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히거나 한줌의 재가 되어 바람에 날린다. 그러나 평범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모든 이들, 어떻게 죽었는지 의혹이 남은 사람들은 그 전에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 부검실이 바로 그곳이다.
국과수 법의학과 부검팀이 변사자의 시신을 부검하고 있다.
냉장보관실에 있던 사체가 카트에 실려 싸늘한 부검실로 들어왔다. 하얀 방수천을 벗겨내니 밀랍같은 사망자의 시신이 드러난다. 따라들어온 경찰관이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가족들이 그러는데 죽은 사람이 에이즈 환자였던 모양입니다.”
순간 부검 당직 이한영 법의학과장(45)의 표정이 굳는다. 한 명의 의사와 세 명의 연구사로 구성된 부검팀도 술렁인다. 사망자의 피가 묻은 메스에 찔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에이즈 감염을 각오해야 할 판이다. 몇몇 사람이 부검실 구석에 있는 서랍장에서 목장갑을 꺼내 의료용 장갑 위에 덧낀다. 사체 옆에 놓인 서류를 들여다보던 이과장에게 옆 해부대에서 부검을 진행하고 있던 양경무 법의관(35)이 말을 건넨다.
“과장님도 마스크를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미리 알았으니 꺼림칙한 거지, 에이즈 환자인 줄 모르고 부검한 게 한두 번이야? HIV 바이러스는 공기 중에 노출되면 몇 초 안에 죽는다고. 자, 시작들 합시다.”
“피라도 튀면…”
이과장이 듣는 둥 마는 둥 해부대 옆으로 다가선다. 냄새 또한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에 마스크는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자의 발이 저절로 뒤로 한 발짝 움직였다.
“목장갑이 전붑니까? 다른 살균시설 같은 것은 없습니까?”
어쭙잖은 질문이었을까, 이과장의 씁쓸한 웃음이 대답을 대신한다.
서울 양천구 신월7동 135번지 N연립주택은 동네의 다른 집에 비해 집값이 싸다. 건물이 낡아서도, 부실공사 때문이어서도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 부검실이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 법의학 별관이 손에 잡힐 듯 가깝기 때문이다. 입구에서 만난 아이 업은 아주머니는 “아무래도 꺼림칙하지만 저 건물이 먼저 생겼다니 할말 없지 뭐” 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공기정화시설이 시신 냄새나 병균을 완전히 제거한다고 하지만 왠지 께름칙하다는 것이다.
국과수 법의학부 법의학과. 매년 7000여 명에 달하는 변사자의 시신이 이곳을 거친다. 그 중 서울 본소에서 처리한 건수가 지난해 3000건을 넘어섰다. 휴일을 제외하면 평균 하루 10건. 수도권 전지역의 경찰서와 군 수사기관, 교정시설 등이 서울 본소 관할이다.
국과수가 서울의 서쪽 끝인 양천구 신월동 외진 동네에 자리잡은 것은 1986년. 시민들의 반발이 적은 곳을 고르고 골라 산림청 소유인 국유지에 터를 닦았지만, 서울이 비대해지면서 인근에 어김없이 주택가가 들어섰다. 부서마다 공간 부족을 호소해도 주민들 항의에 증축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 야산과 고속도로 사이에 건물을 짓다 보니 북향을 택할 수밖에 없어, 안 그래도 을씨년스러운 연구소에는 한낮에도 찬바람이 쌩쌩 분다.
흔히 생각하듯 국과수에서 부검만 하는 것은 아니다. 국과수는 크게 두 부서로 나뉜다. 화학 분석이나 화재 감정, 교통사고 분석 등을 담당하는 법과학부가 그 하나이고, 부검과 유전자 분석, 범죄심리학을 포함한 법의학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법의학부가 다른 하나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부서가 없지만 아직까지 ‘국과수’라는 말에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차가운 부검실의 이미지다.
국과수 법의관의 정원은 남부(부산), 서부(광주), 중부(대전) 분소를 포함해 총 25명이지만, 빈자리가 많아 실제로는 20명이 본소와 분소를 오가며 근무하고 있다. 서울 본소에서 일하는 법의관은 열두 명. 그 중 치흔과 조직검사 담당 법의관을 제외하면 부검을 하는 사람은 열 명이다. 이외에 세 명의 공중보건의가 배치되어 일손을 돕고 있다.
이들 법의관은 모두 의사다. 해부병리학 전공으로 전문의 자격을 획득해야 법의관이 될 수 있다. 국과수에서 법의학 관련 트레이닝을 받고 선배들의 부검에 1년 이상 참여한 뒤에 비로소 자기 이름으로 감정서를 쓸 수 있다.
자격 조건이 까다롭다 보니 연령대가 높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김성호 법의관이 34세. 서울 본소에서 일하고 있는 12명 가운데 7명이 박사학위 소지자다. 이들을 도와 부검을 진행하는 연구사들 또한 임상병리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전문인력이다.
“계단이 그로테스크하죠?”
부검실이 자리잡고 있는 법의학 별관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서 이한영 과장이 기자를 돌아보며 웃음을 짓는다. 서늘한 12월의 아침, 좁고 어두운 철제 나선형 계단이 몸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지하 복도에 들어서자 인체 장기를 병에 담아 보관해 둔 표본이 눈에 들어온다. 일제시대 때 엄청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사이비 종교 교주와 뭇 남자를 홀렸다는 전설적인 기생의 성기도 보관하고 있지만, 이상한 시선이 많아 전시대에서 치웠다는 게 이상용 법의관(36)의 설명이다.
아직 작업이 시작되지 않은 부검실에 들어서자 찬 공기가 훅 끼친다. 텅빈 방에는 알 듯 말 듯 반갑지 않은 냄새가 남아 있었다. ‘시신과 유가족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팔짱을 끼는 일은 삼가 달라’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부검실은 크게 네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그날 부검할 시신을 맞이해 보관하는 냉장실과 X-ray 촬영 등이 이루어지는 검사실, 부패가 심한 사체를 부검하는 밀폐실, 그리고 일반 부검실이다. 밀폐실이 있다고는 해도 여름에 부패가 심한 사체가 들어오면 건물 전체에 냄새가 퍼지기는 마찬가지다.
“춥지요? 혼령이 많아서 그래요. 여기저기 떠다니는 것 안 보이세요?”
부검실의 냉기는 냉장실 문이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농담인 줄 뻔히 알면서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국과수 법의학과의 하루는 아침 8시30분에 시작한다. 아침회의는 그날 부검해야 하는 사체를 검토하고 당직 부검의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이날은 열 건이 들어와 있다. 만만치 않은 날이다.
의뢰 건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하루 2~3개조가 부검을 맡는다. 일이 몰릴 때는 6개조까지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기본적으로 한 부검조는 법의관 한 명과 연구사 두 명, 사진촬영 담당 등 네 명으로 이루어지지만, 빠른 진행을 위해 공중보건의가 참여하기도 한다. 법의학부 부장과 과장도 당직에는 예외가 없다.
부검을 시작하는 시간은 대략 9시 10분경. 부검실 밖에는 시간에 맞춰 도착한 앰뷸런스와 경찰관, 유족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날 부검은 물에 빠진 자동차에서 발견된 중년 여인의 사체로 시작해 병원에서 숨진 장애아의 시신을 살피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어느새 오후 1시.
가운과 장갑을 벗은 부검팀이 구내식당으로 향한다. 기자도 마지못해 수저를 들었지만 밥은 목에 걸린 듯 잘 넘어가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역한 냄새가 나는 사체를 만지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식사를 하는 부검팀이 딴 세상 사람처럼 보인다.
“더럽거나 꺼림칙하다고 생각한다면 의사가 아니죠. 부검 사이에 먹는 샌드위치는 더 맛있는 걸요. 위험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있어요. 결핵이나 간염에 걸린 사망자라면 세균이 공기 중에 떠다닐 수 있으니까요. 부검실에는 소독시설은커녕 샤워실도 없거든요.
그래도 집에 가면 거리낌없이 아이 안아줘요. 따지고 보면 종합병원과 다를 것도 없어요. 외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뿐이죠.”
유일한 여성 법의관 박혜진씨(34)의 말이다.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 양경무 법의관이 한마디 거든다.
“씨랜드 화재사고 때였을 거예요. 일곱 살 먹은 딸아이가 ‘아빠는 의사같지 않은 의사’라고 놀리길래 사무실에 데리고 온 적이 있었어요. 부검실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사무실에 있는 사진도 모두 치웠는데 아이가 무섭다고 하더라고요. 익숙해진 우리는 못 느끼지만 건물 전체에 묘한 분위기가 흐르나 싶더군요.”
영화와 현실 사이의 거리
부검의 첫 번째 작업은 사체의 눈꺼풀을 확인하는 일. 질식사의 경우 눈꺼풀에 있는 모세혈관이 터진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부검팀이 샤워기로 사체의 구석구석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현장 감식반이 확인한 스물일곱 군데의 상처 이외에 왼쪽 어깨 위로 화상 모양 비슷한 긁힌 상처가 발견됐다. 쇠로 된 자를 상처에 넣어 찔린 깊이와 크기를 확인하는 작업을 마친 부검팀이 사망자의 굽은 손을 폈다. 손가락 군데군데에 베인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 방향이나 각도로 봐서 칼을 막다 생긴 방어흔임에 분명하다.
“묶여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과장이 담당 경찰관에게 묻는다.
“네. 감식반 말로는 청테이프로 묶여 있었습니다. 팔다리에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요.”
경찰관의 말에 이과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럼 뭐야, 찌르고 나서 묶었다는 얘기야?”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묶이지 않은 상태에서 칼이 이 각도로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찌르고 묶고 다시 찔렀다? 말이 안 되잖아. 현장 상황 좀 설명해 주시겠어요?”
담당 경찰관이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그게…, 저도 감식반이 작업을 끝내고 현장을 본 거라서….”
형사의 말에 이과장이 한숨을 내쉰다.
해부대 위에 놓인 부검 도구들. 가려진 죽음의 진실을 찾는 ‘탐사 장비’인 셈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부검실에 올 때까지 보통 이틀이 걸린다. 법의관(ME : Medical Examiner)이 현장을 조사하고 부검 여부를 판단하는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사건을 보고하면 담당검사가 부검 필요성 여부를 결정한다. 검사가 판사로부터 사체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야 비로소 사체는 국과수로 올 수 있다. 그 사이 냉장 시설에 보관된 사체의 온도나 시강을 따지는 일은 의미 없는 작업이다. 부검의는 현장에 나간 경찰이나 감식반이 기본 정보를 제대로 확인해 주었기를 바랄 뿐이다.
기본 정보란 발견 당시 사체의 상황이나 현장의 정황을 말한다. 발견 당시 사체의 자세와 상태, 혈흔의 모양 등을 정확히 알수록 죽음을 해석하는 일도 더 정확해진다. 사체와 함께 감식반이 작성한 감식 보고서가 부검의에게 전달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한영 과장의 설명이다.
“단순히 이 사람이 왜 죽었나, 질식사인지 약물중독인지 그 사인(cause of death)을 확인하는 것이 부검의 임무라면 기본 정보가 부실해도 크게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 병사인지 의료사고인지 죽음의 종류(manner of death)를 알아내려면 기본 정보가 필수적이죠. 법의학은 단순히 사체만 들여다보는 학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처 숫자 세려고 부검하는 게 아니니까요.
부검의가 스무 가지 단서를 말할 수 있는 사건도 기본 정보가 부족하면 다섯 개 정도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다’는 ‘무소견 부검(negative autopsy)’으로 결론 날 확률이 커지고, 잡을 수 있는 범인도 놓치게 되는 겁니다.”
“부검의도 현장에 가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청객인 기자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위해 이상용 법의관이 열변을 토했다. 사건의 절반밖에 볼 수 없는 ‘앉은뱅이 부검’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부검의가 직접 현장에 나가서 상황을 살펴야 합니다. 경찰조서 등 간접 정보에 의존하다 보면 그들의 선입견에 영향을 받기 쉬우니까요. 또 법의학자의 눈으로 보면 감식반이 그냥 넘길 수 있는 단서들을 잡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현장 감식과 부검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려면 최소한 현재 인원의 두 배는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변사사건’은 한해 대략 6만 건 내외.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변사자의 30~50%에 대해 부검이 이뤄지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10%를 간신히 넘어섰다. 그나마 법의관에 의해 부검이 이뤄지는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다. 국과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경우 경찰에서 일반 외과의사를 ‘공의’로 위촉해 메스를 맡긴다. 전문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부검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법의관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 5급 의무사무관 신분인 국과수 법의관의 임금은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비슷한 연차의 의사에 비해 절반 수준이다. 때문에 법의관은 이직률이 높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해부병리학을 전공한 의사 수 자체가 줄고 있다는 것. 성형외과나 피부과 같은 ‘돈 되는’ 과목에는 지원자가 넘쳐나지만 해부병리학과는 정원의 20%를 밑도는 수준이다. 이상용 법의관이 국과수의 앞날을 우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가 처음 국과수에 온 1997년 무렵에는 상황이 정말 심각했습니다. 서울본소에 법의관이 네 명뿐이었으니까요. 각 경찰서에 공문을 보내 ‘단순 변사는 의뢰를 자제해 달라’고 사정했죠. 그후 힘겹게 사람을 끌어모아 이 정도 인력이라도 확보했습니다.
의대생들의 요즘 추세로 보면 부검의 구하기가 점점 더 하늘의 별따기일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는 1960~70년대처럼 일반 의사가 부검을 맡아야 할 판이에요.”
외상 확인을 끝낸 부검팀이 메스를 들었다. 흉복부를 Y자로 절개하자 누런 지방층 밑으로 흉곽이 드러났다. 군데군데 고여 있는 피가 출혈이 심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부엌에서 쓰는 국자로 피를 떠낸 뒤, 펜치처럼 생긴 늑골도로 갈비뼈를 하나하나 잘라내고 흉골판을 들어올린다. 순간 견디기 힘든 비릿한 냄새가 부검실에 가득 퍼졌다. 무슨 냄새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온다.
“예상대롭니다. 폐와 간에 난 상처가 깊었습니다. 심장은 말끔한데요.”
사체의 장기를 하나하나 꺼내 저울에 달기 시작했다. 간 1170g, 비장 120g, 신장 210g…. 위를 절개해 내용물을 밀폐용기에 담는다. 소화가 덜 된 밥알이 보인다.
“오전에 죽었다고 했죠? 아침 먹고 바로 살해당했어요. 혹시 모르니까 목도 좀 살펴봅시다.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한 것 같은데.”
목 졸린 흔적이 있는지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사체의 가슴 위부터 턱밑까지 절개해 나갔다. 한참을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뒷목을 깊이 찔린 상처가 뇌까지 닿았음이 발견됐다.
“현장에 피가 많던가요? 뿌려진 형태던가요, 그냥 흘렀던가요?”
이과장이 다시 경찰관을 향해 물었다.
“둘 다였습니다. 군데군데 분수처럼 흩어진 자국도 있었고요. 온통 피 천지였습니다.”
“그럼 맞는 것 같은데…. 사인은 과다출혈이에요. 묶인 채로 피를 많이 흘려 죽은 겁니다. 이제는 머리 좀 살펴봅시다.”
부검은 대개 오후가 늦기 전에 끝난다. 이때부터 법의관들은 감정서를 쓰는 작업에 몰두한다. 부검 당직이 아니었던 법의관들도 마찬가지다. 오전 내내 부산하던 건물이 조용해졌다. 대개 두 사람이 한 방을 쓰는 부검의들은 돌아볼 틈도 없이 사진자료와 분석 결과에 파묻힌다. 박혜진 법의관의 방문을 두드렸다.
“왜 부검의가 되셨습니까. ‘의료계의 3D 업종’이라던데.”
“도전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냥 감기환자나 보며 살긴 싫었거든요. 검사로 일하고 있던 남편도 부검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니까 선뜻 동의했고요.”
“만족하세요?”
“할수록 재미있어요. 집요하게 뭔가를 파헤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추리하고, 그 결과를 감정서에 논리적으로 담아 설득하는 일은 평범한 의사라면 경험하기 힘드니까요. 점점 더 어려운 케이스를 만나면서 새로운 걸 익히는 성취감도 있고요.
물론 사명감이나 동료애 때문에 남아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이직을 생각하는 법의관이 꽤 있어요.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자리를 지킬까, 이 사람들이 더 고생할 텐데, 그런 마음으로 일하는 거죠.”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박법의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부검을 의뢰한 경찰관이 감정서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건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네, 타살인 건 확실해요. 그런데 유족들이 뭐라고 한다고요? 아니에요. 겉으로 멍이 안 보인다고 해서 목 졸린 게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팔로 목을 조르면 이번처럼 외상 없이 피하출혈만 생겨요. 잘 아시잖아요. 조른 사람이 여자 아니냐고요? 그건 알 수가 없죠. 수사로 밝혀내셔야지. 중요한 사항이 나오면 연락 드릴게요.”
경찰이나 검찰은 흔히 법의학을 만능으로 생각한다는 박법의관의 말이 이어진다.
“영화에서처럼 한 번의 부검으로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 주길 바라죠. 물론 소설 쓰듯 지어내면 황당한 스토리도 만들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법의학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한정돼 있거든요. 법의 부검을 해본 일이 없는 의사들이 대충 쓱 보고 생각나는 대로 유족들에게 이야기하는 걸 보면 정말 화나요. 법의관은 프로입니다. 별다른 게 없어 보이는 교통사고 하나를 해석하기 위해 직접 차체를 들여다보고 교통분석과 연구관들과 회의를 해요. 부검 결과는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지는 거니까요.”
메스로 머리를 한바퀴 돌려나가자 생각보다 쉽게 벗겨진 두피 아래로 두개골이 드러난다. 톱질이 시작됐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힘이 부친 연구사들이 교대로 톱을 잡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두개골이 열렸다.
하얀 경뇌막을 걷어내자 누런 뇌가 모습을 드러냈다. 뇌를 들어내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말을 주고받을 것도 없이 순서에 따라 척척 진행되는 부검. 목관절을 살피던 연구사의 한마디가 무거운 침묵을 깬다.
“골절이 있는 것 같은데요.”
부검팀의 표정이 달라졌다. 연구사가 들고 있는 뼛조각을 한참 동안 살피던 이한영 과장이 입을 열었다.
“골절은 아니야. 간혹 발견되는 기형의 일종인데, 사건과 관계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모르니까 사진 찍어두세요. 이따가 다시 얘기해 보자고. 자, 더 봐야 할 것 있습니까? 없으면 그만 끝냅시다.”
이과장의 말에 따라 봉합이 시작됐다. 흉골판을 다시 잘 닫고 피부를 덮은 뒤 가슴부터 바느질을 하는 작업과, 두개골을 닫고 두피를 봉합하는 작업이 빠르게 진행됐다. 익숙한 손길만이 낼 수 있는 속도였다. 순식간에 봉합을 마친 연구사들이 사체를 닦아내고 방수포를 덮었다. 왔던 길 그대로, 사체는 냉장실을 거쳐 앰뷸런스에 실렸다. 썰렁한 대기실에서는 유족들이 멍한 표정으로 TV를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3시. 회의가 열렸다. 흩어져 있던 법의관들이 각자 고민거리를 끌어안고 회의실에 모였다. 대부분의 부검은 논란 없이 종결되지만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1%가 부검의를 괴롭힌다. 이럴 때 부검의는 선배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각 대학 법의학 교실에 흩어져 교수로 일하고 있는 선배 법의관들에게 도움말을 듣는다. 방안 가득 쌓여 있는 외국 서적이나 저널은 물론 인터넷도 뒤져야 한다.
사체 하나를 부검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길어봐야 두 시간 남짓이지만, 감정서 작성에는 두 달이 걸리는 수도 있다. 펜을 드는 것이 메스를 드는 것보다 천 배는 더 무겁다는 것이다. 아무리 의견을 나눈다 해도 사람에 따라, 그동안 경험한 케이스 차이에 따라 의견이 나뉘면, 끝내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김훈 중위, 불광동 치과의사 모녀 등 ‘법의학자들끼리 싸운다’며 사회적 시선을 모은 사건들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쳤다.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부모가 양육을 포기한 뒤 보호시설에서 생활하던 뇌성마비 1급 장애아인데요, 뇌의 3분의 1이 없습니다. 뇌경막과 우측 두개골 사이에 또 다른 뇌경막이 형성돼 있습니다. 그 안에는 누런 점액만 가득하고요. 사인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인지 더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린이 사체 부검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양경무 법의관이 사진을 꺼내 들며 입을 열었다. 아프리카 난민처럼 비쩍 마른 팔다리로는 나이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죽은 아이의 나이는 열 살.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다른 법의관들이 하나 둘씩 의견을 제시한다.
“누런 점액의 성분은 뭐예요? 분석 결과 나왔어요?”
“아직 안 나왔습니다.”
“흔히 볼 수 없는 경우인 것은 확실한데 사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일단 분석 결과를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요. 양선생 생각은 어때요?”
“저도 일단 분석 결과를 받아봐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검은 곧 인권’
법의관이 작성한 부검감정서는 의뢰기관에 발송되기 전에 법의학 과장과 부장의 결재를 거친다. 결재 과정에서 성급한 결론이나 미처 확인하지 못한 바를 지적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지적일 뿐, 최종 결정권은 사체를 직접 부검한 담당자에게 있다.
과장이나 부장은 미심쩍은 부분이 있을 경우 담당 법의관에게 재검토를 지시할 수 있다. 담당자의 견해가 확고부동할 경우 전체 회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한다. 이후에도 담당자가 자신의 주장을 고수하면 그대로 최종 감정서가 발송된다. 대신 부검으로 인한 모든 책임은 감정서에 서명을 한 담당 법의관이 진다. 감정서에는 과장이나 부장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 사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사진이나 자료를 본 선배가 아니라 두 눈으로 직접 실체를 보았던 부검의라는 판단 때문이다.
“감정은 한 사람이 인간으로서 대우 받을 수 있는 최후의 절차입니다. 누군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면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부검이니까요. 거꾸로 잘못된 부검은 결백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확신할 수 있는 것만을 기록할 수밖에요. ‘부검은 곧 인권’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겁니다. 부검의들의 심경은 재판정에 선 판사의 그것과 비슷할 겁니다.”
경력 14년, 4000여 건의 부검을 집도한 이원태 법의학 부장의 말이다.
부검을 오래 한 법의학자들은 대부분 잊혀지지 않는 사건을 한두 개씩은 갖고 있다. 이부장의 경우 1989년 5월 발생한 조선대생 이철규씨 변사사건이 그랬다.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중이던 이씨는 얼굴이 검게 변색된 처참한 모습으로 광주의 한 저수지에서 발견됐다. 2년차 법의관이었던 이부장은 이 사건의 부검을 맡으면서 ‘실족사냐 타살이냐’의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다.
“시위 학생들이 건물 밖에 몰려든 상황에서 부검을 하는데, 메스 끝이 덜덜 떨리더군요. 장기 내부의 플랑크톤 검출 결과 등을 종합해 익사라고 결론지었지만 외력에 의한 것인지 실족사인지는 확정할 수 없었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서울의 서쪽 끝인 양천구 신월동에 자리하고 있다.
“완전 범죄를 할 수 있는 법을 알려드릴까요? 창호지에 물을 적셔서 영아의 입과 코에 붙여두면 흔적 없이 살인할 수 있습니다. 만취한 사람을 벽에 대고 가슴을 밀면 역시 죽을 수 있지만 부검해 봐야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케이스를 만나면 만날수록 얄팍한 과학의 한계가 두렵고, 그 한계를 알지 못하는 세상이 무서워집니다.”
부검의가 진실을 감출 수 있다는 의심, 권력에 의해 감정이 왜곡될 수 있다는 의혹은 뿌리가 깊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당시 국과수 법의학 과장으로 재직하던 황적준 박사(현 고려대 교수)가 경찰의 단순 쇼크사 발표를 뒤집고 진실을 폭로한 일은 국과수로서는 자랑스런 기억이자 잊을 수 없는 아픔이다. 법의관들은 그 사건 이후 국과수가 권력에 흔들린 경우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명시적인 압력이 아니라도 기본 정보의 왜곡이나 선입견이 부검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이때문에 국과수가 경찰이나 검찰이 아닌 행정자치부 소속이다. 경찰관에게서 사건에 대한 정보를 듣거나 중요한 단서를 구두로 통보하면서도, 끊임없이 상대방을 의심하고 회의해야 하는 것이 법의관의 원칙이라고 이부장은 말한다.
“사실 행자부와 국과수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히려 예산이나 인원 배분에 있어서 불편한 점이 많죠. 그럼에도 국과수는 수사기관에 속하면 안 됩니다. 수치를 확인하는 ‘검사’와 평가가 개입되는 ‘감정’은 다릅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선입견, 은연중에 생기는 영향을 막으려면 수사기관과 거리를 둬야 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완전한 독립기관이 되는 것이겠죠.”
사체는 사람인가, 아닌가?
이렇게 해서 스물일곱 번의 칼질로 세상을 떠난 중년 사내는 자기가 어떻게 죽었는지 부검팀에게 소상히 알렸다. 그 ‘말 없는 말’을 전해들은 부검의는 이제 그가 남긴 이야기를 하나하나 감정서에 기록할 것이다. 표피박탈, 점막하출혈 같은 딱딱한 의학 용어에 묻혀 사내의 40년 생은 깔끔하게 정리될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했고 또 미워했을,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고 또 미움도 받았을 한 사람의 마지막을 살피는 데는 40분 남짓이 걸렸다. 순간이었다.
“사람에 따라 둘로 갈립니다. 사체를 완전히 객체로 보고 접근해야 정확한 부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죽은 이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그 사람의 삶에 대해 고민해야 성실한 부검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부검의도 있습니다. 환자들을 만날 때 하는 고민과 똑같습니다.”
늦은 오후 어둑한 사무실에 기자와 마주앉은 한길로 법의관(41)의 말이다. 한법의관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법의학 교실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현장 경험을 위해’ 국과수로 옮긴 흔치 않은 케이스다. 그는 “올해 초 법의관이 되면서 삼한 ‘열병’을 앓았다”고 이야기했다. 수없이 많은 사체를 만나는 동안 부검의는 깊은 고민에 휩싸인다는 것이다.
“사체는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쉽지 않은 질문이지요? 강간 후 살해당한 20대 여성을 부검한 일이 있었습니다. 기회가 닿아서 사건 현장에도 나가봤죠. 현관에서 방 안까지 핏자국이 흩어져 있더군요. 가해자가 피해자를 짐승처럼 폭행하며 집 안 이곳저곳을 끌고 다닌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집디다. 돌아와서도 사체에 선뜻 메스를 대기가 힘들었습니다. 서너 달은 부검실에 내려가는 게 쉽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성당에도 더 이상 나갈 수 없었습니다. 부검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삶, 상상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낍니다. 그러다보니 그저 착하게 잘 살면 죽은 뒤 좋은 세상 간다는 식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지지요.
지금은 많이 나아져서 가급적 냉정한 시선으로 사체를 만나려 하는데, 아직도 감정을 처리하기 쉽지 않아요. 특히 제 딸 또래의 아이를 만나면 더욱 힘들죠. 이 일을 하는 한 어쩔 수 없이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방이 더 어두워졌다. 서쪽에 야산이 있는 국과수에는 어둠이 일찍 찾아온다. 저녁 6시, 좁은 진출입로에는 퇴근 차량들이 빨간 후미등을 반짝인다. 죽은 이가 남긴 ‘소리 없는 말’을 한마디라도 더 해석하기 위해 자료를 뒤지는 법의관들의 사무실에는 밤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 국과수의 밤 바람은 유난히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