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노인요양원에서 바라본 노인 정책

아름다운 노년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

  • 이정옥│시인 beata65@hanmail.net│

    입력2009-04-02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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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톨릭계 수도회가 운영하는 실비노인요양시설에 입소한 지 10년. 65세에서 99세 사이 노인 69명이 살고 있는 이곳에서 나날이 벌어지는 진풍경!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상처들은 앞으로 노인이 될 이들에게 약이 되리라.
    노인요양원에서 바라본 노인 정책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사제관 서쪽 벽에 바짝 붙어 2층 높이로 자란 몇 그루 자작나무 여린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척박한 땅에서 10년을 버틴 하얀 줄기들이 앙상하게 뼈만 남은 어느 노년의 창백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같은 사물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슬프게 보이기도 하고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지금 내가 음악을 연주한다면 분명 구슬픈 피리소리가 될 것이다. 그래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프레드리히 횔덜린이 탄식했다. ‘만상은 늙어가면서 또한 젊어진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들은 자연의 이 아름다운 순환 법칙에서 예외가 되었을까?’이곳 생활 10년 동안 나도 여러 차례 이 질문을 반복했다.

    지금의 장년이 노인이 되었을 때는 이곳 풍경과는 다르리라. 교양 있고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인생의 말년을 보내게 되리라. 하지만 품위 있고 아름다운 노년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곳 노인들의 외롭고 쓸쓸한 노후를 바라보며 오늘의 장년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내일, 스산한 바람 부는 갈대밭에 서서 허송세월을 후회하는 노년이 되지는 말라고.

    오래된 바이올린 소리가 더 아름답다는데 청산의 한 마리 학처럼 아름답게 늙을 수는 없을까?

    리디아 할머니와 율리따 할머니는 검푸른 잣나무 숲인 이곳에서 꽃을 활짝 피운 오동나무였다. 그토록 정감 어린 자매를 본 적이 없다.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율리따 할머니가 말했다.



    “이곳에서 리디아를 만난 건 행운이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너무 황량해서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잡고 있는 손목을 놓아라

    그런데 어느 날 율리따 할머니가 다른 식탁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두 사람이 따로 놀기 시작한다. 보고 있는 내가 더 안타깝다. 그들의 우정은 한 자락 바람이 불면 꺼지고 말 불꽃이었다. 쉬 달아오른 냄비가 쉬 식는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외로움을 주체할 수 없어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나는 너에게 갇히고, 너는 나에게 갇힌다. 노년의 삶이 평화로운 열정이기를 바란다면 자기 놀이터를 가져야 한다. 그 놀이터에서 혼자 놀 줄도 알아야 한다.

    80을 눈앞에 둔 세꾼다 할머니가 입소했다. 여름에도 머리에 스카프를 휘날리며 산책을 나선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멋쟁이에게 현재는 없고 과거만 있다니!

    “시집갈 때 신랑 집에서 보내온 사주단자예요. 우리 집은 천석이었는데 신랑 집은 만석이었지요.”

    저녁식사 후 2층 로비에서 한담 중이던 할머니 가운데 부러운 눈빛을 보내는 이가 없다. 70,80대 할머니들 앞에서 사주단자를 흔들며 세꾼다 할머니가 얻으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곱 평(23㎡) 크기 한 칸 방으로 올 때 서랍장, 반닫이 다 버려야 했을 텐데, 그때 사주단자를 버릴 수 없었던 세꾼다 할머니는 울었을까, 웃었을까?

    아침저녁 식사 후 1층 로비는 할아버지들의 쉼터다. 그곳에서 왕따를 당한 고드릭 할아버지는 앉으나 서나 자식자랑하다 그렇게 되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 했다. 말수 적은 레오 할아버지가 드디어 한마디!

    “돈 잘 벌고 효자라면 좋은 집에 일하는 사람 두고 부모 모셔야지….”

    오죽하면 어느 모로도 쓸모가 없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자식자랑 팔불출’이란 말이 생겼을까? 노년의 행복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꽃밭에 꽃씨를 뿌리는 일, 손자에게 편지를 쓰는 일, 반짇고리를 정리하는 그런 소박한 일들이다. 작은 일들에 숨어 있는 즐거움의 조각을 찾아내 즐기는 것이다.

    유스따 할머니는 애지중지 키운 외아들을 장가보낸 뒤 아들이 좋아하는 밑반찬을 날랐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식탁 위에 쪽지 한 장이 있었다.

    “밤늦게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어. 자세한 이야긴 돌아와서 할게. 식탁에 아침 차려두었어.”

    식탁의 아침상은 뚜껑이 덮인 프라이팬 하나였다. 식어서 기름이 엉겨 있다.

    “개밥 같은 이걸 네가 아침이라고 먹느냐?”

    얼굴이 잿빛이 된 엄마에게 아들이 한 대답이다.

    “내가 괜찮다는데 왜 그러세요.”

    순간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뛰쳐나왔는데 집에 도착할 때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돌아올 수 없는 강 저편에 서 있는 아들을 본 것이다. 그 사건이 할머니 인생에 홀로서기의 계기였다고 한다.

    하반신을 쓸 수 없어 휠체어에 앉은 렐리아 할머니.

    “난, 갈 거야. 내가 왜 이곳에 있어. 아들이 다섯인데….”

    성화를 견디다 못한 수녀님이 모셔가야겠다고 전했다. 며느리 다섯! 하지만 할머니를 감당하겠노라 나서는 며느리가 없다. 행복한 사람은 버려야 할 신분을 스스로 버리는 사람이라 한다. 아들 다섯! 할머니는 그 자랑스러웠던 신분을 진작에 버렸어야 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지막 방법은 잡고 있는 손목을 놓는 것이라는데.

    노인요양원에서 바라본 노인 정책

    영상을 보고 있는 노인들.

    조급증 환자의 좌충우돌

    식탁마다 사각휴지통이 하나씩 올라 있다. 통이 비면 식구들이 돌아가며 가져온다. 우리 식탁 휴지통이 비었다. 아딸리아 할머니의 날선 목소리다.

    “율리에따 할머니 차례라고 알려드렸는데 빈손으로 오셨네요.”

    “아이고, 또 잊어버렸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니까. 내일 아침엔 잊지 말아야지.”

    저녁식사 후 산책을 나서는데 복도가 떠들썩하다.

    “니가 뭔데, 식탁에서 말했으면 됐지 노크도 없이 남의 방문을 밀고 쳐들어와! ”

    아딸리아 할머니의 뒤통수에 대고 율리에따 할머니가 퍼붓는다. 율리에따 할머니의 오장육부가 뒤집힐 정도로 훈계했겠지. 아딸리아 할머니의 행동을 심리 상태로 표현하면 어떤 경우일까? 내 눈에는 자신과 남을 동시에 피곤하게 하는 조급증 환자로 보이는데….

    아흔일곱의 바실라 할머니는 식사도 잘하고 건강하다. 그 식탁에서 할머니의 시달림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정신 좀 차려! ”

    고개를 꺾고 식탁에 앉은 안토니아 할머니에게 호령이다. 며칠 전부터 기력이 떨어지더니 오늘은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다. 재차 불호령이 떨어진다.

    “고개 들고 밥 먹으라니까! ”

    식사 때마다 옆 식탁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나도 자유롭고 남도 자유롭게 하려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노년다운 품격

    ‘현대사회와 노년기의 삶’이란 제목의 특강이 시작되었다. 강사는, 60대 중반의 행정학 박사. 강의 중간에 본인의 삶이 예화로 등장한다. 여기는 각종 노인병 환자들이 살고 있는 요양시설이다. 몇 걸음 물러서서 제대로 이곳을 바라보았다면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제 박사논문의 주제가 ‘성적 욕구와 노년기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부족한 것에 관심이 있다는데 저도 그래서 이 문제를 주제로 삼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아 독신처럼 지낸 지 오래입니다. 주변에 보면 요령껏 해결하는 사람도 있는데….”

    혼자 일어서지도 못하는 분들 앞에서 ‘성적 욕구’‘요령껏 해결’이라니! 할아버지 열네 분 중 열 분이 보행이 어려운 환자인 이곳에서 이성교제가 행복의 특효약이라 강조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문화다.

    지난 9년간 조용하고 품위 있었던 이곳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포옹도 하며 육체적인 접촉을 가져야 행복하다고 부추긴 강사의 열강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고르넬리오 할아버지가 구둣발로 도미니카 할머니 방으로 쳐들어갔다. 고르넬리오 할아버지의 치밀한 계획은 미수에 그쳤지만 분함을 참을 수 없어 이틀 밤을 새운 할머니가 원장수녀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런 인간과는 죽어도 한집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고르넬리오 할아버지 부부를 퇴소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라르고 할아버지는 부부실에 혼자 입소한 분이다. 원장 수녀님이 제안했다.

    “여생을 친구처럼 지낼 동반자 한 분을 소개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그때 할아버지의 대답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고 한다.

    “남은 시간은 책 몇 권 머리맡에 두고 지내는 고요이고 싶습니다. 이 집을 둘러싼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지요.”

    현대의 성문화가 노년을 유혹한다. 그 유혹 속에서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혀 평화로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70대 중반의 고르넬리오 할아버지처럼 살 것인가, 라르고 할아버지처럼 품위 있게 노년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존엄한 죽음을 생각할 때다. 노인에게는 여생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죽음에 대한 문제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노년의 죽음이 의료장비에 의해 중환자실에 유폐당할 때의 문제는 생명의 존엄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고 잔인한 배려일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이 ‘생명존엄’이라는 이름으로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다.

    2008년 6월10일, 드디어 ‘식물인간 연명치료’가 서울서부지법 305호 법정에 서기에 이르렀다. 존엄한 죽음을 위해 75세 환자의 가족들이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구하며 병원을 상대로 낸 가처분신청에 대한 첫 재판이 열린 것이다. ‘존엄사’에 대한 법적 장치를 고려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문’의 필요성을 모든 이에게 전하고 싶었다. 죽음이란 무엇이며 죽음의 끝은 어디인가? 답을 찾아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죽음은 누구의 것인가? 유혹을 물리치며 지켜온 양심, 풍랑과 싸우며 지켜온 자존심,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랑, 마지막 순간까지 불태운 삶에 대한 열정…. 이 모든 이야기가 육신의 죽음으로 끝이라면 너무 허망하다. 전생이 없고 현세만 있다면 나는 어디서 왔는가? 현세만 있고 내세가 없다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인생은 영원이 되기 위한 이어달리기, 릴레이경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로부터 인생이라는 바통을 받아 달려온 것이라면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겨야 할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이 현세에서 나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시간, 다음 선수에게 바통을 넘겨야 할 시간, 죽음의 시간이다.

    40대 중반인 아나톨리아 수녀는 이틀에 한 번 혈액투석 치료를 받아야 하는 만성신부전증 환자다. 투석을 시작한 지 석 달, 아나톨리아 수녀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수술이나 의지로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면 이건 분명 하느님께서 저를 부르시는 소립니다. 하느님 집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세상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수녀님의 소식을 듣는 순간 금세기 최고의 지성이며 환경운동가로 불린 스코트 니어링의 죽음이 떠올랐다. 1980년 초 100세를 맞은 스코트 니어링이 더 이상 자기책임을 다할 수 없다며 음식을 끊고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모습은 장렬했다. 의식이 뚜렷하고, 판단력이 살아 있다 해도 스코트 니어링 같은 방법을 택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내면에 깊이 다져온 죽음에 대한 철학이 없이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율리아나 할머니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외딸이 이곳 요양실로 모셨다. 입소 얼마 후인 2004년 4월,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간 할머니가 ‘위루술’과 ‘방광루’ 설치까지 받고 왔다. 수술 후 할머니의 모습은 오하이오 대학 윌리엄 빈 교수의 표현 그대로다.

    “모든 희망이 다 사라져버렸을 때, 꺼져가는 생명을 희미한 그림자로나마 지켜주는 것은 오직 과학적인 의료장비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완전한 죽음을 잠시 연기해줄 뿐 오히려 고귀한 생명을 우습게 만드는 불필요한 의지다.”

    의료장비에 의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이 우습게 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의식이 있었다면 율리아나 할머니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2년2개월을 버틴 할머니에게 죽음의 징후가 나타났다. 의료담당 수녀님이 병원으로 모시겠다고 알리자 딸이 완강하게 반대했다.

    수녀님과 딸의 신경전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가 눈을 감았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의 죽음은 누구의 것이었나? 수녀님의 것이었다면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접수한 의료장비가 얼마나 더 할머니의 죽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을까?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문.

    연명장치가 남용되는 이런 시대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두어야 한다. ‘죽음이 살아 있음보다 나은 상황’이 언제 나에게 찾아올지 알 수 없다. 아래 첨부한 것은 내가 서명해 보관 중인 사전지시서 서식이다.

    임종방 ·유언장 확인 · 촉탁의

    대한의사협회가 2001년에 이어 2002년,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대한 치료 중단을 담은 ‘의사윤리지침’제정을 발표하자 종교계가 심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제가 병에 걸려 치료가 불가능하고 죽음이 임박할 경우를 대비하여 저의 가족, 친척 그리고 저의 치료를 맡고 있는 분들께 다음 같은 저의 희망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선언서는 저의 정신이 아직 온전한 상태에 있을 때 적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저의 정신이 온전할 때에는 이 선언서를 파기할 수도 있겠지만, 철회하겠다는 문서를 재차 작성하지 않는 한 유효합니다.
    ※ 저의 병이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고 곧 죽음이 임박하리라는 진단을 받은 경우, 어떤 병원균에 감염되어도 항생제 사용·인공급식 · 심폐소생술 등 죽는 시간을 미루기 위한 연명조치는 일절 거부합니다.
    ※ 다만 그런 경우 저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는 최대한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로 인해, 예를 들어 마약 등의 부작용으로 죽음을 일찍 맞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 제가 갑자기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을 때,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의료진의 판단이 내려지면 이른바 생명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연명조치를 중단해주시기 바랍니다.
    위와 같은 저의 선언서를 통해 제가 바라는 사항을 충실하게 실행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요청에 따라 진행된 모든 행위의 책임은 저 자신에게 있음을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밝혀두는 바입니다.
    년 월 일
    서명


    90세든 100세든 넘어져 대퇴골에 금이 갔다면, 맹장이나 폐렴이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 치료해야 한다. 하지만 촛불이 잦아들 듯 생을 마감하려는 노인에게 연명장치를 매달아 존엄한 죽음의 권리를 빼앗는 것은 창조질서에 대한 무의미한 저항이다.

    현재 우리나라 양로원이나 요양시설 대부분이 임종의 징후가 나타나면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달려간다. 임종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비위관 시술, 위루술, 방광루 설치, 기관절개술 등의 시술 후 의료장비에 갇힌 삶을 살게 한다. 노인들의 마지막이 품위 있는 죽음이기 위해서는 노인복지시설에 반드시 임종방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노인복지법에서 요양시설에 요구하는 ‘응급상황 발생시 대응표’를 보면 고령자들의 죽음을 ‘병원의 벽 안에 가두는 일’을 강조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양로원이나 요양시설에는 촉탁의(囑託醫) 제도와 유언장 확인 절차를 의무 규정으로 두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임종방 설치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촉탁의는 가정의(家庭醫)라야 한다. 병원진료를 받아야 할 것인지, 임종방에서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촉탁의에게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지금처럼 임종의 징후가 분명함에도 ‘입원진료→종결’이라는 응급상황 절차에 따르면 존엄한 죽음의 권리는 실종될 수밖에 없다. 의사가 내미는 비위관, 위루술 등의 동의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80년 초 세계의사협회가 스페인 리스본에 모여 ‘존엄사 지지선언서’를 채택한 지 28년이 지났다. 그러나 이날까지 우리나라는 이 문제에 대한 법적 접근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주사나 약물로 환자를 사망케 하는 것이 안락사다. 존엄사는 말기환자에 대한 과잉진료나 연명장치를 제거하고 통증만을 없애줌으로써 고통 없이, 품위 있게 떠날 수 있는 자연사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존엄사법이 제정되었을 때 말기환자들의 연명장치 제거는 누가 결정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합병원마다 윤리위원회 운영을 법적으로 제도화해야 한다. 일반 병원에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오는 말기암환자의 경우 대부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라고 한다. 지나친 치료제 투약의 결과 ‘훌륭한 죽음’의 시기를 놓친 것이다. 의학박사 M. 스캇 펙은 환자가 의식을 잃기 전에 아래의 조건들이 실행되어야 비로소 훌륭한 죽음이라 한다.

    1. 자살이나 살해가 아닌 자연사라야 한다.

    2. 육체적으로 통증이 없어야 한다.

    3. 떠나는 이와 보내는 이들 사이에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진 죽음이라야 한다.

    4. 본인이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 즉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5.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현으로 사별인사(死別人事)를 해야 한다.

    말기암환자의 경우 약물치료를 계속하면 치료효과보다는 부작용이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간 수치와 혈압 상승으로 환자만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자살과 교통사고 사망자 2만여 명을 포함해 매년 26만여 명이 죽음을 맞고 있다. 해마다 12만4000여 명이 암환자로 진단받고 6만7000여 명이 암으로 사망한다. 2007년 질병 사망자 24만5000여 명 중 사망원인 1위가 27.6%를 차지한 암환자다. 현재 국내에 산재한 호스피스 기관을 이용한 암 사망자는 6만7000여 명 중 7.5%에 해당하는 5000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현재 우리나라는 호스피스 병동을 운영하고 있는 30개 의료기관 524개 병상에 대해 국고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의 3500, 일본의 3100여 병상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노인요양원에서 바라본 노인 정책

    채마밭을 가꾸는 노인들.

    노인복지 어디로 가고 있나

    ‘노인수발 서비스 오늘 시행.’ 2008년 7월1일자 신문기사 제목이다. 기사를 읽어보니 가장 중요한 노인병 예방이 실종되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평균수명이 높아지면서 독거노인 가구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이에 따라 노인의료비 지출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이 문제를 가장 시급하게, 가장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면 독거노인들의 공동생활시설을 늘려야 한다. 그런데 ‘노인복지시설의 통합·개편’은, 늘리기는커녕 독거노인들이 살고 있는 기존의 공동시설마저 강제로 문패를 바꿔 달게 하고 있다. 시대의 물길을 거꾸로 돌리는 단견이다. 인간답고 소박한 행복을 담은 노인복지!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다.

    “요양시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무료, 실비, 유료가 있는데 이곳은 실비시설입니다. 간병인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면 일반실에서 요양실로 옮깁니다. 입주자 가운데 치매환자가 생겨도 우리는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요양실에서 끝까지 모십니다.”

    입소 설명회 때의 이야기다. 평화롭고 아름답던 노인들의 보금자리! 아침부터 오후 여덟 시까지 열려 있던 출입문에 잠금장치가 설치된 것은 치매환자가 들어오고부터다. 노인복지법 34조에 의하면 치매나 중풍 등 중증환자는 4항 노인전문요양시설(4항)이나 유료노인전문요양시설(5항)에 입소하게 되어 있다. 이곳은 제 2항인 실비노인요양시설이다. 2항과 4항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2항) 실비노인요양시설 = 노인을 입소시켜 저렴한 요금으로 급식, 요양, 기타 일상 생활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함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

    (4항) 노인전문요양시설 = 치매, 중풍 등 중증의 질환노인을 입소시켜 무료 또는 저렴한 요금으로 급식, 요양, 기타 일상생활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함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

    수도회는 34조 2항에 의해 65세 이상 노인들을 입소시켰고 우리도 걱정 없이 짐을 풀었다. 계약서에도 실비노인요양시설이라는 명칭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평화롭던 이곳 분위기는 치매환자가 입소하면서 무너졌다. 치매환자는 판단력, 기억력 등의 상실로 가정의 단란함을 무너뜨리고 가족을 우울증 환자로 만든다. 나 역시 그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울하다.

    중증 치매노인과 마주한다는 것

    안락하고 평화롭던 이곳이 노인전문요양시설로 둔갑했다. 기존 입주자의 행복은 안중에도 없다. 빼앗긴 행복을 되찾기 위해 2개월여를 헤매고 다녔다. 이 과정에서 파악된 내용이다. 노인요양제도 시행일이 다가오는데 병상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병상 확보를 위해 당국자들이 이마를 맞대고 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실비노인요양시설에서 1,2 등급 외의 노인들을 내보내고 그 자리를 활용하자. 이렇게 하면 전국에서 확보할 수 있는 병상은 얼마나 되지? 미리 시설을 통폐합하여 중증환자만 받게 하자.”

    이런 발상이 아니었다면 치매환자와 중풍환자만 입소케 했을 리가 없다

    2007년 8월3일 공포된 노인복지법 개정안에 따라 2008년 4월4일자로 ‘실비요양시설’이던 이곳은 실비라는 이름을 지우고 통합된 요양시설에 수용되었다. 이름 두 글자 지우는 일이야 어렵지 않다. 1,2등급 판정을 받은 치매나 중증환자 외는 모두 내보내라는 서슬 퍼런 명령이 문제였다.

    69명에 대해 등급을 매겨보니 1,2등급에 해당하는 분이 12분이다. 57명을 내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시행일이 다가오니 시설 측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기존 입주자를 내보내는 일은 못합니다. 모두 실비요양시설 규정에 의해 저희 시설에 온 분들입니다. 이제 와서 통폐합 규정을 적용해 내보내는 것은 노인들의 거주권을 박탈하는 일입니다. 개원할 당시의 형태로 돌아가겠습니다.”

    당국자의 대답은 얼마나 오만한가!

    “병상이 모자라는데 우리가 허락할 것 같은가?”

    이에 대해 어느 시설장이 당국의 태도를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보건만 있고 복지는 없다!! ”

    가슴을 졸인 지 7개월여 지난 2008년 2월15일, 마침내 답이 도착했다.

    “기존 입소자에게만 유예 조처를 적용한다.”

    그동안의 걱정에서 벗어나 원장수녀님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가족도 함께 지내기 힘든 치매환자를 포함한 중증환자들 가운데서 여생을 보내라는 것은 노인들이 바라는 소박한 행복감에 치명상을 입힌 것이다.

    2007년 12월31일 현재, 이곳에 있는 노인 69명 중 일시불을 낸 분은 42명이다. 일시불 입소자들에게 물었어야 했다. 지금이 아니라 2년 전에 물었어야 했다. 나가겠다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일지라도 어떻게 보상해주겠으니 언제까지 나갈 준비를 하라고 제시했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고 상식이다. 우리의 행복이 진창에 떨어졌는데도 감지덕지하며 나가라는 말만 하지 않기를 바랄 거라고 여겼다니!

    노인요양원에서 바라본 노인 정책

    물놀이 가서 식사하는 노인들.

    권위주의자들의 탁상입법

    노인요양시설 통폐합은 빗장을 지르고 밀실에서 해치운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권위주의, 전제주의, 탁상입법의 총합이다.

    노인요양제도에서 인정하는 1,2등급 판정은 간단하다. 1등급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중증환자고 2등급은 휠체어 사용 환자라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이곳은 중증환자 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아니다. 러닝머신, 허리 벨트 등 각종 운동기구들이 비치된 넓은 체력단련실은 중풍환자와 치매환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이곳은 1인용 38실로 부부용(2인용) 17실의 두 배다. 애초 중환자들을 위한 시설이라면 당연히 4인실 중심으로 설계했을 것이다. 방마다 베란다에 세탁기 설치를 위한 수도시설까지 있다. 혼자 화장실 출입도 어려운 환자들의 수용시설에 베란다는 무슨 소용이며 세탁기 설치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버려진 공간이 되고 말았다. 이 외에도 지적하려면 많다. 중환자를 위한 시설이 아니라는 것은 한 번만 둘러보았어도 금방 알았을 것이다.

    2008년 초, 일본의 요양시설을 견학하고 온 크리스피나 간호사가 그곳 실무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지금 한국에서 시행하려는 노인요양제도와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이 같은 것을 일본도 2000년부터 시행하고 있지요.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런데도 시행 5년 후 바람직한 제도가 아니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실패한 제도라는 것이죠. 한국은 지금 시작하면서 왜 우리가 실패한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실패한 제도의 답습이라니!

    노인장기요양제도에 대한 당국의 설명이다.

    “중장기 재정안정과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모형으로 설계했다. 급여대상은 서비스가 꼭 필요한 중등급인 요양 3등급 이상에만 지급한다. 급여내용은 전문화·다양화하되 수발 중심으로 한다.”

    수발 중심!! 예방을 포기하고는 ‘중장기 재정안정’과 ‘효율성 극대화’라는 말을 할 수 없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08년 7월1일 현재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501만6000여 명. 전체 인구의 10.3%다. 2018년이면 14%로 고령사회가 되며 2026년에는 20%가 넘어 초고령사회가 된다. 이런 속도면 2050년에는 생산가능 인구 1.4명이 노인 한 사람을 부양해야 한다. 고령인구가 늘어날수록 노인병에 대한 예방을 소홀히 하면 호미로 막을 재난을 가래로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된다.

    통계청이 ‘2005년~2030년 장래 가구 추계(推計)’를 발표했는데 우리나라 독거노인 인구의 증가세는 심각하다. 지금까지 가구의 개념인 ‘4인 가구’가 불과 13년 뒤에는 사라진다. 2005년 77만7000가구였던 65세 이상 독거노인 가구가 2030년 233만여 가구로 늘어날 것이라 한다. 열두 가구 중 한 가구가 독거노인 가구가 된다. 독거노인 가구가 많아지면 노인의료비 지출 또한 늘어난다.

    노인요양원에서 바라본 노인 정책

    라파엘리 작품.

    ‘노인성 질환 치료비 2020년에는 36조원.’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른 수치다. 2005년의 노인성 질환 전체 진료비는 6조731억원인데 6배 규모로 커질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런 통계자료를 노인요양제도 설계에 참여한 분들이 몰랐을 리 없다.

    노인요양제도의 설계 내용을 살펴보면 당국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80,90대의 고령이라도 1,2등급 중환자가 아니면 어디서 살든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 알아서 하라면서 독거노인들의 공동생활 시설을 일방적으로 해체했다. 그것도 강제로!!

    2008년 4월4일자로 시행에 들어간 요양시설 통·폐합 내용을 보면 여섯 종류를 셋으로 통폐합했다. 실비노인요양시설, 유료노인요양시설은 치매나 중풍환자가 아닌 65세 이상 노인들의 공동생활 시설이었다. 이 시설들은 노인병 예방을 위해서 꼭 필요한 시설이다.

    풍경화의 채색을 끝내며

    고혈압으로 쓰러져 2년째 노인병원에 입원 중인 마엘따의 친정아버지가 2등급 판정을 받았다. 한 달에 110만원의 병원비와 부대비용 등으로 힘든 차에 노인요양제도 시행 소식이 들려오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공동생활가정의 경우 시설이 열악해 재활치료 등은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어요. 현재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어 그나마도 자리에 눕지 않고 2등급을 유지하고 계시는데….”

    2인실 한 달 31일 기준으로 요양시설의 경우 2등급의 부담금이 80여만원 정도. 요양시설과 노인병원의 차액을 계산하니 30여만원. 그래서 마엘따는 어쩔 수 없이 30여만 원의 보험급여를 포기하고 친정아버지를 노인병원에 모시고 있다. 마엘따의 말이다.

    “아무리 1,2등급 환자지만 재활을 포기한 것은 크게 잘못된 거잖아요. 육신은 쓰지 않으면 굳어지는 거잖아요.”

    ‘쓰지 않으면 굳는다! ’

    누구나 알고 있는 기초적인 의학상식을 당국자들이 몰랐을까?

    빼앗긴 행복을 되찾기 위한 싸움의 시작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하지만 잘못된 법 개정을 알면서 눈을 감을 수 없다. 노인복지는 물론이고 나라 경제와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노인요양원에서 바라본 노인 정책
    이정옥

    1939년 밀양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거창대성중학교 교사

    동아일보 출판국 ‘여성동아’ 기자, ‘음악동아’ 차장

    시집: ‘채워지지 않은 잔이 더 아름답다’ ‘아름다운 포구에 닻을’ 수필집: ‘행복한 자기사랑’


    나도 어느덧 일흔에 접어들었다. 아직도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고 인생에 대한 열정으로 가슴이 뛴다면 젊은이들이 웃을까?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 풍선에 꽃씨를 담아 멀리 띄우고 싶다. 죽는 순간까지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하고 싶다.

    아쉽지만 마침표를 찍어야 할 시간이다. 이야기를 빌린 모든 분께 미안한 마음이다. 이곳 우리들의 이야기가, 젊은이들에게 아름다운 노년을 꿈꾸게 하는 느낌표가 된다면, 장년들에게 인생을 가다듬게 하는 각성제가 된다면, 노년들에게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의 작업은 보상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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