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호

‘인사전횡’ 폭로한 정두언도 인사개입 의혹

박영준 “정두언, 청와대 인선 때 30명 리스트 보내와 관철시켰다”

  • 송국건 영남일보 정치부 기자 song@yeongnam.com

    입력2008-07-10 16: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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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무슨 전횡을 했다는 건가, 그렇지 않다”
    • “이상득에게 인사문제 재가 받은 적 한 번도 없다”
    • “정두언이 추천한 사람, 청와대에 제일 많이 들어왔다”
    • 박영준 발언 사실이면 정두언도 ‘권력 사유화’
    ‘인사전횡’ 폭로한 정두언도 인사개입 의혹

    박영준 전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좌)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우)

    지난 5월30일 저녁 청와대 박영준 기획조정비서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기자가 ‘신동아’ 5월호에 기고한 ‘이명박계 이너서클 120일 초단기 권력투쟁 내막’ 기사에 대해 해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정부 및 청와대 인사를 둘러싼 자신과 정두언 의원의 역할을 분석한 내용 중 일부가 사실과 다르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박 전 비서관은 그때껏 언론과는 일절 접촉하지 않았었다.

    지금은 청와대를 떠난 박 전 비서관은 이날 전화통화에서 자신이 ‘장·차관급, 나아가 국무총리와 대통령실장 인사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부분과 관련해 “내가 무슨 전횡을 행사한 것처럼 비치는데, 그렇지 않다”고 했다. 조각(組閣)과 청와대 참모진 인선 당시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 총괄팀장 신분으로 제한된 범위에서 주어진 역할만 했다는 취지였다.

    “대통령께만 보고 드린다”

    또한 ‘박 비서관은 재산 및 경력 검증 같은 기초 작업을 마친 인선안(案)을 이상득 부의장에게 보고해 ‘재가’를 받는 절차를 거쳤다’는 대목에 대해선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박 전 비서관은 “이 부의장을 오래 모셨지만 지금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인데 대통령께 보고를 드려야지 어떻게 이 부의장께 재가를 받겠느냐”고 했다.

    그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부분은 ‘당시 이재오계나 정두언 의원 측에서 올라온 명단이 박 비서관 선에서 차단되기도 했다’ ‘(이상득계가) 막강한 파워를 과시하며 새 정부 요직 인선을 독점하다시피 했던…’이란 기사 내용이었다.



    박 전 비서관은 통화에서 “청와대 참모 인선 과정에서 정두언 의원은 50명가량의 명단을 (인선 팀에) 전달했다. 나중에 보니 그중에서 30명 정도가 관철됐더라. 정 의원이 추천한 사람이 청와대에 제일 많이 들어왔다. 정 의원이 청와대 인사에서 배제됐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항변했다.

    정 의원이 50명을 추천해 30명을 관철시켰다는 말은 청와대의 다른 관계자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의도 국회 주변에서도 정 의원이 평소 인연이 있는 국회의원 보좌관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을 청와대에 입성시켰다는 말이 나돈다.

    박 전 비서관은 ‘신동아’ 기사에서 ‘(대통령직) 인수위 구성은 이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아는 MB 직계(정두언계)가 주도해 ‘실용적’으로 짰고…’라고 기술한 부분에 대해서도 “뭐가 실용적이란 말이냐”고 되물었다. 기사 내용은 ‘인수위의 경우 어차피 한시적인 기구이므로 인선 과정에선 큰 잡음이 일 정도의 계파 간 힘겨루기는 없었다. 이 때문에 그 시점에 정권 이너서클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정 의원 등이 계파 안배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일 위주로 짤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박 전 비서관은 정 의원의 경우 인수위 인사를 공정하게 했고, 자신들은 정부·청와대 인사에서 전횡을 행사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아니면 정 의원이 인수위 인사부터 오히려 더 전횡을 부렸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새 국면 맞은 ‘정두언 사태’

    박 전 비서관의 이 같은 발언은 자신과 관련된 기사에 대해 해명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작심’하고 한 발언은 아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자신이 최근 정두언 의원이 촉발시킨 여권 내 파워게임의 첫 희생양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발언은 향후 상당한 파장을 부를 것으로 보인다. 이상득 부의장과 박영준 전 비서관을 겨냥해 ‘인사 전횡’을 폭로한 정두언 의원에 대해 “정 의원도 인사에 개입하고 권력을 사유화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 의원의 폭로에 한나라당 내 일부 소장파 의원들은 “진정성이 있다”고 동조했다. 그러나 박 전 비서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 의원이 촉발시킨 사태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인사전횡’ 폭로한 정두언도 인사개입 의혹

    이상득 의원이 1월21일 대통령 당선인 특사로 방일한 결과를 이명박 당선인에게 보고하고 있다.

    박 비서관과 기자의 통화가 있고 1주일여가 지난 뒤 정 의원은 폭탄 발언을 했다. 그는 6월7일자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청와대 일부 인사가 국정수행에 집중한 게 아니라 전리품(인사) 챙기기에 골몰했다”며 국회의원 한 사람과 청와대 참모 3명을 ‘권력 사유화’의 장본인으로 지목했다. 정 의원이 겨냥한 국회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 청와대 참모 3명은 류우익 대통령실장, 박영준 비서관, 장다사로 정무1비서관이었다.

    정 의원은 특히 박 비서관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B 비서관(박영준 비서관)은 노태우 정권의 박철언, 김영삼 정부의 김현철, 김대중 정부의 박지원, 노무현 정권의 안희정·이광재씨를 다 합쳐놓은 것 같은 힘을 가졌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B 비서관은 대통령 주변의 사람들을 이간질시키고 음해하고 모략하는 데 명수”라고 인신공격성 발언도 서슴지않았다.

    정 의원의 인터뷰 기사가 보도된 날 국회 출입기자들에게 정 의원실에서 보낸 e메일이 왔다. 보도 내용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한 것이 맞다”고 확인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설명한 글이었다. 작심하고 사건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 의원은 이어 9일에는 한나라당 의원총회 신상발언에서 “인사 실패가 국정 무능 및 부도덕 인사로 이어져 국정실패까지 초래했다. 이제는 책임질 사람들이 각자 자기 거취를 결정하면 된다”고 마무리 펀치를 날렸다.

    박 전 비서관은 처음에는 “너무나 억울하다”면서 이에 강력히 맞설 생각임을 내비쳤다. 그러나 정 의원의 의원총회 발언이 있던 날 오후 이명박 대통령과 한 시간 동안 면담한 뒤 “대통령께 누가 된다면 청와대에 한시라도 더 머물 수 없다”며 류우익 대통령실장에게 사표를 내고 짐을 쌌다. 그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고 한다.

    정 의원과 박 전 비서관은 정권 창출의 산실인 ‘서울시청팀’과 ‘안국포럼’의 핵심 멤버였다. 정권 창출의 1등 공신인 두 사람이 왜 이처럼 관계가 틀어져 박 전 비서관이 정 의원에게 극도의 불신을 표시하고, 정 의원은 ‘공신의 난’을 일으키는 지경까지 왔을까.

    둘 사이 가른 결정적 사건

    박 전 비서관은 1994년 이상득 의원의 국회 참모로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2002년 서울시장선거 당시 이명박 후보 선거 캠프에 차출된 뒤 이 대통령의 돈독한 신임을 받아 ‘1미터 측근’이란 말도 들었다. 정 의원은 행정고시 24회 출신으로 총리실 등에 근무하다 2000년 총선에 나섰다가 실패한 뒤 2002년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발탁됐다. 그 역시 ‘MB의 복심(腹心) 중 복심’으로 불리면서 핵심 측근으로 자리 잡았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의기투합했을 때만 해도 51세인 정 의원과 48세인 박 전 비서관은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그러나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뒤 정부와 청와대 요직 인선을 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팽팽한 힘겨루기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인수위 인사를 주도하던 정 의원이 정부와 청와대 인선에서 소외되면서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다. 그러다 ‘결정적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둘은 완전히 갈라섰다.

    화약고는 정치권과 연결고리를 갖는 청와대 정무1비서관(여당 담당)과 정무2비서관(야당 담당) 자리였다고 한다. 정두언 의원은 청와대 정무 1, 2 비서관에 각각 자신과 가까운 이태규 윤여준 전 의원 보좌관과 현역 한나라당 국회의원 보좌관인 L씨를 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두 자리는 결국 장다사로 전 이상득 국회부의장 비서실장과 김두우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에게 돌아갔다. 대신 이태규 전 보좌관은 연설기록비서관으로 교통정리됐다.

    정 의원은 자신이 추천한 두 사람이 ‘물먹은’ 배후에 박 전 비서관이 있다고 단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다사로 비서관은 이상득계이고, 김두우 비서관은 박 전 비서관과 고향이 경북으로 같다. 이 두 사람을 발탁하기 위해 L 보좌관을 내치고 이태규 전 보좌관은 다른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두우 비서관이 청와대에 합류한 것은 친분이 있던 류우익 실장의 직접 요청에 의한 것으로 나중에 전해졌다.

    이태규 연설기록비서관은 새 정부 출범 불과 한 달 만인 지난 3월26일 돌연 사표를 냈다. 당시 “청와대 보직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고 사퇴의 변을 밝혔다. 자신의 ‘전공’과 다른 자리를 맡아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실제로 이태규 비서관이 작성해서 올린 대통령 연설문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어느 선에선가 대폭 고쳐지곤 해서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말도 들린다. 그는 청와대를 나온 뒤 KT에 전무급으로 들어갔다.

    “99% 시키는 대로 했다”

    ‘인사전횡’ 폭로한 정두언도 인사개입 의혹

    한나라당과 정부, 청와대 관계자들이 5월11일 국회 한나라당 원내대표실에서 당-정-청 협의회를 갖고 있다.

    정 의원은 정무비서관 인선 과정에서 밀린 직후 박 전 비서관을 겨냥해 극도의 적대감을 나타냈다고 한다. 당시 사정을 꿰뚫고 있는 한나라당 한 관계자의 전언이다.

    “정 의원은 L 보좌관이 모시고 있는 의원에게 양해를 구해가면서까지 그를 청와대 정무2비서관으로 넣으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그 의원과 L 보좌관을 만나 울분을 토로했다. ‘박영준이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L 보좌관이 내 라인도 아니지 않으냐. 그 자리가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천거했는데 박영준이 자기 사람을 넣기 위해 밀어냈다’고 했다.”

    정 의원의 말대로 L 보좌관은 ‘정두언 직계’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두 사람은 같은 ‘386 세대’로, L 보좌관이 대선 당시 선대위에 파견돼 정권 창출 후 새 정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담은 보고서 작성 등에 간여하면서 서로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박영준 전 비서관 측의 한 인사는 “인사 전횡은 있을 수 없다”면서 펄쩍 뛴다. 그는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같은 요직은 대통령이나 대통령실장이 직접 결정한다. 일개 비서관이 임의로 자신과 친한 사람을 앉힐 수 없다. 더구나 박영준 전 비서관과 김두우 비서관은 적극적으로 자리를 챙겨줘야 하는 관계가 아니었다”고 밝혔다. “박영준은 박철언, 김현철, 박지원, 안희정, 이광재씨를 다 합쳐놓은 것 같은 힘을 가졌다”는 정 의원의 발언에 대해서도 그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이다.

    “박영준 전 비서관이 인사 전횡을 일삼았다는 구체적 사례가 하나도 나온 게 없다. 박철언, 김현철, 박지원, 안희정, 이광재씨는 모두 권력형 비리 의혹에 연루된 바 있다. 그러나 박영준 전 비서관이 이런 비리를 일으키고 있다는 얘기는 없다. 박 전 비서관은 이들과는 달리 ‘마구 휘두를’ 권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박 전 비서관의 위상을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이명박 대통령이 크게 신뢰하는 ‘대통령 심부름꾼’ 정도였다. 말하자면 윗분이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실무형 참모였을 뿐이다. 99%는 윗분이 시키는 대로 하고 1%는 자신이 결정해서 했다.”

    “이명박-정두언 관계는 끝났다”

    정권 창출 이후 짧은 기간이지만 이너서클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벼랑 끝 대치가 있었고, 결국 정 의원이 공론의 장을 통해 치명타를 날림으로써 박 전 비서관이 벼랑에서 떨어졌다.

    그렇다고 정 의원이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의 선제공격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알 수 없지만 당장은 이번 일로 여권 내에 수많은 적이 생겼다. 이 대통령도 자신의 친형과 대통령실장, 믿고 일을 맡기는 핵심 측근을 무차별 공격한 정 의원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 만무하다.

    일부 여권 인사는 “적어도 이 대통령이 임기 말 레임덕에 빠지기 전까지는 정 의원이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당 내에선 “정두언 의원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이 대통령과는 사실상 끝났다”는 얘기도 나온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대통령의 최측근이, 대통령이 가장 어려울 때 내부 사정을 폭로해 대통령을 더욱 궁지로 내몰았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는 정 의원이 왜 ‘거사’를 도모한 것일까. 정말 박 전 비서관이 인사 전횡을 했을까. 박 전 비서관이 물러나기 전까지 청와대의 인사권이 미치는 자리에 인사 요인이 생길 경우 박 전 비서관과 김명식 인사비서관, 김강욱 민정2비서관 등이 참여하는 ‘인사실무회의’에서 기초 선별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2~3배수로 후보를 압축하면 민정수석실의 검증을 거쳐 류 실장과 수석비서관들로 구성된 ‘인사위원회’에서 검토한 뒤 대통령의 최종 낙점을 받는 형식으로 인사가 이뤄졌다.

    1차 대상자를 추리는 과정에서 청와대와 국정원, 행정안전부 인사실(옛 중앙인사위원회) 등이 확보하고 있는 ‘존안자료’를 들춰보지만 당·정·청에 포진한 여권 인사들로부터 추천을 받는 경우도 많다. 인사실무회의가 2~3배수 후보자로 채택할 수 있는 재량권이 넓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인사위원회와 대통령의 재가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어떻게 보면 인사실무회의의 권한은 상당히 제한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절차는 청와대의 체계가 갖춰진 이후의 공식경로다. 대선 승리 직후 인수위를 구성하고 행정부·청와대와 정부 유관단체의 요직을 갖춰나가는 과정에선 창업공신들끼리의 자기 사람 밀어 넣기 경쟁이 극심했던 게 사실이다. 결국 대통령과의 접근성이 높은 측근들의 입김이 더 세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박 전 비서관은 이 대통령을 도운 사람들을 챙겨야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대선을 앞두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외곽조직을 꾸리는 데 앞장섰다. 광주는 41차례나 다녀왔다. 그 성과물이 대선을 두 달가량 앞둔 지난해 10월24일 출범한 ‘2007 선진국민연대’다. 전국 240여 개 단체를 하나로 묶은 것으로, 회원수가 무려 400만이었다.

    선진국민연대를 꾸리기 위해 그는 엄청난 수의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인수위 시절 “선거 때 도와준 사람들의 전화를 못 받을 때가 있는데 그게 가장 미안하다. ‘선거가 끝나니까 사람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정말 가슴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대통령이나 박 전 비서관에게 그들은 모두 ‘빚’이었다. 다만, 능력에 합당한 인사였고 특정계파가 독식한 것이 아니라면 문제가 될 일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정 의원은 이상득계가 주도한 정부·청와대 인사가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강부자(강남 땅 부자)’ ‘S라인(서울시청)’ 위주로 됐고, 이런 인사가 정권 초기 난맥상의 단서를 제공했다고 봤다.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도 얘기를 꺼내지 못했기 때문에 옛날 같으면 사약도 받을 일이지만” 총대를 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홍준표 원내대표는 “인사에서 소외된 사람이 하는 얘기가 무슨 분란거리가 되겠느냐. 분란이 아니라 불만”이라고 일갈했다.

    당·청 갈등의 결정판

    이번 사태는 본질적으로 권력 투쟁, 인사권 투쟁이나 다름없다는 시각이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깊어진 당·청 갈등이 마침내 터져 생존게임 양상으로 번진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나라당 내에선 계파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 의원을 비롯한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청와대 참모진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다. 청와대를 장악한 사람들의 아마추어리즘이 새 정부 출범 100일 시점에 이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20%선마저 붕괴돼 16~17%대(6월초 CBS, YTN 조사)까지 추락하는 요인이 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6·10 항쟁 21주년을 맞아 ‘100만 촛불대행진’이 벌어지던 시점에 한 초선 의원은 “모든 문제는 대통령이 너무 위축돼 있는 데서 출발하며, 그 책임은 청와대 참모들에게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때는 정면돌파를 해야 한다. 대통령이 다시 한 번 대국민성명을 통해 진정으로 사과하고 제2의 조각 수준으로 인적쇄신을 해서 판을 다시 짜야 한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정치를 잘 몰라서 그런 방법을 모른다. 그렇다면 청와대 참모들이 적극적으로 건의해야 되는데, 지금 청와대에 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자 출신이라 그런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위기가 닥쳐도 대처할 방법을 몰라서 허둥대고 결국 또 다른 위기를 불러와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의 지경이 돼버렸다. 이것이 반복되는 위기의 본질이다.”

    청와대의 ‘정치력 부재’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새 정부 출범 초기부터 나왔다. 대통령실장을 포함한 1기 수석비서관급 이상 9명 가운데 무려 7명이 대학교수를 지낸 학자 출신으로 채워졌다. 대학 강단 경험이 없는 인물은 검찰 출신인 이종찬 민정수석과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이동관 대변인뿐이었다.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재완 정무수석이 유일한 정치인(초선 의원)이지만 그도 정치입문 이전까지 오랫동안 대학교수 생활을 했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청와대가 무슨 학술단체냐, 연구소냐” “정치인들이 정권을 창출해놓으니 ‘책상물림’들이 청와대를 장악해버렸다”는 탄식이 나왔다. 그런 탄식은 우려로 변했고, 결국 청와대의 안이한 상황 판단 때문에 민심수습에 실기(失期)했다는 지적이 당내에서 팽배했다.

    5월19일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이 대통령과의 정례회동을 통해 청와대 조직개편을 포함한 대대적인 국정쇄신책을 건의할 예정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막 시작된 시점이었다. 당에선 그 시점이 국정쇄신책을 내놓을 적기라고 판단하고 이 대통령에게 제출할 건의안을 마련했다.

    그렇지만 강 대표는 회동에서 이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다. 강 대표가 쇄신안이 언론에 미리 보도되자 “다 나온 내용을 보고 드리기 민망하다”며 접었다는 얘기가 있다. 당 고위관계자는 “쇄신안의 보안이 뚫려 대통령에게 말씀드리나마나한 상황이 돼버렸기에 강 대표가 따로 건의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자 출신들의 고집

    하지만 다른 말도 나왔다. 청와대 참모들이 “지금 당에서 쇄신책을 건의해봤자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져 있다는 것만 부각시킬 뿐 아무런 실익이 없다. 자체적으로 쇄신안을 마련할 테니 우리에게 맡겨달라”고 강력히 요청한 것을 강 대표가 수용했다는 관측이다. 이런 이유로 쇄신책 건의가 무산된 게 사실이라면 청와대 참모들의 문제의식 결여로 위기에 제때 대처하지 못하고 사태를 악화시킨 것이 된다.

    청와대 참모들의 미숙함에 대해선 또 다른 비판도 있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학자들의 청와대 장악은 내부의 소통 부족이란 심각한 문제점을 낳았다”고 말했다. 그는 “학자 출신들은 특유의 고집이 있다.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것이다. 문제가 발생해도 참모들끼리 머리를 맞대서 종합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가 맡은 분야만 놓고 머리를 싸맨다. 서로 소통이 없으니 청와대 비서실이 일종의 동맥경화증에 걸려버렸다”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은 5월22일 대국민담화를 발표해 쇠고기 수입 파동에 대해 사과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했다. 당시 담화문은 류우익 실장의 지휘로 박재완 정무수석, 김두우 정무2비서관, 이동관 대변인 등이 함께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정권에서도 비서실장 주재로 정무파트와 연설비서관이 소속된 홍보수석실에서 담화문 작성을 주도했다. 다만 담화문에 담길 내용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기 위해 각 수석실의 의견을 적극 청취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소통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 같다고 한나라당 관계자가 전했다. 심지어 한 수석비서관은 이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하기 직전까지 내용은 물론, 발표 사실까지 까마득히 몰랐다가 언론에 보도되고 나서야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한나라당이 청와대를 향해 ‘정치 아마추어론’을 제기했지만 청와대 사람들은 전혀 수긍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한나라당이 정공법을 쓰지 않고 정치적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니 문제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특히 이 대통령도 이와 비슷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태연한 이상득, 속으로 격노”

    한나라당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국정을 이끌어가는 당·정·청 3축 가운데 한나라당은 그다지 중요하게 보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권을 창출한 원동력도 한나라당보다는 서울시청팀과 안국포럼 같은 이 대통령의 오랜 참모들과 대선후보 경선 및 본선과정에서 영입한 학자와 관료, 언론계 출신 참모들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직인수위를 구성할 때도 과거에 비해 정치인들을 중용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정권 초기에 나타난 이처럼 유례없는 당·청 갈등은 마침내 권력투쟁을 폭발시켰다. 정 의원이 제기한 ‘권력 사유화론’은 결국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득계 핵심 4인을 겨냥한 정 의원의 폭탄 발언은 권력투쟁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당·청 갈등의 불길이 당 안으로 옮겨붙었다. 특히 이상득계에선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 의원은 정 의원 발언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누구든지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다. 그분 입장에서 보면 일리가 있을 수 있다”고 짐짓 의연하게 대처했다. 지난 총선 과정에서 이재오 의원이 자신의 공천 반납을 요구하는 ‘55인 선상 반란’을 일으킨 데 이어 이번에 ‘공신의 난’까지 당했지만 맞대응하지 않고 자제했다. 대통령의 친형으로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의원이 정 의원 발언을 접하고 격노했다고 한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정 의원이 겨냥한 타깃이 박 전 비서관뿐만 아니라 이 의원 자신, 나아가 대통령이란 것을 왜 모르겠느냐. 이 의원이 단단히 화가 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박 전 비서관이 장·차관 인사를 다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 의원 대신 화살을 맞은 꼴이다. 10년 넘게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 바친 사람이 3개월 만에 엄청난 상처를 입고 낙마하니 안타깝다”고도 했다.

    박 전 비서관은 지난 4·9 총선 때 대구 중-남구에 출마하기 위해 공천을 신청했다. 당시 그는 “이제 내 정치를 해보고 싶다”고 총선 출마의 변을 밝혔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그를 불러 “곁에서 일해달라”며 2시간을 설득했고, 결국 뜻을 접었다. 박 전 비서관과 가까운 한나라당 한 의원은 “만일 그때 대통령의 요청을 뿌리쳤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술자리 안주거리 돼버렸다”

    정 의원에 대한 비판은 주로 당내 중진들과 영남 출신 의원들 사이에서 나왔다. 이들은 정 의원의 ‘권력 사유화’ 비판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시민들이 켜든 ‘촛불’에 정권이 포위돼 있는 시점에, 그것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정제되지 않은 온갖 표현을 사용하는 바람에 술자리의 안주거리가 돼버리도록 만든 방식을 문제 삼는다. 정 의원은 “어느 공직자는 밥 먹자고 하도 졸라서 나가보니 ‘오빠 나 이번에 안 시켜주면 울어버릴 거야~잉. 알았지~잉’ 이래요”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 표현이 일간지 만평으로 인용되는 등 세간의 화제가 됐다.

    당 지도부 경선에 나선 공성진 서울시당위원장은 “발언 시기나 내용이 권력투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나무랐다.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목사조차 “국민을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었다. (청와대와의) 대화 통로가 없다면 모를까, 정 의원쯤 되면 대통령에게 직접 말할 수도 있지 않느냐. 공개적으로 발언함으로써 (정권이) 불안한 모습만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정 의원이 ‘권력 사유화’ 발언을 할 자격이 있느냐는 지적도 있다. 박 전 비서관이 주장한 ‘청와대 50명 추천, 30명 채택’이 사실이라면 정 의원도 마찬가지로 권력의 많은 부분을 사유화한 것 아니냐는 반박이다. 정 의원, 박 전 비서관과 같은 안국포럼 출신인 조해진 의원은 “과연 지적된 몇몇에게만 문제가 있고 정 의원을 포함한 ‘친이’계 전반의 잘못은 없느냐”고 반문했다. 역시 ‘친이’계인 차명진 의원도 “사실관계도 명확하지 않은 측근의 인사전횡을 근거로 측근끼리 싸워 이명박 정부를 망쳐서는 안 된다”고 비판적인 의견을 내놨다.

    반면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소장그룹에서는 정 의원을 옹호하면서 전선을 형성했다. 원희룡 의원은 “권력의 한 축을 형성해온 정 의원이 권력 내부를 비판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전제하면서도 “그의 충정을 헤아려 당장 인사전횡 등 지적한 문제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정병국 의원은 “난국을 풀기 위해 여권에 누적된 문제를 지적한 용기를 높이 사야 한다”고 정 의원 편을 들었다.

    결국 정 의원이 감행한 ‘공신 반란’으로 여권의 권력지도는 상당 부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당분간은 ‘MB 직할체제’로 갈 가능성이 높다. 당-청 간, 중진그룹-소장그룹 간 갈등이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던 6월9일, 이 대통령이 이상득 의원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등 포항 출신 원로들을 청와대 옆 안가로 불러 정국해법과 관련한 조언을 들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정치권 관계자는 “3인의 안가 회동에서 박 전 비서관의 퇴진이 결정됐고, 이 대통령이 그날 사표를 받았다. 이는 분란을 조기에 잠재우고 대대적인 인적쇄신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만, 한편으론 이번 일을 계기로 친정체제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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