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저녁이 서서히 다가올수록 신들은 피리를 불며 사람들의 혼령을 악마의 근처에 묶어두려 합니다. 사람들이 정체 모를 힘에 이끌려 막연한 생각에 붙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갑자기 찾아온 불안감에 몸서리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불안과 고독감에 선뜻 일어설 힘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바로 이때 휴대전화를 붙잡게 되는 것이지요.
밤이 깊을수록 혼자라는 사실은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집에 돌아와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움직이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혹독한 자기 확인과 맞닥뜨립니다.
그들은 밤에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상처 속에 들어앉아 있거나 흐릿한 앞날에 대한 걱정에 잠겨 있자면 저도 모르게 자신의 초라함을 자학하게 됩니다. 곧이어 어쩔 수 없이 악령에 몸을 허락하고 마는 것이겠지요.
뒤축이 다 닳고 해어진 구두 한 짝이 있었습니다. 먼지가 뿌옇게 가라앉은 선반 위에서 가쁜 숨을 쉬고 있을 때면 창 밖에서 세상의 소식들이 들려올 뿐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굉장히 많이 걸어 다녔습니다. 그러나 요 몇 해 동안 구두 한 짝은 세탁실 선반 위에서 아주 힘겨운 시간을 보냈으며 그의 친구들조차 그를 잊은 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힘이 다 빠져버렸지만 마지막으로 바깥세상이 한번 보고 싶어졌습니다.
구두 한 짝은 열린 문을 나와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밖은 이른 오후. 아이들은 스케이트보드를 탄 채 아파트 공원 쪽으로 내려가고, 그는 후진하는 차량을 피해 슈퍼마켓 앞을 지납니다.
그쯤이지만 그는 벌써 숨이 가쁩니다. 그러나 그는 가슴이 두근두근 터질 듯한 기쁨으로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집니다. 사람들은 남루한 구두 한 짝이 걷는 것에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지나쳐 가는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가끔 남루한 행색에 관심을 주다가도 곧바로 자신의 일로 돌아갔습니다.
구두 한 짝은 도로를 횡단해 지금은 프랜시스코라는 카페로 변해버린 건물 입구로 들어갔습니다. 이 건물의 이층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키가 작아 밖을 볼 수 없었습니다. 구두 한 짝은 끈을 풀어 로프처럼 매달린 채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아래에 있던 한 차에서 ‘쿠르릉’ 소리가 났습니다. 베이지색 차량 안에서 젊은 남자는 계속 옆에 있는 늙고 예쁜 여자에게 말을 걸었고 그녀는 무표정하게 유리 차창을 열었습니다. 다시 남자가 힘겹게 말을 붙였고 여자는 자동차의 키를 꽂고 시동을 걸었습니다. 여자는 백미러로 차가 오는 것을 살피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습니다.
구두 한 짝은 두 손으로 매달린 채 오랜 시간을 보내 더는 매달려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왼쪽 복도로 힘차게 몸을 꺾어 돌았는데 그곳에는 큼지막한 간판이 붙어 있는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문이 열린 사무실 테이블 위에는 버려진 메모지와 길게 꼬인 전화선, 스테이플러로 묶인 업무보고서가 널려 있어 사무실 안은 너저분하고도 바쁜 느낌이었습니다.
구두 한 짝은 벽에 무표정하게 걸린 액자 아래 등을 기대고 앉았습니다. 그는 너무 바쁜 곳에 들어왔다는 후회의 잎사귀가 온통 몸을 덮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잎은 무성하게 돋아나 결국 구두 한 짝을 덮어버렸습니다. 그 와중에도 구두 한 짝은 어디론가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가 신경을 건드렸으며 무표정한 액자도 이제 그만 나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두 한 짝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알 수 없는 생각들이 자석처럼 찰싹 달라붙어 그를 지치게 했습니다. 거기에다 해어진 밑창 틈새로 튀어나온 발가락이 시멘트 바닥에 닿아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깨진 보도블록 위에서 구두 한 짝은 녹색 신호를 기다리며 생각에 빠졌습니다. 땀으로 흥건히 젖어옵니다. 이윽고 구두 한 짝은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손수건을 빠뜨리고 나온 것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좋지 못한 버릇을 책망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총총걸음과 잰걸음을 하면서도 어깨를 부딪치지 않으려 서로 힐끗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극장과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그의 시야에 입을 벌린 채 껌을 씹고 있는 쓰레기통이 들어왔습니다. 구두 한 짝은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졌습니다. 집을 나온 후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고 더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도시에 가득 차 있고 정신없이 바빠서 자신들의 영혼을 보살필 수 없어. 봐, 황급히 입을 훔치고 식당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 ‘찌익 찍’ 사무실의 의자 끄는 소리, 저 걸음만 보더라도 저들이 깊은 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조용한 시간을 가져보기나 했겠어?”
껌을 씹는 쓰레기통의 얼굴에 광대뼈 힘줄이 일어섭니다. “낚아채듯 택시를 잡아타고, 한 번에 두 계단씩이나 오르는 사람들이 사는 이곳은 전장이야.”
마침 그때 점퍼 차림의 남자가 쓰레기통의 코 위에 담배를 비벼 껐고 쓰레기통은 고개를 숙인 채 등을 돌려 두 팔로 코를 감싸는 바람에 구두 한 짝과 자연스럽게 등을 맞대게 됐습니다.
사람들의 입과 눈에는 프로펠러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구두 한 짝은 갑자기 도시의 수많은 굴레에 몸이 옭죄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녁노을이 자동차 클랙슨 소리를 붉게 물들이고 제과점 빵이 네온에 말라갈 때쯤 구두 한 짝은 그가 지금까지 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구두 한 짝은 보도블록 위로 걸어 집 쪽으로 되돌아갑니다. 눈먼 거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인형가게의 북 치는 곰이 멍하니 구두 한 짝을 내려다봅니다. 그는 지치고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려 하지 않았고 또 누가 보아도 그는 힘없고 초라한 행색이었습니다.
구두 한 짝은 신축 오피스텔 건물을 지나다 몇 사람과 부딪쳤고 그중 깡마른 사람은 얼굴을 심하게 찌푸렸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사과를 대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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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점의 시계들이 일제히 몸을 움직여 일곱 시를 알리고 레코드 가게에서는 노래가 울려퍼집니다.
“잠시 후면 도시는 저녁노을의 진지함에 못 이겨 어두컴컴한 밤이 될 거야. 그때는 새들도 붉은 몸으로 곧장 자신의 집으로 날아가지! 그리고 사람들은 빗나가버린 사랑과 피곤에 지쳐 잠이 들 거야. 그러면 이 도시는 모두가 잠들어 깨어나지 않는 미라의 도시가 되는 거지. 아침이 되어도 몸만 일으켜 세울 뿐 그들의 영혼은 깨어나질 않지.”
노을이 뾰족한 창이 되어 산 쪽으로 몰려가고 어둠이 도시를 덮을 때 별 하나가 구두 한 짝의 고적한 가슴을 어루만져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