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호

지식커뮤니티 Book치고

함께하려면 ‘깍두기’가 필요하다

‘나쁜 사마리아인들’로 나눈 지적 쾌감

  • 박은미 연세대 글로벌행정학과 4학년·Book치고 1기

    입력2019-04-24 13: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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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은 찰(察)이다. 남을 관찰(觀察)하고, 나를 성찰(省察)하며, 세상을 통찰(洞察)하는 도구다. 찰과 찰이 모여 지식과 교양을 잉태한다. 덕분에 찰나의 ‘책 수다’가 묘한 지적 쾌감을 제공한다. 정작 살다 보면 이 쾌감을 충족하기가 녹록지 않다. 검증된 지식 커뮤니티가 우리 사회에 드물어서다. 국내 최고(最古)의 시사종합지 ‘신동아’는 이런 ‘지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지식커뮤니티 Book치고’를 만들었다. 회원들은 한 시즌(4개월) 동안 월 1회씩 ‘신동아’ 고재석 기자와 책 한 권을 함께 읽기로 했다. 

    • 3월 25, 26일 양일간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수십 명의 1기 멤버가 속속 모여들었다. 첫 수다의 대상이 된 책은 개발경제학의 세계적 석학 장하준(56)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이다. 멤버들이 정성스레 써온 서평 중 일부를 골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2018년 7월 1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나쁜 사마리아인들 불온도서 10년 그 후…’라는 주제로 기자 간담회를 하고 있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2018년 7월 1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나쁜 사마리아인들 불온도서 10년 그 후…’라는 주제로 기자 간담회를 하고 있다.

    내가 자란 동네에는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가득한 골목길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4살 많은 언니와 그 친구들 틈에 끼어 함께 놀았다. 나는 자주 ‘깍두기’가 되곤 했다. 깍두기란 어떤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주 연령대에 비해 어린 사람에게 적용되는 규칙이다. 10대 초반 초등학생 사이에서 4살의 나이차는 20대 이후의 그것과 질적으로 달랐다. 그러니 어린 나는 ‘깍두기’가 돼야 했다. 가령 술래잡기를 하더라도 나는 술래에게 잡힐지언정, 술래는 되지 않았다. 다 함께 놀기 위한 포용 방안이었다. 

    장하준은 충분히 자라지 않은 동생을 상대로 ‘깍두기’ 없이 놀자는 서구 선진국의 행태를 꼬집는다. 선진국은 자국 산업이 일정한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철저히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 ‘셀프 깍두기’를 자처한 셈이지만 정작 선진국은 과거를 잊었다. 유례없는 발전신화를 이룩한 우리나라도 국가의 보호와 육성 아래 중화학공업을 정착시켰다. 경제 자유화 조치를 취한 것은 1990년대 중후반이 돼서다. 책이 잘 보여주듯, 우연이라기엔 세계 경제사에는 유사 사례가 너무 많다. 

    언뜻 같은 규칙 아래서 경쟁하자는 것은 공평해 보인다. 모두가 자유롭게 무역을 하면 서로 이득이 되는 것도 같다. 어느 한 품목에서라도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어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질’이다.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을 가진 쪽이 더 많이 번다. 대개 고부가가치 산업은 성공한 국가들의 차지다. 비교우위론을 기계적으로 따른다면 개도국은 고부가가치 산업을 키울 역량을 평생 갖지 못한다. 당장 저부가가치 산업에서 우위를 살려 돈 벌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고부가가치 산업에서 보호를 통해 경쟁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진짜 공정인 이유다. 

    언니와 나의 신체 능력이 비슷해질 무렵에는 더는 술래잡기, 숨바꼭질하며 놀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신은 있다. 그쯤엔 ‘깍두기’ 없이 동등한 규칙 아래 함께 놀았을 것이었다. ‘깍두기’가 없었다면 나는 이내 함께 놀기를 포기하고 혼자 외로이 성장했을 것이다. 반복된 좌절로 신체 능력이 향상된 뒤에도 지레 겁먹고 뛰놀기를 포기했을 테니 말이다. 

    개도국이 부닥친 현실도 이와 유사하다. 경쟁할 수 없는 이와 경쟁하다 보니 끝없이 뒤처진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공정한 규칙이 도무지 소용없다. ‘깍두기’는 공존하며 살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신자유주의의 잘못된 신화를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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