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호

‘난민’ 인정받은 버마 민주화운동가 8인의 꿈

“한국의 민주화 역사는 버마 국민의 희망입니다”

  • 이설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now@donga.com / 사진·지재만 기자

    입력2006-03-06 1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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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차선 도로 위에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쓰러져 있다. 군인이 한 사내의 목덜미를 나꿔채 후미진 곳으로 끌고 간다. 눈에 익은, 5·18민주화운동 사진 한 컷이다. 그 험난한 시절을 거쳐서야 한국의 민주주의는 비로소 ‘일상’이 됐고 민주화운동은 ‘과거사’로 남았다. 그러나 멀지 않은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그 흑백사진은 여전히 현실이고 일상이다. ‘그분’의 이름을 말한 죄로 사람들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항의하는 이들은 손발이 묶이거나 머나먼 땅으로 망명을 떠난다. 그 일부가 서울 하늘 아래 둥지를 틀고 한국민과 정부에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난민’ 인정받은 버마 민주화운동가 8인의 꿈
    “해방을 위해 싸움이 있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자!”

    “대학살 범죄자, 살인자 군사독재를 타도하자!”

    칼바람에 뺨 실핏줄이 터질 것만 같은 2월 어느 날, 한 청년이 뜻 모를 외국 글자와 한글이 섞인 피켓을 들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서 있다. 청년의 신분은 한국으로 망명한 미얀마 민주화운동가.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버마민족민주동맹(NLD)’의 한국지부 회원들은 이렇게 매주 목요일 번갈아 1인 시위를 벌인다.

    2월4일 각 신문에는 작은 상자기사가 실렸다. 미얀마 민주화운동가 8명이 대한민국 법무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난민인정 불허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이끌어냈다는 소식이다. 킨 마웅 윈(40), 마웅 예 윈 라(37), 쪼 모 르윈(34), 쪼 쪼 르윈(34), 마웅저(37), 마웅 저 모 아웅(31), 마웅 마웅 소(31), 툰 툰 윈(30)씨가 그들이다. 짧지 않은 소송기간, ‘망명 민주화운동가’라는 이들의 신분은 행간에 많은 사연이 숨어 있음을 짐작케 했다.

    2월8일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마웅저씨를 만나기 위해 성북구 삼선동에 있는 시민단체 ‘함께하는 시민행동’을 찾았다. 그는 2년여 전부터 이 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명함을 교환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질문이 날아온다.



    “어떤 방향으로 기사 주제를 정했습니까? 인권인가요, 난민인가요, 아니면 버마의 상황인가요?”

    예상외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도 놀랍지만, 기자를 대하는 ‘전문가적인’ 품도 의외다. 기자의 뜨악한 반응을 눈치챘는지 “그간 한국에서 버마 상황을 알리느라 여러 시민단체와 언론을 접하다 보니…”라며 웃어 보인다. “미얀마 얘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그는 “미얀마가 아니라 버마”라고 정정한다. 그를 비롯한 망명 운동가들이 미얀마라는 국호(國號)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1989년 집권한 군부독재정권이 버마라는 옛 국호를 버리고 미얀마로 바꿨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버마라는 이름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버마에는 130여 개의 소수 민족이 있지요. ‘버마’나 ‘미얀마’는 그 가운데 70%를 차지하는 다수 민족의 이름입니다. 민족 가운데 하나의 이름을 국호로 쓴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인 일이지요. 민주화가 되면 모든 국민의 의사를 반영해 새 국호를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범생에서 ‘요주의 인물’로

    마웅저씨가 한국에 온 것은 1994년 말. 버마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의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겠다는 꿈을 안고 수도 양곤에서 유학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러나 한 찻집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이 그의 평범한 삶을 바꿔놓았다.

    “음악이 좋은 낭만적인 찻집이었지요. 다른 테이블에 있던 친구들과 싸움이 벌어졌어요. 서로 자기가 신청한 곡을 먼저 틀어야 한다는 거였지요.”

    싸움의 시작은 유치했지만 끝은 그렇지 않았다. 상대는 고위 정치인의 아들이었다. 출동한 경찰들은 다짜고짜 그를 구타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 부당한 현실을 자신의 손으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첫 계기였다. 곧이어 1988년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함께 ‘자유’를 이야기하던 대학생 선배들을 따라 대열에 동참했다.

    “뭐, 한마디로 선배들을 잘못 만난 거죠(웃음). 우리 반에서 시위에 나선 학생은 6명뿐이었거든요. 불만 많던 아이들이 뭘 모르고 따라나선 겁니다.”

    그러나 시위참가 경력은 그후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며 그를 괴롭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숨죽이고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버마에는 한국의 국가보안법보다 훨씬 강력한 군법이 있어요. 다섯 명 이상이 모이면 감시 대상이 되고, 밤늦게 다른 곳으로 갈 땐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버틸 수가 없었어요.”

    다른 이들의 사연도 마웅저씨의 경우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경기도 부천에서 만난 마웅 예 윈 라씨는 고등학생 때 정부의 교과서 개정방침에 반발해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졸업을 앞둔 무렵에 갑자기 모든 교과서를 영어로 씌어진 교재로 바꾼다는 발표가 나왔다. 학생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내려진 결정이었다.

    “말도 안 되는 처사라고 생각했어요. 대학 입학시험이 코앞이었으니 얼마나 분했겠어요. 그런 분한 마음에 펜을 들어 편지를 돌리기 시작했죠.”

    교과서 개정 방침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 익명으로 친구들과 다른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편지는 학교 당국에 압수됐고 교사들은 편지의 ‘원작자’를 추적했다. 모범생이던 그는 한순간에 ‘요주의 인물’이 됐다.

    겁이 난 그는 남은 학기를 죽은 듯 지내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1988년 민주화운동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학생 지하조직에서 활동하며 시위의 선봉에 섰던 그는 다시는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희망의 근거’

    “버마에서 군부의 위세는 엄청납니다. 자주 가던 거리에 군부대 사무실이 있었어요. 밤이면 아이들을 잃어버린 부모들이 종종 찾아와요. 군인들이 밤늦게 돌아다니는 청소년을 감금해 군복을 입혀 부려먹곤 하니까요. 부대 앞에서 밤새 우는 아주머니, 값나가는 물건을 싸들고 와서 통사정하는 이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집밖 생활을 시작했으니 벌써 20년째네요. 고향에서 양곤으로, 국경 난민촌으로, 그리고 한국까지.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멀어질 줄 몰랐어요.”

    그의 쌍꺼풀 진 큰 눈이 촉촉해졌다. 그는 요즘 건강이 좋지 않다. 신장질환이 있어 일주일에 세 번 혈액 투석치료를 받는다. 생활비와 활동비를 마련하려 해오던 공장 일도 잠시 쉬고 있다.

    이들이 애초부터 고국을 떠나 유랑생활을 작정했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생사조차 확인할 길 없는 실종이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많은 운동가가 망명을 택했다. 부모가 빚을 내 입국브로커 비용을 마련해준 사람도 있었고, 숨어서 운동을 계속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다 가족에게 등 떠밀린 이도 있었다.

    가혹한 현실에 처한 그들의 눈에 한국의 민주화 역사는 ‘희망의 근거’로 비쳤다. 한국에만 가면 나래를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시아 국가들 간의 인권유대도 기대했다. 그들이 한국을 망명지로 택한 이유다.

    “한국과 버마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일본식 군대교육을 받은 독재자, 반정부 지도자들의 피살, 5·18 항쟁과 ‘8888항쟁(1988년 8월8일 버마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 등 유사한 역사적 사건도 많지요. 한국 국민이 자유를 거머쥔 과정은 우리에게 감동 자체였습니다. 우리에게도 곧 현실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지요.”

    ‘난민’ 인정받은 버마 민주화운동가 8인의 꿈

    주한 버마대사관과 국회 앞에서 시위하는 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 노동부국장 저 모 아웅씨.

    그러나 기대가 무너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맞닥뜨린 난관은 불법체류자 단속. 1999년 한국에 망명한 운동가 한 사람이 출입국관리소에 체포된 것이 시작이었다. “민주화운동 경력 때문에 버마로 추방당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강제추방당한 얀 나임 톤씨는 중간기착지인 태국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해 한국으로 재입국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민주주의 국가는 모두 천국인 줄 알았거든요. 한국도 불과 20년 전에 겪은 일이니 버마가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지 잘 알거라 믿었던 거죠.”

    ‘난민 신청’ 문제로 고민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도움이 컸다. 자칫 신청이 기각되면 신분이나 위치만 노출되어 추방당할 수도 있었다. 매일같이 시민단체 관계자나 민변 변호사들과 대화한 끝에 결국 21명 모두 난민 신청을 하기로 결론 내린다.

    조사과정은 혹독했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그냥 한국에서 살고 싶어서 민주화운동가라고 주장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지만 “앞으로 어떻게 활동하는지 보여주겠다”는 말밖에는 할말이 없었다. 아침에 눈뜰 때마다 땅 밑으로 꺼질 것 같은 기분이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한국은 ‘버릴 수 없는 카드’

    그로부터 5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2005년, 난민 신청을 한 21명 가운데 7명이 신분을 인정받았다. 5명은 중도에 포기했고, 9명은 신청이 기각됐다. 자격이 의심스럽다는 이유였다.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 다시 버마에 들어가도 특별한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었지요. 조사과정이 철저했다면 이의가 없겠지만, 2000년 5월 처음 난민 신청을 한 후 겨우 서너 차례 조사받았을 뿐입니다. 시간이 없을 때는 10분 만에 조사가 끝나기도 했지요.”

    여건이 좋은 유럽 등 다른 나라로 재망명하거나 버마 국경지대로 가서 활동하자는 의견이 이어졌지만, 한국은 ‘버릴 수 없는 카드’였다. 각국으로 망명한 정치인사들은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버마민족민주동맹’의 나라별 지부를 만들어 행동하는데, 미국이나 일본에는 이미 활동인원이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들이 간다고 해서 보탬이 될 것이 없었다. 아시아 민주화 역사의 상징인 한국 정부와 국민에게 ‘버마 군부독재 타도’를 호소하는 일은 그들의 몫이었다.

    다시 1년이 지난 2월3일, 행정소송 끝에 8명도 난민자격을 얻게 됐다. 축하의 말을 건네자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는 답이 돌아온다. 법무부 장관이 항소할 수도 있고 아직 마웅 마웅 저씨는 난민 인정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기쁜 일도 조심스럽게 말하는 모습에서 그들이 겪은 그간의 마음고생을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이 한국에서 벌이는 활동은 다양하다. 1999년 설날을 맞아 모인 자리에서 “한국 내 버마인과 한국 정부를 상대로 민주화운동을 하자”는 제안이 나왔고, 그해 8월8일 서울 명동에서 8888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를 연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NLD 지부가 설립되자 활동이 본격화됐다. 현재는 주한 버마대사관과 국회 앞 시위, 한국 인권단체에 버마 실상 알리기, ‘밀레니엄 윈도’라는 잡지 발행에 주력하고 있다.

    “버마에 남은 민주화운동가들은 태국과 가까운 국경지대에 피신해 있습니다. 거기엔 주거지도, 교육시설도 없어요. 그곳 아이들에게 매달 30만~50만원씩 보내기 운동도 합니다.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 등 도와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같은 나라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그들의 뜻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버마 노동자들 가운데는 “왜 여기까지 와서 불온서적을 만드느냐”며 피하는 이들도 있다. 숙소를 같이 쓰는 친구들로부터 눈총을 받기도 했다. 자신들까지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오해받을 수 있으니 삼가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서운했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한국에 온 이들의 처지를 무시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들이 만든 소식지를 읽고 나서 인생이 바뀐 사람들도 있다. 마웅 마웅 소, 툰 툰 윈씨가 그런 경우다. 처음에는 여느 이주노동자들처럼 돈을 벌 목적으로 스무 살과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에 한국땅을 밟았다. 밤늦도록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가 무엇인지 느낀 그들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결국은 민주화운동에 힘을 보태게 됐다. 마웅 마웅 소씨는 한국에 자신들의 주장을 정확히 알리기 위해 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어리석은 이의 우직함

    이들은 대부분 1996년을 전후해 한국에 왔다. 벌써 서울 생활 10년을 헤아린다. 20대 초중반에 만났지만 이제는 서로 불룩해진 아랫배를 놀려대는 나이다. 무엇보다 힘겨운 것은 역시 가족과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는 사실. 예 윈 라씨의 말이다.

    “2003년에야 가족과 처음 통화할 수 있었어요. 어머니가 ‘너 살아 있었구나’ 하고 우시더군요. 여동생들은 이제 아이엄마가 됐대요. 가족도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잊혀지나 봐요.”

    어느새 고국의 혈육보다 동료들을 더 가깝게 느끼게 됐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약해질 때마다 이들을 다잡는 건 암묵적인 의무였다. 눈에 보이는 진전이 없을 때의 속상함,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동료뿐이었다.

    그렇다고 활동방향에 대한 생각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해결되게 마련이지만, 싸늘한 망명지에서 동료들끼리 겪는 갈등은 생각보다 타격이 크다.

    마웅저씨는 2003년 민족민주동맹 지부를 탈퇴하고 한국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본인은 고국의 민주화 이후에 시민사회를 만들어갈 노하우를 익히고 싶다는 바람이었지만, 가족처럼 지내던 동료들의 눈총은 ‘배신자’를 보는 것에 가까웠다.

    마웅저씨는 “지금은 서로 이해하고 고민을 함께하지만, 그때는 자살을 생각했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머나먼 타국에서 뜻을 나눌 사람이 없을 때 느끼는 외로움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는 “그렇기에 더욱더 서로 의지하게 되는 것 같다. 아무리 민주화운동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어도 혼자서는 버티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현재는 NLD 조직원이 아니지만 이전처럼 열성적으로 돕고 있다.

    중년으로 접어드는 나이지만, 이들의 눈동자에는 열정이 가득했고, 활동은 나날이 적극적이었다. 최근 마웅저씨는 성공회대에서 NGO 관련 수업을 듣느라 바쁘고, 마웅 마웅 소씨는 유럽 친구들에게 버마를 알리는 데 한창이다.

    “언제까지 한국에 있을 예정이고, 버마에는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이들에게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마웅 저씨는 잔잔한 미소로 답했다.

    “머지않아 버마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믿어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민주국가들이 힘을 보태줄 거라 생각합니다. 한국(의 단체들)이 버마 국경지대의 운동가들에게 후원금을 보내겠다고 하더군요. 고마운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한국 정부가 버마의 군부세력과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화 투쟁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정부가 독재권력을 인정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NLD 한국지부 사무실의 벽면에는 ‘군부독재가 자행하는 살상이 버마에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마웅저씨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격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갑니다’라는 말을 꼽았다. 그들과 헤어지고 나서 그 두 문장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았다. 버마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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