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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특별연재/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⑨

전태일

시대의 불꽃으로 타오른 한국 노동운동의 깃발

  • 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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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정한 인간의 무덤은 후세의 가슴인지 모른다. 1970년 분신한 전태일은 많은 이의 가슴에 여전히 살아 있다. ‘동아일보’는 1971년 신년호에서 6·25전쟁이 1950년대를, 4·19혁명이 1960년대를 상징하듯, 스물두 살의 젊음을 불사른 전태일의 죽음을 ‘1970년대’란 시대 그 자체로 평가했다. 1970년대 전태일의 치열한 삶과 죽음은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노동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전태일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3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여기서 우리의 기억을 잠시 1970년 그때로 되돌려보자.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30분,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앞 사거리. 피복 노동자(당시에는 ‘노동’이란 말이 금기시됐음)로 일하던 전태일과 12명의 ‘삼동회(三棟會)’ 회원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위 군중은 금세 500여 명으로 불어났고, 시장경비대와 경찰병력이 평화시장 일대를 삼엄하게 에워쌌다. 그로부터 10여 분 뒤, 삼동회를 조직하고 시위를 주도한 스물두 살의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삽시간에 그의 몸 전체로 퍼졌다. 그는 불타는 몸으로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의 손에는 근로기준법 책자가 쥐어져 있었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를 위한다는 화려한 위로의 말잔치며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따뜻한 비단이불이었다. 법으로만 있던 그 화려한 장식물이 이날 화형을 당한 것이다. 역사가 매양 그렇듯, 새 시대가 오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도래를 정면으로 선포하는 의식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런 의식에는 으레 속죄양이 요구됐다. 역사의 비정함인가.

전태일의 육신 위로 불길이 치솟아 오를 때까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너무나 엄청난 광경을 보고 넋을 잃었던 것이다. 잠시 후 전태일의 동료가 달려들어 점퍼로 불길을 덮었다. 불은 한참 뒤 꺼졌다. 전태일은 이미 숯덩이처럼 탔다. 그런데도 그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 생명을 내뱉는 절규였다. 일찍이 세계 노동운동사에 없던 분신투쟁이 벌어진 순간이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전태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엄마, 내가 못다 이룬 일 엄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어머니는 약속했다. “내 몸이 가루가 돼도 네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 그리고 밤 10시경, 전태일은 “엄마, 배가 고파요”라는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이소선 여든의 기억-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후마니타스, 2008) 평생을 굶주림과 고통 속에서 살다 간 스물두 살의 젊은이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인간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전태일의 분신 후 사흘째인 11월16일, 서울대 법과대학에서는 가칭 ‘민권수호 학생연맹 준비위원회’가 발족했다. 학생들은 전태일 장례를 서울대 법대 학생장으로 치르려 했다. 이소선은 아들이 요구한 노동조합 결성과 근로조건 개선 등 8개항의 요구조건을 노동당국에 내걸고 버텼다. “(아들의 시신을) 검은 치마폭에 싸서 뒷산에 묻더라도 내 아들 장례는 내가 치르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노동청에서 공개적으로 그 요구조건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례식은 이틀 뒤 열렸다. 이소선이 다니던 창동 감리교회에서 영결식이 거행됐다.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마석리 모란공원. 산을 밀어 조성한 지 얼마 안 된 공원묘지는 황량했다. 그러나 훗날 이 묘역은 ‘민주열사 묘역’이 되어 동작동 국립묘지와 또 다른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성역으로 가꾸어졌다.

서울대 법대에서는 11월20일 전태일 추모식이 열렸다. 이 모임을 주선한 인물들 중에는 장기표를 비롯,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도 있었다. 추모식에서 조영래가 초안을 작성한 선언문이 발표됐다. 곧바로 서울대에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졌다. 추모모임은 그 후 전국 각지 대학생들과 종교단체에까지 퍼져나갔다. 11월25일 개신교와 가톨릭계가 연합해 가진 추모예배에서 김재준 목사는 “우리 기독교는 여기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속죄했다. 11월27일에는 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됐다. 전태일이 죽음으로써 쟁취하고자 했던 평화시장 노동자의 ‘둥지’가 비로소 마련된 것이다.

1970년 겨울부터 이듬해까지 전태일이란 이름 석자가 한국 사회를 휩쓸었다. 그것은 폭풍이었다.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노동문제를 사회적 관심사로 다루었다. 성장신화의 한 귀퉁이에 내팽개쳐져 있던 노동문제에 관심이 집중됐다. 학생들 사이에선 노학(勞學)연대의 싹이 돋았다. 종교인들은 참회와 속죄의 기도회를 열었다.(구혜근,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2002)

‘신동아’는 1971년 1월호에 전태일 수기를 단독으로 입수, ‘인간 최소한의 요구입니다’를 실었다. 이어 3월호에는 ‘평화·동화·통일시장-근로기준법의 소외지대’를 심층 취재했고, ‘그 후의 평화시장’을 제목으로 생생한 현장르포를 담았다.

전태일, 이 젊은 청년이 우리 사회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노동자는 물론 학생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 할 것 없이 양심에 가시가 찔린 듯 아픔을 겪었다. 특히 수출주도형 산업화와 한강의 기적이라는 외형적 성장신화의 그늘에 가려져있던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인간선언’에 눈을 떴다. 그들은 더 이상 ‘기계’가 아니고 인간이고 싶었다. 노동조합 결성이 무엇보다 당면한 과제였다. 그 결과 1970년 46만여 명이던 조합원이 1977년에는 100만명을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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