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상인들’이 만든 1000년 문화
상인들의 용기와 개척정신이 키운 도시
‘생갈트의 기사’ 카사노바를 재평가하다
베니스 리알토 다리. [shutterstock]
베니스는 사계절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현지인 중에는 “관광객 때문에 불편해서 못살겠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다. 베니스시 당국이 2018년 겨울 궁여지책으로 관광특별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세금 부과에도 여행객이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유명한 카페 플로리안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카페는 베니스의 심장부 산마르코 광장에 자리 잡은 이탈리아 최고(最古)의 카페로, 1720년 문을 연 이래로 그 인기가 아직도 식지 않고 있다. 일찍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을 비롯해 화가 모네, 작가 괴테,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지중해의 낭만을 즐긴 곳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공기가 지배하는 도시공화국인 베니스, 그리고 그 모험의 출발지인 산마르코 광장. 카페 플로리안에서 나는 향기로운 커피에 취해 이 도시의 역사를 회고했다. 그리고 기억의 창고를 뒤져 ‘베니스다움’을 빛낸 인물을 찾아내려 애썼다. 이후 베니스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베니스의 대표적 관광지인 산마르코 대성당의 장엄함에 놀란 관광객들은 광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마주하게 된다. 마치 햇볕으로 샤워하는 느낌이랄까. 순간 나폴레옹의 말이 떠올랐다. “산마르코 대성당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다!”
그렇다면 이 응접실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순간 내 머릿속에 ‘베니스의 상인들’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악명 높은 이도 있다. 셰익스피어의 4대 희곡 가운데 하나인 ‘베니스의 상인’의 주인공 샤일록. 소문난 구두쇠인 그는 부채를 제때 갚지 못한 밧사니오에게 “심장을 꺼내달라”고 요구한 냉혈한이기도 하다.
지금도 베니스에 가면 ‘베니스의 상인들’의 현재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베니스 대운하의 중심에 자리 잡은 리알토(Rialto) 시장에는 지금도 귀금속 가게가 즐비하다. 가죽 제품이나 베니스 근교의 무라노섬에서 만들어진 유리 세공품을 판매하는 곳도 많다. 가게를 둘러본 다음에는 베니스 최초의 석조 다리인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에서 푸른 대운하를 감상할 수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1591년 공모전에 입상한 안토니오 다 폰테의 작품으로 대운하의 3개 다리 중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공모전 당시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도 응모했지만 낙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다리 아래로 곤돌라가 지나가는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베니스의 과거는 화려하다. 그렇다고 도시의 명성이 휘장 뒤에 숨어 있다거나, 수명을 다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곳의 매력은 언제라도 소환 가능한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사순절마다 펼쳐지는 지상 최대 가면무도회 ‘베네치아 카니발(Carnevale di Venezia)’을 비롯해 해마다 열리는 ‘베니스 국제영화제’, 2년에 한 번씩 막이 오르는 국제 미술 전시회 ‘베니스 비엔날레’ 등은 이 도시의 모험적 예술성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미술시장 부흥 이끈 베니스 비엔날레
베니스 비엔날레(왼쪽)와 베니스 국제영화제. [뉴시스]
한국에도 ‘베니스 비엔날레’는 유명하다. 1993년 백남준이 영예의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데 이어 전수천(1995), 강익중(1997), 이불(1999) 등이 잇달아 특별상(Honorable mention)을 받았다. 베니스와 한국의 인연은 이렇게 깊어졌다.
비엔날레에도 이탈리아 현대사의 아픔은 존재한다. 1930년대는 파시스트의 시대였다. 당시 비엔날레 관계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현 정권 홍보에 열을 올렸다. 비엔날레는 물론 국제음악제·영화제·연극제 등에서도 파시즘의 색채는 뚜렷했다. 어디에서도 상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도시는 본래 상인들의 것이었다. 베니스의 상인들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아프리카의 카이로를 하나의 교역권으로 묶었다. 이를 기반으로 중동을 거쳐 중국산 비단이 들어왔고, 인도에서는 향신료가 쏟아져 들어왔다. 또 말리제국에서 제련된 황금도 베니스 상인의 보물창고에 쌓였다.
상인들의 용기와 개척정신이 이 도시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자유를 위해 왕정(王政)을 거부하고, 과두정치를 통해 도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다. 각국의 상관(商館)이 있었고, 완벽하게 통제되는 세관(稅關)이 존재했다. 이 도시는 상인들의 섬이었다. 한 척의 외국 선박이 들고나더라도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없는 구조였다.
상인들이 운영한 베니스공화국의 정식 명칭은 ‘가장 고귀한 공화국 베니스(원어 Seren`sima Repu`blica de Ve`neta)’였다. 자만심이 하늘을 찌를 듯한 이름이다. 8세기부터 1797년까지 베니스는 무려 1000여 년 동안 독립성을 지켜왔다. 당시 베니스 상인들이 누린 부(富)의 규모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내 친구 지오바니 역시 이곳 상인의 후예다. 조상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의 도시’ 베니스의 역사는 사실 비극에서 출발했다. 5세기의 일이다. 게르만족이 북이탈리아로 침입해오자, 사람들은 배를 타고 석호로 도망쳤다. 일종의 피난처였던 것이다. 이후 볼품없던 마을은 차츰 부유한 도시로 발전해나갔다.
7세기경 베니스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로 동로마제국 황제를 찾아가 정치적 보호를 요청했다. 상인들은 과두정치를 원했고 황제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스스로 총독을 선출할 권리를 인정했다. 결국 베니스는 총독과 6인의 총독보좌관, 10명의 원로원 구성원 등 17명이 권력을 장악했다. 이와 별도로 총독선출위원 40명도 상당한 힘을 가졌다. 12세기 말이 되면서 성공한 상인가문은 점점 더 늘어났고, 원로원은 의회의 역할을 담당했다. 13세기에는 그 구성원이 300명을 넘어 최다 1200명까지 늘어났다. 상인들이 권력을 주무르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권력을 쥐고 흔든 상인들
베니스 산마르코 성당과 광장. [shutterstock]
상인들은 갈수록 다양한 물품을 거래했다. 처음에는 목재와 노예가 주였으나 교역망이 넓어지면서 상품의 종류와 물량이 꾸준히 증가했다. 1000년경 베니스는 동지중해 굴지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들은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달마티아를 차례로 제압했다.
한편 1204년 베니스공화국은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제4차 십자군원정의 후원 세력으로서 교황의 의지를 무력화하며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했다. 십자군이 기독교 국가를 약탈한 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 베니스는 막대한 부와 보물을 약탈하는 데 성공한 반면, 동로마제국은 일시 멸망의 위기를 맞았다. 그때 베니스 상인들은 십자군원정대의 이름으로 일종의 괴뢰정권을 세웠다. 라틴제국이었다. 베니스 측은 자신들의 총독을 황제로 임명할 야심을 품었으나 여러 나라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찬란한 영광, 쓸쓸한 몰락
13세기 베니스공화국은 더욱 강성해졌다. 상인들은 아드리아해와 동지중해 요소마다 거점도시를 건설했다. 그들은 로마교황청의 권위에도 저항할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베니스는 유럽의 최고실력자였던 신성로마제국 앞에서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당시 베니스는 이탈리아반도 내의 또 다른 실력자, 제노바공화국과 큰 갈등을 겪었다. 지중해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암투 싸움이 치열했다. 120여 년 동안 두 나라는 전쟁을 네 차례 치렀다. 전쟁의 최종 승자는 베니스였다. 사람들은 베니스를 ‘레반트의 여왕’이라고 불렀고, 베니스는 이탈리아 본토에도 속국을 가질 정도로 강성해졌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1453년 이슬람의 마호메트 2세가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자 상황은 역전됐다. 이슬람은 동방에서 들여온 향신료 가격을 마음대로 인상했고, 베니스 상인들의 이익은 점점 줄어들었다. 1499~1503년 베니스는 이슬람(오스만투르크)과 무력대결에 나섰으나 그들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베니스를 무너뜨리려고 여러 나라가 연합해 만든 ‘캉브레 동맹’의 압박이 날로 커졌다. 이 동맹의 대표 격인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베니스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후 베니스는 1571년 오스만제국과의 전투(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해 희망의 불씨가 되살아나는 듯했으나 동방무역은 갈수록 활기를 잃었다. 흑사병까지 겹치는 바람에 베니스의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선도하는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지중해 교역의 의미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18세기가 되자 베니스 상인들은 재건을 꿈꿨다. 수공업자들을 동원해 무라노섬을 유리 공예 기지로 삼았다. 또 명품 가죽구두와 융단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도시 경제는 한결 나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무렵 프랑스대혁명(1789)이 일어났고, 이로써 유럽의 정세는 불투명해졌다. 급기야 10년 뒤 나폴레옹이 베니스를 공격하면서 1000년 이상 명맥을 이어오던 베니스공화국의 깃발은 아래로 끌어내려졌다.
역사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베니스의 운명을 기울게 만든 대항해시대의 시발점에는 한 명의 베니스 상인이 있었다. ‘동방견문록’에 등장하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주인공이다. 그는 17세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서 당시 서구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 여긴 중국을 찾아갔다.
마르코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1274년 상도(上都·네이멍구자치구)에 도착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칸의 재위 기간이었다. 황제를 알현한 마르코 폴로는 17년간 중국에 체류했다. 대도(大都 베이징)를 비롯해 중국의 주요 도시를 두루 여행했고, 양저우(揚州)에서는 관직까지 맡았다. 나중에 그는 일한국(페르시아)으로 시집가는 원나라 공주를 호송하는 사절단으로 귀로(歸路)에 올랐다. 수마트라, 말레이, 스리랑카, 인도 서남부 등을 차례로 거쳐 1295년에 드디어 고향 베니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몇 년 뒤 베니스공화국은 제노바와 전쟁에 돌입했다. 마르코 폴로는 적군에 체포돼 감옥에 갇혔는데 그곳에서 그는 피사 출신의 작가 루스티첼로를 만났다. 폴로는 루스티첼로에게 자신의 여행담을 들려주며 ‘동방견문록’(원제 Divisament dou monde)을 쓰도록 했다.
마르코 폴로야말로 전형적인 베니스 상인이다. 책에서 그는 여행 중 알게 된 각지의 특산물과 교역 현황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당시 ‘동방견문록’은 많은 이에게 읽히며 널리 사랑받았다. 서인도제도까지 항해한 콜럼버스도 이 책의 애독자였다. 스페인의 세비야 대성당에는 콜럼버스의 메모가 빼곡히 적혀 있는 ‘동방견문록’이 있다.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베니스의 아들’ 마르코 폴로의 모험심이 대항해시대의 문을 연 기폭제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지중해 교역 시대는 종말을 맞았고 베니스 역시 침체의 길을 걷게 됐다.
마르코 폴로와 카사노바의 공통점
중국에서 베니스로 다시 돌아온 마르코 폴로를 그린 그림. 작가미상. [Oxford Science Archive]
카사노바는 다재다능했다. ‘생갈트의 기사(Chevalier de Seingalt)’를 자처했던 그를 희대의 바람둥이로 폄하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18세기 유럽에는 카사노바처럼 도박, 음주, 성적 일탈을 일삼는 귀족이 허다했다. 오히려 그는 미지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탐험한 모험가에 가깝다. 글을 통해 귀족사회의 위선을 여지없이 폭로했고 나아가 인간의 욕망과 쾌락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그가 쓴 책 ‘카사노바, 나의 편력’은 사상적으로 볼 때 계몽주의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확신한다.
법학박사로서 한때 가톨릭교회의 성직자이기도 했고, 음악가이자 외교관이기도 했던 카사노바는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베를린, 마드리드, 프라하, 런던과 파리에서 그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렸다. 왕후장상부터 거리의 부랑아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친구가 됐다. 그들 중에는 볼테르와 루소 등 이름난 계몽주의 사상가도 여럿이다.
카사노바의 일생은 일탈로 점철된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그는 뛰어난 상상력으로 공상소설 ‘20일 이야기’(1888)를 썼는데, 혹자들은 이를 쥘 베른이 쓴 ‘지저(地底)여행’의 예고편이라 평한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역시 카사노바에게서 영감을 받아 장편소설 ‘소송’을 탄생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니스에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불꽃같은 삶을 산 이 도시의 선구자들을 떠올리는 건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