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덩샤오핑과 쓰촨 요리의 공통점은 ‘실속’에 있다. 쓰촨 출신 덩샤오핑은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그저 ‘쥐 잘 잡는 고양이’가 되고자 했고, 쓰촨 요리는 돼지고기 · 두부 · 가지 등 흔한 재료로 한 끼 식단을 푸짐하게 만든다. 쓰촨의 ‘실용’은 효율보다는 삶의 ‘윤택’에 가깝다. 내일의 중국에 중요한 힌트를 주는 것은 분명 쓰촨이리라.
청두시장 푸줏간에서 만난 상인.
“왜 그렇게 웃어요?”
“우리 고향은 공룡이 발견된 것으로 유명한데, 중국에서는 못생긴 여자를 공룡이라 부르거든요. 그래서 우리 동네 여자들에겐 못생겼다는 이미지가 있어요.”
그 말이 겸손한 농담으로 들릴 만큼 그녀는 예뻤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나보다.
“베이징에 가면 자신의 지위가 낮음을 깨닫게 되고, 쓰촨에 가면 자신이 너무 빨리 결혼했음을 깨닫게 된다.”
天府之國
쓰촨 여자를 ‘촨메이쯔(川妹子)’라고 한다. 강가에 사는 누이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그 별칭이 아깝지 않게 쓰촨 여자들은 강물이 흐르듯 활달하고 냇물이 흐르듯 끊임없이 조잘거린다. 쓰촨성의 약칭 ‘내 천(川)’과 참 잘 어울린다. 쓰촨(四川)은 송대 행정구역인 천협사로(川陝四路)의 줄임말이다. 장강(長江), 민강(岷江), 타강(타;江), 가릉강(嘉陵江)의 4줄기 강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쓰촨은 험준한 산속에 거대한 평야가 있는 분지다. 풍부한 강물이 땅을 촉촉하게 적셔주고 기후가 온화해 온갖 동식물이 잘 자란다. 굳게 닫혀 있지만 막상 문을 열면 풍부한 물산이 넘쳐나는 곳이라 천부지국(天府之國), 즉 ‘하늘의 곳간’이라 불렸다. 얼마나 물산이 풍부해야 하늘의 곳간이 될 수 있을까. ‘전국책(戰國策)’은 말한다. “전답이 비옥하고 좋으며, 백성이 많고 재물이 풍부하며, 만 승의 전차를 구비해 떨쳐 일어나면 백만대군을 일으킬 수 있고, 비옥한 광야가 천 리나 뻗어 있고, 축적된 재물이 넉넉하며, 지세가 편안한 곳을 일러 천부(天府)라고 할 수 있다.”
이토록 좋은 땅에 촉인(蜀人)들이 살았다. 쓰촨의 또 다른 약칭 ‘나라이름 촉(蜀)’은 벌레가 머리로 실을 토해내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원래 누에를 뜻했다. 촉인들이 누에를 숭상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촉에선 일찍이 양잠업이 발달했다.
풍요로운 경제 덕분에 촉은 상주(商周) 시대에 이미 고도의 청동문명을 발달시켰다. 촉의 삼성퇴 도성은 상나라의 초기 도성보다 크고 중기 도성과 비슷하다. 삼성퇴의 유물은 중원의 유물과 판이하다. 상의 유물이 추상화한 기하학적 문양의 제기(祭器)인 데 반해 촉의 유물은 사람, 새 등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높이 2.6m, 무게 180kg의 청동상 등 규모도 크고 조형미도 뛰어난 삼성퇴 유물을 보면 촉의 탁월한 예술과 정교한 기술에 감탄하게 된다. 부리부리한 눈의 청동상은 중원보다는 오히려 마야 문명을 연상케 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촉의 국력은 중원을 능가할 정도였고, 독창적 문명을 이룩했음을 알 수 있다. “잠총과 어부, 나라 세운 지 얼마나 아득한가. 그로부터 사만팔천 년 동안 진나라와 서로 왕래하지 않았네.” 이백의 노래가 과장되기는 했지만, 촉이 독자적인 긴 역사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항우를 죽인 땅
상나라는 주변 나라에서 약탈을 일삼아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신흥 강국 주나라는 이들과 동맹을 맺고 상을 정벌한다. ‘상서(商書)’에 따르면 “무왕이 상을 정벌하는 데 파촉의 도움을 받았다. 파촉의 군사들이 앞과 뒤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니 상군은 창을 거꾸로 들고 항복했다.”
그러나 중원을 장악하자 주나라는 지척에 있는 강국 촉이 불편했다. 주는 상을 정벌한 지 불과 37일 만에 촉을 공격한다. 그러나 정벌하지는 못했고, 800년 뒤에 오히려 먼저 망한다. 촉은 춘추전국시대까지 이어져 진나라 때에야 복속된다. ‘천하가 어지러워지기 전에 촉에 먼저 난리가 나고, 천하가 다스려져도 촉은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전통이 이미 이때부터 확립된 듯하다.
강병을 자랑하던 진도 촉을 정벌하기는 쉽진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진은 촉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소 석상을 만들고 꼬리에 금을 입혀 ‘금똥을 싸는 소’라고 소문을 내며 촉의 국경 앞에 갖다놓았다. 촉왕이 소를 가져오느라 진나라까지 길을 뚫자 진은 이 길을 통해 촉을 정벌했다. 촉이 스스로 길을 열어주지 않는 한 외부에서 뚫고 들어가기란 거의 불가능했음을 보여주는 전설이다.
촉의 풍부한 물자는 진이 천하통일을 이룩한 원동력이 됐다. 사서에 따르면 “촉나라가 귀속되자 진나라는 더욱 강력해졌고, 재원이 풍부해 제후들을 우습게 여겼”으니 “진나라의 6국 병합은 촉나라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중원인은 촉을 산속의 오지로만 여겼다. 항우는 천하를 장악한 뒤 눈엣가시인 유방을 촉으로 보냈다. 촉은 ‘산세가 험하고 낭떠러지에 에워싸여 나는 새들도 쉬지 않으면 넘지 못하는 곳’으로 ‘죽으러 들어가는 땅이니 아마 다시는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유방은 오히려 촉에 숨어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항우가 팽성전투에서 3만 정병으로 유방의 육십만 대군을 박살냈을 때, 소하는 촉의 물자를 최대한 활용해 유방이 빠른 시간 내에 재기하는 것을 도왔고, 유방은 해하전투로 기어이 항우를 제압했다. 유방을 죽이려고 보낸 땅이 도리어 항우를 죽인 꼴이 됐다.
항우에게 연전연패하다가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대세를 뒤집자 후한 말에 ‘어게인(again) 해하전투’를 꿈꾼 영웅들이 등장한다. 바로 제갈량과 유비다. 일세의 효웅으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변변한 세력을 만들지 못하고 떠돌던 유비는 삼고초려 끝에 제갈량을 만난다. 물산이 풍부한 익주(쓰촨)와 전략적 요지인 형주(후베이)를 얻으면 조조, 손권과 능히 견줄 수 있다는 천하삼분지계에 따라 유비는 촉한(蜀漢)의 황제가 됐다. 훗날 촉한은 형주를 잃고 세력이 크게 꺾였지만, 쓰촨 하나만으로도 중원을 차지한 위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내륙 깊숙이 위치한 ‘하늘의 곳간’은 근현대 중국에도 매우 중요하다. 일본이 만주, 상하이를 시작으로 중국을 급속히 잠식해오자 국민당은 충칭(당시 쓰촨성)에 임시정부를 세웠다. 쓰촨은 일본군이 쳐들어오기 힘들고 물산이 풍부하기에 든든한 후방이었다. 올해 중국이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맞은 것도 쓰촨의 공이 크다.
바보 셋이 제갈량보다 낫다
훗날 공산당이 국민당을 몰아내고 대륙을 차지했을 때, 중국의 중요 공업지대는 모두 연해에 있었다. 연해는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 등 미국의 세력권과 맞닿아 있기에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중국은 순식간에 모든 생산능력을 잃어버릴 판이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연해 생산기지의 일부를 쓰촨으로 옮겨 전략공업지대로 육성했다.
마침 6 · 25전쟁, 베트남전쟁 등이 연달아 일어났기에 쓰촨의 군수공장은 상당한 호황을 누렸고, 노동자에 대한 대우도 당시 중국 기준으로는 매우 좋았다. 자장커 감독의 영화 ‘24시티(二十四城記)’에 따르면, 3000만 명 이상이 굶어죽은 문화대혁명(대약진운동) 때도 이 지역 노동자에게는 매달 2근의 고기가 배급됐고, 노동자 부모는 자식이 대학에 가지 말고 평생 이곳의 노동자로 살기를 바랐다.
전략적으로 그처럼 중요한 땅이지만, 정작 쓰촨인들은 매우 평온하다. 오랜 세월 동안 산이 천하의 난리를 막아주고, 전쟁이 나더라도 후방 포지션이었기 때문인가. 쓰촨 여행 중 스페인 친구 하비에르를 만났다. 그는 쓰촨에 반해 쓰촨에서 스페인어 강사를 하며 살고 있었다. 그는 “보통 서양인들은 중국인들이 시끄럽다고 싫어하는데, 나는 오히려 편해. 아마 스페인인들도 중국인들처럼 시끌벅적하기 때문인가 봐”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쓰촨인이나 스페인인이나 먹고 마시며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교적, 외향적, 낙천적인 성격도 비슷하다. 다만 화려한 립서비스로 끝나기 일쑤인 라틴계보다는 쓰촨인들이 더 성실하고 약속도 잘 지키는 편이다.
중국의 큰 도시는 어디에나 인민공원이 있지만, 쓰촨성 성도(省都)인 청두(成都)의 인민공원이 가장 개성적이다. 구김살 없고 소탈한 청두인들이 노는 모습이 무척 흥겹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아저씨, 아줌마들이 말춤을 추다가 패션쇼 스타일의 음악이 나오니 폼을 재며 레드 카펫을 밟는다. 신선하고 유쾌한 패션쇼 워킹이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소신을 당당하고 유머러스하게 보여줬다. 한편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옆에서 요가, 서예, 합창 등 자기만의 세계를 즐기는 사람도 많았다. 물론 이들을 한가롭게 바라보며 차 한잔을 즐기고 안마와 귀청소를 받는 사람도 많았다.
쓰촨인들은 제갈량을 숭상하지만 ‘바보 셋이 모이면 제갈량보다 낫다(三個臭皮匠,頂個諸葛亮)’고도 말한다. 소박한 생활 속에서 길러진 민초들의 자신감이 대륙의 역사를 바꿔왔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고대 촉나라는 독창적이고 정교한 삼성퇴 문화를 꽃피웠다. 청두 진장(錦江)의 야경, 인민공원에서 유머러스한 패션쇼를 벌이는 쓰촨 사람들(왼쪽부터).
쓰촨의 자랑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쓰촨 요리[川菜]다. 한국인들이 중국에 와서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너무 느끼하고 기름이 많은 중국 요리다. 그러나 매콤한 쓰촨 요리는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다. 매콤함이 기름의 느끼함을 없애주고 고소한 감칠맛을 살린다.
쓰촨 요리는 재료가 싸고 구하기 쉬우며, 간편하고 신속하게 조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맛과 영양까지 좋다. 가정식으로도 최적의 조건이다. 여기서 쓰촨의 중요한 문화 코드인 ‘실속’을 발견할 수 있다. 진귀한 중국 요리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광둥 요리다. 중국의 요리 영화에서 볼 수 있듯 곰 발바닥, 상어 지느러미, 원숭이 골 등 희한한 재료를 조각하듯 멋있게 차려낸다. 그러나 쓰촨 요리는 두부, 돼지고기, 가지 등 흔하디흔한 재료를 쓴 마파두부, 회과육, 가지볶음 등이 대표적이다. 요리 초보자도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쉽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말한다. “체면치레로 대접하려면 광둥 요리를 시키고, 실속 있게 먹으려면 쓰촨 요리를 시켜라.”
중원이 내가 얼마나 잘나가는지를 천하에 널리 알리는 데 골몰한다면, 산 속의 쓰촨은 천하가 알아주든 말든 조용히 실속을 차렸다. 매콤한 삼겹살 볶음이라 한국인이 특히 좋아하는 회과육(回鍋肉)은 원래 먹다 남은 고기를 어떻게 새 고기 못지않게 맛있게 먹을까를 궁리하다 나온 요리다. 솥에서 나온 고기(肉)가 다시 솥(鍋)으로 돌아가니(回) 회과육이다. 물산이 풍부해도 낭비하지 않고 과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내실 있게 살 수 있다.
중원이 오랑캐들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만리장성을 쌓은 반면, 쓰촨은 2200년 전에 거대한 수리시설 도강언을 만들었다. 만리장성은 전시 상황이 아닌 평시에는 겉치레에 불과하지만, 도강언은 2000년 넘는 세월 동안 전시에도 평시에도 풍부한 작물을 선사했다. 중원이 용이나 호랑이를 숭상할 때 촉이 숭상한 것은 누에다. 폼 나는 동물보다 보잘것없어 보여도 비단을 만드는 누에를 숭상한 것도 실속을 중시하는 쓰촨인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제갈량이 쓰촨인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실속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천재 전략가 이전에 명재상이었다. 도강언의 수리시설을 보강해 “평년만 돼도 다른 곳의 풍년이요, 흉년도 다른 곳의 평년”이 되도록 했다. 제갈량은 촉의 특산물인 비단 생산을 장려하고 염색 공정을 개량했다. 적대국인 위마저 촉금(蜀錦)을 수입했으니, 위의 돈이 위를 치는 군자금으로 흘러들어간 셈이다.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 바로 옆이 비단 직조공들이 모여 살던 비단마을 진리(錦里) 거리인 것도 제갈량과 비단의 각별한 사이를 보여준다.
또한 제갈량은 제염, 제철업을 육성해 경제를 발전시켰고, 공평무사한 법집행을 통해 상을 줘도 시기하는 이가 없고 벌을 받아도 억울해하는 이가 없었다. 제갈량이 군사 천재이기만 했다면 결코 오늘처럼 뭇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청나라 철학자 왕부지(王夫之)의 평가대로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
동틀 무렵 아미산의 금정(金頂), 쓰촨 어린이의 밝은 미소.
철학 없는 철학
실속을 중시하는 쓰촨이 배출한 또 다른 큰 인물은 바로 덩샤오핑(鄧小平)이다. 이름부터가 얼마나 소박한가. ‘작고 평범한 덩씨’라는 뜻이니. 이름값 하듯 덩샤오핑은 150cm의 아담한 키에 질그릇처럼 투박했다. 그에게는 후난인 마오쩌둥의 위풍도, 장쑤인 저우언라이의 준수함도 없었다.
덩은 중국공산당의 초창기 멤버로서 거의 평생을 공산당과 영욕을 함께했다. 그 과정에서 군사, 정치, 외교 등 다양한 일을 해냈지만, 사실 어떤 분야에도 전문가가 아니었다. 개혁 · 개방을 이끌었으니 경제에 밝을 거라는 인상과 달리 덩샤오핑은 “나는 경제학 분야에 문외한”이라고 자인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대세와 핵심을 파악하고, 단 한마디의 슬로건으로 표현하는 일에 능했다. 항일전쟁 시기에 덩은 “먹을 것을 가진 자가 결국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했고, 경제가 피폐해진 대약진운동 때는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무슨 상관인가.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며 핵심을 찔렀다.
그의 정책은 복잡한 계산이 아니라 명쾌한 상식을 통해 나왔고, 적절한 인사관리를 통해 추진됐다. 모든 일에 대세와 사람들의 욕구를 따랐고, 자신은 물꼬를 트고 수위를 조절하는 일에 힘썼다. 그래서 덩샤오핑은 그리 힘들여 일하지 않고 주위를 닦달하지 않으면서도 탁월한 성과를 거뒀다. 중국 제왕학에서 강조하는 ‘무위의 치(無爲之治)’를 실천한 셈이다.
덩샤오핑은 정치적 안정을 중시해 “오직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기실 그 자신은 특정한 주의와 사상에 경도되지 않았다. 생사를 넘나드는 대장정 중에도 ‘자치통감’을 애독했고, 시를 즐겨 지었으며, 사상적 무장에도 투철했던 마오쩌둥과 달리 덩은 역사와 고전, 사상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에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 마르크스, 엥겔스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평가를 내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난 세기의 사람들이다.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다시 살아나서 오늘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는 마오쩌둥의 고향 후난성에서 사회주의 교육에 힘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슬쩍 비꼬기도 했다. “사회주의 교육이라고? 교육에 참여하는 인민들을 먼저 잘 먹여서 굶주리지 않게 해주게.”
덩샤오핑이 외교 노선을 천명한 24자 방침에는 그 어떤 사상과 가치도 찾아볼 수 없다. 외교정책이라기보다 오히려 동양 처세술의 핵심을 요약한 듯하다. ‘상황을 차분하게 관찰하고, 우리 자신의 입지를 지키며, 신중하게 대처하고 때가 이르기 전까지 자기를 노출하지 않으며, 굳게 지키고 먼저 나서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실용주의가 ‘이론 없는 이론’인 것처럼 덩샤오핑주의가 ‘철학 없는 철학’이라는 평가는 꽤 적절하다. 덩 자신도 검은 고양이나 흰 고양이가 되기보다는 쥐를 잘 잡는 고양이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진정한 사치
덩의 성격 역시 쓰촨인의 실용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덩샤오핑이 소년 시절 동향 친구들과 함께 프랑스 유학을 갈 때 상하이 조계지에서 ‘중국인과 개는 출입금지’란 팻말을 보았다. 한 소년이 격분해 팻말을 떼어버리려고 했다. “여기는 중국 땅인데 중국인들을 개처럼 취급하다니!” 그러나 다른 친구 한 명이 말렸다. “바보 같으니라구! 그 빌어먹을 나무조각 하나 떼버린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니?” 이름에 집착하지 않고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쓰촨인다운 태도다.
그런데 쓰촨의 실용주의와 자본주의적 실용주의는 다른 측면이 있다. 자본주의는 최대한의 효율, 최대한의 속도를 강조한다. 일찍 개혁 · 개방을 한 광둥성이나 상하이는 자본주의적 실용주의가 강한 편이다. 그러나 쓰촨의 실용주의는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실용주의다. 무엇을 위해 잘살려고 하는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 그만이다.
따라서 쓰촨의 실용주의는 최대한 돈을 버는 것에 있지 않다. 주어진 여건에 따라 적당히 돈을 벌고 불필요한 낭비는 하지 않되 인생을 누릴 수 있는 일에는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 사서에 따르면 촉인들은 예부터 “농사에 부지런하고 사치하기를 바라며 문학을 존중하고 오락을 좋아한다” “음악을 좋아하고 고민을 적게 하며 사치하기를 즐기고 허황된 칭찬에 기뻐한다”고 했다.
그러나 쓰촨인이 진정 사치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 인생의 유일한 자원인 시간이다.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정 자체가 중요한 경험이다. 마찬가지로 인생 역시 하나의 특정한 목적,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살기보다 삶의 매 순간 순간을 즐겁게 보낼 때 한결 풍요롭게 살 수 있다.
그래서 바쁘게 살아가는 중국인들은 쓰촨에 반한다. “이렇게 느긋할 수가(好安逸)?!”라며 왜 바쁘게 살아야 했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살던 자신의 인생을 되짚어본다. 중국은 그동안 급속한 성장을 이뤘지만 그 와중에 피로와 고단함도 심각하게 쌓였다. 이제 삶의 질을 되돌아보기 시작한 중국인들은 쓰촨성을 주목한다.
‘주관적 지표’ 우수한 도시
2014년 베이징대에서 졸업생을 대상으로 가고 싶은 도시를 설문조사한 결과 청두는 상하이, 선전을 앞질러 3위를 차지했다. 아시아개발은행의 거주 적합도 조사에서 청두는 중국 33개 도시 중 1위였다. 청두는 대기, 수질, 환경관리 등 객관적 지표와 쾌적함, 여유로움, 느린 생활리듬 등 주관적 지표가 모두 우수한 도시다. 쓰촨의 자랑인 요리는 두말할 나위가 있을까. 인터넷 포털 텅쉰(騰訊)이 2013년 1000만여 네티즌에게 행복도 조사를 했을 때, 음식 영역에서는 쓰촨이 단연 1등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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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푼의 돈을 더 벌기보다 한 마디의 말을 사람들과 더 나누려고 하는 곳, 한 등급 위의 지위를 탐하기보다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리려 하는 곳. 쓰촨은 내일의 중국에 중요한 힌트를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