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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보고 배우는 관료사회

  • 허만섭|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대통령 보고 배우는 관료사회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정차 중이던 1079호 전철의 5호차 객실에서 불이 났다. 김대한의 방화였다. 1079호 기관사는 대피하면서도 사령에게 화재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사령은 보고가 없자 화재경보가 울리는 걸 오작동이라고 무시했다.

1080호 전철이 화재 사실을 모른 채 맞은편에 도착했다. 1079호의 불이 1080호로 맹렬히 옮겨 붙었다. 이후 사령이 1080호 기관사에게 승객 대피를 지시했다. 그러나 1080호 기관사는 공황상태에 빠져 마스터키를 빼들고 탈출해버렸다. 이 바람에 객차 출입문이 열리지 않게 되어 수많은 승객이 갇혔다.

192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빚어졌다.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로 명명된 이 사고를 계기로 정부는 ‘국가재난안전통신망(재난망)’ 사업을 추진해왔다. 재난에 신속 대응하는 전담 통신망으로 전국을 잇자는 거다. 취지가 틀린 것은 아니나 참 잘 갖다 붙인다는 인상을 준다.

통신망은 무죄다

엄밀히 말해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에서 통신망은 무죄다. 기계를 다루는 공무원들의 직업정신 결여가 문제의 본질일 것이다. 그러나 일부 선진국이 재난망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사람들은 정부의 일에 반대는 하지 않았다.

이 사업의 원리는 간단하다. 재난 발생 시 일반인의 휴대전화 통화량이 폭주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현장 소방관, 경찰관, 병원, 지휘부처 간 무선통신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9년이 지나도록 첫 삽도 못 뜨고 있다. 일각에선 관료사회의 욕심이 지나친 탓으로 본다.

재난망 구축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전국에 무선통신망을 새로 구축하는 자가망 방식(테트라, 와이브로)과 이미 설치된 상업 무선통신망을 활용하는 상용망 방식(아이덴)이 그것이다. 자가망엔 1조2000억~1조6300억 원의 예산이 들고 상용망은 5000억~6000억 원 정도다(한국정보화진흥원, 재난망 구축 실무협의회).

정부는 자가망 방식으로 밀어붙여온 경향이다. 그러다 2008년 “과잉·중복투자 우려가 있다”는 감사원 지적으로 제동이 걸렸다. 공공기관이 너도나도 자체 망을 깔다보니 이미 전국적으로 공공용 광케이블이 실수요보다 10배나 많이 설치된 것으로 조사됐다(통신사업자연합회). 자가 재난망으로 하면 전국 각지에 별도의 중계기를 설치해야 하고 시설 운영에도 비용이 든다. 대신 정부가 주무를 예산, 권한, 자리는 늘 것이다. 전담 공기업이 새로 생길 수도 있다. 정부의 자가망 선호엔 이런 관료 이기주의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 자연히 정책의 신뢰도에 금이 갈 수밖에 없다.

2011년 말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의 용역결과는 역시 자가망이었다. 정부와 전문기관이 공신력을 걸고 내놓은 결과이므로 웬만하면 정책으로 집행됐어야 한다. 그러나 한발도 나아가지 못했다. 아무리 정부라도 사회의 집단지성을 힘으로 누르지는 못한 것이다. 반대진영의 누구도 복잡한 전문용어로 가득 찬 이 보고서에 수긍하지 않았다. “9·11 테러까지 겪은 세계 최고 통신왕국 미국도 상용 재난망(아이덴)을 잘 쓰고 있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가”라는 상식적인 물음에 정부가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정부 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도 이제 행안부 안에 반대하는 모습이다. 그러자 행안부는 2차 용역을 발주했다. 이 결과로 논란이 해소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부가 더 깊은 불신의 수렁에 빠질 수 있다고 본다.

취미생활 하듯 혈세 펑펑 써

재난에는 철저히 대비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의도로 국민의 공포 심리를 부추기거나 사안을 과장해선 안 될 것이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에서 지진해일과 원전 폭발이 발생한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이 전대미문의 재난 와중에도 일본 정부와 구조대의 재난 통신망은 소위 자가망이 아님에도 제대로 작동했다.

대통령 보고 배우는 관료사회
한국의 대통령들은 자기 취미생활 하듯 특정 선호 사업에 24조 원(4대강), 22조 원(행정수도 이전)을 펑펑 써댄다. 관료사회가 이를 보고 배우는 것 같다. 자기 돈이라면 절대로 이렇게 쓰지는 않을 것이다.

재난망 사업은 연간 325조 원인 정부 예산 규모로 보면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국민에게 큰 교훈을 준다. 그것은 관료들이 국민의 혈세를 아껴 쓰지 않는다는 점, 이들에 대한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신동아 2012년 4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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