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뭇잎들이 서리 내린 대지 위로 내려앉는다. 새벽의 우윳빛 안개는 오전 내내 허공을 부유하고, 한낮의 햇살마저 창백하다. 대기를 가르는 바람이 싸늘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계절. 창에 두꺼운 커튼을 치고 머그컵에 뜨거운 밀크 티를 가득 채운 뒤, 오디오의 버튼을 누른다. 이제 ‘고엽(Les Feuilles Mortes)’을 들을 시간이다.
이브 몽탕 연보<br>1921년 9월21일 이탈리아 밀라노 근교 몽스마노에서 출생<br>1923년 가족과 함께 프랑스 마르세유로 이주<br>1944년 에디트 피아프의 눈에 띄어 파리 물랭루즈 무대에 데뷔<br>1946년 영화 ‘밤의 문’ 출연. OST 앨범 중 ‘고엽’ 녹음<br>1951년 배우 시몬 시뇨레와 결혼<br>1956년 소련,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순회공연<br>1960년 할리우드 영화 ‘사랑합시다’ 주연<br>1968년 프랑스 공산당 탈당<br>1969년 정치영화 ‘제트’ 주연<br>1985년 시몬 시뇨레 사망<br>1986년 영화 ‘마농의 샘’ 2부작으로 세계적인 찬사 받음<br>1987년 카롤 아미엘과 재혼<br>1988년 첫아이 발랑탱 태어남<br>1991년 11월9일 심장마비로 타계
늦가을의 시린 바람처럼 애잔한 이 선율을 노래한 사람이 이브 몽탕만은 아니었다. ‘파리의 지붕 밑’을 부른 줄리엣 그레코는 연인이 갑자기 타계하자 그 슬픔을 담아 ‘고엽’을 노래했고, 1950년에는 영어 가사로 개작한 ‘고엽’이 미국에서 녹음되었다. 1956년에는 아예 이 노래를 주제로 한 ‘가을 낙엽(Autumn Leaves)’이라는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제작되었다. 영화 주제가는 물론 ‘고엽’이었고, 재즈 가수 냇 킹 콜이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불렀다. 그 외에도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내트라, 에디트 피아프, 실비 바르탕 등이 ‘고엽’을 녹음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고엽’의 진수는 이 노래를 처음 부른 이브 몽탕의 버전일 것이다.
이브 몽탕이라는 남자를 정의할 말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샹송 가수이자 배우였고, 반전평화운동의 기수였으며 1950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진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또 미용실 보조나 부두의 노동자 같은 거친 직업을 거쳐 대스타로 자수성가한 남자이며 피카소나 프레베르, 장 콕토 등 당대의 지성들과 거리낌 없이 교유한 지식인이었다.
이브 몽탕을 단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가장 근사한 정의는 이것이 아닐까 싶다. ‘사랑을 하고 간 남자.’ 그는 정말로 70년의 인생 동안 한시도 빠짐없이 사랑을 했다. 에디트 피아프를 비롯해서 시몬 시뇨레, 마릴린 먼로, 셜리 매클레인, 카트린 드뇌브, 로미 슈나이더 등 공식, 비공식 연인에 대한 사랑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인 노래와 연기를 사랑했으며, 자신에게 갈채를 보내는 팬들을 사랑했다. 또 자신의 모국인 이탈리아와 조국인 프랑스를,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슴 깊이 사랑했다. 그 사랑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그는 가수나 배우라는 불안정한 위치에서도 반전·반핵운동 등에 용감하게 참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어디엔가 한번 빠져들면 아낌없이 자신을 모두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브 몽탕이라는 남자가 가진 매력의 핵심이었다.
촬영이 끝나면 “온 마음으로 몰입했던 영화의 인물을 벗어버리는 데 보름 이상이 걸린다”고 말했던 이브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인 ‘IP5’ 촬영을 마친 날인 1991년 11월9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기하게도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심장마비로 죽는 장면을 연기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진짜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다. 일생 동안 배우와 가수로 살던 그는 ‘온 마음으로 빠져들었던’ 역할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영혼의 맨 밑바닥까지 예술가였다.
골수 공산주의자 가족
이브 몽탕이라는 이름은 1970년대 반공세대에게는 일종의 금기어였다. 그것은 그가 열렬한 좌파 예술인 정도가 아니라 진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브는 프랑스 공산당(PCF) 당원으로,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공산당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좌파 예술가였다. 그는 냉전과 매카시즘의 열풍이 불던 1950년대에 모스크바를 비롯한 소련과 동유럽 순회공연을 떠났고, 모스크바에서는 흐루시초프를,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티토를 만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전력 때문에 미국 입국을 여러 번 거부당했다.
어찌 보면 이브가 공산당원이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탈리아 출신인 아버지와 형이 열렬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가난한 농부였던 그의 아버지 지오반니 리비(Giovanni Livi)는 셋째아들 이브가 태어난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했다. 리비 가족이 이탈리아를 떠난 것도 아버지의 공산당 활동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점차 득세하던 파시스트당은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해 탈당을 강요했고, 지오반니 리비는 이를 피해 1923년 온 가족을 이끌고 프랑스 마르세유로 망명을 떠났다.
말이 좋아 망명이지, 가난한 노동자 가족을 환영해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리비 일가는 마르세유의 산동네에 자리 잡았다. 납공장과 식용유공장 사이에 있는 마을에서는 늘 악취가 났고, 오염된 물을 먹은 아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나갔다. 리디아, 줄리앙, 이브 세 아이는 부모가 이탈리아어로 물으면 프랑스어로 대답하며 자랐다. 부모는 이브를 이탈리아식으로 ‘이보’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더러운 거리를 떼지어 몰려다니다 설탕공장의 포대를 찢어 설탕을 훔쳐 먹곤 했다.
곤궁한 형편 때문에 리비 일가의 아이들은 아무도 상급학교에 가지 못했다. 막내인 이브 역시 열한 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국수공장에서 일했다. 점심 대신 생국수를 씹어 먹으며 배고픔을 참던 날들이었다. 누나 리디아가 거리의 창고에서 미용실을 연 뒤에는 이곳에서 손님들의 머리 감겨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미용실 일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었지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이런 신산한 삶의 와중에서 이브가 어떻게 노래를 부르게 되었을까? 그의 ‘교사’는 마르세유 시내에서 상영되던 할리우드의 뮤지컬 영화들이었다. 전차요금이 없는 소년은 10㎞나 되는 길을 걸어서 미국 영화를 보러 갔다. 셜리 템플의 뮤지컬 영화와 브로드웨이 멜로디 시리즈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를 흉내 내기 위해 탭댄스를 배우던 소년은 가끔 마르세유 부두에서 떠나는 배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대서양 저편에 있는 나라 미국에 갈 거라고, 가서 그 나라를 정복할 거라고 그는 막연히 생각했다.
훤칠한 키와 수려한 용모를 가진 이브 몽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매력적인 프랑스 남자’이자 타고난 예술가였다.
마르세유의 한 지방극장에서 바람잡이로 노래를 부르게 될 때까지 이브는 키만 훌쩍 크고 깡마른 데다 수줍음을 타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당시 꽤 인기를 끌었는데,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처럼 춤추며 노래하는 특이한 스타일 때문이었다. 큰 키의 이 소년에게는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있었다. 마르세유에서 인기가수가 되면서 예명도 생겨났다. 당시 흥행업자들이 이브에게 듣기 좋은 예명이 하나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브는 이탈리아어 냄새가 물씬 나는 ‘리비’라는 성 대신 ‘몽탕(Mon-tand)’이라는 성을 지어냈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골목길을 향해서 외치던 “이보, 올라와(Monta)!”라는 말을 예명으로 삼은 것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짙어지던 시기였다.
전쟁이 터지면서 이브 같은 젊은이들은 모두 징집될 위기에 처했다. 형인 줄리앙은 징집 영장을 받고 끌려갔다. 이브는 영장을 피하기 위해 파리로 향했다.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면 큰 도시가 수월했다. 전쟁 중 대도시에서의 생활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카우보이 흉내를 내는 무대 매너 때문에 미국을 찬양한다는 오해를 받는가 하면, ‘리비’라는 본명 때문에 유대인으로 의심받기도 하고 강제노동국의 소환을 받아 끌려가다 열차에서 뛰어내려 아슬아슬하게 탈출하기도 했다. 이브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왜 경찰이 그토록 자신을 추적했는지 알게 되었다. 공산당원인 아버지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남몰래 참가했던 것이다. 이브는 그런 아버지에게 큰 자부심을 느꼈다.
첫사랑, 에디트 피아프
이브가 막 파리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1944년,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1915~63)는 이미 정상에 오른 샹송가수였다. 당시 파리 제1의 카바레였던 물랭루즈에서 오디션 제의를 받은 이브는 그 자리에서 여섯 살 연상의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게 된다. 그를 보기 전까지 ‘미국 사투리로 노래 부르는 시골뜨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피아프는 훤칠한 키의 이브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남성적 매력에 마음을 뺏기고 만다. 그러나 여왕 같은 자리에 있던 에디트가 쉽사리 자신의 마음을 들킬 리 없었다. “당신 억양이 이상하네요, 캐나다 사람인가요?” 에디트가 그에게 건넨 첫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두 사람은 곧 연인이 됐다. 에디트는 미국 팝송을 흉내 내는 데 그치던 이브를 위해 샹송 풍의 노래들을 새로 만들어주었다. 에디트가 작사한 샹송 ‘장밋빛 인생’에 나오는 구절, ‘그이의 입가로 사라지는 흐뭇한 웃음’은 에디트가 이브의 커다란 입을 연상하며 쓴 가사였다. 이브가 본 에디트는 ‘풋풋하고 우아하고 상냥하고 재미있는, 그리고 극도로 잔인한’ 여자였다. 에디트는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리고 사랑을 잃었을 때도 기막히게 노래를 불렀다. 스물네 살의 이브는 에디트의 노래에, 그리고 그녀의 매력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두 사람은 2년 반 동안 동거했고 에디트는 이브에게 약속한 대로 술을 끊었다. 이 2년 반 동안 이브는 가수로 급성장해서 마침내 파리 에투알 극장의 무대에 서게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젊고 잘생긴 이브가 에디트의 사랑을 얻은 후 명성마저 얻자,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에디트를 차버렸다고. 그러나 이브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것은 전설일망정 진실은 아니다. 1946년 봄, 두 사람은 사소한 말다툼을 했고 이 싸움에서 화해하지 않은 채 에디트는 그리스 순회공연을 떠났다. 그리고 그리스에서 돌아온 에디트는 이브를 서먹하게 대했다. 이탈리아인답게 다혈질인 이브는 짐을 싸 집을 나갔고, 3주일 후 다시 돌아온 이브를 에디트는 상냥하게, 그러나 완벽하게 ‘친구’로만 대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해서 끝났다.
이 무렵 이브는 최초의 영화인 ‘밤의 문’-‘고엽’이 등장하는 바로 그 영화다-을 통해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다. 잡지 ‘시네몽드’는 ‘올해 가장 엉망인 연기자는 이브 몽탕’이라는 리뷰를 실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이브는 시인 자크 프레베르를 만나게 된다. ‘고엽’이라는 노래 제목과 가사를 붙인 프레베르는 이브에게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이다. 그는 재미있고 빈틈없고 예리했다. 이브는 이 영화에 등장한 노래인 ‘고엽’을 무척 좋아했지만 이상하게도 이 노래에 대한 뮤직홀 관객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그가 ‘고엽’을 노래할 때마다 관객들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고, 이브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느라 다른 흥겨운 노래들을 연달아 불러야만 했다.
카바레 무대와 영화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기교를 통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진리였다. 노래든 연기든 간에 상대를 사로잡기 위해서는 개성과 카리스마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피아프 같은 사람이 그러했다. 그리고 이브 자신은 잘 못 느끼고 있었지만, 그에게도 예술가다운 개성과 매력이 있었다. 이탈리아인의 피에서 흐르는 본능적 감각이 있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감정을 토로할 용기도 있었다. 그것이 상대 여배우이건, 아니면 이념이건 간에 이브는 언제나 솔직하게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이브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매력적인 프랑스 남자’였다. 늘 우아하고 부드러웠으며, 188㎝의 큰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가 속삭이는 몇 마디의 말에, 또는 무대에서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모습에 정상급 여배우들은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이브는 수없이 많은 여배우와 연애를 했다. 개중에는 연인이나 남편, 심지어 아이를 팽개치고 이브에게 달려온 이들도 있었다.
시몬 시뇨레, 그리고 마릴린
이브에게 평생의 연인이자 반려자가 된 배우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 1921~85)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브는 명성을 얻은 후에도 파리에 거주하지 않고 고향 마르세유에서 멀지 않은 중세풍의 작은 마을 생 폴 드 방스에서 하숙을 했다. 그의 하숙집 인근에 피카소와 브라크, 프레베르가 살고 있었다. 이브는 친구 사이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그들의 예술세계를 놓고 가끔 충돌하는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곤 했다. 영화감독인 이브 알레그레(Yves Allegret·1905~1987)와 시몬 시뇨레 부부도 이브의 이웃사촌들이었다. 어느 한가로운 점심식사 식탁에서 시몬을 처음 만난 이브는 곧바로 사랑을 느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이브는 자연스럽게 시몬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이 가늘군요.” 그는 말했다.
이브 몽탕은 수많은 스타와 염문을 뿌렸다. 왼쪽부터 아서 밀러, 시몬 시뇨레, 이브 몽탕, 마릴린 먼로. 아서와 마릴린, 시몬과 이브가 각각 부부였지만, 이브는 마릴린과도 사랑을 나눴다.
이 부부는 1985년 시몬이 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34년 동안 해로했다. 시몬은 이브에게 보들레르와 모파상 등을 읽게 한 스승이기도 했다. 이브는 아내에게만 충실한 남자는 결코 아니었고 결혼생활 중에도 수많은 애인을 만났지만, 단 하나의 사랑은 시몬이었다. 1985년 시몬이 세상을 떠난 후, 이브는 아내가 묻힌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에게 시몬은 죽어 사라져버린 과거형이 아니라, 늘 함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브는 때로는 시몬 몰래, 때로는 아내의 묵인하에 공공연하게 연애를 즐겼다. 그중에서도 세기의 연인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1926~62)와의 애정행각은 유명하다. 수차례에 걸친 입국 거부 끝에 1959년 간신히 미국 임시 비자를 받은 이브는 시몬과 함께 할리우드로 날아갔다. 브로드웨이,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스시코 공연에서 대성공을 거둔 후, 마릴린 먼로와 함께 첫 번째 할리우드 영화 ‘사랑합시다(Let‘s Make Love)’의 촬영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제목대로, 이브는 정말로 마릴린 먼로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심지어 마릴린 먼로의 남편 아서 밀러(Arthur Miller·1915~2005)가 이브와 친구 사이였는데도 말이다! 마릴린은 서툰 영어로 “당신은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나요?”라고 묻는 이 프랑스 남자의 매력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소문은 곧 할리우드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시몬은 이를 추궁했고, 이브는 꼼짝없이 자신의 불륜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스캔들이 미국과 유럽을 떠들썩하게 달구었지만, 시몬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마릴린 먼로가 품에 있는데, 무감각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시몬의 말에 벌떼처럼 와글거리던 매스컴은 잠잠해졌다.
이브는 언제나처럼 마릴린과의 외도를 접고 시몬에게 돌아갔고 두 사람 사이는 곧 평온해졌다. 시몬은 훗날 몹시 화가 나서 부부싸움을 할 때조차 절대 마릴린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브의 다른 연인들, 즉 셜리 매클레인(Shirley MacLaine·1934~)이나 카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1943~), 이자벨 아자니(Isabelle Adjani·1955~) 등에게도 시몬은 똑같은 방식으로 응대했다. 이브를 거쳐 간 연인은 수없이 많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이브를 소유했던 여자는 시몬뿐이었다.
민중에 대한 애정
이브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인 이유에서’ 공산주의자가 됐다.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아버지와 형이 모두 골수 공산당원이었다. 파리에서 막 큰돈을 벌기 시작할 때부터 이브는 공산당 신문인 ‘뤼마니테 (L‘Humanite)’에 몇백만프랑씩 아낌없이 기부하곤 했다. 파업 중인 광부들을 위해 공연을 하거나, 핵실험 반대운동에 서명하기도 했다. 1950년대의 냉전 분위기에 비추어보면, 이런 행동은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렉스프레스(L‘Express)’ 같은 우익 언론은 그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갈색 트위드 재킷을 입고 무대에 서면 ‘왜 그렇게 투박한 옷을 입는가? 노동자처럼 보이려는 의도 아닌가?’ 같은 리뷰를 싣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브의 마음속에는 조금씩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특히 문화에 대한 당의 의견에 찬동할 수 없었다. 공산당은 그에게 ‘세시봉(C‘est ci bon)’ 같은 유명 샹송도 부르지 못하게 했다. ‘리듬이 지나치게 미국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한번은 형 줄리앙이 함께 식사를 하다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를 ‘완전한 쓰레기’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식탁을 뒤엎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른 채 이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의 규율이 비판정신조차 말소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점점 커졌다.
이런 회의에도 불구하고 이브에게 소련은 ‘히틀러에 대항해 싸우다 스러진 200만 영웅의 나라’였다. 다시 말해서 이브가 공산당원이 된 것은 이름 없는 민중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그 자신부터 마르세유의 빈민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던가. 이런 믿음 속에서, 이브는 1956년 가을 소련을 시작으로 동유럽 순회공연을 떠났다. 바로 그해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를 소련군이 무자비하게 탱크로 진압하는 바람에 서방세계와 소련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시몬은 “모스크바에 가 노래한다면 다시는 프랑스에서 노래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소련행을 말렸다. 영화제작자들도 “소련에 간다면 당신과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브는 약자인 노동자들, 그리고 아버지와 형이 지지하는 공산주의가 정당하다는 믿음을 버릴 수 없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공항에는 수많은 인파가 그를 환영하러 나와 있었다. 이브는 그 환영 분위기에서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감정을 느꼈다. 모스크바 공연 나흘째, 분장실로 아르메니아인 노동자가 뛰어들어와 “이곳은 사람 살 곳이 아니야, 탈출하게 해주세요!”라고 소리쳤다. 노동자는 곧 끌려 나갔지만 이브는 심한 동요를 느꼈다.
이날 저녁 흐루시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주최하는 만찬이 열렸다. 만찬장에서 이브는 솔직하게 흐루시초프에게 물었다. “어째서 부다페스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 흐루시초프는 “배신자들을 묵인할 수는 없다”며 변명을 늘어놓았고 이브는 “그렇다면 왜 사방에서 소련을 배신하는 자가 이토록 많으냐? 소련을 배신하는 모든 이가 다 반혁명가이고 비주류인 것이냐?”며 계속 따져 물었다. 만찬장 분위기는 어색하게 가라앉아버렸다.
훗날 이브는 회고록에서 털어놓았다. “그곳은 낙원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해묵은 고정관념이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마침내 이브는 1968년 ‘프라하의 봄’ 사태 때 소련군의 진압에 항의해 공산당을 탈당했다.
국내 일부 언론은 ‘이브 몽탕이 공산당을 탈당한 후 반공주의자가 되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공산당 탈당 이후에도 이브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좌파 예술인으로 활동했다. 다만 그는 좌익 우익을 가리지 않고 독재체제에 대항하는 반체제 인사들을 후원하는 데 힘을 쏟았고, 이 과정에서 공산당에 대항하는 동유럽 지식인들을 돕기도 한 것이다. 그는 피노체트(Augusto Pinochet·1915~2006)가 철권통치를 하던 칠레를 방문해 민주세력을 지지하는 콘서트 무대에 서는가 하면, 칠레의 레지스탕스 지원을 위한 모금운동에도 앞장섰다.
영화를 통한 정치 활동
이브는 자신의 직업, 즉 배우라는 직업을 이용해 인권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적지 않은 정치영화에 출연했는데 그중에서도 그리스 출신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가 감독한 영화 ‘제트(Z, 1969)’가 특히 유명하다. 공정선거를 요구하다 우익단체에 의해 암살당하는 정치인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그리스에서 암살된 국회의원 람브라키스(Gregoris Lambrakis·1912~63)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브는 1966년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전쟁은 끝났다(La Guerre est Finie)’에서 스페인전쟁에 의문을 품은 공산주의 게릴라 역할을 맡았고, 이후 영화 ‘게엄령(Etat De Siege, 1972)’에서 우루과이 반체제 인사들을 고문하는 미국 비밀요원으로 등장하는 등 영화를 통해 직접적인 방식으로 정치 활동을 하기도 했다.
예술 활동, 그것도 영화와 같은 상업적인 예술 활동을 통해 정치적인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낸 배우는 이브 외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드물다. 한때 그가 프랑스 대통령후보로까지 거론된 것은 이 때문이다. 1990년대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그가 대통령후보에 나서면 30% 내외의 지지율을 얻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브는 한마디로 이를 일축했다.
“나는 프랑스 대통령 자리에 흥미가 없다. 대통령은 본질적으로 명예욕과 성공욕, 그리고 야망을 충족시키는 자리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는 이미 이것들을 가지고 있다 … 나는 결국 곡예사나 확성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재능 있는 확성기겠지만 말이다.”
반세기 가까이 공산주의, 반전운동, 반핵운동 등을 펼치면서도 이브가 맡은 공식적인 직함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 정도에 불과했다.
예술가의 길
이브는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시몬을 무척 사랑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시몬이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내비치지 않고, 그 늙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82년에 개봉된 영화 ‘야단법석(Tout feu tout flamm)’에 함께 출연한 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늙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이브는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배우를 걱정한다. 그는 진정한 배우는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의 역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연기에 대한 이브의 가치관은 ‘마농의 샘(Manon des Sources, 1986)’에서 절정에 달했다. 한 마을의 우물을 둘러싼 3대에 걸친 증오와 갈등의 드라마를 보여주는 이 2부작 영화에서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펼쳐 보인 것이다. 그의 나이 65세 때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나를 일생 동안 움직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불안감이었다. 이런저런 인물 배역을 소화해내지 못할까봐 나는 불안했다… 나는 항상 노래를 부르거나 영화를 찍었기 때문에 언제나 두려움에 휩싸여 살았다. 관객은 무대에 선 나, 확신에 차 보이는 키 큰 남자를 볼 때 내 속을 갉아먹고 있는 불안감에 대해 상상하지 못한다 … 나는 활동을 멈춘 적이 없고, 진정한 휴가를 즐겨본 적도 없다.”
그가 회고록에 남긴 이 고백은 생 폴 드 방스 시절 그의 이웃사촌이던 피카소를 연상시킨다. 일생 동안 3만여 점의 그림을 그린 피카소 역시 화가로서 자신의 인생을 ‘죄수의 삶’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브는 이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예술가의 길을 포기할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만 멈추거나 잠시 쉬거나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내 안의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그것은 자연이 내게 준 것에 대한 배신이라고. 내게 주어진 재능 때문에, 나는 양지에 자리 잡을 수 있었고, 그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열심히 일했다 … 누군가에게 감사해야 한다면, 나는 내 자신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정상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재능이라고. 그는 자신이 타고난 예술가이며, 예술가로 운명 지워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생 동안 수많은 아름다운 여인과 그리고 예술과 사랑을 하던 이브는 67세에 예기치 못한 또 하나의 사랑을 만난다. 1987년 결혼한 두 번째 부인 카롤(Carole Amiel)이 아들 발랑탱(Valentin)을 낳은 것이다. 이브는 시몬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않았었다. 자신의 첫아이를 안는 기분은 일찍이 알지 못했던 감동이었다.
마지막 사랑
남이 할아버지가 되는 나이에-그에게도 이미 양딸 카트린(Catherine Allegret)이 낳은 손자 뱅자맹(Benjamin)이 있었다-아버지가 되는 꼴이 우스꽝스러울 거라 생각했던 그는 아이를 본 순간 ‘모든 선입관은 무너져버리고, 가장 강하고 순수한 감동만을’ 맛보았다. 70이 넘어 새삼스럽게 공연 무대로 되돌아갈 결심을 한 것도 발랑탱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71세가 되는, 그리고 발랑탱이 다섯 살이 되는 1992년 5월부터 파리 무대를 시작으로 프랑스 순회공연을 열 계획을 세운다.
“비록 다른 아빠들보다 나이는 많지만, 다른 아빠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자기 아빠를 발랑탱이 봤으면 한다. 그럴 기력이 충분히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이에게 아빠의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이브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1991년 11월 9일, 프랑스의 모든 TV 방송은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고엽’을 방송했다. 이브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이날 아침 사망한 것이다. 영화 ‘IP5’의 마지막과 꼭 같은, 그야말로 영화 같은 한 인생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브 몽탕이라는 이름이 아름답게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고엽’과 같은 아름다운 샹송을 부르고 많은 영화에 출연해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으며 인권운동가로서도 적지 않은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이 남자가 무엇보다도 말 그대로 ‘멋진 남자’였기 때문이다. 에디트 피아프의 풋내기 연인이던 젊은 시절부터 ‘마농의 샘’을 촬영하던 60대 노년까지 이브 몽탕은 단 한 번도 매력적이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 우리는 ‘멋진 프랑스 남자’ 하면 반사적으로 이브 몽탕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사랑은 떠나도 사랑의 기억은 영원하다고. 또다시 가을이 오고, 우리는 버버리 코트를 입은 채 나지막한 음성으로 ‘고엽’을 부르던 이브를, 사랑을 하고 간 이 남자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