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들은 반대했다. “어떻게 고양이가 잡은 꿩을 뺏을 수 있어요?” 아내도 내가 너무하지 않냐고 했다. 식구들 반대를 무릅쓰고 꿩 다리를 살그머니 당기니 고양이 ‘둥이’가 안 빼앗기려고 입으로 당긴다. “둥이야, 아저씨가 너한테 먹이 주잖아? 나도 꿩맛 좀 보자.” 고양이에게 사정을 했다. 그러자 둥이는 꿩을 놓아줬다. 기분이 묘하다. 고양이한테 얻어먹다니….
“이놈!”
급한 마음에 우선 소리부터 지르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매가 암탉을 덮치고 있다. 내 가슴이 벌렁벌렁한다. 나를 본 매는 닭을 두고 잣나무숲으로 사라졌다. 아이가 두 팔을 벌린 것마냥 무지무지 큰 매다. 날개를 활짝 펼친 매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다.
암탉을 보니 목에 피가 흥건하다. 닭 깃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암탉은 비실비실 간신히 몸을 가눈다. 수탉은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이 사태에 얼이 빠진 모양이다. 다른 암탉들은 밭 둘레 검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숨기고 있다. 수탉이 소리 내어 울지 않았으면 암탉을 고스란히 매한테 바칠 뻔했다. 수탉이 못내 미덥다.
닭에게 배우는 수컷 본성
우리 식구는 닭을 큰 규모로 키우지 않는다. 달걀이나 닭고기를 가끔 먹으려고 몇 마리 키운다. 그렇게 키운 닭들이 해마다 병아리를 까, 대를 이어오고 있다.
닭을 키우면서 느끼고 배우는 바가 많다. 내가 남성이어서 그런지 나는 수탉에게 흥미를 느낀다. 수탉은 우선 보기에도 아름답다. 꾸미지 않은 상태에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부럽다. 붉은 볏, 주홍색과 검은색이 골고루 어울리는 깃털. 덩치도 커서 무리 가운데 단연 돋보인다. 수탉은 곧잘 날개를 한껏 펼쳐 자신이 크다는 걸 과장한다.
수탉은 목소리도 우렁차고 아름답다. 꼬끼오! 새벽부터 간간이 외치는 소리. 닭이 우는 소리는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고자 하는 외침이다. 그러니 이웃집 수탉도 질세라 더 목청을 돋운다.
수탉의 가장 두드러진 임무는 무리를 보호하는 일이다. 마당에 닭을 풀어놓으면 수탉은 수시로 둘레를 살핀다. 개나 고양이는 물론 하늘을 나는 새도 살핀다. 사람도 적당히 경계한다. 경계할 때 수탉의 눈빛은 날카롭다.
수탉은 먹이도 잘 찾는다. 모이를 던져주면 암탉보다 수탉이 먼저 안다. 그러고는 암탉한테 먹으라고 신호를 보낸다. 수탉은 암탉이 웬만큼 먹고 나서야 먹는다. 설사 곁에서 같이 먹더라도 둘레를 살피며 먹는다. 수탉에게선 나에게 부족한 어떤 품위가 느껴진다. 나는 밥상에 앉으면 식구 가운데 가장 ‘전투적’이다. 식사 준비가 좀 덜 되어도 먹기 시작한다. 아내 표현을 빌리면 불도저가 지나가는 듯하단다. 수탉은 암탉에 견주어 많이도 안 먹는다. 암탉은 알을 낳아서인지 잘도 먹는다.
닭은 흙을 잘 헤집는다. 흙 속에 있는 작은 벌레나 풀씨들을 먹는다. 소화가 잘 되게 모래도 먹지만 암탉이 좋아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지렁이다. 마당이나 텃밭을 발로 뒤적이면 지렁이가 곧잘 나온다. 수탉은 힘이 좋아서인지 지렁이도 잘 찾아낸다. 수탉은 이 지렁이를 안 먹고 바로 암탉에게 준다.
달걀 껍데기도 그렇다. 닭장 안에 껍데기를 던져주면 암탉들은 서로 먹으려고 경쟁이 치열하다. 다시 알을 낳기 위해 껍데기 성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먼저 껍데기를 문 놈이 혼자 먹으려고 구석진 곳으로 달린다. 그러면, 다른 암탉은 한사코 빼앗으려고 달려든다. 수탉은 달걀 껍데기가 아무리 많아도 안 먹는다. 수탉은 껍데기가 자신에게 필요한 건지 아닌지를 몸으로 아나 보다. 우리 사람에게도 여성에게는 필요한 음식이지만 남성에겐 불필요한 게 있지 싶다.
수평아리가 자라 ‘청년’이 될 무렵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리가 잘 안 나와 듣기에도 안쓰럽다. 그래도 날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를 친다. 수평아리가 제대로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우두머리 수탉이 달라진다. 청년 수평아리를 쪼아 몰아내려고 한다. 새로운 청년 수탉은 아직 목소리도 시원찮고 몸집도 작으니 눈치껏 피하면서 행동한다. 그러나 부지런히 잘 먹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수탉끼리의 신경전을 보면서 사람들의 권력투쟁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육해공 전천후 짐승
둘레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수탉.
늙어가는 아비는 자라나는 자식을 당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우두머리 수탉의 레임덕도 빨라진다. 그게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 싶다. 아내는 나와 내 아들이 이따금 티격태격하면 수탉 싸움이라고 곧잘 놀린다. 이웃과 어울릴 때도 어른인 남자들끼리는 미묘한 ‘수탉 싸움’이 일어나는 걸 느낀다. 수탉 싸움을 보면서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뒤끝이 없다는 점이다. 사람도 싸우고 나서 뒤끝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청둥오리는 사람이 하기 힘겨운 논농사를 대신 해준다. 오리는 김매기는 물론 벌레를 잡아먹을뿐더러, 거름까지 덤으로 준다. 논에서 허리 굽혀 김을 매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김매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그러니 오리는 환경농업을 하고자 하는 우리 같은 초보 농사꾼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짐승이다.
지금처럼 오리를 논농사에 끌어들이는 데는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농사에 필요한 본성은 살리되, 하늘을 날아가고자 하는 본성은 되도록 억제해 기른 결과물인 셈이다.
그럼에도 오리는 날짐승의 본성을 여전히 갖고 있다. 우선 날갯짓부터 그렇다. 닭은 특별하지 않은 한 날갯짓을 하지 않는다. 천적에게 자신이 커 보이게 하려고 날개를 펼치거나 위급한 상황에 쫓기면 날기도 하는, 방어의 몸짓이다. 하지만 오리는 틈만 나면 날개를 돌보고 날갯짓을 한다. 한창 자라는 새끼 오리도 곧잘 퍼덕이며, 근육의 힘을 키운다.
오리, 하늘을 날다!
먹이를 찾는 모습에도 야성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오리는 한번 먹고 지나간 자리는 다시 오려고 하지 않는다. 논 가장자리에 그물망이 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한쪽 끝에서 다음 한쪽 끝으로 돌 뿐이다. 작은 틈만 보이면 망을 탈출하려고 기를 쓴다.
오리가 탈출하면 다시 잡아넣고 망을 고친다. 그래도 나는 오리가 지닌 야성이 좋다. 오리는 자랄수록 물, 땅, 하늘을 다 먹이 영역으로 한다. 이는 사람이 가진 또 다른 본성과도 흡사하다. 사람 또한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를 동경하고 끝없이 개척해가니 오리와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이 연재 기사를 계속 읽은 독자들은 ‘신동아’ 2005년 8월호에 썼던 청둥오리의 야생성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거기서 나는 “올가을쯤, 논에 새끼 오리들이 다 자라면 하늘을 날아갈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사이 오리들이 컸다. 정말 하늘로 날아갔을까.
논에 벼이삭이 패기 전에, 오리를 논에서 빼내 집에 있는 오리장에 가두었다. 그리고 한 달쯤 뒤 어느 날. 아내가 오리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리들이 불안해하며 아내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잠깐 사이 어미 오리 한 마리가 오리장 틈새로 날아가버렸단다. 하늘로 솟구치더니 길 아래 논 밑으로 사라졌다 했다. 저녁에 식구들이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와! 정말이야? 자세히 말해봐요.”
모두 신이 나 이야기를 들었다. 오리가 사라진 걸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늘을 난 것마냥 통쾌해 했다. 그러면서 동화 같은 꿈을 그려본다. 청둥오리가 농사철이면 논으로 왔다가 가을이면 남쪽나라로 떠난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으련만.
짐승은 키우는 사람에 따라 잘 자라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너무 잘 자라 뒤처리가 어려운 짐승도 있다. 우리에게는 토끼가 그렇다.
해부학 실습
토끼는 번식력이 대단하다. 새끼가 귀엽다고 섣불리 키울 짐승이 아니다. 봄에 키우기 시작한 토끼가 가을에 엄청 불어나니 먹이를 마련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겨울을 나자면 가을에 미리 먹이를 준비해두어야 한다. 어린 시절 내 동무는 토끼를 곧잘 키웠다. 콩잎도 콩깍지도 미리 챙겨두고 먹이곤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식구는 그 어린 소년만큼 정성을 기울이지 못했다. 겨울이 깊어지고 먹이가 떨어지자, 토끼 먹이가 뭐 없나 하고 찾으러 나서야 했다.
번식력이 워낙 좋아, 사람들의 다양한 실험에 이용되는 토끼. 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토끼를 잡는 게 어렵다.
사람이 이 풀을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는 어느 도감에나 잘 나와 있다. 알고 보니, 밭에서 겨울을 나는 풀은 거의 다 먹을 수 있다.
그러다가 겨울 밭에서 냉이를 찾았다. 예전에 나는 냉이가 봄에 싹이 나고 자라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이른 봄에 먹는 냉이는 늦가을 무렵 싹이 나, 겨울을 난 것들이다. 꽁꽁 언 땅에 뿌리를 깊이 박고 겨울을 이겨내고 있었다. 겨울 냉이는 언뜻 보아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잎이 단풍 들어, 푸른빛보다 붉은 빛과 흙빛이 더 강하다. 땅이 꽁꽁 얼어 뿌리째 캘 수는 없다. 그냥 칼로 줄기만 뜯어 먹어본다. 토끼 덕에 겨울풀이 지닌 야성의 맛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토끼를 잡아야 했다. 번식은 왕성하고 시장에 내다 팔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식구가 고기를 먹을 목적으로만 토끼를 잡자니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비위가 약하다. 궁리 끝에 해부학에 대한 공부를 하기로 했다.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들어내어 자세히 관찰하곤 했다.
그렇다고 토끼를 계속 잡을 수는 없었다. 집짐승 가운데 가장 순하고 겁 많은 동물이 토끼일 것이다. 그 눈을 마주치지 않고 토끼를 잡는 게 점점 어려워졌다. 그럴수록 문득문득 수렵하던 시절의 조상들 생각이 난다. 만일 허기를 채우기 위해 토끼를 사냥해서 잡았다면 끔찍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지 않았을까. 아니면 하늘에다가 절을 하고 나서 고기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는 토끼 잡기가 끔찍하다. 산 토끼를 잡자면 마음이 아프다. 몸 고생하지 않고 너무 쉽게 고기를 얻어서인가. 아니면 고기가 아니어도 먹을 게 많으니 배부른 감정일 수도 있겠다. 솔직히 이제는 토끼 잡는 게 번거롭고 귀찮다. 키우는 것조차 흥미가 없어졌다. 아이들은 토끼를 키우고 싶을 만큼 키웠고, 나는 해부에 대해 배우고 싶을 만큼 배웠다.
돈을 벌어보겠다고 염소를 키운 적이 있다. 나에게 염소 사육을 가르쳐준 분이 처음에는 암수 두 마리로 시작하라고 권했다. 처음부터 돈을 투자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염소를 잘 키울 수 있을지 경험해 보고 나서 하라는 뜻에서였다. 염소는 잘 키우면 두 마리로 시작하더라도 금방 수 십 마리로 늘릴 수 있다고 했다.
염소의 도(道)
사료를 먹여 염소를 키우는 게 아니라 풀을 먹여 키우려니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우선 이 짐승은 덩치가 커서 많이 먹는다. 사람이 염소를 끌고 다니는 일도 만만하지 않다. 게다가 염소는 다른 어떤 짐승보다 묶이는 걸 싫어한다. 묶이는 걸 좋아하는 짐승이 어디 있으랴마는 염소는 유별나다.
그렇다고 염소 두 마리를 위해 방목장을 지을 수는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풀이 많은 곳을 골라가며 말뚝을 옮겨 매었다. 두어 시간 뒤 가보면 말뚝에 매단 줄이 염소 발목이랑 목을 친친 감고 있기 일쑤다. 한 이틀이라도 집을 비우자면 염소를 죽이게 생겼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염소가 안쓰러워 염소를 계속 키워야 할지 고민이 된다.
자연 상태에서 자라는 염소는 도인(道人)에 가깝다.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부터 위엄이 있어 보인다. 자기를 지키는 힘이 있는지, 사람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염소는 지나가는 사람을 무심한 듯 바라본다. 마치 인생 경험을 할 만큼 한 시골 노인이 정자에서 쉬면서 세상을 굽어보는 그런 눈빛이라고 할까. 여유롭고 평화롭다.
염소는 곧잘 사람과 눈을 마주친다. 어떨 때는 염소가 마치 내 욕심을 읽고 있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지게를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가다가 염소를 만나면 ‘당신, 참 노력하고 사시네’ 그런 눈빛이다. 염소의 긴 수염도 도인다움을 더하는 것 같다.
염소가 똥을 누는 모습에서도 도(道)가 느껴진다. 염소 똥은 작은 콩알만한 게 한 무더기씩 ‘호로로 호로로’ 떨어진다. 자그마한 것이 떨어지니 똥을 눈 듯, 안 눈 듯 표가 안 난다. 또 염소는 똥을 싸면서도 잘 먹는다. 입으로는 우물우물 하면서 똥구멍으로는 작은 똥알이 ‘또르르르’ 굴러 나온다. 이거야말로 완전한 도가 아닐까. ‘입 구멍에서 똥구멍까지 한길로’ 죽 이어진 걸 고스란히 보여준다. 언뜻 보면 마술 같기도 하다. “자, 풀을 먹습니다. 뒤를 보세요. 먹은 풀이 바로 나옵니다. 호로로…. 어때요?”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세상 볼 거 다 본다.
염소를 키워 목돈은 못 건졌지만 대신 도를 골고루 배웠다. ‘배고프면 먹고, 마려우면 싼다. 온갖 거 다하지만 바쁠 게 없다. 무리를 짓되 고고함을 잃지 않는다. 볼 거 안 볼 거 다 보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스스로 편안하니 세상 바라보는 것도 편안하다.’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이 “개는 안 키우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지금 개를 키우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자연에 살게 되면 늘씬한 개 한 마리쯤 키우는 꿈을 꾼다. 우리도 개를 키워보지 않은 건 아니다. 세 번을 키우다 매번 포기하고 말았다.
고양이 예찬
개를 키우려면 정말 식구처럼 키워야 한다. 묶어서 키우면 개 성질이 나빠지고, 밤에는 더 요란스럽게 짖는다. 사람도 덩달아 신경이 곤두선다. 개를 풀어놓아 키우면 논밭 곡식을 망쳐 이웃에게 욕을 먹기 십상이다. 또 개를 키우다가 이런저런 일로 헤어지게 되면 가슴이 아팠다. 개를 키워 사랑을 나누고자 했던 마음을 접었다. 개를 키우기에는 내 생활이 아직 분주한 걸 깨달았다.
고양이에 대해 우리 식구는 한동안 나쁜 편견을 갖고 있었다. ‘고양이는 기르다가 버리면 복수를 한다’든가 뭐 그런 이야기들이다. 그러다 보니 고양이의 안 좋은 모습을 더 많이 기억했다. 소름 끼치는 눈빛이라든가, 비 오는 날 밤 음산하게 우는 소리…. 그러던 우리 식구가 고양이를 키우는 신세(?)로 바뀌었고, 지금은 고양이 예찬론자가 되었을 정도다.
고양이가 우리 집에 온 것은 우연이었다. 고양이가 제 발로 온 것이다. 그것도 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우리 집 뒤란으로 숨어들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피하더니 우리 아이들이 먹다 남은 밥도 주고 생선뼈도 주니 잘 따른다.
아내는 썩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제 발로 들어온 짐승을 내몰 생각은 없는 듯했다. 자기도 어미라 남의 일 같지 않다며 어미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나 또한 집 마당에 고양이가 지나다니자 쥐를 잡아주었으면 하는 기대도 걸었다. 시골 쥐는 정말 골치 아프다. 곡식을 갉아먹는 건 물론 밤에는 천장을 갉아 잠조차 제대로 자기가 어렵다.
얼마 뒤 어미 고양이가 사라졌다. 알고 보니 고양이는 새끼 고양이에게 영역을 물려주고 떠난단다. 새끼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는 이웃에게 주고, 한 마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 고양이 이름을 ‘둥이’라고 지었다.
둥이는 말 그대로 쥐잡기 선수다. 둥이와 두 해쯤 지내보니 둥이가 쥐잡기는 기본이고 뱀과 참새도 잡는다는 걸 알게 됐다. 쥐죽은 듯 웅크리고 있다가 날듯이 점프를 하여 참새를 잡는데,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고양이 몸짓은 보면 볼수록 배울 게 많다. 우선 기지개다. 자고 일어나면 기지개를 켜는 데 크게 두 가지 동작이 있다. 먼저 허리를 활처럼 굽히는 동작. 네 다리는 모으고 허리는 잔뜩 올려 몸을 달걀처럼 만든다. 곧 튕겨져 나갈 듯 팽팽하다. 그런 다음 네 다리와 허리를 죽 펴는 모습이다. 그냥 펴는 게 아니고 몸 구석구석을 깨우는 듯, 보기만 해도 개운할 정도다. 햐! 이 두 가지 동작이면 웬만한 운동은 다 되겠구나 싶다. 고양이는 잠을 자주 자고 깨기에 이 몸짓을 하루에도 여러 번 한다.
운동이란 일부러 길들여야 하는 습관이라기보다 본성에 더 가깝다는 걸 고양이를 통해 배웠다. ‘몸을 쓰기 전에 꼭 운동을 한다. 마음이 아니라 몸이 원해서 저절로 운동을 해야 한다.’
‘고양이 세수’엔 이유가 있다
또 다른 몸짓은 몸 핥기. 고양이는 먹고 나면 자기 몸을 핥는다. 고양이는 몸이 부드러워 혀가 안 닿는 곳이 드물다. 등, 배, 사타구니…. 그런데 혀가 닿지 않는 곳이 얼굴 둘레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얼굴 부분은 아주 중요하다. 고양이는 특히 수염이 소중하다. 고양이가 얼굴과 수염을 관리하는 걸 보면 참 아름답다. 혀로 무릎과 발목 사이 정강이를 먼저 핥는다.
처음 이 모습을 볼 때는 ‘더럽게 혀로 하냐? 이 무식한 놈아.’ 그랬다. 가만히 보니 이건 보통 정성이 아니다. 온전히 집중해서 핥는다. 정강이가 깨끗해졌으면 그 정강이로 얼굴을 닦는다. 그런 다음 다시 정강이를 핥고 얼굴 닦기를 반복한다. 그렇다고 바쁘지도 않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몸 밖과 몸 안의 경계가 없는 게 혀가 아닐까 싶다. 몸 안의 혀가 입 밖으로 나와 몸 구석구석을 닦는다. 침에는 소화를 돕는 효소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화합물이 있어 살균 작용도 한다지 않나. 사람이 세수를 대충 하는 걸 ‘고양이 세수’라고 하는 데 고양이가 이 말을 듣는다면 무식하다고 하지 않을까. 고양이는 몸을 닦을 뿐만 아니라 몸에 화학물질을 묻혀 면역력도 높이는 셈이다. 자기 털에 남은 화학물질을 영역 표시하는 데도 사용한다니 고양이 세수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고양이 몸짓 가운데 발톱 다듬기도 눈에 자주 띈다. 발톱이 무디어지면 사냥이 잘 안 되거나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것이다. 나무 등걸에 다가가 잠깐씩 발톱을 쓸어준다. 사람으로 치면 자신에 대한 재투자가 아닐까 싶다.
어미를 핥으며 귓속말을 나누는 새끼 고양이. 아이들 마음이 손을 거쳐 고양이에게 옮겨가는 것 같다.
어느 틈에 고양이를 바라보는 내 눈빛은 흠모(?)로 바뀐다. 괜히 안아주고 싶고, 쓸어주고 싶다. 우리 아이들이 갓난아기였을 때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스킨십을 고양이와 나눈다. 구름 끼어 음산한 날, 군불을 때려고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으면 서글프다. 장작에 불이 붙기 전에 누군가의 체온이 그립다. 바로 이때, 둥이가 슬그머니 내게 와 품속으로 안겨든다. 내 마음을 정확히 읽는 것 같다. 이때 고양이는 목에서 ‘가르릉 가르릉’ 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고양이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거나 기분이 좋을 때 내는 소리다. 이 소리야말로 ‘편안한 오르가슴’의 울림이 아닐까 싶다.
소원 하나를 풀다
내가 고양이를 흠모하는 또 하나의 까닭은 이 놈의 독립심이다. 고양이는 몸 관리를 잘 하기에 사냥능력이 탁월하다. 그래서 독립심도 강하다. 사람과 ‘적당히’ 거리를 둘 줄 안다. 가끔 사람에게 와서 몸을 비비거나 안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혼자 지내길 좋아한다. 오히려 내가 고양이를 필요로 할 때가 많다.
둥이가 새끼를 낳고 어미가 되었다. 아비인 수고양이는 코빼기도 안 보인다. 그래서인지 어미 고양이는 사냥에 더 열심이다. 잠도 덜 자는 것 같고, 사냥감도 자주 물고 온다. 어느 날은 꿩을 잡아왔다. 제법 큰 꿩이었다. 어미와 새끼가 꿩을 너무 맛있게 먹기에 나도 먹고 싶어졌다. 예부터 ‘만두에 꿩 대신 닭’이란 말이 있다. 꿩만두가 얼마나 귀하고 맛있으면 그런 속담이 생겼을까.
하지만 아이들은 반대했다. “어떻게 둥이가 잡은 걸 뺏을 수 있나.” 아내도 너무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래도 내 욕심을 버릴 수가 없다.
식구들 반대를 무릅쓰고 꿩 다리를 살그머니 당기니 둥이가 안 빼앗기려고 입으로 당긴다. 다시 당기니 제 놈도 당기고. “둥이야, 아저씨가 네게 먹이 주잖아? 나도 맛보게 좀 주라.” 고양이에게 사정을 했다. 그러자 정말 둥이가 꿩을 놓아준다. ‘에고, 불쌍한 인간….’ 꿩 다리를 하나 ‘얻었다.’ 기분이 묘하다. 고양이한테 얻어먹다니….
|
고양이에게 빼앗지 않고 얻었다고 하자 아이들도 나를 받아들인다. 아이들과 함께 꿩만두를 빚었다. 꿩만두 빚어 먹기, 내 소원 가운데 하나였다. 점차 내가 고양이를 길들이는 게 아니라 내가 고양이한테 길들여지고 있다.
이런저런 짐승을 키우면서 가끔 드는 생각은 덕(德)에 대한 것이다. 짐승은 사람이 원하는 걸 다 준다. 먹을거리는 물론 농사일도 쉽게 해주고, 생각지도 못한 가르침도 주면서 나중에는 목숨까지 바친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가진 걸 선선히 내놓는 일은 쉽지 않다. 짐승을 키우며 덕이 무엇인지 이따금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