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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특별연재 /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⑩

박현채

성장신화에 길항한 ‘민족경제론’의 우렁찬 목소리

  • 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박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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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는 박현채가 쉰아홉에 쓰러져 가까스로 환갑을 채우고는 곡절 많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되는 해다. 박현채는 그의 생애 속에 시대가 가로질러간 우람한 산봉우리 같은 존재다. 그는 재야에서 강단을 훌쩍 뛰어넘은 민족경제론의 주축이었고, 실천적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박현채
1980년대 후반 이후 국내적으로는 ‘87년 체제’라는 획기적 전환이 일어났다. 바깥으로는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도미노 현상’처럼 진행되고, 소련연방의 해체, 중국 천안문 사태가 이어지는 등 국제적으로 변화의 물결이 소용돌이쳤다. 안으로 억압과 저항이 동반상승했는가 하면, 밖에서 불어온 바람으로 이른바 진보진영 전반은 깊은 수렁에 빠져든 채 방향감각을 상실한 시기였다. 박현채 역시 너무나 엄청난 역사의 격랑 속에서 그 강건하던 정신과 육체에 고뇌가 암세포처럼 증식했는지 모를 일이다. 1993년 홀연 병상에 누운 지 3년 만에 기어코 눈을 감고 말았다.

박현채, 그의 이론과 사상은 그의 실천적 활동과 치열했던 삶의 궤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는 광복 이후 남북분단과 6·25전쟁에 이르는 현대사의 파란 속에서 불과 16세의 어린 나이로 빨치산 소년중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발탁’됐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소년전사 조원제의 이야기는 ‘박현채 평전’의 소년기에 해당한다. (‘고 박현채 10주기 추모집·전집 발간위원회’ 엮음, ‘아, 박현채’, 해밀)

생전에 박현채와 가까웠던 송기숙은 조정래와 함께 ‘박현채의 10대 후반’으로 역사기행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박현채가 활동했던 전남 화순군 백아산 등이 대상이었다. 빨치산 동지들이 달 밝은 밤 산마루에서 주고받은 얘기며, 허름한 주막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늘어놓던 땀 냄새 물씬 나는 얘기는 박현채의 놀라운 기억력에 힘입어 ‘태백산맥’ 후반부에 생생하게 재현되기도 했다. 지리산 세석평전 드넓은 분지에 가을 달빛이 교교하던 날의 추억을 조정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소주잔에 담긴 달빛까지 마시며 이어지던 선생님의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는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생사를 건 ‘산 생활’ 중 박현채는 총알을 직통으로 맞아 죽을 뻔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바지 뒤쪽 호주머니에 어머니가 넣어준 지폐뭉치에 총알이 박혔는데, 총알은 지폐뭉치의 거의 마지막 장에 멈추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박현채는 1952년 ‘하산’, 전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 박현채는 ‘한국농업문제연구회’ 간사로 있었다. 당시의 활동을 그의 회갑기념논문집인 ‘민족경제론과 한국경제’(창작과비평사, 1995)에 실린 ‘박현채 연보’에서 인용한다.

“농지개혁의 실패와 잉여농산물 도입, 한국경제와 농업에 관한 연구에 주력하고 실천적으로는 전근대적 생산양식을 극복하기 위해 협업농업의 양성을 주장함. 한국농업문제연구회는 농업문제뿐 아니라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문제, 원조경제의 본질, 자본주의 세계경제하의 국민경제의 독자적인 존재 가능성 등을 검토함으로써 새로운 이론의 온상지 역할을 하였음. ‘한국농업문제연구회’는 주석균(회장), 유인호, 김병태, 김낙중, 박현채 등 비판적 농업경제학자들로 구성되었음.”

“박현채, 그 사람 수상감이야”

지식산업사도 1995년 박현채의 회갑기념논문집 ‘한국경제:쟁점과 전망’을 발행했다. 이 논문집의 서문에서 지금은 뉴라이트 계열의 좌장 격으로 있는 안병직은 박현채를 일컬어 “그는 나의 인생을 크게 바꾸게 한 유일한 스승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14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안병직은 그때와 180도 다른 길을 가고 있다.

1964년 박현채는 도예종, 정도영, 김병태, 김금수 등과 주한 외국군 철수, 남북한 서신교환, 문화·경제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목표로 ‘인민혁명당’을 결성한 혐의로 검거됐다. 세칭 ‘제1차 인혁당 사건’이다. 박현채 등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는 도예종(제2차 인혁당사건으로 사형선고 후 바로 집행. 2008년 무죄선고)을 은닉시켜준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박현채는 제도권과 학계에서 ‘페르소나 논 그라타(기피인물)’가 되었다.

인혁당사건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대학가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연출한 첫 ‘작품’이었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북한과 연계된 인혁당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조작해 정치적 위기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던 각본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노사정위원장을 지낸 김금수는 박현채와 인혁당사건 공범자로 몰려 한 오랏줄에 묶여 취조를 받았다. 김금수의 회상에 따르면 이 상황에서도 박현채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마치 자기 집 안방에서처럼 행동했다.” 거대권력과의 대결이 마치 신나다는 듯 행동했다. 검찰 취조가 끝날 무렵 담당검사가 혼잣말처럼 했다. “당신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박현채, 그 사람이 수상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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