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호

4전5기 기업인, 이경복 수맥돌침대 사장

“전자파, 수맥파 다 잡았으니 단잠 주무세요”

  • 이임광 자유기고가 LLKHKB@yahoo.co.kr

    입력2006-03-06 17: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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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침대 사업가, 수맥 전문가로 성공한 이경복 사장. 내로라하는 직장을 그만두고 고달픈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잇단 사업 실패로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은 그의 눈에 어느 날 문득 돌침대가 들어왔다. 우여곡절 끝에 작은 성공을 거뒀지만, 또다시 커다란 시련이 닥쳐왔다. 그러나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4전5기 기업인, 이경복 수맥돌침대 사장
    지난해 3월 김수환 추기경 비서실 수녀가 수맥돌침대 이경복(李京馥·58)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 추기경께서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못 주무시니 와서 좀 살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경복 사장이 한달음에 달려가 추기경의 침대가 놓인 곳 주변에 수맥파가 나오는지 탐사한 후 자사 제품인 돌침대로 교체했다. 그후로 추기경의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았다고 한다.

    ‘돈 찍는 일’에서 ‘돈 버는 일’로

    17년간 돌 침대를 만들어온 이 사장은 수맥탐사 전문가로도 유명하다. 현재 한국수맥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수맥을 차단하고 신경통, 근육통 치료효과가 있는 원적외선을 발생하는 돌침대를 개발해 연 300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사업가가 됐다. 그가 만든 돌침대는 ‘장영실 과학문화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미국, 독일, 스위스,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열린 발명품대회에서도 금메달을 휩쓸었다. 2003년 돌침대로는 국내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의학적 효능을 인정받았다. 수맥 차단 돌침대, 흙침대, 옥침대, 은나노 무전자파 수맥 차단 돌침대 등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모두 56건의 특허를 받았다.

    이 사장이 돌침대 사업으로 성공하기까지는 남모르는 좌절의 고통과 재기의 노력이 있었다.

    이경복 사장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화학을 전공한 과학도 출신.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75년 한국조폐공사에 입사한다. 조폐공사 연구소에서 화폐의 내구성을 높이고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화학처리를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화폐를 검사하는 것이 주업무였다.



    당시 조폐공사 직원의 봉급은 어지간한 공무원보다 서너 배는 많았다고 한다. 은행원보다 더 많은 돈을 다루는 만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보수를 파격적으로 높게 책정했다는 것이다.

    “연구소가 있던 대전 시내 술집에선 조폐공사에 다닌다고 하면 두말없이 외상술을 줬을 정도죠.”

    그런데 그는 전혀 다른 유혹에 빠져 입사 8년째인 1982년 사표를 던진다. ‘남의 돈 만드는 일’보다 ‘내 돈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이다.

    “내가 만든 돈이 창고 가득 쌓이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찼던 것 같아요. 영어로 ‘메이크 머니(make money)’가 ‘돈 번다’는 뜻 아닙니까.”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그가 시작한 사업은 건강보조식품을 수입해 파는 것이었다. 당시 ‘알로에’ ‘클로렐라’ 같은 제품이 제법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리에 그간 모아놓은 돈과 퇴직금을 덜컥 다 털어넣은 뒤 서울로 올라와 사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돈 버는 일이 돈 찍는 일처럼 쉽지는 않았다. 경험이 부족한 탓도 컸지만, 제품을 가져간 소상인들이 대금도 안 주고 종적을 감추는 통에 손실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2년을 아슬아슬하게 끌고 가다 결국 밑천이 바닥나고 빚까지 잔뜩 짊어진 채 사업을 접고 만다. 살고 있던 아파트까지 팔아 빚잔치를 하고 나니 손에 쥔 돈은 고작 450만원. 급한 대로 식솔을 데리고 서울 면목동에 있는 일곱 평짜리 사글셋집에 짐을 풀었다.

    “다시 조폐공사로 돌아갈까 생각도 했습니다. 사규상 3년 안에는 복직이 가능했으니 눈 딱 감고 가려면 갈 수도 있었죠. 그런데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한번만 더 해보자’고요. 쥐뿔도 없으면서 말이죠.”

    다리 쭉 펴고 잠들기에도 비좁은 사글셋집을 개조해 조그만 문구점을 냈다. 주위에 학교가 여러 곳 있어 입에 풀칠은 하겠다 싶었다. 두 번째 사업이었다.

    밑천이 달리니 뭔가 독특한 마케팅 전략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고객 명부’다. 문구점을 한 번이라도 찾은 손님은 초등학교 1학년짜리라도 일일이 이름을 물어 기록해뒀다. 얼굴도 익혀놓았다가 다음에 또 오면 반갑게 이름을 불러줬다. 누가 어떤 학용품을 선호하는지까지 적어 손님이 그 물건을 찾기 전에 먼저 보여줬다.

    ‘코 묻은 돈’ 1억원

    또 지금으로 치면 ‘포인트 제도’를 도입해 물건을 많이 구입한 학생에게는 그에 비례하는 사은품을 주기도 했다. 변두리 동네 문구점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짜임새 있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코 묻은 돈을 벌려면 코흘리개들에게 잘 보여야 했죠.”

    성과는 있었다. 그의 세심한 서비스에 ‘동심(童心)’이 움직였고, 주변에서 경쟁하던 문구점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코 묻은 돈’은 쌓이고 쌓여 2년 반 만에 1억원 넘게 불어났다.

    “그땐 정말 대단했습니다. 지금도 그 동네 가면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까요.”

    그 돈으로 방배역 네거리에 해물탕집을 낸 것이 그의 세 번째 사업이다. 60평 남짓한 식당은 목도 좋았지만 문구점에서 성공한 고객관리 기법을 그대로 적용하면서 단골손님을 급속도로 늘려갈 수 있었다. 주 메뉴인 해물탕은 기본이고, 반찬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2000원짜리 매운탕 한 그릇을 주문한 손님에게도 무슨 반찬을 원하는지 물어보고 매일같이 직접 장을 봐와서는 다음날 맞춤으로 상을 차렸다. 점심 때 줄 서는 손님이 생길 즈음인 개점 1년 만에 하루 매출이 200만원을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물탕집 단골손님이던 가죽장갑 재단사의 추천으로 네 번째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그 재단사를 공장장으로 앉히고 스포츠용 가죽장갑 공장을 운영한 것이다. 장안평에 마련한 공장에 재봉틀 30대를 놓고 스키 장갑과 야구 배팅 장갑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80% 이상을 미국, 캐나다 등지로 수출해 월 매출 10억원대의 사업체로 키웠다.

    그러나 채 1년도 안 지난 1987년, 오일쇼크 여파로 수출에 타격을 받고 고전하다 끝내 부도를 내고 말았다. 급기야 임가공 도급업체들에 내줄 돈이 없어 지방으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됐다.

    “채권자들을 피해 가족과 떨어져 친구 집으로, 산속으로 숨어 다니던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습니다. 본의 아니게 남의 돈을 떼어먹었다는 사실이 정말 참기 힘들었어요.”

    그렇게 1년을 방랑하던 그는 낭떠러지에서 다섯 번째 사업 아이템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돌침대다. 1989년 어느 날 청계산에 올랐다가 암자에서 속옷 바람으로 얇은 돌 위에 앉아 있는 스님을 보게 된다. 자세히 보니 돌 위에 전기장판이 깔려 있었다. 스님에게 “왜 돌 위에 앉아 계시느냐”고 물었더니 “3년 전 치질이 생겼는데 이렇게 하고 있으면 효험이 있다”는 것이다.

    참 신통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상품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며칠 후 우연히 신문을 읽다가 ‘유럽에서도 온돌방 인기’라는 칼럼을 보고 암자에서 본 ‘돌방석’을 떠올렸다. 온돌 같은 ‘돌침대’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무렵 수중에 남은 도피자금은 350만원 정도. 그는 ‘이번이 마지막 도전’이라는 각오로 청계천을 다 뒤져 자재를 구해온 다음 돌침대 제작에 착수했다. 아내와 둘이서 한 달을 끙끙댄 끝에 돌침대 시제품 네 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디자인은 볼품없었지만 그래도 저의 첫 번째 발명품이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이제 파는 것이 문제였다. 우선 가까운 친척과 친구들을 찾아가 “돌침대를 만들었는데 하나 들여놓으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사업에 실패하더니 정신이 어떻게 된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딱딱한 돌 위에서 어떻게 잠을 자느냐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그는 천주교에서 발행하는 한 신문에 광고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세례명 바오로)인 그로서는 그 방법이 가장 확실했다. 간곡하게 부탁해 조그만 광고가 무료로 실리게 됐다. 며칠 후 광고를 본 한 신부로부터 주문이 들어왔다. 350만원에 첫 판매를 하고 그 돈을 생산에 재투자했다. 이번엔 시제품보다 훨씬 정교한 돌침대를 세 개 더 만들었다. 그렇게 한 대를 팔아 세 대를 만드는 식으로 생산량을 늘려갔다. 그에 맞춰 입소문이 나더니 여기저기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돌방석’에서 찾아낸 ‘돈방석’

    4전5기 기업인, 이경복 수맥돌침대 사장

    수맥의 대가 임응승 신부(오른쪽)에게서 수맥 짚는 법을 배우고 있는 이경복 사장.

    조그만 공장도 짓고 본격적으로 양산에 들어갈 즈음 그를 따라 경쟁사가 하나둘 생겨 나더니 서서히 돌침대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규모가 커져 월 50개 정도가 팔리던 1993년 어느 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TV 9시뉴스에서 돌침대에서 다량의 유해 전자파가 방출된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그 때문에 경쟁업체 한 곳이 문을 닫더니 순식간에 시장이 얼어붙었다.

    옛 실패가 떠오르며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그러나 여기서 사업을 접을 수는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두 번의 실패와 두 번의 성공을 거쳤다. 여기서 다른 사업을 시작할 것인가. 하지만 다른 사업을 시작해봐야 위기는 운명처럼 올 것이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그는 전자파를 제대로 잡아보자고 결심했다.

    일단 생산과 영업을 전면 중단하고 전자파를 차단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마침내 전열선 자기장에서 발생하는 전자파를 잡는 데 성공했다. 돌침대 전자파 차단 특허도 따냈다. 이로써 유해 전자파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 영업을 재개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전자파 차단 연구과정에서 돌침대가 아니라도 발생하는 근본적인 전자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하 40m 수맥에서 나오는 지전류인 ‘수맥파’가 그것이다.

    “수맥파까지 차단할 수 있는 돌침대를 개발해 이 참에 경쟁사들과 완전 차별화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사람이 국내 수맥의 대가 임응승 신부다. 그러나 임 신부는 선뜻 수맥 잡는 법을 가르쳐주려 하지 않았다. 장삿속으로 수맥을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수맥 잡는 법을 가르쳐줄 수 없다고 했다.

    “신부님을 일곱 번이나 찾아갔습니다. ‘내 사업도 사업이지만,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잠잘 수 있도록 돕고 싶다’며 진심으로 애원한 끝에 겨우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죠.”

    전 직원이 수맥 전문가

    회사를 바쁘게 꾸려가면서도 틈만 나면 임 신부를 따라다니며 현장 실습을 했다. 혼자서도 전국 곳곳으로 수맥을 짚고 다녔다. 지금까지 3000여 곳에서 수맥 탐사 경험을 쌓았다. 그 인연으로 2004년 신행정수도 후보지 공주·연기에 대한 풍수지리 감정요소 조사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이 수맥파가 사람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수맥파는 비정상적 파동으로 혈관을 압박하고 신경계, 면역계, 호르몬계의 기능을 떨어뜨려 우리 몸을 서서히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수맥파는 멀쩡한 건물에 균열을 줄 만큼 강력합니다. 하물며 사람은 말할 것도 없죠. ‘새 집 짓고 3년, 이사 가서 3년’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것도 알고 보면 수맥의 피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집 없는 거지나 집시가 오래 산다는 얘기도 이런 점에서 일리가 있어요.”

    그는 1999년 수맥 전자파까지 차단할 수 있는 돌침대를 개발, 특허청에 전자파 제거 기능이 있는 침대로 실용신안 등록을 했다. 또한 2002년에는 한국 전기제품안전진흥원으로부터 ‘0cm 높이(표면)에서 전자파를 측정한 경우에도 전자파가 제로(0) 상태’임을 인증받았다.

    처음에는 돌 패널 아래에 구리(銅)판과 알루미늄판을 설치했다. 구리와 알루미늄은 전기가 잘 통해 수맥파가 돌 패널에 전달되기 전 모두 흡수해 다시 방전시키는 작용을 한다. 지난해부터는 구리나 알루미늄보다 차단효과가 더 뛰어난 은(銀) 소재를 전 제품에 사용해 ‘은나노 돌 침대’로 한층 향상시켰다.

    이 사장은 직원들에게 제품 만드는 방법뿐 아니라 수맥파 잡는 법을 직접 가르친다. 그래서 현재 엔지니어들은 물론 내근 직원들까지 전 직원이 수맥탐사 전문가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고객의 침실에 돌침대를 설치하기 전 반드시 수맥 탐사를 실시해 수맥파가 없는 곳에 침대를 설치하고 수맥파를 피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면 수맥파 차단막을 무료로 추가 설치해준다. 제품의 특화된 장점을 극대화하고 고객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이 사장의 마케팅 전략에 따른 것이다.

    푹신푹신한 돌침대?

    4전5기 기업인, 이경복 수맥돌침대 사장

    수맥파 전문가인 이 사장은 신행정수도의 풍수지리 조사활동에 참여한 바 있다.

    ‘명품 돌침대’ 선언을 하고 침대 프레임 디자인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동시에 최근에는 ‘딱딱한 돌침대’란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하기 위해 특수 소재로 개발한 매트리스를 적용해 ‘푹신푹신한 돌침대’라는 새로운 제품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항균 섬유 소재로 제작된 얇은 매트리스 하단에 돌기들을 박아 돌 위에서도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고, 수천개의 기공을 만들어 돌의 열이 고루 전달되도록 했다.

    대리점을 두지 않고 직영점 체제를 고수해 가격의 거품을 뺀 것도 판매량 증가에 일조했다. 경쟁사와 같은 디자인의 모델이라면 경쟁사보다 100만원 이상 저렴하게 팔 수 있는 것도 직영점 판매를 고수한 덕분이다.

    자사 제품에 대한 이경복 사장의 자신감은 대단하다. 2001년 수맥돌침대가 만든 제품들은 식약청에서 ‘의료기’ 인증을 받았다. 그런데 제품광고에 ‘열 치료 효과’가 있다는 문구를 넣었다가 식약청으로부터 과대광고라는 판정을 받고 3000만원의 벌금을 내야 했다. 그는 이에 불복해 3년간 소송을 거듭한 끝에 2004년 말 대법원으로부터 승소 판정을 받았다.

    “그동안 우리가 제품 개발에 투자한 노력과 제품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못 버티고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무차입 경영과 사회봉사

    수맥돌침대의 매출은 계속 늘어 현재 연매출이 300억원에 이른다. 직영점도 계속 확장해 현재 서울 잠실(공장), 서초, 왕십리, 명동을 비롯해 수원, 대구, 부산에도 본사 및 직영점을 두고 있으며 올 3월 중 대전, 광주에도 직영점을 낸다. 이런 속도라면 올해 안에 코스닥시장 등록도 가능할 것으로 이 사장은 기대한다.

    돌침대 사업 17년. 이 사장에게는 두 가지 경영원칙이 있다. 첫째 ‘무(無)차입 경영’이다. 17년간 수맥돌침대는 ‘부채 제로’ 상태를 유지해오고 있다. 아무리 사업을 확장하고 싶어도 빚을 내서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이 회사는 부채만 없는 것이 아니라 도급업체에 반드시 현금으로 대금을 지급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납기를 정확하게 맞추고 품질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어음 거래를 하지 않으면 부도를 낼 일도 없지요. 예전에 부도를 냈을 때 채권자들에게 돈만 빚진 게 아니라 마음까지 빚을 진 것 같아 가슴이 아팠어요. 돌침대 사업이 잘 돼 그 빚을 다 갚았는데도 마음의 빚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돈 버는 일 못지않게 사회봉사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것은 그에게 수맥 짚는 법을 전수해준 임 신부와의 약속이기도 하다.

    “신부님께서는 가르침을 주신 후에도 저를 예의주시하고 있어요. 돈 벌 궁리만 하는 것 아니냐고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

    이 사장은 30명의 무의탁 노인을 10년 넘게 돕고 있으며 남북한 장애인 돕기에도 매년 수억원씩 후원하고 있다. 수맥을 배울 때의 초심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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