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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연세대 퇴임 고별강연

“이념과잉의 시대, 중도개혁으로 ‘불임정치’ 벗어나자”

  • 안병영 연세대 교수·행정학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연세대 퇴임 고별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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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좌우 어느 한쪽으로 급진적이며, 파괴적인 혁명이나 독재를 원하지 않는 이상, 보수와 진보는 이념적 스펙트럼의 가운데에서 만나야 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영역을 비교적 폭넓게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오른쪽, 즉 중도우파는 자유와 평등을 다 중시하되 자유에 더 역점을 두는 세력이며, 그 왼쪽, 즉 중도좌파는 양자를 다 중시하되 평등가치에 더 비중을 두는 세력이다. 이 비교적 폭넓은 중간 영역 안에서 보수와 진보가 바르게 만날 때, 적정한 정도의 이념적 정책 지향의 차이는 정치과정의 역동성과 생산성을 보장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세계에선 이념과 정책의 대결과 갈등은 있으나 그 진폭이나 심도가 얼마간 절제된 가운데 전개된다. 따라서 서구의 선진 정치사회의 경우 대부분의 정치적 상호작용은 중도우파와 중도좌파 간의 연속성 안에서 이뤄지며, 이를 통해 안정적 민주주의와 중도주의적 정치개혁을 추구한다.

‘중도’라는 개념은 매우 모호하다. 따라서 학문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중도라는 개념 자체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본질적 내용을 지닌 것도 아닐뿐더러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이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개념을 사용하는 데는 항상 어려움이 따른다.

예컨대 엄혹한 권위주의시대에는 정치가 거의 필연적으로 ‘민주 대 반민주’의 치열한 대결구조로 전개될 수밖에 없으므로, 그 시대 정치마당에서 이른바 ‘중도통합론’은 으레 권위주의 지배세력이 투입한 ‘트로이의 목마’였던 게 사실이다. 그 밖에도 전쟁이나 경제공황과 같은 ‘역사적 결단의 시간’에는 중도라는 정치공간이나 중도적 해결방식이 설자리가 없는 경우가 많다.

중도를 다시 본다

그런가 하면 시간에 따라 중도의 이념적 자리가 가변적인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지난 복지국가 시대에는 이른바 스웨덴으로 표상되던 ‘제3의 길’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극에 대한 ‘제3의 대안’이라는 의미가 강했으나, 요즈음 블레어나 기든스가 말하는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와 구(舊)사민주의를 초월하는 의미가 짙다.



중도는 그것이 가지는 균형, 중용, 온건의 함축성 때문에 본질적으로 좌나 우로 크게 치우친 정치세력이나 개인이 국민의 눈을 현혹하고 스스로를 위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밖에도 공공연하게 중도를 표방하지만 실제로 그 이념적 불모성 때문에 이렇다 할 정책대안이 없거나 그 내용이 빈약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되면, 중도가 수사(修辭)에 그치고 허구화할 가능성도 크다. 적지 않은 경우, 중도는 자칫 양 극단으로부터 양비론 내지 양시론, 혹은 기회주의로 비판받기 일쑤이며, 그에 따라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중도가 외롭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선진 여러 나라의 민주주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민주화가 공고화·제도화할수록 좌와 우의 극단적 주의·주장은 급속히 퇴조하고 점차 정치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주변으로 밀려난다. 또 극단적 이념세력이 중도를 위장할 때, 혹은 알맹이 없이 이름만 중도일 때, 비판적 공론화 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그 마각이 드러나게 된다.

중도는 대체로 극단적 보수와 극단적 진보의 한가운데에 있는 기하학적 중간점이라기보다는, 양극이 추구하는 이념적 가치지향을 두루 포용하면서 양자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제3의 길’이다. 따라서 중도는 좌와 우 양 방향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들이 제시하는 정책대안에 고르게 관심을 기울인다. ‘교조’에 집착하며 ‘진리독점’과 ‘완승’을 꾀하는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비해 ‘대안모색’의 폭이 크고, ‘정책수단’이 다양하며, ‘대화’ ‘타협’과 ‘제휴’ ‘연립’을 통해 사회적 합의의 도출이 용이하다는 강점이 있다. 그리고 비록 점진적이나마 변화와 개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통합적 문제해결’을 추구하기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엄청난 강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개혁적 중도’는 시대의 징표를 앞서서 읽고, 사회통합적 차원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개인과 집단 및 정치, 사회세력을 포함한다. 그들은 이념적으로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추구하되 그 실천적 정책 내용은 그 나라와 그 시대의 국가적, 사회경제적 맥락에 따라 적실성 있게 구성한다. 그들은 체제차원의 거시적 개혁을 추진할 수도 있고, 일정 정책영역에서 개혁을 추구할 수도 있다.

세 명의 중도개혁가

20세기 역사 속에서 체제개혁 차원의 새로운 국가모형을 설계했던 세 사람의 중도개혁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국가 위기상황에서 중도통합적 리더십으로 국가차원의 체제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영국형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마련해 20세기 복지국가시대를 연 베버리지 경(William H. Beveridge·1879∼1963), 분단 전야의 오스트리아를 탈냉전적 통일국가로 이끈 레너(Karl Renner·1870∼1950), 그리고 금세기의 대표적 강소국(强小國)인 네덜란드의 ‘기적’을 설계한 콕(Wim Kok·1938∼)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중도통합의 이념적 입지에 서서 시대의 징표를 바르게 읽고 장기적으로 조망하면서 국가재편을 결행하는 데 앞장선 체제 설계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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