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당연히 잊혀졌어야 하는 사람인데…

김국태(소설가)

  • 글: 김국태

    입력2003-02-26 1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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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잊혀졌어야 하는 사람인데…
    에세이와 미셀러니의 개념 구분은 라틴어 문자 사용 문화권에서도 명쾌하지 못한 듯하다. 얼마나 논리적이냐는 것이 기준인 듯할 뿐이어서, 우리 안목으로 보는 수필과 논설, 독후감까지를 두루 포함하여 에세이라 하는 경향이 있다.

    조선시대 사람 성현이 지은 ‘용제총화’를 읽노라면 서양식 장르 개념으로 콩트와 단편소설, 그리고 논설과 세시풍속을 빈정거린 잡문을 총괄하여 싣고서 아무개 ‘문집’이라 하는 식이다. 경직된 서양식 장르 개념을 슬쩍 넘어선 듯하여 썩 넉넉함을 느낀다.

    그렇다면 미셀러니는 딱이(요즘 젊은 편집자는 충직한 국어사전 노예로 전락한 나머지 ‘딱하다’의 부사형 ‘딱히’로 꼬박꼬박 고치는 어리석음을 연출하며 그에 전염된 듯 방송 진행자 이상벽씨도 어쩌자고 ‘딱히’라 연발하는데 그야말로 두루 딱하기 그지없는 바이고, 내 상식으로는 ‘딱이’란 부사 ‘딱’을 얼굴바꿈한 꼴이라 굳게 믿는 터다) 무엇일까.

    미셀러니란 신변잡기라고 나는 규정하는 바이고, 오늘날 우리네 수필이라는 것이 대부분 이에 속한다고 선언함에 서슴이 없겠다. 그러니까 우리 수필가는 대체로 신변잡기나 쓰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밖에 없다.

    대학 때 교육학과 학생이었던 나는 영미소설이 좋아 김용환 정병조 장왕록 선생님들 강좌를 수강했는데 부전공 학점을 채우느라 영미수필 강독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 과목 담당 이종수 선생님은 경험론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수상록’에서 발췌한 작품을 강의 텍스트로 했단 말인가.

    수강 준비를 하느라 도서관에서 옥스퍼드나 웹스터 대영사전을 뒤적여 16·17세기 영어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던 내 몰골이 지금도 딱하게 다가든다. 어떤 수준의 학점을 받았는지는 기억에 없고, 별반 감동을 받지 못했던 기억은 분명하다.

    ‘現代文學’ 편집실에서 20년 가까이 일할 때, 주간 조연현 선생님이 어느날 수필을 시 소설 희곡 평론처럼 신인 추천 부문으로 넣자고 했을 때 나는 단연 반대했다. 아마도 수필이라는 개념에 대한 내 경직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사가 두 번, 세 번 말씀하는 데야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 수필가 숫자를 늘리는 데 한 보탬하고 만 셈이 되었다.

    조연현 주간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한 반동에서였을까. 나는 황순원 선생님을 흉내내어 잡문을 쓰지 않고자 했고 수많은 수필 청탁을 거절하며 지내왔다.

    마흔 살쯤은 되어야 인생을 조금 알 만하리라는 것이 수필 안 쓰는 내 행태를 합리화하는 논거였는데 황선생님은 1980년대에 와서 평생 대학노트에 꼼꼼히 적어놓았던 잡문을 뭉뚱그려 이른바 문집을 냈고 내게까지 한 권을 부치셨다. 나는 처절한 배신을 느껴야 했다.

    작년부터 ‘現代文學’ 편집실 창에 비친 시인·소설가라는 어쭙지않은 잡문을 연재하면서, 나는 소설은 쓰지 않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회한을 질겅질겅 씹으며 지내는 바이거니와 고희를 눈앞에 둔 나이가 되어버린 마당에 내 몸을 깡그리 망가뜨릴 요량으로 이런 글을 쓰는 모양이라는 생각이다. 망령됨이 급기야 내게도 다가든 것일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내 대학시절에 피천득 선생님의 영미시 강독은 겁이 나서 수강할 엄두가 나지 않았거니와 그 선생님이 쓰신 ‘수필’이라는 수필과 김진섭 선생님 작품 ‘窓’쯤 되어야 올곧게 수필이라 할 수 있겠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수필가라는 명패를 달고 있는 분에게 여쭙고자 한다. 내 견해가 여전히 경직돼 있다 하시겠소?

    다음에 늘어놓는 옛날 이야기야말로 에세이가 아닌 우리 식의 수필쯤 되는 게 아닐까.

    눈에 핏발이 서고 술냄새 풍기면서 몽둥이로 바닥을…

    나는 본분을 지키며 조용하고 차분하게 살아보겠다는 신조로 문학단체에조차 가입하지 않고 사노라 해왔는데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때로 착잡하다.

    1969년, 1972년과 1970년대 중반 어느 해에 중앙정보부 ‘남산’으로 끌려가 취조를 받았고, 보안사령부에도 갔고, 1977년 초겨울에는 소위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서대문교도소에 갇혀본 적이 있고 보면 결코 차분하고 조용하게 살아온 인생은 아닌 듯하다. ‘본분을 지킨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을까.

    1969년 ‘남산’에서 만난 취조관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다. 키 작달막하고 얼굴색 하얗고 눈알에 핏발이 서 있고 쉰 듯하면서 짜랑한 목소리로 나를 취조했던 사람, 그 취조관은 나더러 무엇을 곧이곧대로 대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댈 자료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사정이었다.

    취조관은 첫날은 ‘김국태씨’라 부르다가 다음날에는 ‘국태 형’이라고 확 바꾸었다. 나는 의아해하지 않았다. 저런 호칭 바꾸기가 내 감성을 자극하여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기술일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키 작달막한 그 취조관은 또한 자기 가슴 높이께 올라가고 손아귀에 간신히 잡히는 자연목을 항시 손에 거머쥐고 있었는데 지팡이라 하기에는 너무 긴 듯했고 몽둥이라 하기에도 지나치게 굵어서 그 용도가 도대체 궁금했다.

    득도한 늙은 중이 자기 키만하고 굵은 명아줏대 지팡이를 짚는다는 이야기를 읽었는데 아주 가뿐할 테여서 좀 굵고 길더라도 지팡이 몫을 잘 감당하겠지만, 그 취조관이 거머쥔 자연목은 때로 취조실 시멘트 바닥을 찍노라면 좀 떨어져 있는 내 발을 울리는 것으로 보아 명아줏대 지팡이처럼 가볍지는 않은 듯했다.

    몽둥이일 것이라고 단정하자 저것이 내 몸뚱이 어떤 부위에 언제쯤 와 닿을까 해서 많이 궁금했고 조바심까지 치게 했다. 그런데 계속 ‘국태 형’이라고 하는 바람에 저 사람이 초중고, 대학, 또는 군대 등 어디에서 만난 후배일까 하는 데에 몰두하기에 이르렀고, 취조관이 원하는 자료가 내게 있었다면 확확 불어댈 듯도 했다.

    어떤 날은 저녁나절 두 시간쯤 나가서 반주를 했는지 눈에 핏발이 더 서고 술냄새를 조금 풍기면서 진작에 떨어지고 없는 담배를 내게 건넸고, 지팡이 같은 그 연장으로 바닥을 쾅쾅 찍을 뿐 끝내 몽둥이로 쓰지는 않았다.

    1972년 ‘남산’에 또 끌려가 먼젓번과는 달리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국태 형’이라 불러대던 그 취조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 만났던 후배인가 하여서 새삼 안달이 났는데, 하루는 취조실에 그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었고, 고문을 더는 받지 않을 듯싶어 반가웠지만 악수나 말 한마디 없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준 채 취조실 옆방에 들렀다가 휭 하니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30여 년 세월 저쪽에 있었던 일인데, 어느 정당이 국정원 도청 문제를 한사코 떠들어대니까 그 기관에 몸담았던 사람이 유난히 많은 그 당 정황이 어처구니없게 다가들면서, 나를 ‘국태 형’이라 불렀던 그 취조관이 문득 생각난다.

    나이 먹어 확 달라진 얼굴로 그 정당 소속 국회의원쯤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회한에 후닥닥 잠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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