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

  • 조성일│출판평론가 pundit59@hanmail.net│

    입력2009-04-01 1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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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박노자 허동현 지음/ 푸른역사/ 360쪽/ 1만5000원

    허동현과 박노자. 이 두 역사학자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눈 밝은 인문독자 중에 상당수가 이미 그들의 마니아 독자가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 두 학자의 신상에 관한 것부터 몇 자 적어두려는 것은 원고 매수를 채우려는 나의 사적인 속셈도 속셈이려니와 그래도 낯설어할 독자에게 알려야 하는 이 리뷰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인 허동현은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이른바 신사유람단)이 근대 일본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 연구해왔다. 그리고 고난과 굴곡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그는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인 운석(雲石) 장면(張勉)이 보여준 리더십에 심취해 주변에서는 ‘장면주의자’로 불린다.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교에서 동아시아학 및 학국학을 가르치는 박노자 교수는 러시아 출신 귀화인으로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국가와 민족에 짓밟힌 개인들이 겪은 아픔의 역사에 관심의 초점을 맞춰 근대국가 최고의 물신인 민족을 상대화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소개에 대해 스테레오타입하다고 힐난할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단 한 줄로 두 학자를 소개해보겠다. 허동현은 ‘건강한 보수주의자’요, 박노자는 ‘개인주의적 진보주의자’다. 이렇게 두 학자의 학문적 노선을 대비해놓는 것은, 물론 나름대로 계산이 있어서다. 지금 여기서 리뷰하는 책이 바로 두 학자가 반대 시각에서 벌인 논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학자 간에 논쟁이 시작된 것은 경희대에서 함께 근무하다 2000년 박노자 교수가 노르웨이로 간 후 e메일을 주고받으면서다. 이들의 사적(?) 메일 교류는 하루에도 두세 통씩 이어질 만큼 빈번했고, 단순한 안부 차원을 뛰어넘어 한국사 전반에 관한 내용을 다루면서 이들의 e메일 소통은 소문이 났고, 나중에 그 결과물을 묶어 책으로 내게 됐다.



    이들이 벌인 논쟁의 출발점은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처한 상황과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근대라는 화두를 놓고 두 사람은 창과 방패가 되어 치열한 논쟁을 벌였지만 그 흔한 인신공격이나 우격다짐 따윈 찾아볼 수 없고, 동전의 양면처럼 엇갈린 시각 차이는 어느덧 인류의 보편적 이상이라는 지점으로 수렴되었다.

    한국 근대 100년의 두얼굴

    이번에 나온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 역시 ‘우리역사 최전선’(2003)과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2005) 등 두 전작과 그 궤를 같이하며 한국 근대 100년의 격랑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번 책에서 이들 두 학자가 주목하는 것은 ‘지식인과 친일’을 비롯해 여성, 대중문화, 종교 등의 분야로, 박노자 교수가 먼저 한국 근대 100년은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비롯된 ‘길들이기’라고 공세를 취한다. 이에 대해 허동현 교수는 한국 근대 100년의 자화상은 ‘편가르기’였다고 박노자의 날카로운 비판을 맞받아친다.

    그럼 두 교수의 본격적인 논쟁 속으로 들어가보자. 먼저 지식인과 친일 문제다. 이 논쟁에서는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 이광수를 통해 살펴본다.

    박노자에게 이광수는 두 얼굴의 지식인이다. 이광수는 개인의 애정 문제 탐구에 몰두하기도 하고 부처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을 애써 본받으려 한 구도자의 모습을 보이는 한편 힘과 살인과 ‘황인종의 단결’을 예찬하는 친일 파시즘의 국가주의자였다는 것. 그래서 이광수는 톨스토이의 화두인 평화와 비폭력을 옹호하지만 “힘 있는 자만이 자유와 개성을 논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신조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모순적인 이념과 사상의 혼재 그 자체다.

    박노자는 이러한 이광수의 두 얼굴은 민족을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근본단체’로 보는 데서 연유한다고 말한다. 근대를 배우면서 개인적인 부분을 해체했기 때문에, 즉 국가의 신화를 해체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파시스트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허동현 교수에게 이광수는 ‘민족’이라는 실에 자신이 삶의 궤적에서 만난 다양한 사조라는 구슬들을 꿴 일관된 ‘민족주의자’다. 이광수가 일관되게 추구한 가치는 국가주의 내지 민족주의였으며, 기독교나 불교를 비롯한 여러 사상은 민족과 국가에 유익한지 않은지에 따라 취사선택됐던 종속적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그가 ‘민족개조론’에서 민족을 최우선에 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음 주제는 한국 근대 100년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여성’ 문제다. 신분의 예속에 얽매여 현모양처로 살아가기를 강제당했던 여성들의 질곡은 봉건사회가 해체되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여전하다.

    박노자는 이 같은 여성의 예속을 성매매 여성과 신여성을 통해 고발한다. ‘~공화국’ 식의 이름 짓기는 ‘매매춘’ 앞에도 붙일 수 있다며 박노자는 2004년 성노예방지법 제정으로 우리 사회의 마지막 ‘현대형 노비’들이 사라진 듯 보이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성화를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여성 예속은 성리학과 메이지 일본과 기독교가 모든 여성을 ‘정숙한 숙녀’와 ‘음탕한 요부’라는 두 범주로 나누고 심판하는 남성중심주의적·중산층 위주의 이분법을 강요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근대 여성의 표상으로 칭송받는 신여성조차 이 같은 강고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허동현은 성매매 여성은 단순한 ‘성노예’나 자본주의 체제와 남성 중심 사회의 구조적 산물이 아니라고 본다. 오늘 우리 사회의 성매매 여성은 성 산업에 종사하는 성노동자이자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길 꿈꾸는 데서 알 수 있듯 한 세기 전 이 땅의 성매매 여성들도 민족과 국가의 동등한 일원이길 꿈꾸었다는 것이다. 남성 중심 사회의 희생물로 보는 시각은 여권의 신화화를 통해 여권운동가 자신을 계몽의 주체로, 성매매 여성을 계몽의 대상으로 나누는 잘못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열린 관점을 가진 두 학자

    요즘 ‘한류’로 통하는 대중문화 문제는 어떠할까? 박노자는 서구, 특히 노르웨이를 위시한 유럽의 한국 영화와 태권도 열풍에 슬며시 딴죽을 건다. 그들이 소비하는 것은 ‘한국’이 아니라는 것. 한국영화나 태권도가 식탁에 오를 때 메뉴판에 적혀 있는 것은 ‘한국 문화’가 아니라 ‘아시아 문화’라는 것. 그래서 비판적 사회의식으로 무장한 진정한 작가들의 민중 서사시보다 자본들이 노련한 솜씨로 다듬어 만든 포장 좋은 폭력물과 신비물이 외국에 훨씬 더 많이 진출해 ‘코리아’ 이미지 형성에 좀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이 아쉽다는 것이다.

    허동현은 영화는 ‘자본주의적 악몽에서 세상을 깨우는’ 도구여야 한다는 박노자의 생각과 달리 욕망을 파는 문화상품이기에 다양한 영화가 우리 문화를 풍성하게 살찌운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영화인들이 치열한 역사의식과 작가정신, 그리고 비판정신과 사명감이 있기 때문에 한국 영화가 자본주의적 상품화에 따른 타락의 유혹과 할리우드 영화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민화나 헤게모니 장악의 도구’로 이용될 소지를 적게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번에는 종교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자. 박노자는 기독교와 무속신앙, 그리고 불교에 눈을 돌려 한국 종교의 명과 암을 살피는데 특히 무속신앙에 비중에 둔다. 개화기에 조선을 찾아온 외국인들은 무속신앙을 한국 민중의 ‘가장 보편적인 종교’로 인식하면서 이것을 조선인의 ‘열등성’과 ‘의타성’으로 보았다. 하지만 무속신앙은 공동체의 안정과 합심, 갈등의 완화와 개인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완화제 역할도 수행했다는 것. 그럼에도 한국 근대는, 특히 기독교는 무속을 배척했다. 미신 타파의 광기 속에 무속은 긍정적 기능을 거세당한 채 배척과 억압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종교 중 하나인 불교는 어떤가? 박노자에게 한국 불교의 역사는 ‘부끄러움의 역사’다. 권력에 아부하고 사리사욕에 치우쳐 불교가 진정 나아가야 할 길인 ‘무소유’의 실천에서 눈을 돌렸다고 비판했다.

    허동현은 이 같은 박노자의 주장에 대해 무속과 기독교, 불교의 명과 암을 함께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속 역시 종교적 ‘마취제 장사’에 목매는 등 나눔과 더불어 삶이라는 종교의 정신을 망각한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가 한국의 근대국가 수립 과정에서 수행한 역할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불교가 단순히 일제의 권력에 빌붙어 비자주적 종속 발전만을 꿈꾸지 않았다는 것은 자주적 독립국가 수립에 온몸을 바쳤던 한용운이 잘 보여준다고 했다.

    이렇듯 두 사람이 바라보는 한국 근대 100년은 서로 공감하는 부분보다는 달리 생각하는 부분이 더 많아 보인다. 그래서 합일점을 만들어가기가 쉬워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다른 시각을 인정하고 그 견해를 반영하는 열린 자세다.

    절대적 진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열린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두 학자의 논쟁은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자 ‘내일의 어딘가’를 위한 진심 어린 조언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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