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호

‘중고나라’와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의 별난 상생

중고거래 플랫폼 ‘결점 인정’ 마케팅 시험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9-04-19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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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인터넷 중고거래 사기 피해자의 글로벌 복수혈전을 그린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이 극장 개봉했다. ‘중고나라’는 관객에게 특별 선물을 제공하는 등 이 영화 마케팅에 동참하고 있다. 해당 플랫폼에서 벌어진 실제 사기사건을 모티프로 삼은 영화 홍보에, 중고나라는 대체 왜 뛰어든 걸까.
    국내 최대 중고거래 플랫폼 ‘중고나라’는 회원을 대상으로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 시사회를 열고 붉은 벽돌 모양 상자에 선물을 담아 제공하는 등 영화 홍보에 동참했다.

    국내 최대 중고거래 플랫폼 ‘중고나라’는 회원을 대상으로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 시사회를 열고 붉은 벽돌 모양 상자에 선물을 담아 제공하는 등 영화 홍보에 동참했다.

    “사기꾼님, 이 영화는 님 덕분에 만들게 됐습니다. 감사의 의미로 제 수익의 반을 드리려고 합니다. 극장에 오시면 제가 알아볼 수 있게 꼭 C열 8번 자리에 앉아주세요.” 

    백승기 ‘오늘도 평화로운’ 감독이 ‘사기꾼님’에게 보내는 공개 메시지다. 이 영화 주인공 영준은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노트북을 사려다 돈만 날린다. 딱 백 감독 본인 얘기다. 2016년 노트북 사기를 당해 150만 원을 잃은 그는, 사기꾼에 대한 분노를 모아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작품이다. 

    제목 ‘오늘도 평화로운’은 유명 중고거래 플랫폼 ‘중고나라’ 앞에 흔히 붙는 수식어에서 차용했다. 백 감독은 “사기를 당하고 한동안은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영화를 만들며 어느 정도 고통을 극복했지만, 여전히 사기꾼을, 꼭 한 번은 만나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 대목을 말할 때는 느릿느릿, 영화 속 영준처럼 이를 갈았다(454쪽 참고). 

    2003년 네이버 카페에서 출발한 중고나라는 기상천외한 사기 사건이 종종 벌어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중고나라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건, 여기서 택배 거래를 한 누리꾼이 약속한 제품 대신 벽돌을 받았다는 사연을 인터넷에 공개하면서부터다. 최근에도 명품백 대신 두유, 휴대전화 대신 후추를 받은 사기 피해자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각각 택배 사진을 공개했다. 판매자가 제품을 보내겠다며 돈을 받아 챙긴 뒤 대충 아무 물건이나 포장해 부친 것이다. 어이없는 사건이 세상에 알려질 때마다 누리꾼들은 ‘중고나라는 오늘도 평화롭다’는 반어적 표현으로 상황을 비꼰다. 백 감독은 바로 이 상용 어구를 작품 제목으로 삼았다.

    “재밌잖아요”

    백 감독 또한 중고나라 플랫폼에서 물건을 사려다 사기 피해자가 됐다. 그는 심지어 빈 택배상자조차 받지 못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영준이 사기를 당하는 대목은 백 감독 경험 그대로다. 자연스레 중고나라는 사기행각이 벌어지는 주무대로 영화에 등장한다. 



    백 감독은 이 때문에 한때는 ‘중고나라가 소송이라도 걸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웬걸, 영화 개봉을 앞두고 중고나라에서 먼저 마케팅 제휴 제안을 해왔다. 회사 ‘흑역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벽돌 모양 상자에 선물을 담아 관객에게 나눠주자는 아이디어도 냈다. 백 감독은 “깜짝 놀랐다”고 했고, 유승훈 중고나라 홍보실장은 “재밌지 않나”라며 웃었다. 

    “이 영화 제목을 들으면 누구나 자연스레 중고나라를 떠올릴 거다. 우리 서비스가 사람들 일상에 깊이 파고들어 있다는 증거다. 그런 점에서 같이 마케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사건을 다룬 영화라는 게 신경 쓰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백 감독님과 배급담당자분이 ‘중고나라에 해를 끼칠 영화는 아니다’라고 하시더라. 그 말을 믿었다.” 

    유 실장 얘기다. 벽돌상자 모양 이벤트 상품을 준비한 건 벽돌이 중고나라 사람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볼 때마다 ‘사기거래 예방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자’는 각오를 다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중고나라는 이 때문에 사옥 로비에도 붉은 벽돌을 전시해뒀다고 한다. 전시품 이름은 ‘적벽대전(Great War with Red Brick)’. 그 앞에 붙여둔 설명문 내용은 이렇다. 

    “때는 바야흐로 2003년, 오늘도 평화롭던 중고나라의 전쟁은 이 벽돌 하나로부터 시작되었다. 중고나라에서 택배 거래를 했는데 제품 대신 벽돌이 왔다는 ‘웃픈’ 사기 후기가 네티즌 사이에서 이슈가 되었다. 그렇게 중고나라는 ‘오늘도 평화로운 중고나라’ 타이틀을 안고 국내 최대 규모 중고거래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중고나라 임직원은 이 벽돌을 보면서 고객의 사기 피해 아픔을 함께 느끼며 사기가 영원히 없어질 때까지 기술 개발에 전의를 다진다.”

    “결점도 경쟁력”

    중고나라 사옥 로비에는 빨간 벽돌이 전시돼 있다. [사진제공·중고나라]

    중고나라 사옥 로비에는 빨간 벽돌이 전시돼 있다. [사진제공·중고나라]

    벽돌 사기는 중고거래 위험을 세상에 알린 상징적 사건이다. 동시에 그것은 중고나라 급성장의 계기도 됐다. 이 사건을 패러디한 콘텐츠가 인터넷에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은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는 인터넷 공간, 한순간도 평화롭지 않은 이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중고나라도 머잖아 세상에 다 드러난 플랫폼의 약점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전자상거래는 본질적으로 대면 상거래보다 위험하다. 대금 결제와 제품 수령 사이에 시차가 있어서다. 중고물품의 경우 구매자가 제품 상태를 확인할 수 없어 리스크가 더 크다. 게다가 중고나라는 개인 간 거래 플랫폼이다. 휴대전화를 주문했다가 벽돌을 받을 수도 있는 게 현실이다. 중고나라는 이것을 깨끗이 인정했다. 자신들의 흑역사를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음’을 어필했다. 

    글로벌 트렌드 조사기관 트렌드워칭은 이것을 ‘결점을 인정하는 마케팅(flawsome marketing)’이라고 칭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소비자는 “결점이 아예 없다”고 하는 쪽보다 이처럼 자신의 결점을 정직하게 밝히는 쪽을 오히려 좋아한다고 한다. 

    김상훈 서울대 경영대 교수가 박선미 광고디렉터와 함께 쓴 책 ‘진정성 마케팅’에는 관련 사례가 여럿 소개돼 있다. 프랑스 맥도날드의 경우 ‘어린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만 맥도날드에 오세요’라고 광고했다. 패스트푸드가 소아 비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한 것이다. 분유회사인 네슬레 또한 모유 수유의 우수성을 알리는 캠페인을 벌이면서 ‘출산 직후에는 모유 수유가 좋다. 그것이 정 어렵다면 우리 제품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광고를 덧붙였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누군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면 신뢰가 높아진다”고 밝혔다. 또 “솔직함이 유머감각과 결합하면 단점이 장점으로 승화된다”고 했다. 

    중고나라가 딱 그렇다. 중고나라는 현재 국내 중고거래 분야에서 경쟁자를 찾기 어려운 1위 업체다. 가입자 수가 2100만 명에 이른다. 월간 실사용자수(MAU), 즉 한 달 동안 해당 서비스를 실제로 이용한 사람도 1600만 명 수준이다. 1초당 3건씩, 하루 평균 23만 건의 신규 상품이 등록된다. 

    거래 규모도 크다. 중고나라 네이버 카페 거래액은 2018년 한 해 동안 2조 5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모바일 앱 거래액도 2016년 881억 원에서 지난해 3421억 원으로 급증했다. 전문가들은 중고나라가 이처럼 승승장구하는 비결로 △관련 시장을 선점한 것과 더불어 △끊임없이 이야깃거리를 만듦으로써 고객의 관심을 놓치지 않은 것을 꼽는다. 

    중고거래는 기본적으로 요즘 한국에서 인기 있는 사업 분야다. 김난도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16’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 사회의 저성장·취업난·고용불안·양극화 등은 날로 악화하고 있다. 그러나 풍요의 시대를 경험한 소비자는 여전히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 이 역설적인 긴장 속에서 ‘적게 쓰지만 만족은 크게 얻으려는 전략’이 나타난다. 현대 소비자들은 지출을 위한 잔고가 부족하더라도 여전히 자신의 즐거움과 품위를 찾을 수 있는 소비 방안을 마련한다.” 

    이에 따라 여러 사업자가 중고거래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아직 누구도 중고나라의 아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중고나라에는 벽돌로 대표되는 역사가 있고,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있기 때문이다.

    물건보다 사람

    중고나라에서 ‘오늘도 평화로운’ 주연배우 손이용 씨를 모델로 만든 이모티콘.

    중고나라에서 ‘오늘도 평화로운’ 주연배우 손이용 씨를 모델로 만든 이모티콘.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에서 주인공 영준은 이른바 ‘쿨거래’를 하다 사기꾼의 희생양이 된다. 쿨거래는 중고나라에서 널리 쓰이는 말로, 판매자가 제시한 조건을 그대로 수용해 최소한의 연락만 하며 ‘쿨하게’ 거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풀박’ 또는 ‘박풀’은 ‘full box’를 뜻하는 ‘중고나라어’다. 거래 제품이 기본 구성품뿐 아니라 포장박스까지 온전히 갖춘 상태임을 의미한다. ‘민트’ ‘민트급’ ‘SSS급’은 포장을 뜯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은 제품을 일컫는다. 이외에도 에눌(에누리), 교신(교환신청), 택포(택배비 포함) 등 중고나라에서 생겨나 유행어가 된 말이 적잖다. 중고나라는 이들 용어를 정리해 사전처럼 만들고 ‘그 나라에서는 그 나라 말을 써라’라는 제목을 붙이는 등 온라인 장터를 일종의 놀이터처럼 가꾸고 있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중고나라는 물건 거래 플랫폼이지만 물건보다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만들어내는 스토리에 더 초점을 둔다는 게 인상적”이라고 평했다. 

    중고나라는 회원에게 거래 수수료를 받지 않는다. 누구나 들어와 물건을 사고팔 수 있도록 자리만 깔아뒀다. 문제는 활짝 열린 판에 사기꾼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 사기피해정보 공유 사이트 ‘더치트’에 따르면 2006년 1월부터 올 3월까지 이 사이트에 접수된 피해 사례는 38만 건이 넘는다. 피해금액도 1310억 원대에 이른다. 중고나라 회원이 늘고 거래 건수가 늘수록 사기 수법은 더 교묘해지고 있다. 중고나라가 지금의 성장세를 이어가려면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유 실장은 이에 대해 “현재 중고나라 직원 90여 명 중 절반 정도가 개발자다. 사기거래 예방과 이용자 편의 향상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사기 피해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판매자와 구매자가 직접 만나 거래하는 것이지만, 이게 어려울 때는 중고나라 앱과 안전결제를 사용할 것을 권한다. 중고나라 앱에는 최근 3개월간 사기신고 이력을 조회할 수 있는 ‘사이버캅’이 탑재돼 있다.” 

    유 실장의 조언이다. 누리꾼들도 중고나라에서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한다. 일단 더치트(thecheat.co.kr) 사이트에서 판매자 휴대전화번호를 검색해보는 게 필수다. 또 △일반 가격에 비해 터무니없이 싸게 올라온 물건 △판매자가 인구 수 적은 지방 도시에 산다고 하면서 택배거래를 유도하는 물건 △안전거래가 가능하다면서 판매자가 직접 사이트 링크를 보내오는 물건 △전화번호를 공개하지 않고 카카오톡으로만 대화하자고 하는 판매자의 물건 등은 주의해 거래하는 게 좋다고 한다. ‘오늘도 평화로운’의 백 감독은 이 주의사항 중 세 가지에 해당하는 판매자에게 의심 없이 돈을 보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판매자의 친절한 말투, 매너 있는 태도에 의심의 고삐를 풀어서도 안 된다. 최근에는 구매자를 안심하게 하려고 카카오톡 프로필을 아기 사진으로 설정해두는 사기꾼이 적잖다는 후문이다. 이런 이들을 믿고 거래했다가 피해를 보면 금전 손실보다 배신감 때문에 더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사기 예방법을 담은 책 ‘우리는 왜 친절한 사람들에게 당하는가’를 쓴 황규경 변호사는 “사기피해자 중에는 분노와 자책감으로 살의와 자살충동을 느끼는 이가 많다”며 “사기 피해는 예방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 |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 백승기 감독
    “뼈아픈 사기 경험 바탕 삼아 만든 사기 피해 예방 영화”

    “전 재산을 털어 ‘맥북’을 사서 멋지게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영준은 중고나라에서 노트북 사기를 당한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영준은 사기 조직을 직접 응징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다. (장르: 액션, 드라마, 코미디)” 

    2017년 5월 백승기(37) 감독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새 영화 시놉시스다. 첫 문장은 정확히 백 감독 본인 이야기였다.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한 그는 한동안 중·고교 미술교사로 일했다. 동시에 오래도록 마음에 품어온 영화감독의 꿈도 이루려 노력했다. 2010년 ‘숫호구’를 시작으로 두 편의 장편 독립영화를 연출했다. 직접 각본을 쓰고, 촬영 편집까지 맡았다. 첫 작품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등 평단의 주목을 받은 그는 2016년 겨울, 영화에 전념하고자 교사 일을 쉬기로 마음먹었다. 단골 카페에서 영화 구상에 전념했다. 달리 말하면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앉아 있었다.”

    “내가 바로 호구였다”

    그걸 본 카페 사장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있지 말고 노트북 좋은 거 하나 사서 시나리오라도 써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잘 차려입고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시나리오 쓰는 모습을 떠올려봤다. 근사했다. 이왕이면 사과 그림이 그려져 있는 유명 노트북을 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검색해보니 신제품 가격이 너무 비쌌다. 시나리오 쓰고 영화 편집까지 할 수 있는 성능 제품은 300만 원을 호가했다. 그때부터 매일 중고나라에 들어가 적당한 중고 가격의 노트북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 200만 원 안팎 제품이 종종 눈에 띄었지만 너무 비싸다 싶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른 어느 날, 운명처럼 그의 눈에 150만 원짜리 중고 맥북 판매 글이 들어와 박혔다. 

    여기서부터는 ‘오늘도 평화로운’ 영화 장면이 곧 백 감독 얘기다. 혹시라도 누가 채갈까 봐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인공 영준처럼, 백 감독 가슴도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철저한 ‘을’이 돼 판매자한테 “바로 입금할게요. 다른 데 팔지 마세요” 매달렸다. 

    처음에는 직접 만나 제품을 보고 구매하려 했다. 그런데 지역이 광주였다. 바로 가기엔 너무 멀었다. 하는 수없이 안전거래를 택했다. 안전거래는 구매자가 제품을 받고 ‘구매 확인’ 버튼을 눌러야 판매자에게 대금이 전달되는 시스템이다. 판매자는 백 감독에게 “안전거래 사이트는 제가 보내드릴게요”라며 e메일 하나를 전달했다. 클릭하니 시중 유명 은행 사이트가 떴다. 거기에 개인정보를 입력하고 150만 원을 보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죠? 돈을 딱 넣자마자 뭔가 ‘싸~’한 겁니다. 그전까지는 빨리 돈을 보내야 맥북이 내 것이 된다는 생각에 이성이 없었어요. 돈을 보내고 나니 갑자기 방 안 공기가 묘하게 달라지더군요. 그 안전거래 사이트의 조악한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어요. ‘어? 이거 뭔가 이상해. 이거 뭐지?’ 혼자서 막 그렇게….” 

    백 감독 말이다. 그는 즉시 판매자한테 전화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아무 문제없이 통화했던 번호인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순간 사기를 당했다는 확신이 왔다. 재빨리 거래은행에 전화했다. 출금정지를 신청하자 상담원은 “보이스피싱을 당했느냐”고 물었다. 

    “우리나라 법이 보이스피싱의 경우 즉시 출금정지를 해줘요. 그런데 중고거래 사기는 안 해줍니다. 적용법이 다른 거예요. 제가 ‘그럼 지금 전화 끊고 다시 연락해 보이스피싱 당했어요 하면 출금정지해줄 거냐’고 따졌죠. 상담원이 안 된다고, 중고거래 사기는 경찰에 신고해야만 출금을 정지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백 감독은 즉시 경찰서로 달려갔다. 이 또한 영화에 그대로 담겨 있다. 경찰은 다급히 사정을 설명하려는 그에게 “굳이 말할 것 없다. 여기 종이에 쓰라”며 서류를 한 무더기 내놓았다. “일단 출금부터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 사건이 접수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는 답만 들었다.

    “일확천금을 꿈꿨구나…”

    알고 보니 백 감독을 속인 자는 대포통장까지 사용하는 전문 사기꾼이었다. 위조 안전거래 링크를 보내 구매자를 속이는 수법도 최근 널리 쓰이고 있다고 했다. 경찰은 백 감독에게 “당신을 속인 놈은 푼돈을 노린 잡범이 아니다. 보이스피싱 사기집단과 거의 똑같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체포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설명해줬다. 

    사기꾼이 사용한 대포통장 주인은 경기도에 살고 있었다. 그 통장에 백 감독 돈 150만 원이 들어간 건 곧 확인됐다. 그러나 사기꾼을 못 잡으면 돈도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 그게 법이라는 것이다. 보이스피싱과 유사한 범죄지만 보이스피싱은 아니라서 출금정지를 못 하고, 돈이 어디 있는지 뻔히 알지만 사기꾼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돌려줄 수 없다니! 백 감독은 분통이 터졌다. 가장 화가 난 건 자기 자신에 대해서였다. 그는 말했다. 

    “돌아보면 제가 일확천금을 노린 거예요. 가격이 시가에 비해 지나치게 저렴하면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이로써 영화에 집중하려는 꿈은 산산조각 났다. 당초 계획했던 차기작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스케일 큰 작품이었으나, 머릿속에 사기꾼 이미지가 둥둥 떠다녀 시나리오를 쓸 수 없었다. 그는 아예 자기가 겪은 일을 먼저 영화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감동 실화’는 아니어도 최소한 ‘감독 실화’는 될 터였다. 제작비 투자받기가 불가능할 게 뻔해, 그는 SNS에 시놉시스와 함께 솔직한 상황을 털어놓았다. 

    “이 영화의 현재 총 제작비는 감독의 자비 100만 원입니다. 참여하시는 분에게는 별도의 출연료나 인건비 없이 식대만 제공합니다. 전문 배우나 스태프 말고 어떤 형태로든 ‘영화’라는 것을 너무 만들어보고 싶었던 분들을 모집합니다.” 

    놀랍게도 일주일 만에 50명 넘는 사람이 모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아기자기한’ 중고거래 사기 피해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며 시나리오를 다듬고 촬영을 진행한 결과물이 바로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이다.

    “알아야 안 당한다”

    이 작품은 제작비 1000만 원 안팎을 들여 보름여 만에 촬영한 영화다. 만듦새가 상업영화처럼 세련되지 않다. 그러나 재치 있는 대본과 아마추어 배우들의 개성 넘치는 연기가 어우러져 장면마다 웃음이 빵빵 터진다. 특히 중국으로 달아난 사기꾼을 잡고자 영준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대목부터는 코미디 영화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백 감독은 이 작품을 ‘C급 영화’라고 부르며 “일반적인 C급 영화 말고, 모두 다 함께했다는 의미의 ‘C급(Community) 영화’로 봐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영화에 내가 겪은 사기 피해 과정을 생생히 담은 만큼, ‘오늘도 평화로운’을 본 관객만큼은 이런 사기를 당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밝혔다. 

    “이 영화를 촬영하느라, 중고나라에 제가 낚였던 바로 그 내용의 판매 글을 잠시 올린 일이 있어요. 맥북을 150만 원에 팔겠다고요. 그거 올리고 찍는 그 잠깐 사이에, 사겠다는 전화가 정말 열 통 이상 걸려 오더군요. 보면서 사기꾼이 마음만 먹으면 참 돈 벌기 쉽겠구나 싶었죠. 여러분, 지나치게 싼 가격 제품은 꼭 의심하세요. 안전거래도 너무 믿지 마시고요.” 

    백 감독 얘기다. 그는 이제 마침내, 한동안 미뤄뒀던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준비할 생각이다. ‘오늘도 평화로운’을 완성하고 다시 한동안 미술교사로 일하며 제작비를 모았다. 이번에는 정말 영화에 집중해, 스케일 크고 개성 뚜렷한 작품을 만들어낼 계획이다. 불의의 사기를 당하지 않는다면, 올여름 촬영, 내년 개봉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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