설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두 사람은 그때마다 이를 부인하는 발언을 되풀이하던 상황이었다.

    블레어 총리가 연설에서 브라운과의 불화설을 강한 어조로 부인하며 브라운 장관의 인품과 능력을 한껏 치켜세우고 있을 때였다.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게 바로 셰리였다.객석에서 연설을 듣고 있던 셰리가 “거짓말쟁이!”라며 혼잣말처럼 비아냥거린 것이 화근이었다. 셰리가 무심코 내뱉은 이 말은 마침 옆에 있던 블룸버그 통신 기자의 귀에 들어갔고, 이 발언은 다음날 아침 대부분 신문의 1면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전당대회를 통해 블레어-브라운 불화설이 수그러들기를 기대했던 노동당 지도부는 발칵 뒤집혔다. 셰리가 발언 내용을 부인했지만 블룸버그가 급히 타전한 이 기사의 파장을 잠재우기에는 이미 늦었다. 공영방송 BBC도 ‘거짓말쟁이’ 발언을 들은 블룸버그 통신 기자를 생방송 중에 인터뷰하며 법석을 떨었다.

    “집에 들어올 생각 마세요”

    누구보다 커다란 곤경에 빠진 사람은 블레어 총리였다. 블레어는 문제의 발언 다음날, 당시 재무장관이던 브라운의 집무실 겸 공관이 총리 공관 바로 옆에 있는 점을 빗대 “적어도 마누라가 옆집 남자와 눈맞아 도망가는 일은 없게 됐다”는 농담으로 파문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전력이 있는 셰리가 자서전에서 또 한번 브라운 총리 진영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드러낸 것을 놓고 의도적인 메시지가 담긴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쏠리고 있다. 셰리는 자서전에서 1993년 블레어와 브라운의 차기 경쟁에 얽힌 일화를 생생하게 풀어놓았다. 당시 두 사람은 이른바 ‘그라니타(런던 북부의 한 레스토랑) 회동’을 통해 담판을 짓고 블레어가 먼저 노동당수를 맡은 뒤 브라운이 차기를 보장받는 구도에 합의했던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셰리는 자서전에서 이 회동은 두 사람의 밀약을 어떤 방식으로 세련되게 당 내외에 알릴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권력승계에 관한 합의는 이미 몇 주 전에 끝났다고 폭로했다. 그뿐만 아니라 블레어가 브라운과 담판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기 전, 자신이 남편에게 “다음 총선까지만 당수직을 맡고 넘겨주기로 합의한다면 집에 돌아올 생각을 마라”고 위협한 사실도 털어놓았다. 셰리의 ‘안방정치’가 먹혀든 것일까. 블레어 총리는 결국 10년 넘게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고 브라운 진영을 애태우다가 지난해에야 마지못한 듯 당 대표직을 넘겨줬다.

    셰리 블레어, ‘영국판 힐러리’ 될까?

    셰리는 자서전에서 남편인 토니 블레어를 옹호하기에 바빴다.

    블레어가 당시 약속을 이행하는 과정 또한 간단치 않았다. 블레어 진영은 이라크전 참전으로 추락하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브라운의 대중성 부족 등을 이유로 당내 경선을 요구하면서 ‘브라운 흔들기’에 나섰다. 당사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브라운보다 젊고 참신한 이미지를 가진 경선후보들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며 브라운 진영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우여곡절 끝에 10년 전 합의를 이행한 데 대해서도 셰리는 자서전에서 남편을 변호하는 데만 급급했다. 브라운 총리 측이 당시 블레어의 공공개혁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데 좀 더 적극적이었더라면 훨씬 빨리 총리직을 물려받았을 것이라고 흔들어댄 것이다.

    수렁에 빠진 노동당과 브라운

    셰리는 자신과 대조적으로 다소곳한 이미지를 가진 브라운 총리의 부인 사라 브라운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셰리는 사라가 브라운 총리 취임 이후 이미지 메이킹 팀의 도움을 받아 인기가 높아졌다며 과거 사라의 ‘촌스러운’ 이미지를 은근히 부각시켰다. 브라운 총리 취임 이후 블레어 시절보다 총리 부인에 대한 보좌진 수를 늘렸다는 불만도 털어놓았다. 한마디로 사라 브라운의 인기가 올라간 것은 이미지 전문가들이 덧칠해놓은 ‘화장발’ 때문이라는 질투심을 드러낸 것이다.

    노동당 주류 진영에서는 셰리의 자서전 내용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돈만 노리는 보잘것없는 책’에서부터 ‘셰리 블레어는 앞으로 노동당 내에서조차 ‘왕따’ 당할 신세’라는 평가까지 비난 일색이다.

    브라운 총리 본인은 이 책을 출간한 시점에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 지난 5월초 지방선거에서 노동당이 졸전을 치르자 셰리가 오는 10월 펴낼 예정이던 자서전을 부랴부랴 앞당겨 출간했다는 설이 파다하다. 만일 사실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선거 결과와 당내 비판으로 곤경에 빠진 브라운 총리에게 결정타를 먹이기 위한 의도가 엿보인다.

    노동당 좌파, ‘우경화 브라운’에 반기

    노동당은 5월초 지방선거에서 3선에 도전하는 관록의 런던시장 켄 리빙스턴이 보수당의 신예 정치인 보리스 존슨에게 고배를 마시는 등 참패를 면치 못했다. 얼마 후 치러진 보궐선거에서도 전통 강세 지역을 모두 보수당에 내주는 바람에 당내에서는 ‘총리 교체론’이 고개를 들고 차기 당수 후보자들이 거론되는 등 극심한 내홍을 겪은 바 있다.

    지난해 총리 취임 이후 ‘브라운 효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지율이 가파르게 상승했지만 불과 몇 달 만에 이렇듯 수렁에 빠진 것이다. 블레어 정부에서 부총리를 지낸 존 프레스콧과 블레어의 최측근으로 노동당의 재정 문제를 사실상 책임져온 존 레비 의원 등이 잇달아 회고록을 펴내 브라운 총리를 곤경에 빠뜨린 것도 이 무렵이다.

    브라운을 사면초가로 몰아넣은 사건은 블레어 측근뿐 아니라 당내 좌파 그룹에서도 비롯됐다. 최근 노동당내 좌파 그룹은 브라운 총리 진영의 외교 및 경제정책 전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압박작전을 구사해왔다. 특히 브라운 총리가 얼마전 내놓은 소득세 개편안이 빈곤층 유권자들이 노동당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공격 수위를 높였다. 소득세 개편안에 대한 당 안팎의 비난에 직면한 브라운 총리 측은 부랴부랴 보완책을 내놓고 당내 반대파들을 다독거렸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전직 총리의 부인이 자서전을 통해 현직 총리의 과거사를 들춰내며 ‘아픈 곳’을 다시 한 번 건드린 것은 바로 이렇게 당내 갈등이 정점에 달한 시점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서전 출간의 배경과 의도를 둘러싸고 구구한 해석이 나올 만도 하다.

    물론 셰리는 이런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셰리는 자서전에서도 자신이 브라운 총리의 집권으로 노동당 지지율이 떨어지고 경제상황이 악화됐다는 세간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블레어 전 총리가 브라운 현 총리와 여전히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다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고든 브라운과 셰리 블레어의 구원(舊怨)을 아는 사람들은 셰리의 이러한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의 시각으로 보면 평소 블레어에 비해 좌파적 성향을 보여온 셰리가 자서전 출간을 통해 브라운 총리의 우경화를 비판하면서 좌파 그룹의 조직화 움직임에 힘을 실어준 것이 아니냐는 풀이가 가능하다.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이라크전 반전(反戰) 여론과 브라운 총리의 경제대응 미숙 등을 내걸고 최근 정치적 목소리를 더욱 높이기 시작한 노동당 내 강경 좌파 그룹에 셰리가 ‘러브콜’을 보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셰리가 전직 총리의 부인이라는 기득권을 등에 업고 브라운과 대립각을 세워 지지율 하락세인 노동당의 ‘구원투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효과 정도는 충분히 거뒀을 듯하다.

    “나는 사회주의자예요”

    셰리 블레어, ‘영국판 힐러리’ 될까?

    단란한 블레어 가족.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듯 셰리는 자서전 출간 이후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이 노동당과 인연을 맺은 16세 때 이후로 계속 사회주의적 소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셰리는 지난 15년 동안 영국에서 언론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은 인물이면서도 가장 알려진 게 없는 인물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가디언’지 기자는 “25년 동안 셰리와 알고 지내왔지만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힐 정도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심한 듯 각종 인터뷰에 현안은 물론 사생활에 대한 얘기까지 털어놓았다. ‘가디언’ 인터뷰에서 자신을 여전히 사회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소신을 밝힌 셰리는 ‘더 타임스’ 인터뷰에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가 보석상에서 (공무원 선물 수령 허용액을 넘는) 값비싼 목걸이를 사주겠다고 해서 겨우 거절했다는 일화도 털어놓았다. 그런가 하면 영국 왕실 일부 구성원들과의 불화는 물론, 이라크 침공을 비난하는 국민의 여론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총리실에서 자신이 임신 중 유산했다는 소식을 발표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전직 총리 부인이 이런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까발리고 나선 데 대해 여론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돈 욕심 많고 신중치 못하며 낭비벽마저 있는 셰리 블레어의 나쁜 이미지만 더 굳혔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셰리가 자서전을 통해 브라운 총리를 더욱 곤경에 빠뜨림으로써 정치 무대에 데뷔하려는 의욕을 강하게 드러냈다는 시각도 있다.

    그동안 셰리 블레어가 어느 여성 정치인 못지않은 정치지향적 행보를 보인 점을 감안하면 이런 분석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치 성향을 이해하려면 출생 및 성장 배경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블레어와 결혼하기 전 셰리 부스라는 이름을 가졌던 그는 결혼 후에도 한동안 처녀 시절 본명을 고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토니 블레어가 중산계급의 유복한 가정 출신인 것과는 달리 항구도시 리버풀의 노동계급 출신이다.

    남편과의 차별화 전략

    셰리의 아버지 토니 부스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영화에서 리버풀의 바보 역을 맡아 유명해진 배우다. 술 좋아하고 한량 기질이 넘쳤던 아버지 토니 부스는 셰리를 낳은 뒤 딸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물론 당시 중하층 계급 영국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토니 부스 역시 평생 노동당원이라는 정치적 타이틀을 버리지 않았다.

    게다가 셰리의 외할아버지 역시 탄광에서 곡괭이질을 하던 광부 출신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셰리 블레어는 노동계급 출신의 가정에서 태어나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라난 뒤 자기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법률가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러한 집안 내력이 말해 주듯 셰리의 정치적 유전자는 그가 사회주의를 접하기 시작한 1960년대 초 이후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고 봐도 된다. ‘제3의 길’을 내세우며 기존 노동당의 이념적 좌표를 중도를 향해 큰 폭으로 이동시킨 토니 블레어와는 정치적 출발점과 지향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16세부터 노동당원’임을 내세워온 셰리는 이번 자서전을 통해 ‘남편은 남편이고, 나는 나’라는 차별화 전략을 예고한 셈이다.

    젊은 시절부터 두 사람을 잘 알고 지내온 이들은 토니 블레어보다 셰리가 더 큰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었다고 전한다. 두 사람은 같은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가까워졌는데, 당시 토니 블레어가 셰리의 환심을 얻기 위해 노동당원이 됐다는 소문도 있다. 인권과 노동법 분야에서 높은 명성을 얻었고 왕실 변호사 자격까지 갖춘 셰리가 변호사로서도 더 앞서 있었음은 블레어 총리도 이미 인정한 바 있다.

    정치무대 데뷔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결혼 3년 후인 1983년 총선 당시 서로 다른 지역구에 동시 출마했다. 당시 두 사람 주변에서는 누가 먼저 국회의원이 되든 상대편이 평생 재정적 후원을 떠안기로 약속했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당시 선거에서 토니 블레어가 당선되고 셰리가 낙선한 것은 셰리가 정치무대 위가 아닌 무대 뒤의 인생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블레어 집권기 10년 내내 남편의 그늘에 가려 있던 셰리의 정치적 야심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블레어가 브라운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난 뒤부터다. 셰리는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공관을 떠나는 날,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기자들 앞에서 “앞으로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을 것”이라며 농담을 던지는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퇴임 직전 BBC의 특집 다큐멘터리 취재에 응해 총리실 사생활을 공개하는 등 독자적 이미지 구축 작업에 나섰다. 10만파운드(약 2억원)나 되는 예산을 쏟아부은 이 프로그램을 위해 셰리는 아프리카 순방에 BBC의 유명 앵커를 대동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총리실 안주인 노릇을 하는 동안 사생활 보호를 내세워 언론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던 것을 떠올리면 파격적 변신이다.

    누드모델로도 활동

    셰리는 왕실 변호사까지 지낸 법조인답게 대인관계에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토니 블레어 역시 귀족적 문화와 민주주의 질서가 공존하는 영국의 주류 사회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는 등 리버럴한 성향을 보여왔지만 정도 이상의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셰리가 토니 블레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셰리는 수습변호사 시절 누드모델로 활동한 전력도 있다.

    BBC의 정치담당 기자이자 토크쇼 진행자인 존 소펠이 펴낸 토니 블레어 전기를 보면 셰리의 직선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들이 눈에 띈다.

    토니 블레어의 지역구에서 노동당수 취임 축하 리셉션이 열렸을 때의 일이다. 한 지방의원이 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다음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해 토니가 총리실에 입성하게 되면 부인께선 변호사 일을 그만두셔야겠군요.”

    차기 총리가 유력해진 토니 블레어의 부인에게 듣기 좋으라고 던진 덕담이었지만 셰리는 그의 말허리를 끊고 쏘아붙였다.

    “토니가 총리가 되면 내가 변호사를 그만둬야 되는 이유를 한 가지만 대보시겠어요?”

    셰리는 일개 변호사라고 보기 힘들 만큼 언론과의 접촉에도 적극적이었다. 1995년 왕실 변호사가 된 직후에는 유명 정치인들이 가장 출연하고 싶어하는 프로그램의 하나인 BBC의 ‘투데이’에 혼자 출연해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노동당수였던 토니 블레어 역시 방송이 나간 뒤에야 부인의 인터뷰 소식을 전해 듣고 기겁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승점의 힐러리, 출발선의 셰리

    이렇듯 노동당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성장환경, 개방적이고 사교적인 성격, 그리고 노동당의 당내 갈등과 브라운 총리의 인기하락 등이 맞물려 셰리가 나름의 정치적 진로를 모색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하나, 셰리가 개성 있는 미모로 유권자의 관심을 끌 만한 ‘비주얼’을 갖췄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려운 요인이다. 셰리는 오목한 갈색 눈에 광대뼈가 조금 튀어나온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 지금은 얼굴에 주름이 늘어 예전보단 못하지만 젊은 시절의 셰리는 인형 같은 미모를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표정이 풍부해 권위와 더불어 지적인 분위기를 한꺼번에 풍긴다는 얘기도 듣는다.

    힐러리 클린턴과 셰리 블레어는 클린턴-블레어 정상회담 등 국제외교 무대에서 개인적으로도 여러 차례 만남을 가진 바 있다. 클린턴 부부가 블레어 부부를 캠프 데이비드 별장으로 불러 저녁식사를 즐겼는가 하면 백악관 국빈만찬에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당시 힐러리는 셰리에게 “여류 명사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래도 욕을 먹고 저래도 욕을 먹게 돼 있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수수한 옷차림으로 나타나면 ‘성의가 없다’고 손가락질하고, 전속 미용사라도 두게 되면 ‘허영기로 가득 찼다’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힐러리가 비슷한 커리어와 정치적 야심을 지닌 셰리에게 정치무대 데뷔와 관련해 어떤 조언을 해줬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힐러리가 국내 정치에서 목표했던 결승점에 도착할 즈음 셰리는 서서히 출발선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진진한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민주당 경선 이후 정치 인생의 2막을 새로 시작하게 될 힐러리나 무대 데뷔를 암중모색 중인 셰리나 그런 면에서 앞으로도 ‘닮은 꼴’ 행진을 이어나갈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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