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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발칸의 유서

  •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발칸의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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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래 차지하고 있던 학교 연구실을 비웠다. 반년도 더 걸렸다. 줄 것은 주고, 버릴 것은 버리고, 갈무리할 것을 갈무리하는 마무리 과정이. 물경 27년 동안 누적된 학방(學房)의 진애(塵埃)를 털어내는 일은 녹록하지 않다. 책은 공공재니까 나누어주면 그만인데 서류와 편지는 다르다. 사형 아니면 무기간수, 재판관의 고민이다.

작은 영어 책자를 두고 한참 고심했다. 20년 전 한 여인이 남긴 선물이다. ‘절교’를 선언하는 서신과 함께 우편으로 부쳐온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새삼 되살아난다. 사귄 적도 없는 여인에게서 받은 절교 편지. 뜬금없었기에 더욱 민망했다.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은 게 전부다. 정중한 독자의 독후감에서 비롯되었다. 몇몇 영미 문학작품에 대한 가볍지 않은 평도 담겨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단미(사랑스러운 여자)’니 ‘그린비(그리운 남자)’니 ‘예그리나(사랑하는 우리 사이)’니 하는 아름다운 우리말도 썼다. 행간을 읽지 못한 나의 아둔함도 있었다. 언제 한 날 함께 산책하자는 제의를 받고 머뭇거리던 터였다. 이내 거절의 뜻으로 알겠노라, 그러면서 이별의 징표를 남겼다. 어린 시절부터 곁에 두었고, 이사 때마다 챙겨 다닌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책이라고 했다. 유고의 내전이 심화되는 소식에 ‘왠지 떠나보내고 싶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 내게 맡긴다고 했다. 사춘기가 긴 여인 같았다. 어쩌면 자신의 청춘 유언장을 맡아줄 변호사 정도로 생각했을까? 나 또한 사춘기가 긴 사내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을지 모른다. 손수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에 ‘하느님은 선생님을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썼다. 무엇보다 그 말이 불편했다.

# 2 ‘이것이 유고슬라비아다(This Is Yugoslavia)’. 통틀어 100면도 안 되는 포켓판 사진첩이다. 1950년대 초반, 뉴욕에서 발행한 소책자로 ‘세계의 사진기행’ 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앞 표지가 서늘한 감동을 선사한다. 바다와 언덕과 해변의 마을, 그리고 마을 전체를 굽어 내려보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휘어진 소나무, 언뜻 보아 내 나라 풍광과 흡사하다. 뒤 표지는 이국적이다. 검은 털모자를 쓰고 가죽 배낭을 차고 백마를 탄 산악촌 노인의 모습이다. 책 속에 수십 장의 사진이 해설과 함께 담겨 있다. 흑백사진이지만 다인종 사회의 모습이 역력하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그야말로 연방국가, 유고슬라비아가 균형 있게 분해돼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나같이 갑옷처럼 육중한 민속의상에 눌려 있다. 해변 풍경도 경직 일변도, 기껏해야 낚싯대를 드리운 사내들뿐이다. 호숫가에서 아이를 지켜보는 구식 수영복 차림의 젊은 어머니 모습이 그나마 가장 풀린 자세다. 청년 법학도 시절 내 영혼을 앗았던 외국인 판사가 있었다. 그의 여행기 ‘이상한 나라, 친절한 사람들(Strange Lands · Friendly People)’을 읽을 때 느꼈던 진한 감동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선한 사람의 질박한 삶의 무게, 바로 그것이다.

#3 도무지 오리무중인 게 발칸의 역사다. 되풀이해 읽어도 머릿속에 정리가 되지 않는다.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청년이 쏜 ‘사라예보의 총성’이 제1차 세계대전을 불러왔다. 중학 시절 이래 반세기를 그 수준에서 맴돈다. 보스니아 산속에서 유고슬라비아가 탄생했다고 한다. 2차 대전 중 히틀러를 상대로 한 유고 빨치산의 투쟁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그들이 즐겨 부르던 애국 독전가의 일부 가락은 6·25전쟁 후에 지리산 남부군에게도 전승되었다고 한다. 유고 사람들은 “가슴으로 먼저 생각하고, 나중에 머리로 생각한다.” 우리도 그 시절에는 그랬다.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였으니.

발칸의 유서

발칸반도에 자리한 크로아티아의 성채도시 두브로브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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