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호

특집; 파국적 한일관계

[인터뷰] ‘한일관계 석학’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

“청와대·외교부 아마추어리즘이 문제” “인권 중심 新한일체제로”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19-04-2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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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교부, 끌려다니고 얻어터지고 역사인식도 없어

    • 반일 넘어선 평화적 대일 정책 만들어야

    • 3·1운동은 풀뿌리 세계 평화운동의 원점

    • 한국병합 강제성 인정한 간 나오토 담화 기억해야

    • 일본 의회, 강제병합조약 원천 무효 의결하라

    [홍중식 기자]

    [홍중식 기자]

    한일 양국 관광객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지만 외교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고 있다. 위안부 합의 파기 문제와 강제징용 배상 판결 등 과거사뿐 아니라, 일본의 교과서 역사왜곡, 레이더·초계기 갈등 등 외교·군사·경제 문제까지 산적해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해서는 남북관계뿐 아니라 한일관계도 순조로워야 한다. 

    정부의 허술한 외교와 달리 한일 시민사회에서는 그 해법의 일단을 찾기 위해 활발히 공조하고 있다. 3월 29일 서울 종로구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는 한일 지식인들이 모여 한일관계의 새로운 100년을 모색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여기에는 일본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이홍구 전 국무총리,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 등이 대거 참석했다. 

    이에 앞서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1운동 100년 기념 범국민대회’에선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과 시민사회 리더들이 함께 ‘3·1운동 100주년 기념 한일시민공동평화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3·1운동은 풀뿌리 평화운동”임을 강조하며 그 정신을 좇아 양국 시민의 직접 평화운동의 일환으로 새로운 한일관계를 만들자고 강조했다. 평화선언문은 “시민 부재의 한일관계에서 시민 주도의 관계로 전환”하자면서 정부 주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시민 주도 한일관계로

    “우리는 아시아 국가 간 혹은 정부 간의 교류 협력을 기대하고 있으나, 국가 간 혹은 정부 간 협력에만 맡겨둘 수만은 없다. 시민의 투표로 정부가 구성되어 정부가 시민의 뜻을 반영해주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지만, 거대 권력은 거대 자본, 제도 언론과 결탁하여 외부에 적을 만들어 시민에게 권력의 뜻을 따르도록 강제하는 역류현상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남·북간, 일·중간, 일·북간, 한·일간 ‘적 만들기’ 게임이 빈번히 발생하여, 적대적 상호 의존 관계로 각국의 수구적 정치기반을 강화하고 있다.”(‘평화선언문’ 가운데) 

    한일 시민사회는 시민의 직접 평화운동인 3·1운동이 한일관계를 풀어가는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영호(79) 전 산업자원부 장관(김대중 정부)은 2010년 일본의 강제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과 양국 지식인 1200명의 공동 서명, 그리고 이번 한일시민평화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는 김 전 장관을 4월 4일 ‘신동아’ 인터뷰실에서 만났다. 김 전 장관은 일본 오사카시립대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도쿄대 정교수, 아사히신문 포럼21 위원, 일본 경제학자들이 뽑은 ‘애덤 스미스 이래 100대 세계 경제학자’(1997년), 유한대 총장,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단국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현재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이사장, 동북아평화센터 이사장, 경북대 명예교수로 있다.



    나치 극복하고 강대국 된 독일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왼쪽에서 세 번째) 등 한일 지식인과 시민사회 리더들이 3월 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에서 동아시아 평화선언을 발표했다.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 페이스북]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왼쪽에서 세 번째) 등 한일 지식인과 시민사회 리더들이 3월 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에서 동아시아 평화선언을 발표했다.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 페이스북]

    -3·1운동이 한일관계를 풀어가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고 보시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3·1운동에서 특히 감동받은 것은 그 운동의 핵심인 3·1독립선언서가 ‘반일’ 개념을 넘어 동양 평화를 위해 함께 손을 잡자는 평화운동이었다는 점입니다. 요즘 일본 지식인 중에 여기에 감복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모든 언행도 ‘반일’ 차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오히려 동양평화를 강조하여 일본을 포용하고 있지요. 안중근 의사의 유묵 가운데 ‘日韓交誼 善作紹介(일한교의 선작소개·한일 친선은 서로를 잘 아는 데서 생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한일’이 아니라 일본을 앞에 둔 ‘일한’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안중근 의사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생각해요. 즉 3·1운동은 반일의 차원을 넘어선 독립운동이었다는 점을 상기하고, 현재 한일관계에서도 반일을 넘어서 더 큰 목적으로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반일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반한(反韓)과 혐한(嫌韓) 외교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반일을 넘어선 대일정책이란 어떤 것일까요. 

    “예컨대 미중 무역전쟁 와중에 ‘새우등’이 되지 않으려면 한일이 공동대응해야 한다는 논리가 가능할 겁니다. 둘째, 아시아 시민사회의 힘을 모아 북한의 비핵화 문제를 동북아와 아시아 시민사회의 공동 이슈로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역사 문제에 모든 것이 매몰될 정도로 현실이 단순하지는 않습니다만, 역사 문제에서도 반일 차원을 넘어설 철학과 전략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 덴마크 코펜하겐에 갔다가 시내에서 흑인 여성의 동상을 우연히 봤습니다. 표지석에는 ‘I am Queen Mary(나는 메리 여왕이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덴마크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저항하던 흑인 여성을 불태워 죽였는데, 그때 희생된 이 가운데 메리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여성의 동상을 세워 여왕과 동급으로 높이고 사죄의 뜻을 표시하고 있다는 점은 정말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덴마크에 대한 신뢰도를 엄청나게 높이고 있습니다. 서독이 유럽 지도국가로 떠오른 것도 나치즘에 대한 철저한 극복 의지와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독일이 유럽에서 도덕적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었습니다. 일본도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청산하는 것이 아시아와 세계에서 도덕적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는 계기가 될 겁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그런 길을 갈 수 있도록 반일을 넘어 과거사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끊임없이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부족해 아쉽습니다.”

    ‘중국이여 조선인에게 배울지어다’

    -3·1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평화의 원점이라고 주장하시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세계 평화운동은 파리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입니다. 윌슨 미국 대통령이 이 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주체가 된 위로부터의 세계 평화 만들기여서 한국 같은 식민지와 손잡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대척점이 풀뿌리로부터 시작된 3·1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손을 내밀자 그동안 가만히 있던 아시아 식민지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저마다 일어난 것입니다.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 필리핀의 독립운동, 베트남의 민족해방투쟁, 그리고 인도 독립운동으로 연쇄반응을 일으켰습니다. 만일 3·1 운동이 지향했던 것처럼 식민지 독립운동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결합이 이뤄졌더라면 포스트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탈식민주의)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 후가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파리강화회의를 계기로 열렸겠지요. 하지만 식민지 독립운동과 민족자결주의가 결합되지 못하자 파리강화회의는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패전국의 식민지를 갈라먹는 게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 해도 풀뿌리 평화운동인 3·1운동은 위로부터의 정부간 평화운동과의 접목을 시도했고 그것이 다른 나라 독립운동에도 큰 자극을 줬기 때문에 20세기 평화운동사에서 가장 오래 되고 빛나는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한국이 3·1운동으로 세계사적 역할을 하게 된 동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함석헌 선생은 3·1운동에 대해 ‘한국인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한국인이 짊어지고 있던 짐의 위대성 때문에 위대한 일이 가능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중국 5·4운동 추진자들도 한국인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독립 만세를 외치는 소리를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5·4운동 지도자인 천두슈(陳獨秀)가 ‘국민’이라는 잡지의 3·1운동 특집호에 ‘3·1운동은 세계 혁명사의 위대한 새 혁명’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조선인이여 위대하도다, 중국인이여 부끄럽도다, 중국인은 오체투지 하여 조선인에게 배울지어다’와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베이징대 도서관에서 그 자료를 봤을 때 너무나 감동해서 혼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올해 3·1운동 100년을 맞이해 발표한 한일 시민의 동아시아 평화선언은 65년체제에서 신한일체제로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신한일체제란 무엇인지요. 

    “저는 3·1운동 100주년에 국내에서 어떤 행사를 하는 것보다 어떤 메시지를 내놓아야 하느냐에 관심이 더 있었습니다. 한일시민평화선언도 그래서 추진했던 것입니다. 

    1965년 이뤄진 한일기본조약(7개조로 구성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이에 부속된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등 4개의 협정 및 25개 문서)은 냉전 시대의 군사정권이 일본을 상대해서 맺은 조약이었습니다. 이 65년체제는 전쟁범죄는 추궁하되 식민지 범죄는 건드리지 말라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하위체제입니다. 이 강화조약이 모법(母法)이 되고, 거기서 파생된 겁니다. 그리고 냉전체제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신한일체제’는 식민지 범죄를 묻고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적 기반 위에 선 체제를 말합니다. 위안부, 강제징용,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 등을 모두 인권 차원에서 해결하는 거지요.”

    한일월드컵, 새 시민의식

    김 전 장관은 1989년부터 65년 체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언론 기고 등을 해왔다. 일본 정부 내에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93년 고노담화에서부터였다. 당시 고노 관방장관은 위안부에 대한 조사 발표에서 식민지 범죄의 하나인 위안부 문제를 처음 거론했다. 그 2년 뒤 무라야마 담화(무라야마 총리의 식민지 사죄)에서는 일본이 아시아 전체에 대해 식민지의 고통을 줘서 미안하다는 내용이 발표됐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서는 한국의 식민지화에 대해 사죄한다고 표현됐다. 

    “하지만 무라야마 총리는 담화 다음 날 국회에서 한일 강제병합조약(일본에 대한제국 주권을 빼앗긴 사건.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이라고도 함)의 유효성 여부에 대해 질문 받고 ‘유효하다’고 발언합니다. 결국 미안하다는 말은 마음뿐이었고, 조선 식민지 통치는 합법적이기 때문에 법적 책임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한일 강제병합조약이 원천적으로 무효임을 일본 국회에서 인정받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제병합조약은 일본이 순종의 조칙 형태로 발표했지만, 국새도 찍혀 있지 않았고 순종의 서명도 없었기 때문에 원천 무효가 맞습니다.” 

    그러다 김 전 장관은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특별한 경험을 하면서 새로운 체제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했다.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도쿄에서 벌어진 한일 평가전에서 승리한 한국팀과 응원단이 도쿄 긴자를 달리며 승리를 만끽할 때 일본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 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몇 달 뒤 서울 명동에선 서울 시민이 일본 선수단에게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시민사회가 이 정도 성숙했으면 시민에 의한 새로운 한일관계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악의 한일관계

    “2010년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에 일본의 ‘세계’라는 잡지에서 관련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때 글을 쓰면서 동양평화론을 강조한 안중근 의사의 위대성을 새삼 절감했습니다. 그의 뜻을 따라 행동을 취해보자는 생각에 일본 친구들에게 전화해 ‘한일병합조약이 엉터리인데, 원천무효를 선언하는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을 내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와다 하루키 교수 등 일본의 지인들이 여기에 호응해 저는 바로 일본으로 가서 협의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한일 각 100명씩 서명을 받으려 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 각 600명씩 1200명을 모았습니다. 저는 이태진 서울대 교수(국사학과), 김진현 서울시립대 총장, 와다 하루키 교수 등과 함께 일본의 중진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안중근 쿠데타’라고 합니다. 그 얼마 뒤 간 나오토 담화가 나왔습니다.“ 

    간 나오토 담화는 대한제국 병합 과정의 강제성을 우회적으로 시인한다는 내용이어서 그때껏 나온 일본의 사죄 발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다. 간 총리는 담화에서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해 이뤄진 식민지 지배로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대다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여기에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을 표명” “향후 100년을 바라보면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해 갈 것” 등 전향적인 발언을 내놓았다. 

    당시 국내 언론은 간 총리 담화가 나오도록 분위기를 만든 양국의 시민사회에 주목했다. 그 전 해부터 합병 100년을 의미있게 맞기 위해 추진했던 양국 공동행사, 김영호 전 장관과 와다 하루키 교수 등 지식인의 노력 등을 조명했다. 한일지식인 1000명뿐 아니라 400명의 중국 역사학자, 구미 지식인 200명도 한일강제병합조약 불법무효 성명에 지지를 보냈다. 그러다 지난 2월초 한일지식인공동성명에 참여했던 일본측 지식인 230명이 아베정부의 식민지 범죄 은폐 노선을 비판하고 한일강제병합조약 무효성명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리고 이번 한일시민공동평화선언에서도 신한일체제의 핵심내용으로 이를 강조했다. 

    그 후 9년이 흘렀고, 지금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이다. 김 전 장관은 한국 외교부가 간 나오토 담화의 중요성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한일관계에서 간 나오토 담화가 가장 중요한데 일본은 아베 정권으로 바뀐 뒤 그것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한국 외교부가 이것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위안부나 강제징집 같은 식민지 문제에 대해 가해국인 일본이 사죄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인식을 잊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현대 세계사에서 식민지 범죄의 피해국이 가해국에게 외교적으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경우가 또 있을까요? 정말 화가 납니다. 청와대와 외교부의 한심한 아마추어리즘이 문제입니다.” 

    -외교부가 한일관계에서 역사적 기본 인식을 잊고 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한일국교정상화 기본조약 제2조에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원천 무효’라고 선언돼 있지만, 이에 대한 양국의 해석이 달랐습니다. 한국은 병합조약 등 모든 조약이 불법 무효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일본은 병합조약이 대등한 입장에서 맺어진 것이므로 체결 당시엔 효력이 ‘유효’했고, 다만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무효가 됐다고 해석했습니다. 일본의 해석대로라면 위안부나 강제징용 같은 식민지 범죄를 따질 수 없게 됩니다. 병합조약이 처음부터 무효임을 일본이 받아들이게 해야 한일 청구권협정이 폐기될 수 있고, 위안부와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 외교부에는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원천무효라는 인식이 거의 없어요. 박근혜 정부에서 당시 외교부가 대법원의 징용자 판결을 지연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한 것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다수의 국제법 교수들이 사법부자제론으로 동조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입니다. 

    2011년 한국 헌법재판소는 우리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피해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선고한 뒤 전향적인 판결이 이어졌습니다. 2018년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우리 대법원이 1인당 1억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일본이 그때까지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징용 피해에 대해 개인에게 배상 문제는 끝났다고 말해온 것을 뒤집은 거지요. 식민지 지배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문제에 대해 사법부가 판결을 내렸으면, 행정부인 외교부는 그 판결을 따라야 하는 것이 기본 임무입니다.”

    ‘을사늑약 무효’ 유엔 결의안

    김 전 장관은 그동안 일본에서 나온 한일관계의 담화나 국내 판결 등으로 인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이 전환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가장 전향적 내용을 담고 있는 간 나오토 담화도 각료 간 협의에 의해서 나왔을 뿐 국회 결의를 얻지 못했다. 

    “신한일체제는 이처럼 붕 떠있는 무라야마 담화, 간 나오토 담화 등을 담는 법적 그릇입니다. 그 그릇에 역대 총리 사죄 담화에 플러스 알파를 담자는 것이지요. 보도에 따르면 우리 정부도 일본 정부의 한국대법원 징용자 재판에 대한 협의요청에 대응하여 1965년의 청구권협정을 보완하는 역제안을 검토하고 있다는데, 이왕 하려면 신한일체제를 염두에 두고 담대한 구상을 해야 합니다. 미국도 하와이 강제 점령 100년째에 해당하는 1993년에 와서야 그것이 불법이었음을 인정하고 인권 학살에 대해 사죄하는 결의안을 국회에서 채택한 적이 있습니다.” 

    김 전 장관은 65년체제를 넘어 신한일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 정부가 직접 나서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금은 정부보다 학계나 시민사회가 나설 때라고 주장한다. 지금 한국의 국제적 고립이 심각하고 외교적 상황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정부는 철저히 준비하고 적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아베 정권이 너무 ‘터프’해서 한국의 내상 과 외상이 너무 클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나설 적기가 언제라고 예상하십니까. 

    “북일기본조약이 이뤄질 때가 좋겠지요. 2002년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한 뒤 나온 김정일–고이즈미 공동선언에서 ‘한일협약방식으로 북일협약을 한다’고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북에서 청구권방식이 아닌 배상금방식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박근혜정부 때 위안부 문제에 관한 정부간 합의에서 일본측이 정부예산으로 10억엔을 낸 것도 65년체제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방식입니다. 또 2월 28일 미연방하원에서 상해임시정부를 오늘날 대한민국의 법통으로 높이 평가하는 결의안이 제출됐습니다. 그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성격의 것입니다. 이러한 팩트들 위에서 한국이 한일협정 방식으로 북일협정을 맺는 것을 반대해야 하는데, 그런 대담한 발상의 전환이 가능할까요. 저는 1990년대에 이미 이러한 방식을 제의하는 칼럼을 동아일보에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정부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한일 기본조약이 1965년 맺어졌지만 그 2년 전인 1963년 유엔 국제법위원회(ILC)에서 ‘을사늑약(1905년 외교권 박탈 조약, 강압적으로 맺은 조약이라 늑약이라 부르기도 함)’이 불법이고 무효라는 보고서 결의안이 통과됐습니다. 이어 11월 18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안(Resolution)이 만장일치로 통과했습니다. 한일 기본조약을 추진할 때 우리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을 유엔 총회 결의안도 전혀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신한일체제를 만들기 위해 한국과 일본 시민사회가 어떤 노력을 펴고 있는지요. 

    “올해 초 평화선언 서명을 함께 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평화헌법 9조(전쟁과 국제분쟁 해결 수단으로서의 무력의 행사 포기)를 수정하려는 아베 총리의 전략에 맞서 그것을 막으려는 노력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이끄는 ‘9조의 회’(평화헌법 9조를 지키려는 모임)와 ‘총궐기 행동 실행위원회(이하 실행위원회)’가 여기에 핵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7년 일본의 헌법 관련 기념일에 도쿄시민 5만명이 국회를 포위하여 평화헌법수호를 외쳤는데 그때 제가 그들 앞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평화헌법 수호결의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 6월 7,8일 이 총궐기행동위원회가 주도할 한일 시민연대 대집회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 시민사회의 주류가 한국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아베 정권에 맞서 평화헌법 9조를 지키려는 운동이 성공하면 그것이 곧 일본의 시민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시민은 이 운동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는지요. 

    “실행위원회에서 평화헌법을 지키기 위한 일본 시민 3000만 명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이미 2000만 명 서명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6월 대집회에는 한국 시민사회 지도자들도 참가해서 한일 시민 간의 연대 행동을 처음 하게 될 겁니다. 그것은 한일시민공동평화선언에 기반한 행동 1호가 되는 겁니다. 저는 이처럼 시민의 직접 행동을 통해 아베 정권의 헌법 개정을 저지할 수 있다면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시빌 아시아(Civil Asia)’의 플랫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만들어지면 동아시아의 중산층 사회에 미치는 효과가 매우 클 것입니다.”

    ‘기억, 책임, 미래재단’

    -일본에선 징용 배상 문제의 경우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에 맡기자는 여론도 있는 것 같습니다. 

    “징용자 문제에 대한 일본 변호사들의 모임에서 지적된 흥미로운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 외무성 담당국장이 1991년 8월 일본 참의원 회의에서 ‘한일 청구권 협약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청구권은 살아 있다’고 발언한 자료가 발견된 겁니다. 이것은 개인 청구권이 아직 살아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엔에도 국가는 개인 청구권에 대해서 막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징용자 배상 문제는 국제 사법재판소에 가도 한국에 유리합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일본의 선의를 이끌어낼 선제 조처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증거가 있다고 해도 국제사법재판소에 가기보다는 한일 우호 관계에서 대화로 해결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본이 경제 보복을 얘기한다면 책임 있는 이가 나서서 ‘우리는 한일관계를 그처럼 우스운 수준이라고 생각지 않고 더 훌륭한 관계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본이 우리 정부에게 정부간 합의를 어겼다고 비난하면 일본이야말로 메이지유신 때부터 불평등조약 개정의 세계적 선도국가인데, 불평등조약은 개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당당히 주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한 수 위의 레토릭(rhetoric·수사학)이고, 전략입니다.” 

    -위안부와 강제 징용자 배상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현실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재단 설립이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한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기업, 일본 기업, 한일 정부가 기금을 낸다면 가능하겠지요. 한국 정부가 먼저 우리 정부도 돈을 낼 테니 일본 정부도 돈을 내라고 제의하면 좋겠습니다. 독일은 2000년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을 만들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의해 피해를 본 전쟁포로와 점령지 강제노동자, 강제수용자 등 1500만 명에 대한 보상작업을 해나갔습니다. 기금은 약 50억 유로(약 8조8800억 원)가 모였는데, 독일 내 6500여 기업과 독일 정부가 절반씩 부담했습니다.” 

    -한일관계를 미래 지향적이라 보십니까. 

    “감성적으로는 비관적이지만, 이성적으로는 낙관적으로 봅니다. 아베의 정책 수준이 정말 낮은데도, 한국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끌려다니고 얻어터지고 있습니다. 외교부의 뛰어난 일본통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일본 대사도 좀 더 전문적 식견이 있고, 일본 내 인맥이 두터운 이가 되면 좋겠습니다. 외교부는 천재적 외교력을 갖춘 최고의 프로페셔널 집단이 돼야 해요. 외교부 장관도 부총리급으로 격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친일파 청산과 만델라

    -한국 정부는 과거사와 미래지향적 관계는 분리하는 ‘투트랙’ 정책으로 대응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가 완전히 구별될 수 없는 점이 문제입니다. 지금 한일관계는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는 구조입니다. 아베 총리의 과거 역사 미화가 한일관계의 미래를 온통 삼키고 있지 않습니까. 과거사와 미래사를 투트랙으로 가져간다는 것은 안이한 도피입니다. 또 친일파 청산 등 정부의 과거사 적폐청산이 경직된 반일 이미지를 갖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내세운 화해정책 같은 것이 문재인 정부에 필요합니다. 만델라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흑인을 못살게 굴던 백인 대통령을 처단하지 않고 대통령 대리를 시킵니다. 또 대통령궁에 거주하게 하고 장관 5명의 제청권을 줍니다. 그러자 흑인 사회에서 불만이 쏟아졌습니다. 그때 만델라가 말합니다. ‘복수하기를 원하느냐,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느냐. 나는 나라를 세우기 원한다. 나라를 세우려면 백인의 경험과 노하우의 협력을 받아야 한다.’ 이로 인해 위기에 몰린 백인들마저 감동을 받습니다. 

    지난번 서울 광화문 3·1운동 100주년 행사장에서 대통령의 경직적인 기념사를 듣고 경찰 방어벽 밖으로 나왔는데, 거기 완전히 딴 세상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태극기부대가 진을 치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남남 분단의 현장에서 현기증이 났습니다. 문 대통령이 만델라 모델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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