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경기도 의정부에서 한 아주머니가 살해됐다. 40대 중반의 범인은 아주머니가 살던 집 1층에 살던 세입자였다. 범인은 그전까지 어떤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는 평범한 사내였다. 체포 당시엔 무직이었지만 직장생활도 해봤다. 다만 한 직장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여러 곳을 전전했다는 점은 눈에 띄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든 성격임은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것이 윗집에 살던 여자를 무참하게 살해할 이유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범행 후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현장은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핏자국만 따라가도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형사들이 아랫집으로 들어가자 그가 있었다. 현장에서 그를 체포한 형사는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고 했다.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식이 없었다는 얘기다.
형사들에게 전후 상황을 듣고 난 뒤 그를 만나 살인한 까닭을 물었다. 그는 “아줌마가 나를 노려보고 공격하려고 해서 내가 먼저 죽였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아주머니가 그를 노려볼 이유도, 공격할 이유도 없었다. 사내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내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고 시달리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위 사람들이 늘 자신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한다고 ‘믿는’ 피해망상증 환자였다.
지난해 서울에서 지하철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 50대 남자도 피해망상증 환자였다. 그를 괴롭히는 ‘상상 속의 인물’은 국가정보원 직원. 가족들에 따르면 그는 집 밖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고, 집에서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가면 국정원 직원들이 자기를 미행한다고 믿었고, 집에는 온갖 도청장치가 숨겨져 있어 자기가 하는 말이 모조리 녹음된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국정원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사실이 전혀 없는데도 그는 도청과 감시의 공포에 시달렸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국정원이 나를 도청한다’
시너와 라이터, 기름통을 들고 지하철 방화를 시도하던 날도 환영과 환청에 끔찍할 만큼 시달렸다고 한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어 직장도 못 나가고 가족들에게 피해만 준다고 생각한 그는 그날 죽기로 결심했다. 가족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시체도 찾을 수 없도록 죽을 방법을 찾다 불을 지르기로 했다. 그러고는 지하철을 타고 사람이 많이 타지 않은 칸으로 가서 주위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러나 막상 불이 붙자 두려워졌고, 전동차 문이 열리는 틈을 타 도주하다가 지하철역 CCTV에 얼굴이 찍혀 붙잡혔다.
내가 알기로 국정원의 도청에 시달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다. 인터넷에는 국정원의 도청과 감시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여러 개 있다. 올라 있는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국정원 직원이 어떤 음파로 자신을 괴롭힌다, 자꾸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국정원 직원이 어디선가 자신에게 속삭인다, 자신의 뇌에 이상한 칩을 심어놓아 머리가 아프다….
이들은 치료받아야 할 환자들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들에게 치료를 권하지 않는다. 이상한 징후를 눈치챈, 혹은 이들의 기이한 행동에 시달리는 가족들조차 이들을 정신병원에 수용하기를 주저한다. 한국에서 정신병원에 가는 것은 인생의 끝이나 다름없다고 치부하기 때문이다. 치료하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도 없다. 환자도 정신병원에 다닌다는 사실을 참지 못하고, 이를 요구하는 가족에게 반발한다. 결국 이들은 ‘시한폭탄’으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