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호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보이지 않는 손’ 황병무 교수 인터뷰

“이상희 장관은 국방부 문민화 역주행하고 있다”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입력2008-07-09 18: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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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핵 실험 후 조용히 군 수뇌부 교체한 참여정부
    • 북핵 실험은 참여정부 예방외교의 대실패
    • 북한 급변시 미군 북한 진입은 절대 막아야
    • 작계 5029 작성 둘러싼 한미 갈등 내막
    • 중국도 북한 급변사태시 군사력 투입 어렵다
    • 북한 급변시 특전사 투입→찰리선 부대 투입
    • 합참, 행정사령부에서 전구(戰區)사령부로 전환
    • 안보정책을 대북정책 밑에 놓은 것은 盧 정부 잘못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보이지 않는 손’ 황병무 교수 인터뷰

    ● 1939년 전북 고창 출생<br>●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UC 리버사이드 박사(정치학)<br>● 육사 교관, 국방대 교수, 한국국제정치학회장 역임<br>● 저서 : ‘신 중국군사론’ ‘한국 안보의 영역, 쟁점, 정책’ 등

    ‘좌파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끈 ‘참여정부’ 5년은 안보 문제로 내내 시끄러웠다.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와 한미연합사 해체 추진, 북핵 실험과 2차 남북정상회담, 대규모 감군(減軍)을 전제로 한 군 구조조정 착수 등등 굵직한 일들이 추진됐고 그때마다 많은 논란이 일었다.

    참여정부 시절 많은 사람이 외교·국방·통일부 장관 자리를 거쳐 갔다. 이들은 중요한 일을 했지만 참여정부 전체의 안보전략을 꿰는 일은 하지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주목할 사람이 황병무(黃炳茂·69) 국방대 명예교수다. 황 교수는 참여정부 중기인 2005년 4월부터 대통령 직속 국방발전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노 정부의 국방정책을 조율했다.

    노 대통령, 국방개혁 강력히 요구

    중국군 전문가이기도 한 황 교수는 한 손에 쥐기 힘든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흐름을 설명하고자 했다. 참여정부의 안보정책은 북한 핵실험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참여정부의 안보정책을 점검하고, 그 교훈을 얻기 위해 그와 논쟁적인 인터뷰를 가졌다.

    ▼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 어떤 인물을 국방장관에 임명할지 관심이 쏠렸습니다. 노 대통령은 재임 5년 동안 내내 좌파 대통령으로 몰렸는데, 그는 어떤 기준으로 초대 국방장관을 뽑으려고 했습니까.



    “첫째, 군을 개혁하려는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 둘째, 한미관계를 중시한다. 셋째, 군심(軍心)을 확보해야 한다. 넷째, 국방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였습니다. 당선자 시절 노 대통령은 다른 부처 장관은 e메일로 천거를 받았으나 국방장관만큼은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고 보고 추천인단을 구성해 추천하게 했습니다. 네 가지 조건 가운데 특히 중시한 것이 개혁 마인드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임명된 인물이 조영길 장관이었습니다. 조 장관은 1년 남짓 재직하고 2004년 7월, 대통령국방보좌관을 하던 해군 중장 출신의 윤광웅씨에게 바통을 넘겼습니다. 그런데 2005년 5월 윤 장관은 노 대통령에게 국방중기계획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전작권 전환 등은 거론했으나 국방개혁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갑자기 ‘불과 4만여 명을 줄이는 것이 국방개혁의 핵심이냐?’라며 질책성 발언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2005년 9월 국방부가 군 구조 개혁을 골자로 한 국방개혁 초안을 만들어 보고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국방관(觀)은 한마디로 국방개혁을 하겠다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 국방보좌관을 하던 윤광웅씨를 국방장관에 앉힌 것 자체가 ‘노무현식 국방개혁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죠. 윤 장관 임명을 계기로 청와대의 국방담당체제가 바뀌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윤 장관을 임명할 때 청와대에서는 문민 국방장관 임명을 심도 있게 논의했습니다. 윤씨가 국방장관이 된 후 국방보좌관은 공석으로 있다가 폐지되고, 2005년 4월초 저를 위원장으로 한 16명의 대통령 직속 국방발전자문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자문위는 대통령을 자문하고, 국방부가 만드는 개혁안을 검증하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주임무였습니다. 위원 가운데 현역 군인은 없었고 예비역 군인은 7명(육군 출신 3명, 해군·해병대 출신 2명, 공군 출신 2명)이 있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위원회에 ‘국방개혁은 군만 하는 게 아니라, 정부가 하는 국정과제다. 이 개혁은 3군 합의를 이뤄 국회를 포함한 국민 동의를 받아가며 해야 하는 과제다. 3개 정부에 걸쳐 추진할 장기계획이니, 2020년을 목표 달성 연도로 정해놓고 법제화하라’는 지침을 줬습니다.”

    국방부 문민화, MB 정부에서 더 후퇴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보이지 않는 손’ 황병무 교수 인터뷰

    2005년 4월 노무현 대통령(왼쪽)으로부터 국방발전자문위원회 위원장 임명장을 받는 황병무 교수.

    ▼ 노 정부 국방개혁의 한 축이 국방부 문민화였는데, 노 정부는 이를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국방부는 군사기관이 아니라 정부기관이라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국가정책 밑에 정부정책이 있고, 그 아래에 국방정책과 3군정책이 있다는 것이 노 대통령의 시각이었습니다. 국방부는 문민 중심으로 국방정책의 작성과 집행을 담당하고, 합참의 군사정책을 국가정책과 연결시키고, 각군의 이해관계를 조정해 3군 균형발전을 도모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군은 전투에만 전념하게 하자는 것이었지요.

    1990년 개정된 국군조직법 8조엔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의 명을 받아 (중략) 합참의장과 각군 총장을 지휘 감독한다’라고 돼 있는데, 이는 문민 국방장관이 대통령이 정한 정부정책에 따라 합참과 각군을 지휘 통제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법정신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국방부를 문민화하는 개혁은 문(文)이 무(武)를 길들이는 것으로 오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 군의 저항이 만만찮겠지만 국방부 문민화는 꼭 이뤄야 할 과제입니다. 미국과 NATO 국가의 국방부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방위성도 꼭 군인이 와야 하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전부 민간인이 맡아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회의 동의를 받아 국방부의 문민화를 법제화한 겁니다.”

    ▼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이상희 초대 국방장관은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과거 국방부는 군인, 그 중에서도 육군이 독식해 ‘육방부’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상희 장관은 국방부를 육방부로 만들어가고 있어요. 그는 ‘국방부의 문민화를 재검토하겠다’고까지 했는데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령을 무시하고 이렇게 나가도 되는 건가요.

    “여야 합의를 거쳐 2006년 12월28일 법률 제8097호로 제정된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 제11조 ①항엔 ‘국방부 장관은 현역 군인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위를 제외한 국방부 직위에 군인이 아닌 공무원의 비율이 연차적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인사관리를 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고, 대통령령인 이 법 시행령 제7조 ①항에는 ‘국방부 장관은 법 제11조에 따라 군인이 아닌 공무원의 비율을 확대해 (중략) 2009년까지 100분의 70 이상을 목표로 한다’라고 돼 있습니다.

    국방부의 16개 국장급 보직 가운데 군사보좌관, 전력정책관, 동원기획관, 군수관리관, 정책기획관은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이라 군인이 현역을 보임하고, 나머지는 민간인을 앉힌다는 것이 애초의 결정이었습니다.”

    ▼ 그런데 재검토를 하겠다고 했으니 이 장관은 이 법령을 피해가는 길을 찾아내겠다는 것 아닙니까.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장관과 주로 육군에 적(籍)을 둔 것으로 보이는 현역 군인들은 ‘현역이 군 정책 결정과정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내걸며 이를 바꾸려 한답니다. 이렇게 하려면 ‘국방부 장관은 민간 인력의 활용 확대를 위한 세부 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는 이 법 시행령 8조 ③항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민주화, 정보화 시대인지라 이 조항의 개정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 국방부를 문민화하려면 장관부터 민간인을 앉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미국은 전역 후 10년이 지나야 국방장관에 취임할 수 있게 했기에 예비역 장성이 국방부 장관을 맡는 일이 거의 없죠.

    “대장이나 중장으로 전역한 사람이 바로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니 그의 ‘탈(脫)군인화’가 미흡해 국방부에서는 그의 인맥이 활성화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국방부의 문민화와 공정한 인사가 이뤄지기 어렵죠. 그래서 국방부 장관 취임 시기를 전역 후 10년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7년, 5년, 3년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검토했지만, 이를 명문화하면 대통령의 인사권에 부담을 줄 수 있어 명문화하지 못했습니다.”

    ▼ 미국이 공개석상에서 하는 말과 실무자들끼리 만나서 하는 말에 큰 차이가 있군요. 노무현 정부는 실익도 없는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함으로써 좌파정부로 지목됐는데, 미국은 한국의 안보 약점을 잡고 강하게 밀어붙이는군요. 그런데 미국이 던진 MD 문제는 우리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본이 참여했는데 우리가 빠진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불리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MD는 북한과 중국의 미사일 발사에 대비하자는 것인데 우리는 두 나라와 너무 가까이 있어 MD에 참여해도 실익이 적습니다. 북한과 중국이 쏘는 미사일을 막으려면 우리는 고층(Upper Tier)방어가 아닌 저층(Lower Tier)방어를 해야 합니다. 저층방어는 패트리어트 PAC-3로 할 수 있는 것이라 MD의 핵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MD에 참여해 고층방어를 해주면 미국과 일본은 아주 좋아하겠지요. 고층방어를 위해서는 X 밴드 레이더 등을 구입해야 하는데 여기에 10조원 이상의 돈이 들어가요. 이 때문에 우리 군은 MD 참여에 실익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압니다.”

    ▼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1번 이지스 구축함인 세종대왕함에 탄도탄 요격이 가능한 SM-3를 탑재하지 않고, 속도가 느린 대함(對艦)미사일과 전투기만 요격하는 SM-2를 탑재한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SM-3는 저층방어용 미사일인데 김대중 정부는 이것도 MD를 구성하는 무기라며 구입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대함미사일 방어 체계를 선택할 것이냐 지역방위 미사일 체계를 선택할 것이냐는 작전상의 선택이기에 앞서 정치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MD 참여 여부는 매우 예민한 문제라서 현 정부에서도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功過

    ▼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10년간 북한에 많은 것을 퍼줬지만 북은 비핵화가 아니라 핵실험으로 응대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정책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전혀 책임을 지지 않고 있어요.

    “어느 정부의 정책에도 공과(功過)는 함께 있습니다. 북핵 실험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은 겸허히 수용해야겠지만, 남북 간 긴장을 완화시키고 민간교류를 확대시켜,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정치적 노력을 했다는 점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참여정부는 화해와 협력정책을 북한을 비핵화하는 정책에 연계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참여정부 대북정책은 여론 주도층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미국과의 대북공조도 삐걱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화해와 협력을 강조하다 보니 국방정책을 화해와 협력 정책 밑에 둔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됩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군의 사기가 떨어졌고 참여정부가 추진한 국방개혁은 보수층의 반발을 샀습니다. 서해의 화해·협력지대는 그럴 만한 여건과 시기가 조성돼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전까지는 군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NLL(북방한계선)을 지켜내야 합니다. NLL을 지키다 희생된 군인에게 국가는 정당한 예우를 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우리 군은 북한과의 군사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기에 우리가 ‘우세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예비역과 여론주도층은 핵과 장거리 미사일로 대표되는 ‘북한의 비대칭 전력의 위협’과 ‘한반도 전장(戰場)의 특수성’을 내세워 이러한 평가를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대북 방위에 ‘충분성’을 가질 수 있는 전력이 오히려 안보불안감을 초래했습니다. 군사력은 억제와 방위를 하는 기본이고, 외교력을 지원하는 힘이며, 경제발전의 안전판입니다. 향후 정부는 이러한 것을 알고 잘 활용해야 합니다.”

    ▼ 참여정부가 만든 국방개혁안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려면 이명박 정부의 국방개혁 리더십도 중요한 기능을 해야 할 텐데요.

    “그렇습니다. 국방개혁은 군뿐만 아니라 국가의 과제입니다. 3대 정권이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군 통수권자가 강력한 개혁의지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국회는 초당적이고 초군(超軍)적인 자세로 입법과 예산을 지원해야 합니다.

    국방부는 과거 정권이 이루지 못한 군 구조 조정이 계획대로 추진되도록 구조조정의 주대상인 육군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국민의 이해와 지지 없이, 병영 훈련만으로 강한 군대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국민이 국방의 기반임을 알고 국방정보를 국민에게 알려 국민을 국방 발전의 동반자로 삼아야 합니다. 국방부는 ‘군의 특수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닫힌 기관이 아니라 열린 기관을 지향해야 합니다.”

    북핵 실험 때문에 문민장관 임명 못해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보이지 않는 손’ 황병무 교수 인터뷰

    2·13합의에 따라 북한이 작성한 핵목록을 가지고 지난 5월8일 판문점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성 김 미 국무부 한국 과장(가운데).

    ▼ 군인들은 야전에서 본부로, 본부에서 야전으로 잦은 보직 이동을 하는데 이들에 대한 인사권은 각군 총장이 행사합니다. 인사 순환에 따라 국방부에 근무하는 현역은 인사권을 쥔 자군(自軍) 총장을 의식하게 되니 국방이라는 큰 목표보다는 자군의 이익이라는 작은 목표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국방부는 절대 다수를 차지한 육군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이 되는 거죠.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의 국방부는 특정 군에 치우치지 않고 오랫동안 국방 분야를 연구해온 민간인들이 이끌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국방부를 이끄는 나라는 중국이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뿐인 것 같습니다.

    “이상희 장관 얘기가 나왔으니 한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분이 육사 생도이던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국방개혁 2020을 만들 때 그는 군 구조조정을 담당한 합참의장이었으니 우리 군을 어떤 정체성을 가진 군대로 발전시켜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전역 후 1년여 만에 국방장관에 임명됐기에 몸에 밴 군사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군의 기본 가치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상희 장관은 국방운영의 문민 기반을 확대해 군이 전투 임무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군은 크게 전투 분야와 전투근무지원 분야로 나뉩니다. 전차나 전투기 함정 같은 장비를 ‘정비’하고 전투물자를 대주는 ‘보급’이 대표적인 전투근무지원 분야입니다. 한국군은 이러한 분야까지 현역들이 다 하고 있지만 미군을 비롯한 선진국 군대에서는 민간이 맡고 있습니다.

    군인들은 민간이 들어와 전투근무지원분야를 맡으면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합니다만 전투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민간의 경쟁력이 훨씬 더 높은 게 현실 아닙니까. 전투기를 제작한 민간 기술자들이 전투기를 정비하는 게 낫겠습니까, 군에서 키운 정비병이 정비하는 게 낫겠습니까.”

    ▼ 노 정부는 ‘화해와 협력’이라는 대북정책과 함께 국방개혁을 추진했지만 2006년 10월9일 북핵 실험으로 찬물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래서 북핵 실험 한 달도 안된 11월1일 외교·안보 관련 장관 전원을 교체하며 김장수씨를 국방장관에 지명했는데 이는 노 정부가 대북 인식을 잘못했다고 자인(自認)한게 아닙니까.

    “북핵 실험으로 국가지도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노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전직 대통령을 초청해 의견을 듣고, 김만복 국정원장,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 김장수 국방장관, 이재정 통일장관 지명하고 백종천씨를 안보실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참여정부는 북한이 핵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는데 북한이 핵실험을 했으니 외교·안보에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장관들을 교체한 것입니다.”

    ▼ 북핵 실험은 우리 군 수뇌부의 대규모 교체도 불러왔지요.

    “김장수 육군총장이 국방장관이 되면서 11월15일, 대장이 보임되는 9개 보직 가운데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공군참모총장을 제외한 8개 자리가 모두 바뀌었습니다. 대장에서 보직만 바뀐 이는 3군 사령관을 하다 합참의장이 된 김관진씨와 1군 사령관을 하다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된 김병관씨뿐이고, 육·해군 총장과 육군의 1·2·3군 사령관의 5개 자리는 중장이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보임됐습니다. 대장을 보임하기로 한 합참 차장에는 해군 중장을 새로 임명했습니다.”

    ▼ 그러나 노 정부는 북핵 실험에 따른 군 수뇌부 인사라고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2006년 10월 말의 한미안보장관회담에서 전작권 전환 문제를 결정짓기로 했고, 이것이 끝난 후 장관과 군 수뇌부를 교체한 것이기에, 북핵 실험과는 연관이 없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지요.”

    ‘소망적 사고’

    ▼ 노 정부의 대북 판단은 정말 안이했습니다. 북핵 실험 3개월 전인 2006년 7월4일, 북한은 미사일을 무더기로 발사함으로써 노 정부의 대북정책에 관심이 없다는 사인을 보냈는데도 이를 무시했어요.

    “합참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무력시위라고 판단했으나 정부는 그 의미를 축소하고자 했던 게 사실입니다. 정부의 판단이 안이했다는 것은 10월9일 북한이 핵실험을 함으로써 증명된 것이니까요. 당시 정부는 미국과의 협조를 공고히 해서 북한이 핵실험을 못하게 하는 것보다는 북한도 참석하는 6자회담에서 북한을 설득하겠다는 데에 비중을 뒀습니다.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보이지 않는 손’ 황병무 교수 인터뷰

    중국 단둥에 있는 항미원조전 기념탑. 황 교수는 미군이 개입하지 않으면 중국군도 북한 급변사태에 개입하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정보 업무를 하면서 가장 위험한 것이 ‘wishful thinking’, 우리말로는 ‘소망적(所望的)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수집해서 분석된 정보를 보고 객관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소망 때문에 정보를 믿지 않으려 하다보면, 그런 소망에 맞는 정보만 주목하게 돼 결국은 ‘intelligence failure(정보의 실패)’가 빚어집니다.

    미사일 발사 뒤인 8월, 민주당 조성태 의원은 대통령을 만나 ‘북한이 핵실험을 할 것이다’라고 직언했습니다. 저도 9월에 송민순 안보실장을 만나 단정적으로 ‘북한이 핵실험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7·4 미사일 발사는 북한이 미국의 대북 협상전략을 유연화하려고 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전략 변화를 하지 않았기에 북한은 다시 도전할 것이고, 다시 도전한다면 그것은 핵실험밖에 없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안보 관료들은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아무 대책도 마련해놓고 있지 않다가 당했습니다.”

    ▼ 그런 소동을 치르고 2007년 2월의 6자회담에서 나온 것이 2·13합입습니다. 2·13합의는 2005년에 나온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와 대북지원 분담을 주 내용으로 합니다. 북핵 실험 이후에 나왔다는 점에서 2·13합의는 북의 핵실험 의도가 먹혀든, 일종의 ‘패배문서’ 같습니다.

    “2·13합의는 현재 잘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북한이 모든 핵시설의 가동을 중단하는 ‘동결’을 하고, 이러한 시설을 ‘신고’하며, 이 시설을 ‘폐기’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그리고 북한이 만들어놓은 무기급 플루토늄은 신고한다는 것입니다. 북핵 실험은 북한을 비핵화하려는 노정에 큰 장애물을 만들었고, 한미일 공조에도 큰 어려움을 줬습니다. 북한 핵시설을 불능화하고 무기급 플루토늄을 반출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은 조잡한 수준의 핵무기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을 찾아내 제거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북한은 관련국을 상대로, 그들이 보유한 조잡한 수준의 핵무기 제거 문제를 군축 문제로 끌고 가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초래됩니다. 벌써 워싱턴에서는 북한이 보유한 조잡한 핵무기 제거는 미-북 수교 이후에 할 수 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습니다.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조짐은 북핵실험 방지라는 예방외교 실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교훈을 국민과 정부는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북핵 예방외교에 실패한 대가는 이명박 정부가 치르게 될 것이 때문입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의 재발을 막으려면 정부는 국가안보회의(NSC) 산하에 국가 위협을 예측하고 그 위협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보조정위원회’를 둬야 합니다.

    북핵 실험 예방외교가 실패한 데엔 한미 간의 정보공조가 원활하지 못한 것도 한몫을 했습니다. 한국과 미국, 한국과 중국 사이의 정보 교류가 부실하면 북한 비핵화를 위한 관련국들의 전략에 허점이 생깁니다. 북한 비핵화를 위한 주변국과의 대북 정보교류 방안도 시급히 강구돼야 합니다.”

    DJ의 충고는 적절했다

    ▼ 2·13합의는 실익이 적은 것인데도 노 정부는 이를 토대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습니다. 물론 미국은 반대했고요. 노 정부의 안이한 대북 인식이 미국과 충돌을 일으킨 사건으로는 2007년 9월7일 호주 시드니 APEC 때 한미정상회담이 거론됩니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북한을 비핵화하려면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해 갈등이 빚어졌죠.

    “참여정부가 그러한 판단을 한 데는 미국의 태도 변화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북핵 실험 직후인 2006년 10월14일 유엔 안보리는 대북 제재안인 ‘결정문 제1718호’를 발표했지만, 그해 11월7일의 미국 중간선거에서 대북강경책을 유지해온 공화당이 패배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대화 쪽으로 대북 정책을 전환합니다.

    참여정부는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6자회담을 다시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6자회담을 포함하는 대북 종합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북한의 행동에 대해서는 행동으로 대응하자는 것이었죠.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제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열린 6자회담에서 나온 것이 2·13합의였습니다. 참여정부로서는 어떻게든 대화를 통해 북핵을 포기시키는 쪽으로 끌고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2차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것으로 압니다.”

    ▼ 참여정부가 북핵 실험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대화로 전환한 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역할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김 전 대통령이 북핵 문제에 대한 대화를 ‘방기’하면 사태가 더욱 어려워진다고 조언한 것은 사실입니다.”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보이지 않는 손’ 황병무 교수 인터뷰
    ▼ 그러한 충고를 왜 받아들였을까요.

    “북핵 실험 후 북한과 대화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결국은 대결로 가는 것인데, 대결로 갔으면 한반도 위기는 고조돼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지 않았겠습니까. 힘으로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자는 포괄안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에서 쉽게 적용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2·13합의가 있었기에 북핵 시설을 폐기시킬 수 있는 단서가 열렸고 그로 인해 한반도 위기가 어느 정도 해소됐습니다.”

    ▼ 미국은 2·13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추출한 것으로 보이는 고농축 우라늄 문제와 북한-시리아의 핵 커넥션 문제는 북한이 추출한 플루토늄의 정확한 신고와 분리해서 다루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핵 문제는 장기화하고 해결 전망이 밝지 않을 거라는 얘깁니다. 이명박 정부도 결국은 북핵 문제 해결을 남북관계 개선과 어떻게 병행시킬 것이냐란 문제에 봉착할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대북정책의 기조를 ‘비핵, 개방 3000’으로 잡았는데, 이는 노 정부가 설정했던 목표와 방향에서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전임 정부가 범한 시행착오를 최소화해서 목표를 달성하길 바랍니다.”

    미국의 北 공습 막으려 이라크 파병

    ▼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참여정부는 ‘전작권 전환’이라고 표현했지요. 전작권 전환을 포함한 한미동맹 문제로 화제를 바꿔보겠습니다. 참여정부는 반미(反美) 코드를 갖고 있었기에 전작전 전환을 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참여정부가 반미였다고 보진 않습니다. 다만 미국의 정책에 끌려가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 부시 정부 출범 직후인 2002년과 2003년, 미국은 일방주의에 젖어서 ‘압박을 하면 상대는 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 군사행동을 포함한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all options on the table’을 거론했고, 북한에 대한 공습을 검토했습니다.

    반면 참여정부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높아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이것이 대미전략의 기본 틀이다 보니 한미관계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죠. 미국은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이었으니 한미 수뇌 사이엔 신뢰가 형성되지 않고 긴장이 돌았습니다.

    미국은 그들의 세계전략에 따라 주한미군을 활용하고 동맹국인 한국의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부시 정부 초기 미국은 주한미군의 일부를 빼내 이라크로 보내고, 한국에는 이라크 파병을 요구하며, 북핵 문제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나간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은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북 문제 주도권은 우리가 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이 주도권을 쥐면 북한 공습을 검토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져 우리가 끌려가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 미국이 북한 공습을 결정한다면 한반도는 전시(戰時)가 될 것이고, 전시가 되면 미군 대장이 지휘하는 한미연합사가 미군과 한국군 작전부대를 작전통제하게 됩니다. 전면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전면전에 대비한 연합사의 작전계획이 5027이지요.

    “노 정부가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하되, 대북 문제에 대한 미국의 일방주의에 끌려가지 않겠다고 한 것은 잘한 결정으로 봅니다. 윤영관 외교장관과 이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는데, 윤 장관이 ‘미국이 북한에 무력을 쓰겠느냐’고 물었을 때 저는 ‘중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어려울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미국이 북한을 때려도 북핵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한반도의 긴장만 고조된다면 우리 경제만 어려워진다고 봤습니다. 윤 장관이 미국에 가서 파월 국무장관을 만나 비슷한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러자 파월 장관은 대뜸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과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를 맞바꾸려는 것이냐’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윤 장관이 우리 의지를 미국에 전달하느라 많이 고생했습니다.”

    전작권 전환 추진 배경

    ▼ 미국의 공습 등으로 한반도에 전시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전시에 연합사가 행사하기로 돼 있는 작전통제권을 가져오려고 했죠. 이것이 국민에게는 한미동맹을 와해시키는 것으로 비치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초 우리는 2개 사단 플러스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해놓고 있었는데, 미국은 ‘괌 독트린’에 따라 주한미 7사단을 일방적으로 철수시켰습니다. 이에 정일권 총리는 ‘7사단을 철수시키면 총리 이하 전 국무위원이 사퇴하겠다. 주한미군 주둔비의 일부를 한국이 부담하겠다’는 발표까지 했지만 미국은 그냥 밀어붙였습니다. 여기서 놀란 박정희 정부는 백곰 미사일(NHK-1)과 핵무기 개발로 달려갔습니다.

    노태우 정부 초기인 1989년 미국 의회는 3단계로 주한미지상군을 완전 철수시키고 1997년에는 한미연합사를 해체한다는 넌-워너 수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시켰는데, 1992년 1차 북핵위기가 터짐으로써 넌-워너 수정안의 집행이 정지됐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 정지가 영원한지 일시적인지 확인할 수 없었기에, 1994년 말 평시작전통제권은 한국군 합참이 행사한다는 평작권 환수 조치가 이뤄진 것입니다.

    1970년대 초의 7사단 철수와 1989년의 넌-워너 수정안 제정은 미국의 세계 전략이 바뀐 데서 나왔습니다. 참여정부 초기 미국은 ‘Global Posture Review (GPR)’라는 ‘미군의 세계 재배치 전략’을 만들었습니다. 미국은 세계전략을 정한 후 한반도를 바라보지만, 우리는 한반도가 전부이다 보니 미국의 전략 변화에 휘둘리게 됩니다. 이렇게 돼서는 안 되겠다 해서 나온 것이 전작권 전환입니다.

    그러나 북한과의 대치를 고려해 우리의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후 전작권을 전환하기로 했습니다. 미국은 2009년 전작권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영길 장관 시절 국방부는 2010년쯤이면 전작권을 전환해도 된다고 보았고, 2005년의 국방부는 2012년이 적절하다고 보고했기에 이를 수용했습니다. 이러한 판단은 국방부 실무자들이 합의해서 도출한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협의를 통해 전환 시기와 절차를 정하는 것과, 전환 후 어떠한 공동방위체제를 만드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습니다. 국민, 특히 보수세력의 이해와 협조를 어떻게 받아낼 것이냐도 중요한 문제였고요. 노 대통령은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진통은 불가피하다고 봤지만 이 진통이 예상보다 컸습니다. 대국민 홍보를 제대로 하지 못해 진통이 컸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쉽게 생각합니다.”

    ▼ 청와대의 지시로 국방부가 전작권을 환수한 것이기에 국민은 노 정부의 안보의식을 맹비난했습니다. 안보 문제는 대국민 홍보의 성패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전작권 전환은 한미연합군의 전쟁승리 능력이라는 ‘효율성’과 한국 방위는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는 ‘정체성’이 결합돼 추진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수 진영은 효율성에만 주목해 ‘미국이 2009년에 전작권을 가져가라고 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무조건 반대 목소리부터 냈습니다. 일부는 통일 이후에 전작권을 가져와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전작권 전환이 역사적 흐름이고, 남북관계와 국제무대에서 우리의 행동 자유를 확대시켜준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국방능력이 향상됐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중국, 미 지상군 투입에 민감

    ▼ 현실적으로는 북한의 전면 남침보다는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났을 때의 군사적 대응 문제가 논의의 초점으로 떠올랐습니다. 많은 국민은 ‘동북공정’ 등으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하는 중국이 북한 급변사태시 중국군을 개입시킬 것이라고 봅니다. 북한에 진입한 중국군은 친중(親中) 정부를 세운 다음에야 철수할 것이므로 남북통일은 멀어질 것이라는 시각이죠. 그래서 많은 이가 북한 급변사태가 일어나면 ‘한국군은 미군과 함께 북한 안정화를 위해 북한에 진입하는 것이 좋다’며 연합사 작계 5029 작성을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전작권 환수가 일어나면 연합사는 해체될 수밖에 없으니 북한 급변사태시 한국군은 단독으로 북한에 진입하려는 중국군에 맞서야 한다는 부담이 생깁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한미연합사가 북한에 한미 양국군을 투입한다면 중국과 러시아가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중국은 미군이 휴전선 이북으로 올라온다면 자기들도 군사적 대응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의 긴장은 더욱 고조돼 통일은 더욱 멀어집니다.

    6·25전쟁 때 중국이 항미원조(抗美援朝) 참전을 결정하면서 주목한 것은 미 지상군이 38선 이북으로 올라오느냐였습니다. 한국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을 넘은 1950년 10월1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면 중국군도 개입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다음날 저우언라이는 미국과 통할 수 있는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를 불러 같은 내용을 전달합니다. 이때 파니카가 ‘한국군의 북진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묻자 저우언라이는 ‘그것은 그들(한민족)의 문제’라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군과 미공군기가 38선 이북으로 올라와 작전하는 것은 용인해도 지상군이 올라오는 것은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중국군, 북한 급변사태 개입 어렵다

    ▼ 만일 한국군이 단독으로 북한 급변사태에 개입하면 중국은 어떻게 나올까요.

    “북한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불개입 선언’을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헌법상 북한은 우리의 영토이지만, 유엔에 별도 가입한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 일어난 내분은 북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선의(善意)의 관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해요. 만일 개입하게 된다면 미국, 중국과 충분히 사전협의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개입이 ‘동네싸움’을 일으키는 구실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요. 우리는 북한 치안상황을 바로잡고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자치정부를 세우게 하는 평화유지작전을 한다는 것을 목표로 개입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행동을 하기 전, 다시 말해 우리가 선의의 관망을 하고 있는데 중국이 군사적으로 북한에 개입한다면, 이는 미국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중국군의 개입은 미군의 투입을 불러올 것이므로, ‘동네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중국은 국제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주변국들은 이러한 중국을 적대시할 것이므로 중국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습니다. 중국군이 한국군을 공격한다면 이는 미국에 대한 도전이 되므로 중국은 미국과 대립해야 합니다. 주변국뿐만 아니라 미국 등 서방국가를 적으로 만들고 중국이 평화롭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 한국이 미군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북한 급변사태 종식이라는 평화 목적 실현을 위해 한국군을 투입한다면, 중국은 북한에 군사력을 투입할 명분을 찾기 힘들 것입니다. 한국군이 들어가 북한 치안을 안정시키고,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선거라고 하는 민주절차로 자치정부를 세우게 한 후 그 정부가 한국과의 통일을 결의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중국이 개입하지 못하는 평화통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북한 급변사태를 계기로 한 통일은 우리 힘으로 해야 합니다. 전시에 가동되는 한미연합사의 작전계획으로 북한 급변사태에 대응해 통일을 이루려 하는 것은 위험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계는 한국군 합참에서 세워야 합니다.”

    평시작전으로 북 급변사태 개입해야

    ▼ 북한 급변사태 때 한국군이 들어가면 북한의 일부 군부대가 중국으로 건너가 망명정부를 세우거나 중국을 근거지로 한 게릴라전을 펼치진 않을까요.

    “지금 중국은 중국으로 건너온 탈북자들을 망명자로 대우하지 않고 ‘비법월경자(非法越境者)’로 판단해 잡아들이는 족족 북한으로 송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활용해야죠. ‘과거 중국이 탈북자를 망명자로 처리하지 않았듯 지금 발생한 탈북자도 망명자가 아니다. 북한은 빠르게 안정되고 있으니 그들을 돌려보내라’는 요구를 외교적으로 해야 합니다. 국가라는 게 뭡니까. 유일하게 무력을 가질 수 있는 조직입니다. 중국은 자국 내에 무력을 갖춘 또 다른 조직이 가동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북한군 일부가 공식적으로 중국에 게릴라전 본거지를 만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요.”

    ▼ 북한 급변사태시 중국의 개입을 피하려면 우리는 평화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따라서 합참은 이 작전을 전시작전이 아닌 평시작전 개념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1999년 호주군은 동티모르 사태에 개입했지만 당시 호주는 전시를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식으로 북한 급변사태에 개입해야 하지 않을까요.

    “미국의 안보관료들이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 한미 공동작계를 만들자고 한 것은, 한미 간의 역할분담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북한 급변사태시 미군은 핵과 미사일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를 안전하게 확보하고, 한국군은 인도주의적 지원활동을 펼쳐 북한을 조기에 안정시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북한에 새로운 정치상황을 만들고 중국 등 주변국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한미 공동작계 작성을 전제로 한 한미연합사의 역할은 변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 전작권 환수의 대전제는 충분한 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단계까지 국방력을 강화한 후 추진하라는 것입니다. 국방력을 증강시키려면 인건비 지출을 줄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병력을 줄여야 합니다. 미군은 직업군인제를 택하고 있어서인지 전투와 훈련 이외의 분야에는 현역을 쓰지 않습니다. 반면 한국군은 의무병제라 그런지 당번병 숙소병 운전병 행정병 이발병 테니스병 취사병 등 전투와 무관한 분야에 현역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병력감축의 핵심은 부대 수를 줄이는 구조조정입니다. 그래서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 제25조 ①항에 ‘국군의 상비병력 규모는 (중략) 2020년까지 50만명 수준을 목표로 한다’라고 해놓은 것입니다. 애초 국방부 안은 ‘목표’가 아닌 ‘조정’이었는데, 국회 국방위 심의에서 목표로 변경됐어요. 35만명으로 줄이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결국 50만으로 결정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이 결정에 매우 만족해했죠.”

    감군은 하되 전력은 증강

    ▼ 우리 군은 전투근무지원 분야에 현역을 다수 배치해 낭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군 구조를 방만하게 가져감으로써, 하체는 약하고 머리가 큰 ‘가분수’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미 육군은 50만 병력으로 10개 사단을 운영하는데, 한국 육군은 비슷한 병력으로 47개 사단을 운영하고 있으니 허약 체질일 수밖에 없습니다.

    “병사는 적은데 사단이 많으면 좋은 것은 장교들입니다. 예비군이 입소해야 완편(完編)이 되는 체제로는 유사시 신속한 작전을 펼치기 어려우니 우리도 미 육군처럼 완전한 완편사단 체제로 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2007년 1단계로 3개 동원사단과 후방에 있는 2개 군단사령부를 해체했습니다. 2015년까지 2단계로 동원사단을 중심으로 한 13개 사단과 군단 1개를 더 해체합니다. 그리고 목표연도인 2020년까지의 3단계에서는 7개 사단과 1개 군단, 그리고 한 개 군사령부를 해체해 최종적으로 23개 사단-6개 군단 체제를 구성하고자 합니다. 해병대의 2개 사단은 그대로 존치하니 지상군 사단은 25개가 되는 셈입니다. 병력은 줄이되 전력은 1.7배 증강시킨다는 것이 국방개혁의 목표입니다.”

    ▼ 한국처럼 좁은 전구(戰區)에서 세 개의 야전군을 운영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죠. 육군은 하루 빨리 1군과 3군을 통합해 공통 보직 자리를 줄여야 합니다. 지금 통신과 교통이 얼마나 발전했습니까. 그런데도 6·25 직후에 결정된 군단과 사단의 작전구역이 지금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2007년 11월 육군은 2군사령부를 제2작전사령부(2작사)로 개편했으니, 남은 것은 1군과 3군을 통합해 지상작전사령부(지작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지작사로의 통합은 안보 여건을 감안해 구조조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합니다. 2020년 6개로 줄어드는 군단은, 작전구역을 갖는 지역군단 4개와 작전구역을 갖지 않는 기동군단 2개로 재편될 것입니다. 4개 지역군단은 지금의 야전군사령부인 1, 3군사령부보다 약간 작은 작전구역을 담당하는 소(小)야전군 사령부 기능을 할 것입니다.

    지역군단은 전방지역에서 축선별 주축 제대로 발전됩니다. 이 군단의 감시 타격 기동 능력은 현저히 증가하고 작전구역도 현재 군단보다 7배 정도 넓어집니다. 기밀 사항이라 상세히 설명하진 못합니다만 미래 사단의 작전 능력과 작전구역도 현저히 증가합니다.”

    북한 급변사태시 특전사 투입

    ▼ 북한 급변사태가 일어나 한국군을 투입한다면 40만으로 줄어든 지상군으로는 북한 지역 민정작전을 원활히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DMZ 바로 남쪽에 있는 알파선(제1선)과 브라보선(제2선)에 있는 상비부대는 북한 안정화를 위해 출동시키기 어렵겠지요. 북한 안정화를 위한 민정작전에는 그 후방에 있는 부대가 출동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부대로는 육군 특전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정규 사단을 출동시킨다면 동원예비군을 동원해 동원사단을 만들어, 이 부대가 이동한 자리를 메울 수 있습니다.”

    ▼ 특전사는 너무 강하지 않나요. 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군사작전은 ‘무트와’(MOOTWA·Military Operation Other Than War, 전쟁 이외의 군사작전)여야 하지 않습니까.

    “전면전이라는 정규전에 나서는 것이 정규사단과 군단이고, 비(非)정규전에 투입하는 것이 특전사입니다. 이라크의 쿠르드 지역에 가 있는 자이툰부대가 민정작전 부대인데, 자이툰의 주력이 바로 특전사 예하 대대들입니다.

    급변사태는 북한 전역에서 발생하기보다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선(線)을 중시하는 정규사단보다는 점(點)을 중심으로 지역을 확보하는 특수전 부대가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특수전 부대는 고공낙하를 비롯한 다양한 방법으로 아주 신속히 진출할 수 있습니다.”

    ▼ 북한 지역에서 MOOTWA를 펼칠 때 압록-두만강을 따라 획정된 한·중 국경선 방어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부대를 압록-두만강 지역으로 진출시키면 미군이 참여하지 않았다 해도 한중 간의 긴장이 고조될 텐데요.

    “그것은 정치적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앞서 지적했듯, 중국은 북한 안정화를 위해 들어온 한국군에 투항을 거부한 북한군이, 무장한 채로 중국으로 건너오는 것을 매우 경계할 것입니다. 중국이 압록-두만강에 중국군을 배치해 이들을 색출해 한국에 넘겨주도록 정치적 타협을 보아야 합니다.”

    ▼ 북한 급변사태시 일본의 개입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그것은 절대로 안 됩니다. 중국군과 미군이 우리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듯이, 일본군도 우리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중국은 청일전쟁의 기억이 있어서, 일본 군사력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미군이 휴전선 이북으로 올라오는 것만큼이나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 1999년 동티모르 사태 때는 호주가 다국적군 구성을 주장하면서 먼저 개입했습니다. 이에 한국과 일본 등이 호응해 군대를 파병했죠. 유엔이 이러한 군사력 투입을 승인한 것은 다국적군 사령부가 구성돼 동티모르 지역을 안정시키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국적군이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전환됐지요. 북한 급변사태 때도 먼저 한국군이 다국적군 구성을 요구하며 북한 안정화를 위해 들어가고, 이어 미국이나 일본, 중국을 제외한 나라의 군대가 들어가면 어떨까요. 그리하여 북한이 안정되고 유엔이 이 부대를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이전한다면, 그때는 미군이나 일본 자위대나 중국군도 북한에 들어와 평화유지활동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유엔의 승인이 있더라도 강대국의 군대가 북한에 들어오면 정치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민정 작전의 핵심은 민심을 얻는 것이니 민정작전 교리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 다시 군 구조조정으로 화제를 돌려보죠. 해군 구조는 어떻게 바뀝니까.

    “현재 3개인 함대사령부에 잠수함대사령부, 항공사령부, 기동함대사령부를 더해 한반도 전해역을 감시하고 타격할 수 있게 할 겁니다. 대신 3개 함대사 예하의 전단은 없애 전단 수는 4개로 줄입니다.”

    ▼ 기동함대 창설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지요.

    “제가 반대했습니다. 해군에 기동함대를 만들어 싱가포르 옆의 말라카 해협까지 갈 것이냐, 대만과 필리핀 사이의 바시 해협까지 갈 것이냐를 따져 물었더니, 답을 못하더군요. 3개 해역 함대사령부로 해역방어는 되니까 기동부대는 함대가 아닌 전단(기동전단)으로 하자는 것이 제 주장이었습니다.”

    ▼ 해병대는 백령도에 있는 6여단을 없앤다고 하는데, 전략도서인 백령도 주둔 부대를 없애도 되는 건가요.

    “해병대 6여단 해체는 남북관계 개선을 전제로 하기에 마지막 단계에서 결정됩니다. 대신 해병대는 포항에 있는 1사단 예하 1개 연대를 주축으로 상륙여단을 만듭니다. 해병대는 헬기여단을 창설해 공지(空地) 기동부대가 되겠다며 조종사와 헬기를 요구했지만, 명쾌한 결론을 내지 못 했습니다.”

    ▼ 공군은 2개 전투사, 9개 전투비행단 체제 그대로 갑니까.

    “그렇습니다. 공군은 구조변화보다는 질(質)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공군은 공중우세와 정밀타격을 위해 고-중-저 개념으로 500여 대의 작전기를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 노후한 작전기가 많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전투기는 부속품을 구할 수 없어 유지비용이 많이 들기에 퇴역시키는 것이 낫습니다. 작전기 수를 420여 대로 줄이고 대신 조기경보통제기와 공중급유기 등을 확보할 예정입니다.”

    공중-정보 전력은 미군이 주도

    ▼ 한미동맹 문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전작권을 환수해 한국군 합참이 한국군 전 작전부대를 지휘하게 되면 한미연합사는 해체되는데, 이 경우 미8군은 어떻게 됩니까.

    “현재 미8군은 유사시 결성되는 한미연합사의 지상구성군사령부를 지원하는 행정사령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군 합참이 전작전을 가져가 한국군 주(主) 작계를 만들면, 미군은 미군대로 유사시 한국군을 지원하는 전구(戰區)사령부를 만들고 지원 작계를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미8군은 미국 전구사령부 밑의 지상전투사령부 기능을 합니다. 미8군은 하와이로 옮겨가더라도, 작전 수행 조직을 둬, 유사시 한반도로 전개되는 미 지상군 부대를 지휘하는 최고 지상군 전투부대의 기능을 할 것입니다. 미군은 지상 전투사령부로 8군, 해군 전투사령부로 7함대, 공군 전투사령부로 7공군을 지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군 전투부대와 한국의 지작사, 해작사, 공작사가 협조를 합니다. 즉 한미 합참끼리는 MCM을 통해 전략대화를 하고, 한국 합참은 한국군을 지원하는 미국의 한국 전구지원사령부와 협조합니다. 그리고 한국군 지작사·해작사·공작사는 미군의 미 지상전투사령부(8군), 해군전투사령부(7함대), 공군전투사령부(7공군)와 협조하는 것입니다.”

    ▼ 그런 시스템을 언제까지 구성합니까.

    “2007년 1월 한미 양국이 합의한 전작권 전환을 위한 이행계획서에는 우리 합참이 한반도 전구 작전을 지휘 통제할 수 있도록, 하루빨리 한미연합사 수준의 전투참모조직을 편성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2009년 초까지 이러한 편성을 완료하고 2009년 말에는 주한미군사령부와 함께 한국군 주작계를 완성할 계획입니다. 이 작전계획에 구체적인 미 증원전력 규모와 전개일정, 그리고 작전사 이하 제대의 지휘관계를 정리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밝혀둘 게 있습니다. 연합사가 해체돼도 한반도 유사시 작동하는 주한미군의 작계에는 미 증원군의 규모와 전개일정이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2010년부터는 새로 만든 작계에 따라 전구급 연습을 펼쳐 작계를 검증해봅니다. 그리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 2011년 말까지 한미군사협조 기구의 완전한 운용능력을 갖춥니다.”

    ▼ 평작권만 있는 한국 합참은 사실상 행정사령부입니다. 이러한 합참에 전작권을 준다는 것은 자기 작계를 가진 전구사령부로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한국군 합참이 완전한 작계를 만들어 운용하려면 보완해야 할 전력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을 Bridging Capability, 즉 교량전력이라고 하는데, 이 교량전력은 2012년까지 메우기로 했습니다.”

    합참의 육군 독주도 제어

    ▼ 그렇다 해도 공중 정보전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군사위성은 물론이고 U-2 같은 고공정찰기와 EP-3 같은 해군 정찰기가 없는 한국군으로서는 미군만큼 광대역의 정보를 수집할 수 없습니다.

    “공중 정보작전에서의 미군 주도는 당분간 인정해야 합니다. 한반도 전구에서 한미 양국군은 ‘공동정보센터’를 설치해 ISR(정보, 감시, 정찰)이라고 하는 정보자산을 통합 운영합니다. 그리고 ‘통합항공우주작전센터’를 만들어 한미 공중전력도 통합운영합니다. 이 센터는 한국 공군이 능력을 갖출 때까지 미 공군이 주도하고 한국 합참의장의 지침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체제는 미국의 첨단 항공우주전력을 이용해 전쟁을 억제하고 전쟁이 발발하면 필승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 비효율적인 병력 배치를 줄이는 것과 함께 추진해야 할 것이 3군의 균형발전입니다. 합동성을 강화해 통합전력을 발휘하려면 국방부의 ‘육방부화’와 함께 합참의 육군화도 막아야 합니다.

    “3군 균형발전 이야기가 나오면 3군을 하나로 묶자는 ‘통합군’ 주장과 따로 운영하자는 ‘합동군’ 주장이 대립합니다. 자문위원 가운데 일부는 국군총장이 육해공군을 통합 지휘하는 통합군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통일이 이뤄질 때까지는 3군 간의 합의를 존중하는 합동군 체제를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각군은 각군본부를 유지하되 전력운영만큼은 합동성을 기반으로 한 통합성을 추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국방개혁법 시행령 제11조에 합동성위원회를 설치한다는 내용을 넣었습니다. 이 위원회는 합동전투발전에 관련된 주요 안건을 심의합니다. 그리고 이 법 19조 3항과 시행령 10조 2항에 따라 ‘합동 특기’제를 도입합니다. 합참이나 연합, 합동부대에 근무하는 장교는 이 특기를 가져야 하고, 이들에 대한 인사도 각군이 아닌 합참에서 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합참의장이 이끄는 합참의 힘이 막강해집니다. 따라서 합참 보직을 3군이 어떻게 나눠 갖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합참 직위 가운데는 ‘해상작전과장’처럼 특정 군(해군)이 맡아야 하는 ‘필수직위’가 있고, 3군에서 누가 맡아도 되는 ‘합동직위’가 있습니다. 시행령은 18조 2항에 필수직위 수를 최소화하라고 규정해놓았습니다. 합참의 공통직위는 육해공군이 2대 1대 1의 비율로 맡는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국방부 직할부대 지휘관은 특정군 장교가 3회 연속해서 보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육해공군이 3대 1대 1의 비율로 돌아가면서 지휘관을 맡기로 했습니다. 시행령에는 합동성을 강화하는 조항이 6개나 들어가 있습니다. 합동성 강화는 합동개념서 작성과 네트워크 중심의 합동전장 운영체계 작성에도 반드시 반영하도록 했습니다.”

    ▼ 국방개혁을 법제화하면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계속 추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을 하다 보면 그 내용을 바꿔야 할 부분도 나올 텐데요.

    “개혁법은 3년마다 개혁 성과와 안보환경을 평가해 수정, 보완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리고 군 구조를 조정하려면 계급별, 병과별, 직위별 공석(空席)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점을 꼭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3군 총장과 방위사업청장도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해야 합니다.”

    ▼ 전력증강과 국방개혁을 완수하는 2020년까지 필요한 예산을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실현 가능한 소요재원 확보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2006~2020년의 15년간 연평균 실질 경제성장률이 4.8%로 전망됩니다. 같은 기간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2.3%일 것으로 추정되니, 둘을 더한 경상성장률은 7.1%입니다. 이 기간 사이의 연평균 정부 재정 증가율은 7.1%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국방비 증가율은 6.2%로 추정되니 충분히 부담할 수 있습니다.”

    ▼ 증가율로 보면 그럴지 몰라도 절대 금액으로 따져보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1991~2005년 15년간의 연평균 국방예산은 13조6000여억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전연도인 1990년의 국방예산은 6조6000여억원이었습니다. 15년간의 연평균 국방예산은 직전연도 국방예산의 2배가 좀 넘습니다.

    2006~2020년 15년간의 연평균 국방예산은 41조4000여억원으로 전망됩니다. 그런데 그 직전연도인 2005년의 국방예산이 20조8000여억원이었습니다. 역시 2배 남짓한 규모지요. 1991~2005년은 국방비 증가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때였습니다. 그러한 때의 국방비를 부담한 우리가 유사한 비율의 국방비 증가를 요구하는 2006~2020년의 부담을 감내하지 못하겠습니까.”

    전력증강 예산 마련 가능

    ▼ 그러한 계산에 따른다면 2006~2020년의 국방비 총액은 621조원에 달합니다. 엄청난 금액이지요. 노무현 정부는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을 3%로 올리겠다고 해서 최근에는 국방비 증가율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군비경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GDP 대비 국방비는 일본이 1.0%, 대만이 2.5%, 미국이 3.9%, 중국이 3.7%, 러시아가 4.4%입니다. 그런데 분단된 한국이 노무현 정부시절 2.4%를 기록했다는 것은 군비경쟁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를 3%대로 올린다 해도 미국, 중국, 러시아와 비교하면 여전히 낮은 수치입니다.

    2001~2005년 5년간 정부 재정증가율은 7.9%로 다소 높은 편이었습니다. 2006~2010년 5년간은 교량전력 증강이 시급하니 국방비 증가율을 높게 잡아서 연평균 9.9%로 했습니다. 그리고 2011~2015년 사이엔 연평균 7.8%로 하고, 전력증강이 사실상 완료되는 2015~2020년엔 1.0%로 떨어뜨려서 15년 평균 6.2%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 과거 경부고속전철(KTX) 사업은 시작은 미약하게 했으나 중간에 변경을 해서 크게 키웠습니다. 전력증강사업은 반대로 초기에는 9.9%의 증가율로 가다가 뒤로 갈수록 떨어지는데,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요? 후반기에도 여전히 높은 증가율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2006~2010년의 1단계에서는 군 전문인력을 보충하고 진행 중인 사업을 계속하며, 군 구조 조정에 따른 소요전력을 마련해야 하니 9.9%로 높게 잡혔습니다. 국방개혁의 핵심은 ‘선(先) 전력증강, 후(後) 구조조정’입니다. 1군과 3군을 통합해 지작사를 만드는 등의 기간부대 해체는 ‘후 구조조정’에 해당되므로 초기에 군사비 증가율이 높은 것입니다. 기간부대를 해체할 때는 국방비 증가율이 크게 떨어질 것입니다.”

    ▼ 이러한 국방개혁에 대해 미국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국방개혁안이 완성된 후 저는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마이클 그린 백악관 동아태 담당 선임보좌관, 빅터 차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국장, 최근 주한미대사로 지명된 캐슬린 스티븐스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등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국방개혁 취지와 방향에 공감했습니다.

    그때 마이클 그린 선임보좌관은 MD(미사일 방어체계) 같은 한미동맹 강화 방안이 없어 아쉽다고 했고, 빅터 차 국장은 미국의 대북전략과 한국의 대북전략이 공조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이 핵을 가진 북한과 공조한다면 미국은 주한미군 문제를 재검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스티븐스는 주한미군 역할을 한반도에 국한하지 말고 동북아 평화를 위한 것으로 확대하자고 했습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내비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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