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기처럼 스며든 유혹…“농구인, 팬에게 상처 드려 죄송”
- “‘승부 조작한 것 아니니 괜찮다’…합리화가 禍 자초”
- “이런 게 조폭의 협박이구나…하루하루가 지옥”
- “모든 것을 잃으니 새로운 것이 채워졌다”
그는 프로농구 원주 동부 감독이던 2011-2012 시즌에 4차례에 걸쳐 승부조작을 한 혐의로 2013년 3월 구속돼 10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KBL(한국프로농구연맹)에서도 영구 제명됐다. 한국 프로농구의 레전드이자 ‘코트의 마법사’로 불리던 그가 부정방지 교육 프로그램 강사로 선수들 앞에 서기까지엔 숱한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
‘그 사건’ 이후 강 전 감독을 처음으로 인터뷰했다. 최근 그를 만나 승부조작 관련 상황과 구치소 수감 생활, 가족과 함께 지내는 요즘 얘기를 들었다.
“농구는 그런 게 안 돼”
강동희 전 감독의 승부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은 이가 궁금해한 것은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스타 감독이 왜 겨우 4700만 원에 자신의 농구 인생을 저당잡혔을까 하는 점이었다. 도대체 왜? 뭐가 아쉬워서?강 전 감독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 모든 의혹과 의구심이 일시에 풀렸다. 유혹은 ‘대놓고’ 손을 내밀지 않았다.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주변으로 스며들었고, 가장 믿고 좋아하던 후배가 총대를 메고 그를 끌어들였다. 강 전 감독이 오랫동안 마음에 묵혀둔 사건 전후의 사연을 일문일답 식으로 정리해본다.
▼ 후배이자 브로커로 알려진 C씨가 처음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했나.
“그 후배는 나 외에도 많은 농구인과 무척 친밀한 사이였다. 나와는 1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라 평소 서울로 원정경기를 가면 자주 숙소를 찾아왔고 식사도 함께 했다. 여러 가지 사업을 했던 걸로 안다. 그 사업들이 잘 안 풀렸다고 들었다. 그래서 불법 도박 사이트에 연루된 게 아닌가 싶다. 그때만 해도 농구는 ‘청정지대’였다. 축구는 간간이 승부조작 소문이 돌았지만 농구는 경기 운영 특성상 승부조작이 끼어들기 어렵다. 그러니 내가 승부조작에 연루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2011년 1월 어느 날, 그 후배가 날 찾아왔다. SK와의 5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저녁을 먹자고 해서 원정 숙소 주변에서 식사 자리를 가졌다. 그 후배의 입에서 스포츠 베팅과 관련해 처음 나온 말은 ‘언더’와 ‘오버’였다. 아직도 난 그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후배 말로는 70점 밑이면 언더고, 70점 위면 오버라고 한다는데 그걸 두고 베팅한다는 얘기였다. 그때 내가 ‘농구는 그런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돼’라고 했다. 감독이 선수들에게 특정 점수를 내도록 경기하라고 지시하라는 얘긴데, 그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날 식사는 그렇게 정리됐다.”
“형, 1쿼터만 부탁드려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스포츠토토와 관련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사석에서 지인들을 만나면 농구의 승부에 대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제시하며 대화할 때가 많다. 그런 대화 중 하나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농구 자체가 베팅을 하기 어렵다고 말해준 것이다.
그런데 그 후배는 오랫동안 나와 인연을 맺으며 내 스타일을 훤히 파악했을 게 분명하다. ‘저 형은 계속 찌르면 분명히 유혹에 넘어올 것’이라고. 돈 빌리는 사람은 아무리 찔러도 안 빌려줄 것 같은 사람한테는 절대 돈 빌려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아쉬운 소리를 해도 빌려줄 것 같은 사람에게선 어떻게 해서든 돈을 빌려간다. 그러고 나선 갚지 않고. 그 후배 처지에선 사람 좋다고 소문난 내게 접근하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 돈을 처음 받은 게 언제인가.
“이후에도 계속 제안은 있었다. 만약 승부조작에 대한 ‘예방접종’이 있었다면 후배의 얘기가 무서운 제안이라는 걸 금세 파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경기 앞두고 하루 쉬는 날이 있었다. 그때 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 한잔 살 테니 만나자고 했다. 선약이 있다니까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래서 지인과 저녁을 먹은 후 늦은 시간에 후배를 만났다. 만나자고 한 곳은 강남의 유명한 유흥주점이었다.
그 후배 외에 2명이 더 있었는데, 그 자리에선 다른 얘기 없이 일상적인 대화만 나누다 다음 날 경기 때문에 내가 먼저 그곳을 나왔다. 그때 후배가 따라나왔다. 그런데 후배가 ‘형, 술값이 300만 원 넘게 나왔어요. 혹시 돈 좀 있어요?’ 하는 게 아닌가. ‘네가 산다고 해서 그냥 왔는데 내가 현금 300만 원이 어디 있냐’라고 하니 후배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런 제안을 해왔다.
‘형, 내일 1쿼터에만 비(非)주전 선수를 내보내줘요. 사실 형이 좀 도와주면 아는 형이 1000만 원을 준다고 하는데, 그걸로 여기 술값 300만 원 계산하고 형이랑 저랑 700만 원 나눠 써요.’
내가 황당해서 ‘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그래. 어차피 순위가 정해진 다음엔 플레이오프 앞두고 비주전 선수를 내보내게 돼 있어. 그건 내가 널 도와주지 않아도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라고 답했다. 그러자 후배는 ‘아, 그럼 아무 문제없는 거네요?’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된 것이다.
호텔 방에 놓고 간 700만 원
만약 후배가 술을 마시기 전에 그런 제안을 했더라면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술을 사겠다고 해놓고선 술값이 300만 원 나왔다 했고, 내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없다니까 은근히,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유혹해 왔는데, 난 거기서 무너지고 말았다. 원래 내 계획이 다음 날 경기 1쿼터에 비주전 선수를 내보내려 했고, 그들의 요구대로 한 게 아니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한 것이다. 이게 엄청난 잘못이었다.”▼ 그 후배와 700만 원을 나눠 가졌나.
“다음 날 자고 있는데 후배가 숙소로 찾아와선 호텔 방 테이블에 700만 원을 놓고 가려 하더라. 내가 놀라서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형, 오늘 1쿼터 해주시고 쓰시면 돼요’라더라. 나는 ‘인마. 그건 원래 내가 하려고 한 계획이야. 너희 말 듣고 해주는 게 아닌데 왜 이런 걸 주고 그래?’라고 반문했다. 후배는 ‘형, 그냥 쓰세요’라며 돈을 두고 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5만 원짜리 140장이 테이블에 놓여 있는 걸 보고 내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했다.
그런데 그날 우리가 비주전 선수를 내보냈는데도 큰 점수차로 이겼다. 그래서 경기 후 후배에게 전화해서 돈을 가져가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형, 걔네들이 1쿼터 주전 안 나온 거 보고 그냥 쓰시라고 하네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후배가 날 해코지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10년 넘게 맺은 인연인데,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후 모비스, KT, 오리온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전화가 왔다. 주전들이 빠지냐고 물었고, 나는 이미 언론을 통해 비주전들로 경기를 운영한다고 말한 터라 사실대로 빠진다고 말해줬다. 그때 세 경기 합해서 3000만 원을 받았다. 모두 합쳐 3700만 원을 받은 거다. 나중에 그들은 내게 4700만 원을 줬다고 주장했다.”
▼ 그렇게 큰돈이 오갔는데 걱정되는 게 없었나. 돈의 출처가 궁금하지 않았나. 그런 돈을 건넬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듯한데.
“나 스스로 합리화하며 어리석음을 자초했다. 농구 선수로, 또 곧장 코치, 감독하면서 세상 물정을 잘 몰랐던 것 같다. 내가 승부조작의 덫에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게 솔직한 얘기다.”
▼ 돌아가는 사정을 눈치챈 건 언제쯤인가.
“LG와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있을 때다. 후배가 또 제안을 해왔다. 그때는 800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 순간 겁이 덜컥 났다. 그래서 내가 화를 내며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한다.
‘야, 내가 몇 번을 얘기했어. 전에 비주전 선수를 내보낸 건 너희가 해달라고 해서 한 게 아니야. 너한테 돈을 받아서 해준 게 아니라고. 내가 일부러 져준 것도 아니잖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당장 이 돈 가져가!’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아, 이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구나. 내가 잘못 말려들었구나 싶더라. 그런 불안함을 갖고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그 후론 후배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 그해(2011년) 5월 축구에서 승부조작 사건이 터졌다.
“그 사건을 기사로 접한 후 나는 그야말로 ‘멘붕’ 상태가 됐다. 축구선수의 자살 소식도 들려왔다. 그때부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돈 보내줄 테니 다 가져가라고 했다. 그래서 계좌 이체로 3700만 원을 다 돌려줬다.”
낯선 번호의 전화 한 통
▼ 그렇게 하면 없던 일이 될 거라 생각했나.“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아내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내도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때 절감했다. 돈을 받으며 나 자신을 합리화한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3개월 남짓 매일 지옥을 경험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였다. 밥을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했다. 체중이 10㎏ 빠졌다.
8월 이후부터 축구 승부조작 파문이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그러다 2011-2012 프로농구 시즌이 시작됐고 우리 팀은 연승가도를 달리며 치고 올라갔다. 그러던 12월 초 어느 날이었다. 휴대전화로 낯선 번호의 전화가 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낯선 번호의 남자는 전화를 받은 내게 ‘강동희 감독님이시죠?’라고 물었다. 아, 큰일이 벌어지겠구나 싶은 생각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내게 승부조작을 제안한 후배의 이름을 거론하며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후배에게 이미 돈을 다 돌려줬고, 나는 그 녀석이 원하는 대로 해준 적이 없다’고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눈앞이 아득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조폭들의 협박이구나 싶었다.”
잠 못 이룬 나날
▼ 후배한테선 전화가 오지 않았나.“왜 안 왔겠나. 계속해서 내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200만 원, 300만 원, 500만 원…. 끊임없이 요구했다.”
▼ 그래서 송금해줬나.
“해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려면.”
▼ 2011-2012 시즌의 원주 동부는 최고의 성적을 냈다. 최다 연승, 최다 승리, 최고 승률(16연승, 44승10패, 81.5%) 등 주요 기록을 갈아치우며 고공행진을 이어갔는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배구에서도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숨을 제대로 못 쉴 정도였는데 경기를 하면 계속 이겼다. 정규 리그에서 우승하면서 겉으로 보면 제일 잘나가는 감독이었다. 하지만 밤마다 잠을 못 이루며 불면의 나날을 보냈다. 가장 좋은 시절에 최악의 지옥을 경험한 셈이다.
결국 변호사를 찾아갔다. 자수하고 싶어서였다.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변호사는 ‘좀 더 지켜보자’고 했다. 그땐 정말 하루하루 ‘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후배의 돈 꿔달라는 전화도 잠잠해졌다. 그해 10월까지 연락이 없었다. 그사이에 팀과 재계약을 했다. 늘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감이 자리했지만.”
▼ 2013년 3월 언론 보도를 통해 그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가 나온 날 밤 11시경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국가대표 출신 A감독이 승부조작에 연루됐다는 내용의 기사가 떴다고. 전화 받고서 그냥 주저앉아버렸다.”
▼ 잊히지 않는다, 의정부지검에 출두하던 모습이.
“이 말을 믿을지 모르겠지만 기사가 터졌을 때 한편으론 홀가분한 심정이 되기도 했다. 오래도록 내 마음에 켜켜이 묻어놨던 비밀이 세상에 알려졌는데, 두렵다기보다 ‘아 이제 다 끝났다’ 싶은 마음이 든 거다. 나도 잘못한 게 있지만 그동안 나를 회유하고 협박한 사람들이 처벌받을 거란 생각에 속이 시원했는지도 모른다. 일은 터졌지만 진실은 밝혀질 거라고 생각했다. 검찰 조사에서 모든 게 명명백백하게 바로잡힐 거라고 믿었다.”
검사 앞에서 목 놓아 울어
“검찰에선 내가 돈을 받고 승부조작을 했느냐, 안 했느냐에만 중점을 뒀다. 내가 그들에게 협박받은 사실은 전혀 안중에 없었다. 나는 검사의 물음에 계속 ‘그런 일 없다’고 했다. 나를 협박한 이들은 검찰 조사에서 내가 돈을 받고 주전들을 뺀 채 경기를 치렀다고 진술했더라.
나는 실제로 그런 일이 없었기에 아니라고만 답했다. 그때 검사가 나를 옆방으로 데려가선 담배 한 대 피우자고 했다. 그러면서 ‘감독님,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이놈들 정말 나쁜 놈들이에요. 제가 감독님 심정 잘 압니다’라며 나를 위로했다. 그 순간 2, 3년 동안 참았던 가슴앓이가 눈물로 쏟아졌다. 검사 앞에서 자제력을 잃고 목 놓아 울었던 것 같다. 검사도 같이 울었다. 난 그때 검사가 내 진심을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진술하겠다고 한 것이다.
진술을 다 하고 나니 검사가 진술서를 읽고서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다. 진술서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도장을 찍었다. 조사를 받고 밖에 나와 보니 내가 모든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돼 있었다. 돈을 받은 건 맞지만 그게 승부조작의 대가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 건데, 진술서에는 내가 돈을 받고 승부조작을 한 것으로 기재됐다.”
▼ 어찌 됐든 영장실질심사를 거쳐 구속됐다. 가족들의 충격이 컸을 것 같다.
“아내가 헤어지기 전에 내 손을 잡고선 내가 죽으면 자신도 따라 죽겠다며 울었다. 아내의 눈에는 내 모습이 불안해 보였을 것이다. 구치소에 수감됐을 때도 교도관이 나를 특별 관리했다. 행여나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까 봐 계속 신경을 쓰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 걱정 때문에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학교에서 친구들한테 놀림을 받지는 않을까, 농구를 좋아하는 애들인데 아빠 때문에 농구를 못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돌이켜보면 그때 구속된 것이 내가 살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만약 불구속으로 수사를 받았다면 폭음을 하고 홧김에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기가 막힌 건, 구치소에 수감된 첫날 독방에 들어가자마자 큰 대자로 뻗어서 코를 골며 잤다는 사실이다.”
▼ 그게 어떤 의미인가.
“이제 모든 게 끝났구나, 죗값 치르고 나가면 된다는 생각에 비로소 자유로워진 거다. 2, 3년 동안 제대로 잠을 이룬 날이 없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단잠을 잤다.”
▼ 구치소에 수감된 이후 승부조작에 연루된 브로커들을 회유했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운동시간이었나…어떤 사람이 갑자기 다가오더니 ‘어휴 감독님 아니십니까?’ 하면서 후배 얘기를 꺼내더라. 그 후배도 구치소에 있는데 뭔가 전달할 내용이 있으면 자기가 대신 전해주겠다고 했다. 전달할 내용을 메모지에 써달라고도 했다. 글을 쓰진 않았고 왜 사실대로 얘기 안 했냐, 왜 하지도 않은 얘기를 만들어서 날 이렇게 힘들게 했느냐는 얘기를 전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브로커를 회유한 걸로 둔갑해 알려졌다. 이 부분은 재판 과정에서도 기각됐다.”
끝까지 믿고 지켜준 허재
▼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터라 구치소 생활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그간 감독 강동희로선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좋은 음식, 훌륭한 호텔에서 먹고 잤다. 지도자 능력에 대해서도 후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내가 있더라.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가족들 걱정이 끊이지 않았고 출소 후 뭘 해서 먹고살지를 떠올리면 답답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겁부터 났다. 막막했다.
그때 내게 힘이 돼준 사람들이 있다. 가족, ‘강동희 농구교실’ 친구들, 허재 형 등 날 끝까지 믿고 지켜준 분들 덕분에 조금씩 힘을 내면서 버틸 수 있었다. 구치소에서 책을 많이 읽었다. 출소할 때쯤 방에 200여 권의 책이 쌓여 있더라. 성경 필사도 하고, 일기도 쓰며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보냈다.
교도관들의 도움도 컸다. 그들은 날 인간적으로 대해줬다. 잘나가다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을 여럿 겪어봐서 그런지 내게 용기를 주려고 다양한 조언을 해줬다. 그런 부분이 정말 감사했다. 육체적으로 힘든 건 거의 없었다. 단지 시간이 더디 흐르는 것,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것, 세상과 단절된 게 괴로웠다.”
▼ 구치소 수감 전에는 그 안에서 보낼 걱정이, 출소 전에는 세상으로 나갈 걱정이 많았을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걸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아무 걱정이 생기지 않았다. 아내는 매일 면회를 왔다. 정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를 찾았다. 중식당을 운영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텐데 아이들 돌보고, 식당 꾸리고, 나 면회 오는 일상을 반복했다.
출소한 뒤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 어떤 얼굴로 만나야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 그런데 내가 염려하고 두려워한 것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똑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변한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의지하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게 커다란 위안이 됐다.
“가족애를 얻었다”
감독 시절 난 바쁜 가장이었다.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보낸 날이 손에 꼽을 정도다. 아내와도 단조로운 부부관계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런데 큰일을 겪고 나니 오히려 가족애가 커지더라. 아내, 아이들과 굉장한 친밀감을 형성했다. 애들하고 매일 대화하고, 아이들을 직접 돌보고, 가족여행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그래서인지 아내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게 절대 가식이 아니다. 모든 걸 다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새로운 것들이 채워졌다. 출소 후 2년 8개월가량의 시간이 꿈같이 흘렀다. 만약 누군가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바로 답할 수 있다. 지금이라고.”
▼ 그렇게 야인으로 살던 사람이 한국프로스포츠협회와 손잡고 부정방지 교육 강사가 돼 프로야구, 프로농구 선수들 앞에 섰다.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승부조작 사건이 터질 때마다 방송 뉴스에 내 이름과 관련 영상이 나왔다. 그게 끔찍하게 싫었다. 내 인생이 사건 자료화면으로 치부되는 게 견딜 수 없었다. 선글라스와 모자가 외출 필수품이 됐다. 나는 머리가 커서 모자가 안 어울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더워서 땀이 줄줄 흐르는데도 모자를 벗지 못했다. 그래도 간혹 팬이라며 사인을 부탁해오는 분들이 계셨다. 사인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예전엔 사인하면서 동부 코치, 동부 감독 강동희라고 썼는데 지금은 사인 말고는 아무것도 쓸 게 없는 거다. 그게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그러던 중 삼성 감독을 지낸 안준호 전 감독이 내게 연락을 하셨다. 프로스포츠협회에서 일하고 있는데, 내게 부정방지 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하시면서 강사로 초빙하고 싶다는 게 아닌가. 내가 그런 자리에 나갈 자격이 되나 싶더라. 며칠 동안 고민했다. 지인들에게 자문했다. 다들 적극 찬성했다. 언제까지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다닐 거냐며 어차피 기회가 주어진 거, 용기 내 도전해보라고 격려도 해줬다.
다른 건 다 괜찮았다. 초등학교 6학년, 4학년인 두 아들이 농구를 하는데 얘들이 농구하는 걸 직접 가서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강동희라는 걸 알면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불편한 시선을 보낼까 걱정스러웠다. 더 이상 숨어 있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내가 잘못한 건 용서를 구하고, 잘못 알려진 부분은 해명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처럼 운동만 알고 지낸 선수들이 검은 유혹의 손길에서 벗어나려면 사전 예방교육이 중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팩트와 주장, 그리고 진심
▼ 부정방지 교육 강사로 나선 것을 놓고 해석이 분분했다. 프로농구판으로 돌아오려는 움직임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내가 그렇게 뻔뻔한 성격이 못 된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돌아갈 생각을 하겠나. 단 한 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이 없다. 다만 유소년 선수들의 농구 기술 향상을 위해 일해달라고 한다면 기꺼이 응할 마음은 있다.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말이다. 그런 일 말고는 전혀 관심 없다. 이건 진심이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농구를 통해 받은 사랑을 농구로 보답하며 어린 선수들이 나처럼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걸 잃지 않게끔 교육하고 내 경험담을 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엉망이 된 내 삶을 그렇게 살면서 치유 받고 싶다.”
승부조작 사건이 불거지기 전까지 그에 대한 농구계의 평판은 매우 좋았다. 평소 신의를 바탕으로 인간관계를 맺었고, 구단이나 선수들의 신뢰도 두터웠다. 그런 사람이 안타까운 사건에 연루된 터라 농구팬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어쨌거나 ‘팩트’는 그가 브로커들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했다. 이 인터뷰는 팩트 안에 담긴 뒷얘기면서 그가 전한 진심이다. 그는 끝까지 “돈은 받았지만 그 대가로 비주전 선수를 뛰게 한 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가 돈 받은 부분만 기억할 수밖에 없다.
강 전 감독 사건은 스포츠 관계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나이 어린 선수들은 이런 유혹에 더 쉽게, 더 자주 노출된다는 점에서 그가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강 전 감독은 과오로 인해 농구인들과 팬들에게 상처를 드린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 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조금씩 갚아나가고 싶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부와 명예는 잃었지만 가족애를 되찾았다는, 그래서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다는 강 전 감독의 얘기가 진한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