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호

시마당

고등학교 동창들을 서울에서 만나면

  • 입력2018-05-09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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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집이나 직장에서는 그러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강남 한복판에서 고래고래 사투리를 썼지
    조금은 불편해지려고 했다 너희가 사투리로
    자의식을 확인하는 자들이여 절대로 잊지 못하는
    사투리여 왕따의 기억처럼 죽이고 죽여도
    되살아나는 빌어먹을 사투리여
    염병할 뉘앙스여 괘씸한 톤이여 공동체여
    너나없이 쓸데없이 맥락 없이 욕을 뱉고 술잔은
    이리저리 세상 바쁘고 이것이 몇 년 만일까
    아마도 집이나 직장에서는 그러했겠지 예전에
    착한 학생이었고 놀 때는 놀았고 의리도 있었지만
    지금은 강남대로에서 택시 하나 못 잡는다
    이왕 모였으니 좋은 데를 갈까 하는 녀석은 여기에도 있고
    미안하지만 부끄럽다 죄송하지만 기억이 안 나요 반말이
    어색해요 하지만 사투리는 편하지 감각에 우정을 맡기고
    기억을 추렴해 보지만 사투리만 기억난다
    너희 얼굴은 이름은 번호는 성적은
    몇 년 만이냐 이러한 폭력은
    없었다 다들 성공해서 서울이나 서울
    가까운 곳에서 배우자와 자식과 먹고살고
    있구나 명함을 나누자 인맥이 생기며 근거가 생기고
    공동체도 생기고 자의식도 생기고 사투리가 없어진다
    병원에 있는 친구여 연락을 하겠다
    법원에 있는 친구여 연락을 하겠다
    전화기를 붙잡고 사투리로 내가 그때
    부끄러웠다
    용서해 달라
    하는 친구는 없었고
    숨 가쁜 우정의 무대 위로 꺼냈던 반지갑들이
    바짝 접히고 있었다

    서효인

    ● 198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
    ● 2006년 ‘시인세계’에 ‘어린 송아지가 온다’ 등 발표하며 등단
    ●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여수’, 에세이집 ‘잘 왔어 우리 딸’ 등 출간
    ● 김수영문학상(2011), 대산문학상(2017), 천상병시문학상(2018)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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