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냐 반덴베르흐 씨(오른쪽)와 한국에서 낳은 딸 애령 양.
만우절인 4월 1일, 그야말로 거짓말 같은 사연을 담은 기사가 ‘동아일보’에 실렸다. 25년 전 미국과 프랑스로 각각 입양된 한인 쌍둥이 자매의 감동적인 재회 스토리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미국 영화계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1987년 11월 부산에서 태어난 서맨사 푸터먼 씨와 아네 보르디에 씨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년 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서다. 미국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푸터먼 씨의 얼굴을 유튜브 동영상에서 확인한 보르디에 씨가 페이스북 계정으로 푸터먼 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 기사를 읽고 나니 이틀 전에 만난 소냐 씨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만약 엄마를 만난다면 제일 먼저 엄마 얘기를 듣고 싶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를 임신한 기간 동안 어땠는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엄마 가족은 누구인지. 또 내 아버지는 누구이고 뭘 하는 사람인지도 묻고 싶다.”
‘권리’와 ‘사생활’
2010년 8월,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 땅을 밟은 소냐 씨는 현재 미국인 남자친구와 동거하며 14개월 된 딸을 키우고 있다. 이화여대 대학원(여성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발표를 남겨둔 그는 “논문 중간 발표 시점을 4~5월로 잡고 있고, 올해 안에 논문 발표를 마치고 싶다. 학업을 마치면 네덜란드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계획대로라면 친부모를 찾기 위해 이 땅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8개월 남짓. 그때까지 친부모를 못 찾으면 ‘잃어버린 뿌리’를 평생 그리워하며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엄마 사진이라도 한 장 있었으면 좋겠다. 구글과 페이스북에 엄마 이름과 옛 주소를 쳐서 엄마와 비슷한 또래의 한국 아줌마들 사진이 나오면 유심히 본다. ‘혹시 이 사람이 우리 엄마가 아닐까? 아니면 이 사람일까?’ 하면서 온갖 추측과 상상을 해본다.”
그동안 백방으로 부모를 찾아 나섰지만 지금껏 흔적조차 찾지 못해 애가 탄다. 2005년 한국을 첫 방문했을 때부터 따지면 10년 넘게 이 땅을 헤매고 다닌 셈.
“네덜란드에 있을 때부터 인터넷을 통해서 입양 기록을 찾아봤다. 대학 시절에는 방학 때 두 차례나 한국에 왔다. 나를 입양 보낸 기관을 여러 차례 찾아갔다. 해외 입양인의 뿌리 찾기를 도와준다는 곳(중앙입양원)에도 전화를 했지만 친부모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얼마 전에는 경찰서 실종아동신고센터에 가서 ‘부모를 찾아달라’고 했다. 답답한 마음에 심부름센터도 알아봤는데 200만 원이 든다고 했다. 거기에라도 맡겨야 하나 고민 중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애를 쓰고 발품을 판 끝에 그가 손에 쥔 것은 출생증명서와 입양아동조서, 네덜란드로 출국하기 직전 입양기관에서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 전부다.
“입양기관에 여러 번 전화해서 엄마의 이름과 (출생 당시) 주소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기록에 담긴 다른 내용은 말해줬지만 이름과 주소는 ‘산모의 사생활보호 차원에서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직접 찾아갔더니 엄마 이름과 본적을 가린 출생증명서를 보여줬다. 나중에 다시 찾아가서 어렵사리 서류를 복사해 받을 수 있었다.”
2012년 8월부터 시행된 입양특례법에 따르면, 입양인이 중앙입양원 또는 입양기관이 보유한 본인 관련 입양 정보를 공개해달라고 청구할 경우 두 기관은 친생부모의 동의를 받아 공개해야 한다. 친생부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친생부모의 인적사항을 제외한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제36조 ‘입양정보의 공개 등’). 소냐 씨를 비롯한 많은 입양인이 친부모의 이름조차 쉽게 알아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친생부모의 동의’ 때문이다.
“입양기관에서 ‘입양인들은 부모를 찾고 싶어 하고, 친생부모들은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어 해 양측의 입장이 충돌한다’고 했다. 부모의 사생활만 중요한가. 내 권리는 왜 보장해주지 않는 건가.”
신공덕동 조산소
소냐 씨는 입양기관에서 받은 기록을 통해 태어난 지 30여 년 만에 출생 당시 상황, 입양 전 한국에 머문 흔적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가 보여준 출생증명서와 입양아동조서 복사본의 내용은 이러했다.
‘출생아의 모(母) 김순자. 나이 만 21세. 본적 경기도. 산모 주소 경기도 ○○(시). 출생장소 마포구 신공덕동 139-13 이정숙조산소. 출생일시 1979년 2월 10일 오전 5시 35분. 성명 김은영(金銀英). 출생아의 건강상황 체중 3.9㎏ 키 50㎝. 아동의 체구 보통. 건강상태 우(수). 친부(親父)는 친모(親母)가 말하지 않음으로 일절 미상. 아동 인상은 둥근 용모에 건강한 여아. 머리숱 많고 까만 머리가 매력적임. 우유를 매우 힘차게 잘 빨며 소화력이 좋고 잠을 잘 잔다. 매일 목욕하는데도 울지 않고 기분 좋아한다….’
조산소에서 작성한 출생증명서.
“집 안까지 들어가 볼 순 없었지만 그래도 동네에서 출산을 도와준 분(조산사)의 여동생을 만났다. 그분께 조산소 기록이 남아 있는지 물어봤지만 모른다고 했다. 나이 든 동네 분들 중에는 조산소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할머니 한 분이 ‘너희 엄마를 꼭 찾으면 좋겠다’고 꽉 껴안아주셨다. 낯선 사람을 스스럼없이 안아주는 동양적 정서가 좀 생경했지만 좋은 느낌이었다. 안쓰러워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전해졌으니까.”
소냐 씨가 14개월 전 딸을 출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자신을 나아준 ‘엄마’였다고 한다.
“출산할 때 ‘엄마가 옆에 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에 몹시 아쉬웠다. 양부모님이 옆에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양아버지는 네덜란드에 계시는데, 양어머니는 내가 19세 때 돌아가셨다.”
소냐 씨는 양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스스로 돈을 벌어 네덜란드에서 대학(학사·석사 통합과정)을 마쳤다. 졸업 후 한국에 오기 직전까지는 주(駐)대만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일했다. 그가 안정적인 직장까지 버리고 다시 이 땅을 찾게 한 절실함은 어떤 것이었을까.
‘내가 받아들여지는 느낌’
한국사회봉사회가 입양 보낼 당시 찍은 소냐 씨 사진 (생후 3개월).
네덜란드에서 사는 남동생은 소냐 씨와 달리 친부모 찾기에 관심이 없다. 입양인 대다수가 남동생과 마찬가지다. 소냐 씨는 그 이유를 “친부모를 찾아야 하는 고통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입양기관에서 해준 얘기인데, 어렵게 친부모와 연락이 닿아도 상당수가 입양인을 만나려 하지 않고, 비밀이 보장되는 공간에서 만나게 해주겠다고 설득해도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배우자와 사별했거나 혼자 사는 친부모는 입양인을 만나려 하지만, 가정을 이루고 사는 친부모는 대부분 이제 와서 가정의 평화가 깨질까봐 선뜻 그러지 못한다. 그런 얘기를 듣는 순간 입양인은 좌절하고 친부모로부터 두 번 버림받는 느낌을 갖는다. 태어나서 한 번, 성인이 돼서 또 한 번. 그런 게 두려워서 친부모를 찾지 않는 입양인도 많다.”
철도회사에 근무하는 양아버지와 주부인 양어머니 밑에서 평범하게 자란 소냐 씨는 “어릴 때 행복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다. 평소 과묵하지만 화가 나면 다혈질이 되는 양아버지와 점잖고 내성적인 양어머니의 성격 차이로 인해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기 때문. 책에 파묻혀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소냐 씨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다.
“학교 친구나 동네 아이들이 나를 ‘칭크(Chink·중국인을 비하하는 호칭)’, ‘차이니즈 어글리(Chinese Ugly·못생긴 중국인)’라며 놀렸다. 어른들 중에는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느꼈다. 그래서 해외 입양인들은 한국에 오고 싶어 한다. 외모가 비슷하고 같은 피가 흐르니 내가 받아들여지는 느낌이랄까.”
입양정보 공개청구
신언항 중앙입양원 원장에 따르면, 한국인은 해외 입양인을 이방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참 안됐다’고 생각하다가 막상 접촉해보면 의사소통이 쉽지 않고 사고방식마저 달라 자신과 다른 이방인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 신 원장은 “우리 사회에서 탈북자나 다문화가정을 바라보는 시각도 입양인을 보는 그것과 비슷하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매김’하려는 경향이 있다. 편견도 존재한다”며 “그들을 ‘우리 사회가 보듬어야 할 사람’으로 여기는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해외 입양인들이 모국에 와서 자기 뿌리를 찾고 싶어 한다면 우리에겐 그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2011년 개정된 입양특례법에 따라 설치·운영되는 중앙입양원에 따르면, 최근 한국을 찾는 해외 입양인 수가 크게 늘었다. 현재 700여 명이 국내에 들어와 장·단기 거주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입양원은 그들을 위해 모국방문 지원, 모국 문화체험 지원, 한국어 교육 지원, 적십자병원을 통한 의료비 지원 사업 등의 ‘사후관리 사업’을 펼친다. 특히 중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국내 4대 입양기관(홀트아동복지회·동방사회복지회·대한사회복지회·한국사회봉사회)이 보관하고 있는 국내외 입양인 자료를 한데 모으는 일이다.
4대 입양기관이 보유한 국내외 입양인 기록은 24만여 건으로 추정된다. 중앙입양원은 지난 2년간 그중 3만5000건을 데이터베이스(DB)화했고, 올해에도 4만4000건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다음은 신 원장의 설명.
“4대 입양기관 외에 폐업한 기관이 갖고 있던 입양인 관련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개인이 입양 기록 100여 건을 보관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 자료를 찾기 위해 직원들이 전국을 수소문하고 있다. 아무리 사소한 기록이라도 입양인에게는 정체성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소중한 자료다. 스웨덴 입양인이 지난해 한국에 와서 자신이 거쳐간 일시아동보호소와 보육원 기록을 찾았는데, 거기에 ‘자랄 때 울지 않고 성격이 무난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걸 보고 마치 친부모를 찾은 것처럼 기뻐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우리가 DB 구축에 힘쓰는 이유다.”
소냐 씨는 “한국은 IT(정보기술)산업 수준이 세계 최고인데, 엄마 이름과 나이, 본적과 당시 살던 주소 일부가 남아 있는데도 왜 친부모를 찾을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입양기관에서 친부모를 찾고도 못 찾았다고 하는지, 진짜 못 찾은 건지 궁금하다”고 답답해했다.
그는 아직 우리말이 서툴러 대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나 e 메일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 때문에 인터뷰 약속을 잡는 데도 기자와 50건이 넘는 문자를 주고받아야 했다. 친부모 소식을 몰라 답답해하는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입양인이 친부모를 찾으려면 자신을 입양 보낸 입양기관이나 중앙입양원을 방문하거나 e 메일로 입양정보 공개청구를 해야 한다. 신청서를 작성하고 신분증사본을 제출하면 된다. 친부모의 소재지 파악 등은 행정정보망을 갖춘 중앙입양원만 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해놓았기에 신청서를 접수한 입양기관은 중앙입양원에 의뢰해 결과를 받아야 한다. 이때 얻은 친부모의 정보를 입양인에게 알려줄 순 없다. 입양기관 또는 중앙입양원이 양쪽 만남을 주선한다. 복수의 입양기관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입양기관이라 해도 친부모의 휴대전화 번호까진 알 수 없다. 대신 현재 거주지가 파악되면 등기우편물을 보낸다. 사실 그것만 해도 친부모나 기관 처지에는 민감한 부분이다. 친부모의 현재 가족이 배우자 또는 부모의 과거를 모를 경우 우편물 때문에 입양 사실이 알려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가장 답답할 때는 연락이 닿아도 회신이 없는 경우다. 입양인을 만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경우에도 입양인에게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21세 미혼모였던 엄마
취재 결과, 소냐 씨의 경우 입양기관이 중앙입양원에 자료 조회를 의뢰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사회봉사회 담당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친부모의 주민등록번호가 있으면 좋지만 그게 없다면 최소한 친부모 이름과 생년월일, 출산 당시의 정확한 주소가 있어야 중앙입양원에 조회를 의뢰할 수 있다. 소냐 씨의 경우 친모의 이름과 나이 외에 주소가 ‘경기도 ○○(시)’로만 돼 있어 자료 조회를 의뢰할 수 없었다. 안타깝다.”
중앙입양원 관계자는 “정확한 이름이 있고 주민번호나 본적지 주소 또는 출산 당시 거주지 주소가 한두 군데 틀린 경우는 우리가 경찰에 협조요청을 해서 친부모를 찾는 경우도 있다. 소냐 씨 사례는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입양특례법 시행 후 영아 유기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친부모가 아이를 몰래 버리면서 자신의 인적사항이나 연락처를 남기는 경우는 없다는 게 신 원장의 말이다.
“1980년대 초까지 미아(迷兒)나 기아(棄兒)가 많이 발생했는데, 부모를 못 찾고 경찰서나 일시보호소에 맡겨졌다가 입양되면 아이 이름을 입양기관에서 지어주곤 했다. 주소지도 입양기관으로 기록한 경우가 많았다. 착오로 입양인의 출생 배경이나 친부모 정보가 정확히 기록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아쉬운 점은 입양특례법상 친부모 외에 친척까지 범위를 확대해 정보를 조회할 수 없다는 것. 가령 외할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입양에 동의한 경우 외할머니 이름으로 정보를 추적할 수 없다.”
소냐 씨의 입양 기록에 따르면, 친모는 친부와 정식결혼이나 약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낳았다. 친부모는 소냐 씨가 태어나기 6개월 전에 헤어진 걸로 돼 있다. ‘특기사항’에는 ‘21세 미혼모가 사생아 분만 후 조산소에 두고 가면서 ‘좋은 가정 양자 보내달라’고 부탁한 뒤 퇴원해버려 조산소에 의해 맡겨졌다’고 기록돼 있다.
“엄마는 나를 낳고 조산소를 떠났고 며칠 뒤 나는 입양기관으로 보내졌다. 그래서 ‘김은영’이라는 내 이름도 엄마가 지어준 게 아닌 것 같다. 미혼모인 엄마가 나를 키우지 못한 걸 이해한다. 엄마가 현재의 가족 때문에 나를 만날 수 없다면,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을 받아들일 거다. 하지만 친부모에 대해 알고 싶고 찾고 싶은 건 내 권리다. 그래서 편지 한 장만은 꼭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엄마 얘기를 듣고 싶다.”(소냐 씨)
‘출생도시 : 서울’
2014년 보건복지부통계연보에 따르면 국내외 입양아동 수는 2011년 3231명, 2012년 3562명이다. 2013년에는 3899명인데, 1641명이 국내에 입양됐고 2258명이 해외로 입양됐다. 해마다 입양 아동도, 해외 입양도 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을 떠난 해외 입양인 16만여 명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일까. 소냐 씨는 말한다.
“내가 태어난 곳이라 나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딸을 낳았고, 딸의 미들네임도 ‘애령(愛嶺)’이다. 네덜란드에서 처음 여권 만들 때 ‘출생도시’가 ‘서울’이라고 돼 있었다. 그때는 서울을 잘 몰랐기 때문에 이상한 느낌이었다. 이제 딸도 여권을 받으면 출생지가 ‘서울’로 기록될 거다.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