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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⑬

여제 살린 ‘리가 블랙’ 황제도 감탄한 ‘우니쿰’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여제 살린 ‘리가 블랙’ 황제도 감탄한 ‘우니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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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가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방문했을 때 심각한 병에 걸렸다. 심한 감기 증세에 소화불량까지 겹친 중한 상태였다. 궁중 의사들의 처방도 효험이 없자, 주변의 권유로 리가 특산 약주를 마셨고 병은 씻은 듯 나았다. 여제를 살린 술, ‘리가 블랙 발삼’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는 사경을 헤매다 황실 주치의로부터 약술 한 잔을 건네받았다. 40여 종의 약초와 향신료를 재료로 만든 이 술 ‘우니쿰’은 헝가리의 국민주가 됐다. 리가 블랙 발삼과 우니쿰은 전통적 개념의 건강 목적 술인 ‘비터스’ 제품에 속한다.
여제 살린 ‘리가 블랙’ 황제도 감탄한 ‘우니쿰’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

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을 무대로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문화 사조로서, 합리적 이성에 기초를 두고 낡은 사상을 타파하려는 일종의 혁신적 사상운동을 일컫는다. 계몽주의를 주도한 학자 중에는 철학자인 스피노자와 로크, 역사학자 볼테르, 수학자 뉴턴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계몽주의 사상은 유럽 내 군주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계몽주의를 새로운 사회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국정 철학으로 인식하면서 이를 정국 운영 기조로 채택하려고 노력했다.

계몽주의 전제군주로 일컬어지는 지도자 중에서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신성로마제국의 요제프 2세, 그리고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는 이른바 ‘계몽주의 군주 삼총사’로 불릴 정도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중 예카테리나 2세와 요제프 2세는 남다른 정치 행보와 사생활 이외에도 생전에 유명한 유럽의 약주(藥酒)와 남다른 인연이 있어 애주 호사가들의 흥미를 더한다.

먼저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1729~1796, 재임기간 1762~1796)는 러시아 역사에서 여자 황제로는 가장 오래 통치한 인물이다.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대제(大帝)로 불리는 황제는 표트르 1세와 함께 예카테리나 2세 단둘이라는 점은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예카테리나 2세의 어릴 적 이름은 소피 프리데리케(Sophie Friederike)였다. 통일 독일의 근간을 이룬 지역인 프로이센과 스웨덴 접경 지역에 있는 안할트 제르프스트라는 소공국의 공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두 사촌형제가 스웨덴 왕이 될 정도로 명문가였지만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다.

엘리자베타 여제가 후원한 예카테리나

여제 살린 ‘리가 블랙’ 황제도 감탄한 ‘우니쿰’

우니쿰(왼쪽), 리가 블랙.

그는 어릴 때부터 프로이센과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복잡미묘한 국제 정세 속에서 항상 정략결혼 대상으로 거론돼왔다. 그를 이용해 권력을 얻고 싶어한 야심 찬 어머니 요한나(Joanna Elisabeth·1712~1760)의 후원 아래 그는 당시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의 손에 거두어졌다. 유명한 표트르 대제의 친딸로 오늘날 러시아 국민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군주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엘리자베타 여제(Elizaveta Petrovna·1709~1762, 재위기간 1741~1762)는 요한나는 배척했지만 그녀의 딸인 소피는 매우 마음에 들어 해 러시아 정착에 필요한 교육을 철저하게 시켜나갔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소피의 아버지는 그녀가 러시아에서 기반을 잡기 위해 어쩔 수없이 거쳐야 하는 개종(루터교→러시아정교)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럼에도 그는 1744년 그리스정교 신자가 되면서 엘리자베타 여제의 모친인 예카테리나 1세(Ekaterina I·1684~1727, 재위기간 1725~1727)를 기리는 뜻에서 ‘예카테리나’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 그리고 이듬해인 1745년 훗날 러시아황제 표트르 3세가 되는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인 카를 울리히와 결혼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16세였다. 그의 아버지는 종교적 이유로 이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겨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카를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아 후사가 없던 엘리자베타 여제가 생전에 황위 계승자로 정해놓은 그의 조카였다. 불안한 정국 속에서 쿠데타로 황제에 오른 탓인지 엘리자베타 여제는 황실의 안정을 강력히 원했고, 이 때문에 프로이센에서 자란 어린 조카 카를을 불러와 빨리 결혼시키고 싶어했다.

그런데 정작 예카테리나와 카를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원래 결혼 전부터 인간적으로 카를을 좋아하지 않았고, 결혼 후 무능하고 알코올 중독인데다 괴팍한 성격의 그에게 더욱 실망했다. 그가 다른 남자들과 본격적으로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까닭에 공식적으로는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훗날 예카테리나 2세의 뒤를 이어 러시아 황제 파벨 1세(Pavel I·1754~1801, 재위기간 1796~1801)로 즉위한 아들도 아버지가 카를이 아니라 젊은 장교였던 세르게이 살티코프(Serge Saltykov·1726~1765)라는 말이 공공연한 사실로 치부될 정도였다.

남편을 제거한 예카테리나의 쿠데타

어쨌든 1762년 엘리자베타 여제가 병으로 사망하자 예카테리나의 남편 카를은 표트르 3세(Peter III, 1728~1762, 재위기간 1762년 1월~1762년 7월)로 즉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제7대 황제가 되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어머니 엘리자베타 여제와는 달리 그 자신이 자란 프로이센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이며 유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 프로이센의 황제이자 국민의 행복 증진을 우선으로 한 계몽 전제군주로 평가되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1712~1786, 재위기간 1740~1786)를 숭배하다시피 해 러시아군 제복을 프로이센군과 비슷하게 바꾸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 국민으로부터 인기가 결정적으로 하락한데다 급기야 일련의 대내외 정책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주위의 큰 불만을 사게 된다.

표트르 3세와는 달리 예카테리나는 같은 프로이센 출신이지만, 러시아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타고난 총명함으로 러시아 귀족과 백성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야심가였다. 결국 표트르 3세는 즉위한 지 불과 반년 만인 그해 7월 황실 근위대의 도움을 받은 부인 예카테리나의 쿠데타로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로부터 8일 후인 1762년 7월 17일 유폐돼 있던 로프샤에서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는다. 이 암살의 배후에 과연 예카테리나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느냐 여부는 지금까지 역사가들의 단골 관심거리이지만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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