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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특별연재/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⑨

전태일

시대의 불꽃으로 타오른 한국 노동운동의 깃발

  • 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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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한 사람들

전태일과 함께한 삶은 많다. 이후 그의 가족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일일이 말하기엔 지면이 부족하다. 당시 대학생으로는 장기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장기표에게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어머니’였다. 그는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조영래와 함깨 1년6개월의 징역살이를 했다. 장기표는 이소선에게서 받은 전태일의 육필수기를 조영래에게 건네주었다. 그밖에 손학규, 제정구, 이신범, 김문수 등이 전태일과 한때를 같이한 사람들이다.

서울법대 학생회 간부였던 이광택은 뒷날 독일유학을 거쳐 노동법 교수가 됐다. 지금 그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기념사업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민종덕은 청계천 고서점에서 우연히 ‘신동아’에 실린 전태일의 수기와 평화시장 르포 기사를 읽고 충격과 감동에 사로잡혔다. 곧바로 이소선을 찾아 전태일을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장기표와 조영래 사이에서 연락을 하면서 1983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 출간에 숨은 기여를 했다.

조영래는 전태일이 분신할 당시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기표의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 나와 추모모임의 선언문 초안을 쓰는 등 참여하다가 다시 시험 준비를 계속했다. 조영래에게 근로기준법은 단순한 법전의 문제가 아니었다. 노동자의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규범이었다. 그는 제도권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사법부에 진입하려 했고, 1971년 마침내 고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조영래는 사법연수원 생활을 하던 중 ‘국사범’으로 옥고를 치렀다.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이라는 거창한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조영래는 장기표와 함께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1973년 4월에 출옥했다. 조영래는 출옥 후 장기표로부터 전태일의 수기를 건네받았다. 조영래는 전태일보다 한 살이 많았다. 그는 이 스물두 살 청년의 아름답고 눈물겨운 모습에 가슴이 찢어질듯 아팠다. 그러나 1974년 발생한 민청학련사건에 연루, 장기표와 함께 당국의 수배를 받고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됐다.



‘대학생 친구’ 조영래

수배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조영래는 피신에만 급급할 수 없었다. 그는 틈틈이 이소선을 만나는가 하면,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몰래 접촉해서 그들의 생존조건을 샅샅이 조사했다. 만 1년 이상을 그렇게 해서 뒷날의 ‘전태일 평전’을 준비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한 1년 동안 도망 다녔는데, 조 변호사(1983년 변호사 개업-필자 주)에게 넘겨주었지요.(전태일 수기 복사본. 원본은 이소선에게 반환-필자 주) 그렇게 해서 그 책은 1976년 초가을에 거의 마무리됐지요.”(‘조영래변호사 유고집: 진실은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창작과 비평사, 1991)

조영래는 고달픈 수배생활 중에도 ‘전태일 평전’ 집필에 매달렸다. 1976년 가을 초고가 완성됐다. 완성된 원고는 미로와 같은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국내 상황은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계엄령 상태’였다. 어쨌든 1977년 한국에서 넘어간 한 뭉치의 원고가 이듬해 일본어로 번역·출간됐다. ‘불이여, 나를 감싸 안아라’라는 제목에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부제를 단 ‘전태일 평전’이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서 역수입됐다.(안경환, ‘조영래 평전’, 강, 2006)

국내에서 이 책은 유통이 철저하게 금지됐다. 금서 중의 금서였다. 1983년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가 결성됐다. 문익환 목사가 회장이었을 때 일이다. 문익환은 그해 6월 돌베개출판사에서 ‘어느 청년…’을 펴내기로 했다. 책은 출판과 동시에 판금됐다. 그러나 입을 발로 해 이 책은 빠른 속도로 독서시장에 퍼져나갔다.

‘어느 청년…’은 수많은 독자의 가슴을 두드리고 혼을 흔들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이 책은 더 이상 ‘불온문서’가 아니었다. 1990년 가을 개정판 출간 준비 작업이 시작됐다. 길고도 모호한 제목을 군더더기 없이 ‘전태일 평전’으로 바꾸었다. 저자 역시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대신, 조영래 이름 석자를 세상에 처음으로 밝혔다.

책 내용도 달라진 시대상황에 맞춰, 숨길 수밖에 없었던 부분을 드러내고, 부분적으로 수정도 했다. ‘전태일 평전’의 ‘복권’이었다. 그러나 정작 조영래는 1990년 폐암선고를 받고 12월12일 세상을 떠났다. 개정 증보판이 산뜻한 장정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 전태일이 그토록 갈망하던 ‘대학생 친구’ 조영래는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후 20년 만에 그의 곁에 누웠다. 뒤늦은 만남이지만, 그 역시 아름다운 인연이 아니겠는가.

평화시장에 첫발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 서장의 글머리에서 1976년 현재 전태일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 노동자. 1948년 8월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선언’이라고 보았다.”

전태일의 어린 시절은 1950~60년대 하층민의 삶을 밑도는 참담한 것이었다. 봉제 노동자였던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 사이에서 2남2녀의 맏이로 태어난 전태일은 1956년 남대문초등공민학교 2학년으로 들어갔다가 1960년 남대문초등학교로 편입했으나 그마저 중퇴했다. 평생 그는 배움에 목말랐다. 삶의 근거지도 들쑥날쑥해서 대구에서 서울로, 다시 대구로, 다시 서울로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전형적인 뜨내기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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