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중·고교 영어교육이 개편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 아이들이 외국인과 영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기란 여전히 힘들다. 어학원을 운영하는‘신동아’ 독자 안천구씨가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낀 학교 영어교육의 문제점을 정리해 보내왔다.
여전히 우리 아이들은 입으로 영어 한마디 옮기는 데 힘들어한다. 이러한 현실은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전문가들은 영어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나는 서울에서 조그마한 어학원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는 원장 겸 강사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학교와 학원에서 긴 시간과 많은 돈을 투자해 영어를 배우면서도 입으로 간단한 생활영어 하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까닭을 분석해봤다.
영어교육과에서 배우는 것
우선 예비 영어교사를 길러내는 대학 영어교육학과 교수들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이들은 대부분 중·고생을 직접 가르쳐본 적이 없고 전공도 대부분 ‘영어교육’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한 예로 서울 모 대학의 영어교육과 교수 6명의 전공을 살펴보면 영어교육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단 한 명이고 나머지는 영미 시나 소설 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어를 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다 영어교육과 교수가 된다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좀 지나친 비유일지 몰라도 가령 프랑스에서 미술공부를 해 불어에 능숙하다고 해서 한국에 와서 불어교육과 교수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그 6명 중에 중·고생을 실제로 가르친 경험이 있는 교수는 한 명뿐이라는 사실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실제 중·고생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이론으로만 가르치는 교수들에게 배운 학생들이 교사가 되어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셈이다. 적어도 사범대학의 교수가 되려면 중·고생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또한 영어교육학과와 영어영문학과에서 영어교사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영어과목은 두세 과목에 지나지 않는다. 4년 동안에 배우는 과목 대부분이 교육심리학 같은 교직 과목과 음성학 등 주로 이론 과목들로, 교육 현장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 위주다. 현장에서 필요한 실무적인 부분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결국 영어교육과를 졸업하는 학생 대부분이 시중에 나와 있는 수십년 된 문법서를 가지고 공부해서 ‘검증되지 않은 문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니 예전의 영어나 지금의 영어나 다를 리 없는 것이다.
언어도 세월이 흐르면 변화하게 마련이다. 우리만 이러한 변화에 무감각하다. 악순환이 거듭되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중3 영어 수업시간에 직접화법을 간접화법으로 바꾸는 방법이 나온다.
▼ 다음 직접화법을 간접화법으로 전환하시오.He said to me, “I want to go home.” →He told me that he wanted to go home.
답은 맞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화법을 간접화법으로 고쳐 쓸 줄 안다 해도 실제 회화나 독해, 작문 그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그는 나에게 집에 가겠다고 말했다’를 영어로 써보라고 하면 올바르게 쓰는 경우가 드물다. ‘말하다’의 정확한 영어 표현을 모르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는 tell이나 say와 같이 말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있고, talk나 speak처럼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 위의 문장은 말을 전달한 것이니 tell이나 say를 써야 하는데 say 다음에는 to를 붙여야 하므로 미국인들은 주로 tell을 사용한다. 따라서 ‘He told me he would go home’이라고 해야 한다.
왜 이런 시험을 치는지…
시험에 절대로 내지 말아야 할 문제가 등장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 다음 중 다른 용법으로 쓰인 문장을 고르시오.① Have you ever been to London?② She has never seen him before?③ I have done it once.④ She has washed her car.⑤ He has seen a movie recently.
답은 ④번인데 도대체 왜 이런 문제를 출제하는지, 그리고 이런 문제가 아이들이 실제 영어를 배우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다음 현재완료 중 뜻이 다르게 사용된 것을 고르시오’ 하면 훨씬 낫지 않을까.
▼ 다음 중 다른 용법으로 쓰인 것을 고르시오.① The problem is that she hates me.② She likes the toy that I have.③ I don’t believe that she is honest.④ It is true that she works at the bank.⑤ He doesn’t like the idea that we should give it up.
명사절과 관계대명사에서 사용되는 that을 구분하는 것을 묻는 질문인데, 답을 안다고 하더라도 일상 생활에서 영어를 구사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들은 학생의 영어실력을 향상시키기보다는 영어를 더 못하게 이끄는 질문이다. 차라리 그냥 작문 문제를 내는 편이 아이들 영어실력 향상에 훨씬 도움이 된다.
여러 학교에서 시험 문제로 교과서 본문을 활용한다. 주로 본문의 내용을 묻는 것과 빈 칸 채우기가 있는데, 문제는 빈 칸 채우기다. 본문만 암기해도 점수가 80점 이상이 나올 수 있으므로 대부분의 학원에서는 죽기 살기로 학생들에게 교과서 본문을 암기시킨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모두 쉽게 잊어버릴 것을 단지 몇 점 더 얻으려고 달달 외우는 아이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나 한숨만 나온다.
그래도 보습학원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영어를 토대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 설령 학교 선생님들이 잘못된 것을 가르쳐도 그것이 잘못됐다고 수정해줄 수가 없다. 그 문제가 학교 시험에 나온다면 승산은 선생님 쪽에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작문을 목적으로 영문법을 가르친다면 회화능력을 길러줄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사실과 관련 없음.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작문을 목적으로 영문법을 가르친다면 아이들에게 문장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그것이 곧 영어회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시험 문제도 다음과 같이 내면 좀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 다음을 영어로 옳게 적은 것을 고르시오.
“당신이 그곳에 가는 데 2시간 정도가 걸릴 것이다.”(It will take you two hours to get there. 혹은 It will take two hours for you to go there.)
이런 문제를 주관식으로 내면 한층 더 효율적일 것이다. 모르면 아예 추측도 할 수 없는 문제를 내야 한다. 학교시험에서 점차 주관식 문제가 많이 출제되고 있고 앞으로 그 비율을 50%까지 높인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렇지만 일부 학교에서는 주관식 문제라고 해야 기껏 빈칸 채워 넣기나 전치사 써 넣기에 지나지 않는다.
단어 외우기의 맹점
영어 단어는 숨은 뜻을 가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단어 자체의 뜻만 외워서는 그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서는 ‘참다’라는 단어 하나가 여러 의미에 다 통용되지만, 영어에서는 화나는 것을 참는 경우는 ‘put up with’, 배고픔이나 고통을 참는 경우는 ‘be patient’라고 쓰는 등 의미에 따라 여덟 가지 정도의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학교 영어에서는 단어만 나오면 무조건 외우고 그것으로 끝이다. 한국인들이 영어로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결정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어나 문법은 오랫동안 배워서 대충 아는데 도대체 어느 단어를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아이들이 배우는 영어는 구어체보다 문어체에 가깝다. 따라서 그런 단어를 이용해 문장을 만들어 말한다고 해도 대화를 나누는 미국인은 알아듣지 못한다. 예컨대 vomit(토하다)라는 단어는 말할 때보다는 글을 쓸 때 주로 사용한다. 말을 할 때는 ‘throw up’이나 ‘puke’(속어) 등이 사용되며, 그냥 더러운 것을 보았을 때 느낌상으로만 토할 것 같다(혹은 역겹다)고 할 때는 ‘I feel disgusted’라고 한다.
1987년 필자가 미국에 갔을 때는 사람들이 처음 만나면 대부분 ‘I’m glad to meet you’라는 표현을 썼는데, 지금은 이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Nice to meet you’나 ‘Pleased to meet you’라고 말한다. ‘천만에요’라는 뜻으로는 대개 ‘No problem’이라고 한다. 말은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도 쓰임새도 변한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들이 주로 학교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하고만 접촉했기 때문에 그 지역에 사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영어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하다못해 중학교에서 ‘실례합니다’라는 뜻으로 흔히 가르치는 표현 ‘Pardon me’는 필자가 미국에서 10년 넘게 지내는 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미국 등 영어권 국가에서 현지 영어를 배운 교수들이 좀더 효과적인 교육방법을 연구해 학생들을 가르치면 그 학생들이 졸업 후 실제 현장에 나가 자신이 배운 것을 자신감 있게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마을’보다 교사 해외연수를
수능시험을 보면 왜 아직도 우리가 영어를 배우면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시험 문제의 80% 이상이 독해 위주의 답 고르기다. 즉 단어만 외우면 시험을 무난히 치를 수 있다. 문제를 내는 사람들도 영어 전문가들일 텐데 왜 독해 위주의 문제만 고집하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문제를 좀더 다양화해 동의어나 반의어 등을 묻는 어휘 문제나 문법 문제를 더 많이 출제해야 한다. ‘문법을 오래 배워도 영어 한 마디 못한다’는 것은 영어 문외한들이 하는 말이다. 올바른 문법을 배우지 않아서 영어를 못하는 것이지, 문법을 제대로 배운다면 얼마든지 영어를 잘할 수 있다.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이 부족한 점도 지적하고 싶다. 아직도 영어회화가 능숙한 영어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런데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 이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더욱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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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모든 탓을 사교육에 돌리고 있다. 그러나 공교육이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면 아이들이 학원에 다닐 이유가 없다. 일반적으로 학원 강사가 학교 선생님보다 더 열정적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적어도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을 내버려두지는 않으니 말이다.
얼마 전부터는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엄청난 돈을 투자해 ‘영어마을’이라는 것을 만들고 있다. 몇 년 동안 실용적이지 못한 영어를 배운 아이들이 그 마을에 가서 2주 내지 3주 동안 영어를 배운다고 해서 영어 실력이 향상될 수 있을까. 차라리 그 어마어마한 돈을 영어교사들에게 투자해 해외연수를 보내는 등의 장기 계획을 세우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