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중산층의 배타적 공간, 아파트

  • 이승협│노동행정연수원 교수 solnamu@gmail.com│

    입력2009-04-01 1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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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층의 배타적 공간, 아파트

    ‘아파트에 미치다’전상인 지음/ 이숲/ 199쪽/ 1만2000원

    인간의 삶에서 주거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주거란 단순히 잠을 자는 공간이 아니라 집단적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사적 공간이다. 1990년대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자가용을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니라 사적 공간의 확장으로 보는 것도 동일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주거의 문화적 양식이 한국사회에서는 언젠가부터 아파트라고 하는 기괴한 괴물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전체 주택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은 52.7%에 달한다. 특히 대도시의 경우 아파트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도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아파트가 한국의 대표적인 주거양식이 된 것일까? 전상인 교수가 쓴 ‘아파트에 미치다’는 바로 이러한 의문에 흥미로운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굳이‘현대한국의 주거사회학’이란 부제를 붙인 것도 아파트가 갖는 사회문화적 의미를 다양한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제시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책은 아파트에 관한 사회학이자 문화인류학이다. 일반 독자가 자신의 일상에 널브러져 무심히 지나치던 중요한 사회적 현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도록 알기 쉽게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학술적 개념으로 도배해 일반 독자와의 거리두기를 즐겨 하는 대부분의 사회과학자와는 달리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중과 호흡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사회과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국가, 이데올로기, 권력, 민족, 통일, 운동 등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의 사회과학에서 벗어나 일상과 주변세계의 소소한 현상을 대중이 알기 쉽게 풀어줌으로써 사회과학을 대중화하는 대담한 시도를 한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세계의 비참’이라는 책에서 개인의 구체적 삶과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이라는 추상성을 르포 형식을 통해 시각적 및 정서적으로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아파트에 미치다’는 건축양식으로서의 아파트가 아니라 주거양식으로서의 아파트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아파트문화의 계보학을 정립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아파트란 한국사회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일종의 내시경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란 광복 이후 한국사회의 성장과 근대화를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신분의 상징

    한수영은 자신의 소설 ‘공허의 1/4’에서 아파트를 “잔뜩 발기한 것처럼 여기저기 솟아 있는 난수표”라고 묘사했다. 이 말은 한국의 아파트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정서를 그대로 드러낸다. 아파트란 개인과 가족을 규격화된 공간 속에 획일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개인의 삶을 균질화된 사회적 삶으로 전환시키는 규칙성을 갖지만, 아파트 자체는 주변 환경과 결코 어우러지지 않는 어지러움으로 존재한다. 일정한 규모의 공간만 존재하면 불쑥불쑥 하늘을 헤치고 뻗어 오르는 탈선적 괴물과 같은 존재다. 저자의 표현대로 산은 아파트에 자리를 내주고, 논두렁 아파트와 밭두렁 아파트가 허허벌판에 들어서 있다.

    그럼에도 아파트는 동시에 한국인의 꿈과 로망이다. 아파트에 산다는 말은 곧 중산층의 최소 요건을 갖추었다는 말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중산층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금전적으로 부를 축적한다는 경제적 의미에 사회적 양식, 즉 사회자본의 소유라는 사회적 의미가 더해져야 한다. 아파트는 이러한 사회자본의 소유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한국사회가 지난 60년 동안 추구해온 발전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단순한 경제성장과 등치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경제성장은 서구적 생활양식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한국인에게 근대성은 서구적, 더 정확하게는 미국식 생활양식으로 받아들여졌고, 발전은 미국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유사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사람들은 안방에 놓인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미국 드라마를 보고 발전한 미국을 뉴욕 맨해튼의 고층 빌딩과 고급 펜션아파트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즉 발전이란 도시인이 되고 고층빌딩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인지된 것이다.

    물론 저자가 지적하듯이 서구에서 고층 다세대 주거양식은 대도시 최고급 펜션아파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도시빈민이나 서민층을 위한 집단거주시설에 지나지 않는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 서민을 위한 집단거주시설이 한국사회에서는 중산층의 상징적 생활양식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파트에 산다는 서구적 근대성을 일상에서 공유하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이 된 것이다. ‘맥도날드에 간다’가 미국에서는 바쁜 샐러리맨이 쉽게 점심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햄버거를 먹는다는 의미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미국 샐러리맨의 생활양식을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사회적 신분이 되었음을 과시하는 전혀 다른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저자가 언급한 “우리가 시골에 산다고 아파트에서 살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느냐”는 시골사람들의 항변에는 바로 이러한 아파트의 사회문화적 기호가 숨어 있다는 의미다.

    결국 아파트는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신분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저자가 말하는 신분의 차별이란 바로 아파트의 소유 여부가 사회적 계층을 구분하는 사회적 배제와 포섭의 기제를 말한다. 아파트 거주자와 주택 거주자의 차이는 바로 서구적 근대의 생활양식을 일상화한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의 차이이며, 이는 곧 발전과 저발전의 차이다.

    초기 저층 아파트가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했던 이유도 그 자체가 충분하게 서구적 생활양식을 대변하지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들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아파트는 한국사회의 중요한 계층적 코드가 된다. 아파트 거주자는 자동차를 갖고 있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들어간다. 여기에 아파트를 관리해주는 관리인과 경비가 항상 대기하고 있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가사도우미가 집안일을 해주러 온다.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지만 비슷한 교육수준과 수입, 소비행태를 지닌 이웃들과 친밀하지 않은 이해공동체를 형성해 계층적 단결력을 과시하고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의 계층적 귀속성을 확인한다.

    프티부르주아의 자기만족

    저자가 말하는 아파트의 개폐식 삶과 사회공동체는 이러한 중산층이라는 사회계층적 이데올로기와 프티부르주아적인 가족중심주의가 혼합되어 있다. 부녀회로 대표되는 아파트 단지의 집단주의는 중산층의 여타 계층에 대한 사회적 배제이며, 치맛바람으로 대표되는 가족중심주의는 아파트 내부의 개인주의와 경쟁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파트는 이 시대 한국인의 계층적 로망이며 서구적 근대성을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중산층의 배타적 공간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아파트를 반사회적이고 반공동체적이며 반인간적인 시멘트 건축물이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항상 가슴 한켠에서는 앞마당이 있고, 사랑방이 있으며, 뒤에는 장독대가, 옆에는 텃밭이 있는 한적한 시골 전원주택을 꿈꾸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역설의 주거공간이 바로 아파트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파트의 한국적 토착화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설 수 없는 도시 프티부르주아의 자기만족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저자가 언급한 한국 아파트의 온돌문화, 베란다 문화, 거실문화, 방과 부엌의 구조 등이 설득력 있는 이유는 이러한 아파트의 한국적 토착화가 불편한 과시적 서구적 생활양식과 익숙한 전통적 생활양식을 공존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파트의 내부는 남이 쉽게 들여다볼 수 없는 완벽한 사적 공간이다. 어차피 내가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이 대외적으로 과시될 수 있는 한, 보이지 않는 실내 주거공간이 어떤 형태를 갖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은 한국 아파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사회문화적 분석서다. 근대 이후 한국의 사회 발전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아파트라는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현상을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그러나 결코 결론이라고 할 수는 없는 ‘10장 아파트와 미래한국’을 제외하면, 별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1장에서 9장까지 개인적 주장을 가능한 한 배제한 채 독자에게 아파트라는 현상을 차분하고 시각적으로 흥미롭게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10장은 좀 생뚱맞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며, 오히려 전체적으로 이 책이 주는 흥미로운 분위기를 깨뜨리고 있다. 현재의 주택분배 체제가 좌파 진보주의 이데올로기의 온상이 될 수 있다거나 좌파 포퓰리즘의 득세를 막기 위해 주택정책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 책이 쭉 전개해온 아파트를 매개로 형성된 중산층의 소시민주의, 집단적 배타주의, 가족중심주의와 모순적인 관계에 있다.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또는 살고 싶어하는 세대들의 의식 속에 좌파가 얘기하는 사회적 연대와 진보가 들어설 자리는 별로 없다.

    고층 아파트로 대변되는 허구적 중산층의식이 사회자본 기능을 하고, 아파트 사회자본을 지키기 위해 거주민이 전투적 이익집단이 되는 사회에서 좌파 진보주의 이데올로기는 아파트 담장 밖의 이야기며, 좌파 포퓰리즘은 아파트 담을 넘을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는 서구 생활양식을 발전으로 받아들이는 가치지향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이 시대의 계층적 로망으로 존속할 것이다. 전상인 교수의 ‘아파트에 미치다’는 제목만큼 파격적이고 재미있는 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흥미로운 시도이며, 사회과학의 대중화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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