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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이공계 교육 실상

단순 기능인 양산 치중, 광복 직후 조선인 학사는 31명뿐

  • 조명제 한국산업기술사연구회 고문

일제하 이공계 교육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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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이공계 교육 실상

1926년 세워진 경성제국대학 전경. 경성제국대학은 1941년이 되어서야 이공학부를 신설한다.(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제공)

직인도제제는 주로 소규모 개인 철공업소에서 주인(職匠)으로부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정기간 무보수 또는 침식제공 정도의 대우를 받으면서 숙련공(직공)이 될 때까지 봉사하는 제도로 경성공업학교 설립 무렵에 등장했다.

이와 관련, 1923년 2월11일 ‘조선일보’는 ‘공업전습소 축소안에 대하여’라는 기사를 통해 “일제가 예산긴축의 일환으로 인원을 감축할 작정이어서 실업교육이 위축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인기 폭발! 보습학교, 직업학교

한편 공업전습소와 함께 기능인 양성의 한 축이던 실업보습학교가 1910년 서울의 수하동, 미동, 어의동 등지의 3개 보통학교 부설로 설립됐다. 이후 보습학교는 일제의 빈번했던 교육 개정령 변경에 따라 학교명칭의 변경과 통폐합이 계속됐다(실업보습학교-간이학교-간이공업학교-공업보습학교-직업학교).

실업교육에 있어 공업교육보다 농업기술교육에만 관심을 집중했던 조선총독부가 보습학교를 없앤 후 이를 간이공업학교로 바꾸고 성장을 거듭하도록 방치한 사실은 당시 공업교육에 대한 조선인들의 열의가 그만큼 높았음을 시사한다. 20여 년간 변화무쌍한 과정을 거쳐 공업계 실업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한 보습학교는 한때 졸업생의 취직률이 높고 월급도 꽤 많아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보습학교는 변화의 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일화도 많이 남겼다. 어의동 간이공업학교는 학생들의 전람회를 열었는데, 신선로, 주전자, 은잔, 화병, 화로, 농기구 등 1000점 이상이 전시돼 장안의 화제가 됐다. 한때 보습학교의 졸업생 가운데는 80원에 이르는 고액의 월급을 받은 이가 많았다. 80원이면 1930년 공공기관의 서기급이 받는 급료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미국 대공황 여파로 초등학교는 물론 중학교도 수업료 미납으로 중도 퇴학자가 속출하던 시절임을 상기하면 보습학교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어의동 간이공업학교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교육성과가 우수하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어의동 간이공업학교는 3·1운동으로 졸업생이 줄어든 후 학생 수 감소로 1921년 폐교했다. 일반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타 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3·1운동 이후 기층민중의 체계적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문화정책’을 표방하는 등 유화정책을 편 영향이 크다. 결국 모든 보습학교는 1931년 신설된 경성공립직업학교로 학제가 이관되면서 숱한 애환을 남긴 채 폐교되고 말았다.

1930년 세계 대공황의 내습은 보습학교의 체제개편이 불가피할 정도로 일제뿐 아니라 국내 경제에도 깊은 주름살을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공업전습소가 공업학교로 변경되고, 보습학교가 직업학교로 규모가 바뀌었지만 교육수준은 ‘기능공 양성소’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졸업하면 누구든 밥벌이 넉넉…”

보습학교를 흡수한 경성공립직업학교는 1931년 5월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에서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 직업학교의 시작이었다. 이 학교는 도시에 사는 보통학교 졸업생에게 직업기술을 가르칠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기존 어의동 간이공업학교에서 가르치던 목공, 철공 등의 전문기술 이외에 전차 운전수, 백화점 점원, 관청급사, 전차차장, 철도국원 등 여러 방면의 요구에 따라 특과를 설치해 해당 기관의 종업원을 양성했다. 1931년 4월14일자 ‘매일신문’은 이 학교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경성공립직업학교는 독일의 유명한 직업학교 조직을 본떠 각종 과목을 두었다. 건축·가구·기계·전공·토목·철도 및 상업의 7개 과정이 있는데, 이 과정을 졸업하면 누구든지 자기의 밥벌이를 넉넉히 할 만한 전문기술인이 된다….”

이를 증명하듯 이 학교의 학생모집 요강이 발표되자 지원자가 쇄도해 입학 경쟁률이 평균 11대 1에 달했으며 이런 높은 경쟁률은 한동안 계속됐다. 대공황의 여파로 학교마다 중퇴자가 속출하고 실업학교조차 지원율이 떨어져 추가모집을 하던 상황에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경성직업학교 개교가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한 총독부는 이를 계기로 직업학교를 전국으로 확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경기 지방의 직업학교는 일제의 식민지교육 ‘홍보무대’ 구실을 충실히 했다. 해마다 입시철이면 경성직업학교 학생모집 요강이 신문에 실렸다. 이후 경성직업학교는 이발·시계·자동차과를 증설하고, 1935년엔 본과 야간부에 기계·건축·토목과를 신설하는 등 발전을 거듭했다. 1939년에는 기계과와 광산과가 신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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