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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 ④

파란만장 외길인생 걸어온 방짜 유기장 이봉주

“우리만의 뛰어난 합금기술, 반드시 지켜낼 겁니다”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파란만장 외길인생 걸어온 방짜 유기장 이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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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위기 모면하면서 삼팔선 넘어

파란만장 외길인생 걸어온 방짜 유기장 이봉주

본래 반상기는 주물로 제작하지 방짜로는 못 만든다. 그러나 이봉주 옹은 기계를 개선해 작은 그릇까지 방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위). 수복강령 등의 글자를 새긴 구절판.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다.

언제나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데 망설임이 없는 그는 월남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너 없으면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는 어머니의 만류로 그는 한 해 더 농사를 짓고 1948년 겨울, 송아지 판 돈 5000원을 들고 남으로 향했다. 아내는 어머니가 말리는 바람에 남게 됐고, 그것으로 그와 아내의 연은 끊어지고 만다.

“시동생들 돌보고 농사를 돕다가 1년 뒤에 가라는 시어머니 말씀을 차마 거스르지 못해 남은 아내는 평생 고아를 돌보며 살았답니다. 미국에 사는 육촌동생이 고향을 방문하고 알려주었어요. 88올림픽 이후 일본에서 북한으로 돈을 부쳐줄 수 있었는데, 아내는 2008년 여든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고향에서 쓸쓸하게 살다간 아내 때문에 그는 늘 딸들에게 “결혼하면 부모 말씀보다 남편 말을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첫 아내와는 비록 짧은 인연이지만, 그 인연은 그의 방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월남한 후 찾아간 양대 공방의 탁창여 방주가 바로 아내의 이모부였고, 이 인연으로 그는 방짜 유기의 길로 들어섰다. 이러니 그가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를 실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인도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남하할 때 이미 몇 차례 경험했다.

“삼팔경비대를 만나 도망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 칡넝쿨에 걸렸더군요. 숨어서 하나님께 이번에 살려주시면 평생 하나님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제 평생 그때만큼 간절하게 기도한 적이 없어요.”



12월에 비가 와 물구덩이 속에 숨어 있던 그는 차라리 자수를 할까 고민하다 잠이 들었고, 눈을 뜬 순간 무엇인가 펄쩍 뛰는 소리를 들었다. 알고 보니 노루가 지레 겁먹고 도망간 것이었다.

“그때 깨달았죠. 아무도 해치지 않는데 무서워하는 노루처럼 저 역시 저 혼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러자 두려움이 가시고 그는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때마침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아무도 다니지 않는 대로를 그는 활개치고 걸었다. 그는 그때의 깨달음이 그의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걸 맡기면 편안해질 거라는 약속 말이다.

예성강 상류에 도착해 함께 남하하던 일행과 안내인을 다시 만난 그는 새로운 난관에 부딪혔다. 강을 건너야 하는데 물이 빠진 조금 때라 물이 차오르는 사리 때까지 이레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숙박비도 바닥나기 시작했고, 언제 경비대가 들이닥칠 모를 상황에서 그는 다시 결단력을 발휘했다.

“갯벌에 배를 밀고 갈 수 없다기에 제가 책임진다고 했습니다. 제가 해변 가까이 살아 갯벌을 좀 알지요. 감탕(펄)에 물을 뿌리면 아주 미끄러워져요. 그때 손쉽게 배를 밀 수 있습니다.”

마침 달도 없는 그믐밤이어서 오히려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도착한 예성강역은 당시 이남이었다. 그러나 남으로 오면 환영받을 줄 알았는데 일행을 기다리는 것은 서북청년단과 경찰 등이었다. 월남한 일행은 사상검증을 겸한 취조를 받았다.

“다짜고짜 ‘민청에 가입했느냐?’‘김일성의 20대 교지를 아느냐?’고 묻는데 모른다고 대답하면 마구 패고 끌고 가더군요. 그래서 저는 솔직하게 대답했지요. 민청에는 강제로 가입해야 했으며, 20대 교지를 다는 모르지만 신앙의 자유를 말한 4조는 안다고요.”

그러자 오히려 여관에 데리고 가 하룻밤을 재워주더란다. 정직함과 당당함이 신뢰를 얻은 것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배울 교훈을 월남하면서 다 깨우친 것 같다. 신에게 맡기는 겸손함과 과단성, 정직함이 살길이라는 것을. 이후 그의 인생은 이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기차에서 만난 교수 부인과 유기 공방에서 만난 탁 방주

예성강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지만 한밤중에 도착하는 서울에서 그가 갈 데라곤 없었다. 여관에 투숙할 돈도 없어 고민하던 그의 옆자리에는 연세대 교수 부인이 타고 있었다. 아이와 짐 가방 때문에 지게꾼이 없으면 집에 갈 일이 막막하던 부인에게 마침 일행 중 한 사람이 즉석에서 주선해 그는 부인의 집까지 짐을 들어주고 하룻밤을 기탁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 이밥에 쇠고깃국을 차려주었는데, 그때 난생처음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았습니다.”

이튿날부터 그는 외삼촌 집과 아버지 친구 집을 찾아 나섰다. 북에서 부자로 살다 서울에서 어렵게 사는 외삼촌 집에 머물기도 어렵고, 대동청년단 소속인 아버지 친구 집은 폭력의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하루 만에 나오고 말았다. 다시 막막해진 그는 문득 아내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남한에서 이모부가 유기 공방을 크게 한다는 소리였다. 그는 서울에서 가장 큰 유기 공방을 찾았다. 바로 탁창여 방주의 공방이었다.

“정주에서 방금 내려왔다니까 다들 고향 소식이 궁금해서 제게 몰려와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그러다 탁 방주님이 김태옥 장로를 아느냐 하시기에 저의 장인이라고 했지요.”

정말로 아내의 이모부를 만난 것이었다. 그때부터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풀렸다. 당장 먹고 잘 곳이 없는 그에게 탁 방주는 “우리 집에서 살면서 공방 일을 함께 하자”고 제의했다. 이후 그는 전국 유기점에 수금하러 다니면서 공방 일을 익히고 탁 방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기술도 배웠다.

“탁 방주 님은 제게 제2의 아버지이자 스승, 은인입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기술을 배우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게 어찌 저의 능력이겠습니까? 사람은 때를 잘 만나야 하는데, 저에게는 그 시운(時運)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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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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