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호

한·미·일, ‘경수로 청산비용 한국 전담’ 합의…

청와대 보고하고도 반발여론 의식해 ‘비공개’?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6-03-03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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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월초 사실상 종료된 북한 함경남도 금호지구 경수로(신포 경수로) 사업과 관련, 1월 중순 관계국들이 2000억원가량으로 예상되는 청산비용 전체를 한국이 부담하기로 합의했음이 복수의 한미 정부 관계자들에 의해 확인됐다. 이 같은 합의는 이미 청와대와 백악관 등에 보고되어 최종 승인을 받았으나, KEDO 차원의 절차 문제와 한국 내 반발여론 등 정치적 민감성을 고려해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2월중순 미국 행정부의 한 관계자는 “한 달 전 한국과 미국의 외교 당국 사이에 경수로 청산비용에 관해 합의가 이뤄졌으며, 현재는 형식적인 절차 문제와 한국 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계속 ‘비공개(low key)’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도 이와 관련해 “미국, 일본 등 관계국과 협상한 결과 한국이 청산비용 전체를 단독으로 부담하는 방안이 확정됐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미 외교 당국의 또 다른 관계자는 “1월 중순 합의한 것은 사실이나, 공개되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통일부와 외교통상부 등 복수의 당국자들은 “우리 정부가 청산비용 전체를 부담하기로 한 것은 사실이나, 대신 신포 경수로 건설현장에 있는 자산 처분권을 확보하기로 했다”고 확인했다. 현재 신포에 투입된 장비와 시설, 3분의 1가량 진행된 경수로 구조물 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법적 권리를 확보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경수로 사업이 재개될 때를 대비한 포석이라는 설명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1월 중순 외교 당국간 협상이 끝났는데도 공개되지 않은 것은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차원의 공식절차를 거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KEDO, “청산비용 3억~5억달러”

    신포 경수로 건설공사는 북한과 미국이 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이 핵시설을 동결하는 대신 100만kW급 경수로 2기를 제공하기로 함으로써 시작된 사업이다. 이에 따라 미국, 한국, 일본, EU 등이 집행이사국으로 참여하는 KEDO가 구성되어, 1995년 12월 북한과 공급협정을 체결하고 1997년 8월부터 공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2002년 10월 미국이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계획을 시인했다”고 발표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해, 2005년 9월 6자회담 합의를 통해 상황이 바뀌자 결국 11월 KEDO 집행이사회를 통해 사업종료가 결정됐다. 지난 1월8일 현장에 남아 있던 건설인력 57명이 완전 철수함으로써 34%까지 진행됐던 공사는 현재 사실상 종결된 상태다.



    남은 문제는 지금까지 들어간 1조5000억원 규모의 공사비와는 별도로, 사업을 공식적으로 청산하는 데도 만만찮은 비용이 필요하다는 사실. 2005년 9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청산비용을 2억달러로 추산한 바 있으나, KEDO 사무국은 3억~5억달러가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비용의 상당부분은 사업이 종료되는 경우 그간 KEDO와 계약을 맺고 공사를 진행해온 한국전력과 협력업체에 지급해야 하는 대금. 경수로 부품 공급계약을 체결해 생산을 진행해온 관련업체에 지급해야 할 위약금도 만만찮다.

    그간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지난해 7월 경수로 건설 종료를 전제로 200만㎾ 송전을 제안한 만큼, 미국과 일본, EU 등 집행이사국들이 청산비용을 분담해야 한다는 견해를 유지해왔다. 전기까지 지원하면서 청산비용을 낼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1월8일 현장인력 철수를 발표하면서 사업 주무부서인 통일부 경수로기획단측은 “참가국간 협의를 통해 합리적인 분담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등은 사실상 청산비용을 부담할 뜻이 없다는 주장을 고수해 협상이 난항을 겪었다. 2005년 가을부터 진행된 협상과정 내내 견해차이를 쉽게 좁히지 못했다는 것. 우선 경수로 사업 중단의 책임이 북한에 있다고 주장하는 미국측은 “의회에서 예산을 타낼 명분이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비용을 부담할 수 없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측과는 예상되는 청산비용의 세부 항목별로 부담 주체를 나누는 식으로 협상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업개시 당시 총 공사비의 22%를 부담하기로 한 일본(한국은 70% 부담)은, 지난해 12월까지 진행된 협상과정에서 그간 투입한 공사비 4억700만달러 외에 몇몇 청산비용 항목에 대해 지급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액수는 매우 미미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산비용 내고 자산 처분권 인수

    한·미·일, ‘경수로 청산비용 한국 전담’ 합의…
    당국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사업철수가 결정된 후에도 협상에 진척이 없던 12월말에서 1월초 사이 한국 정부 쪽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청산비용을 한국이 부담하는 대신 신포 현장의 자산과 시설에 대한 소유 및 처분권을 넘겨받는다는 방안이다. 그간의 협상이 경수로 사업 주무부처이던 통일부를 중심으로 진행돼왔던 것에 비해, 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논의한 통로는 관계국 외교 당국인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한미간 협상은 KEDO 집행이사회 미국측 대표를 임시로 맡고 있는 제임스 포스터 국무부 한국과장과 한국의 외교통상부 북미국 간에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새로운 아이디어’가 외교부 차원에서 나온 것인지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서 기획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경수로 사업에 미련이 없는 미국과 일본은 한국측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가 청산비용을 지급하는 대신 확보하게 됐다는 ‘자산 처분권’은 크게 둘로 나뉜다. 우선 인력 철수 이후에도 북한의 반출통제로 현장에 남아 있는 건설중장비와 사무기기 등이다. 여기에는 굴착기(8대)와 지게차(6대), 크레인(9대), 덤프트럭(13대) 등 중장비 93대와 앰뷸런스 1대를 포함한 일반 차량 190대가 포함된다. 컴퓨터 등 사무기기와 통신설비, 의료장비, 시멘트(32t), 철근(6500t), 배관(500개) 등도 있다. 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455억원 정도다.

    다른 하나는 34%가량 건설된 신포 현장의 콘크리트 구조물과 사업 자체에 대한 권리다. 지난해 4월 KEDO는 주계약자인 한전을 통해 현대와 동아, 대우, 두산 등 합동시공단에 보상지침을 내렸고, 이에 따라 현지 시설에 대한 소유 및 처분권은 현재 KEDO로 이관된 상태다. 1월 중순의 외교 당국간 합의는 한국이 이러한 KEDO의 법적권리를 승계하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그간에는 북한과 KEDO가 맺은 협정에 따라 사업이 진행됐지만, KEDO가 공식 해체되는 대신 그 권리와 의무를 한국 정부가 물려받는 모양새다.

    이에 따라 향후 경수로에 관한 협상은 남북 당국간 테이블에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사업종료 결정 직후 북한은 제네바 합의가 깨진 것은 미국의 책임이라며 추가보상을 요구하고 나섰고, 미국측은 이를 일축한 바 있다. 앞으로는 이 같은 문제를 포함해 경수로 공사를 재개할 것인지, 재개한다면 어떤 절차를 거쳐 언제까지 완성할 것인지에 대한 일체의 결정을 남북이 논의하게 된다.

    정부 당국자들은 이번 합의에 대해 ‘장기적인 전망을 바탕으로 한 전략적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2005년 9월 6자회담 참가국들은 “적절한 시점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공동성명에 합의한 바 있다. 앞으로 6자회담 진전에 따라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경수로 제공사업이 다시 논의되면, 신포 경수로 현장에 대한 법적 권리를 갖고 있는 한국 정부가 논의를 주도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다.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문안에 있는 경수로와 중단된 신포 경수로의 관계에 대해 논란이 제기된 바 있다. 미국측 관계자들이 이와 관련해 “신포는 제네바 합의가 깨짐에 따라 이미 수명을 다한 사업”이라는 견해를 흘리며 공사를 재개하는 방안에 대해 회의적인 자세를 보였기 때문. 그러나 한국측이 신포 현장에 대한 권리를 확보함에 따라 새 경수로가 아니라 신포 경수로를 되살리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주도권을 확보했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당장은 수천억원의 돈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카드를 얻었다는 논리다.

    ‘사안의 민감성을 의식해…’

    하지만 이러한 당국자들의 설명을 모두 인정한다 해도, 대북 송전비용에 청산비용까지 부담하게 된 사실 자체는 여론의 즉각적인 반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정부가 이에 대한 외교당국간 합의를 한 달여가 지나도록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점도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정부 당국자들은 “경수로 문제에 대한 공식 논의 테이블은 KEDO 집행이사회이므로, 조만간 이사회를 열어 사업종료 및 KEDO 해체를 공식선언하고 그간의 협상결과를 발표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공식적인 절차를 마무리해야 국민에게도 알릴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결정사항이 공개됐을 경우 예상되는 야당과 언론, 국민의 반발여론 등 정치적 부담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월 중순 합의가 끝난 직후 실무부처가 결정내용을 청와대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사안이 민감하고 논란의 소지가 있는 만큼 당분간 ‘비공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덧붙여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지난해말 북한이 경수로 건설인력의 철수를 요구했을 때도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언론을 통해 사실이 알려져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경수로 청산비용을 부담하는 대신 자산 처분권을 확보하기로 한 이번 결정 또한 그 적절성 문제와는 별도로 ‘대(對)국민 투명성 부족’이라는 측면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지난해 11월14일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은 대북 송전 제안과 향후 경수로 제공에 들어갈 비용과 관련해 “정부는 앞으로도 돈이 필요한 남북협력 사항을 소상히 밝히고 국회 동의를 받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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