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하 50~6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白夜)와 한낮에도 해가 뜨지 않는 극야(極夜) 현상이 4~5개월 이상 이어지는 곳. 지구에서 가장 척박한 땅 남극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어떻게 ‘의료 서비스’를 받을까. 남극기지의 의료 현실을 취재해봤다.
상공에서 바라본 장보고 과학기지 전경. [해양수산부 제공]
당시 남극기지 주변 바다는 아직 꽁꽁 얼어붙지 않았고, 쇄빙연구선 ‘아라온호’도 대비하고 있었다. 연구진은 즉시 환자를 가장 가까운 뉴질랜드로 후송하고 현지 병원에서 수술을 받도록 조치했다. 이 대원은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으나 판단이 조금만 늦었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최첨단 원격 협진 시스템
우리나라가 현재 운영하는 남극기지는 두 곳. 한 곳은 남극 대륙 북서쪽 킹조지섬에 자리한 ‘세종과학기지(세종기지)’다. 다른 한 곳인 ‘장보고과학기지(장보고기지)’는 남극 동남쪽 ‘테라노바만’에 있다. 세종기지는 배로 접근이 가능하고, 수시로 항공기를 띄울 수 있다. 만에 하나 사고가 발생해도 언제든 병원으로 환자를 후송할 수 있어 대원들이 스키 등 레저 활동을 즐기는 게 일부 허용된다.그러나 장보고기지는 사정이 다르다. 남극의 겨울(한국의 여름)인 매년 3~9월에는 극도로 춥고 어두워 야외 활동이 불가능하다. 이때는 바다까지 얼어붙어 쇄빙선도 들어오지 못한다. 일부 옥외작업을 제외하면 사실상 기지 안에 갇혀 지내야 한다. 이때 긴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현장에서 치료하는 이외엔 방법이 없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기 어렵다는 점이다. 기지 내에 의사가 상주하지만 한 사람이 모든 의료 분야 치료 기술을 다 알고 있을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계속 나왔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남극기지를 운영하는 ‘극지연구소(극지연)’는 ‘원격 협진시스템’ 도입을 추진했다. 우리나라와 남극기지를 인공위성으로 연결하고,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올해 1월부터 두 곳의 남극기지에 이 시스템이 도입돼 실제 운영되고 있다.
이 설비는 사실상 원격의료 시스템의 한 종류다. 환자의 생명현상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전자청진기 △혈당계 △혈압계 △의료용확대경 △심전도계까지 5종류의 의료 측정장비가 붙어 있다. 현장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동영상 카메라도 달려 있다. 이 장치는 남극기지와 극지연 협력병원인 가천의대 길병원 의료센터를 바로 연결한다. 길병원 의료진이 언제든지 남극 환자의 상태를 모니터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국내법상 금지된 원격 진료에 해당되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 현재 남극기지엔 한 명 이상의 전문 의료진이 반드시 파견되도록 돼 있다. 원격 설비는 이 의사의 진단 및 치료를 돕기 위한 장치다. 이형근 극지연 기기지원팀장은 “원격의료 장비라기보다는 의사의 협진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으로 이해하면 된다”면서 “2018년 2월 환자 후송 과정에서 의사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시스템 도입 필요성이 대두됐고, 그 결과 현장에 도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사시에는 긴급 수술도
남극 동남쪽 테라노바만에 있는 장보고 과학기지. 겨울이면 바다까지 얼어붙어 외부 이동이 어렵다. [해양수산부 제공]
2010년 남극 세종기지 23차 월동대 의사를 지낸 이어진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의무과장은 “자잘한 외과 치료는 남극기지에서 꽤 자주 이뤄지지만 보통은 수술이 아니라 ‘처치’ 수준”이라며 “손등 뼈 골절 등보다 더 큰 문제가 생기면 병원 후송 등을 먼저 고려한다”고 설명했다.
인근 외국 기지 의료진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다. 세종기지와 가까운 칠레기지의 경우 상당히 규모가 크며 의사가 상주한다. 헬리콥터 등을 이용해 이곳으로 환자를 후송한 뒤 의사끼리 의견을 나누며 병원으로 옮길지 자체적으로 치료할지를 판단하는 식이다.
장보고기지에서 환자가 발생하면 남극 대륙 남서쪽 해안에 있는 미국의 초대형 기지 ‘맥머도’로 1차 후송하는 방법도 고려한다. 이 기지는 건물 100채 이상으로 구성돼 있다. 사람이 많을 때는 1000명 이상 거주한다. 3개의 활주로가 있어 비행기 이착륙에 유리하며, 의사도 여러 명 상주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맥머도 기지로 환자를 후송한 적은 없다고 한다. 이형근 극지연 팀장은 “남극에서는 비행기가 뜰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 환자가 맥머도에서 1차 치료를 받고 한국으로 후송될 경우 운이 없으면 한 달 이상 시간이 소요되며, 비용도 수천만 원 이상 들 수 있어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고 설명했다.
남극기지는 환자 후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를 대비해 기본적인 수술 대비 태세도 갖추고 있다. 장보고기지로 파견하는 월동대원 중 일부는 유사시 의사의 수술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는다.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 생명공학 등 의학과 유사한 지식을 가진 사람 등이 의료대원으로 선발되며, 이들은 평소 유사시에 어떻게 의사를 도울지 연습한다.
가천의대 길병원에서 원격의료 시스템을 이용해 남극기지와 소통하는 모습. [극지연구소 제공]
남극에서 특히 조심할 건 ‘부상’
남극기지에서 발생하는 환자는 보통 외상환자다. 남극에서는 주위 환경이 깨끗해 일반적인 질병에는 오히려 잘 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 대원을 선발할 때 건강검사를 통해 잔병치레가 거의 없는 건강한 사람 위주로 선발한다. 국내 유일의 극지의학 전문 연구모임 ‘대한극지의학회(극지의학회)’ 소속 이민구 고려대 의대 교수는 “1988년 세종기지가 생긴 이후 26년간 의료기록 중 기록이 명확하고 온전히 보존된 19년간의 자료를 추려 분석한 결과 세종기지에서 발생한 환자 중 24%가 외상환자였다”고 밝혔다.극지의학회가 2015년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6년간 환자를 후송한 사례는 12건이었다. 이 중에도 10건이 외상으로 가장 많았다. 남극이라면 동상환자가 많을 것 같지만 동상환자는 전체의 0.25% 수준에 불과했다. 대원들이 추위에 철저히 대비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 외에는 소화기(19%) 관련 질환, 피부질환(15%), 근육통과 염좌 등 근골격계 질환(14%) 등이 종종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극지연은 이 연구 결과를 참조해 세종기지에는 일반의사(공보의), 장보고기지에는 외과의사를 주로 배치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형근 극지연 팀장은 “세종기지는 주변에 의료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지가 많고 원하면 언제든 일반 병원으로 환자를 후송할 수 있어 외과 전문의를 배치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장보고기지는 특수성을 감안해 가급적 경험 많은 의사, 그중에서도 외상 치료를 잘하는 정형외과 의사나 응급의학과 의사를 배치하려 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어떤 상황에서든 솜씨 좋게 수술을 해낼 실력 있는 의료진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형근 극지연 팀장은 “최소한 외과를 전공하고 수년 동안 트레이닝을 받은 ‘전공의’를 대상으로 남극기지 근무 의사를 타진하는데 자원자가 드물다”고 밝혔다.
정신건강 유지에도 관심
남극 의료진이 외상 치료와 더불어 크게 관심을 쏟는 건 정신건강 분야다. 백야 또는 극야가 계속되고 극한의 추위 또한 이어지는 상황에서 실내생활을 계속하면 사람은 적지 않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스트레스가 폭력으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남극을 다녀온 연구자 중에는 “초기에는 비교적 괜찮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울감이 높아져 옆사람과도 이야기를 잘 하지 않게 된다”고 토로하는 이도 있다.이헌정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과 교수팀은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세종기지 월동대 의사들과 공동으로 남극 세종기지 대원의 생체리듬과 심리상태를 분석했는데, 남극의 일조량이 크게 줄어드는 4∼9월에 대원 대부분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우울지수, 무기력지수, 공격성지수 등도 상승했다. 단 낮 시간에 태양광과 비슷한 파장의 인공광을 30분 이상 쬐면 스트레스 완화에 효과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진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의무과장(극지의학회 총무, 세종기지 23차 월동)은 “극한 환경에 노출된 환자의 치료 방법은 보통 상황에서와 달라 고려할 부분이 많다. 남극에서 얻은 극한환경 치료 노하우는 우주 및 해양, 지질탐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연구자에게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