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6월 민주항쟁 20년

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토론보다 선동의 시대, 군 나섰어도 온몸 던졌을 것”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4/6
‘구속 취소’

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고려대 총학생회장 선거 당시 이인영 의원(오른쪽에서 두 번째).

▼ 이 의원의 홈페이지를 보니 6월10일 당시 감옥에 있었더군요.

“6월1일 새벽에 붙잡혔어요. 6·10 궐기 준비하면서, (학생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각 대학 총학생회장이 단식에 들어가고, 6월6일엔 고대에 몇천 명, 몇만 명이 모여 연합대동제를 해서 분위기를 한껏 돋우기로 하고, 프로그램을 가동하자마자 붙잡혔어요. 6월10일 마침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가는데, 시청 앞에서 ‘안드로메다 군단’(전경)에 둘러싸인 인파를 호송차 창 틈으로 볼 수 있었어요. 그러고 6월17일엔가 나왔죠. 그래서 사실 6·10항쟁은 나중에 들은 얘기가 다예요.”

▼ 사건이 검찰로까지 넘어갔는데 풀려났단 말인가요.

“구속이 취소됐어요. 아주 이례적인 일이죠. 4월19일에 수유리에서 연합집회한 걸 집시법 위반으로 걸고넘어졌는데, 그날 제가 빠진 다음에 소요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절 주범으로 몰기엔 법적 고리가 약했어요. 고대 학생들이 석방투쟁을 강렬하게 해준 덕도 크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6월항쟁이 성공하고 있었다는 방증이죠. 저를 풀어주면 진정효과가 있을 거라 기대한 거예요. 제가 나온 뒤에 국민운동본부 주요 인사들도 거의 다 석방됐어요. 그렇게 상황이 바뀌고 있었던 거죠.”



그가 풀려났을 때는 이미 6·10 궐기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항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명동성당 농성과 이한열군의 희생이 6월항쟁을 장기화하는 결정적인 두 축이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국민운동본부 실무자들은 6월10일 밤 이미 승리의 축배를 들었고, 학생운동세력도 6월은 ‘본 게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성난 민심의 매운맛을 보여주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걸로 예상했다.

그러나 밤늦게까지 경찰과 접전을 벌인 시위대 중 일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명동성당 농성은 6월15일 오후까지 5박6일간 계속됐다. 국민의 눈은 명동성당으로 쏠렸고, 매일같이 그 주위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벌어졌다. 6·10대회 하루 전날, 시위를 벌이다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군이 6월 내내 사경을 헤매는 동안, 최루탄은 독재정권의 야만성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어 국민의 분노를 키웠다. 결국 ‘6·18 최루탄 추방대회’로 다시 한 번 수만 군중이 집결하는 기회를 만들었고, 6·10항쟁의 불씨는 6월 내내 꺼지지 않았다.

▼ 항쟁이 장기화하면서 아무래도 열기가 식고, 연대에도 분열 조짐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최루탄 추방대회 전후로 ‘비상조치설’ ‘계엄설’이 떠돌아 위기를 맞는 듯했죠. 6월20일이라고 날짜까지 박아서 꽤 구체적으로 소문이 떠돌았어요. 군부대가 출동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고. 그렇다고 주저앉을 순 없었어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아침마다 교문 앞에 집합하고, 오후엔 시내로 퍼져 쉽게 진압당하지 않게 하자는 식의 준비를 했죠.”

6·26 최후 항전

▼ 당시 정권에서 정말 군을 동원할 생각이 있었을까요.

“실제로 군부대가 나올 준비를 했다고 하던데요. 광주에서 한 짓이 있으니 그럴만하죠.”

▼ 그렇다면 당시 정권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군부대를 투입해 강제 진압할 수도 있었지만 다른 선택을 한 건 자신들의 용단이었다고 하는 게 억지는 아니네요.

“그건 그렇지 않죠. 군부대를 투입했어도 민중은 온몸으로 맞붙었을 겁니다. 그게 두려우니까 군부대 투입 계획을 접은 거죠. 아직도 6·29선언이 정권의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게 옳다고 봐요.”

▼ 야당과의 연대는 어땠습니까.

“비상조치설이 나돌면서 YS(김영삼)가 정권과 타협하려는 듯한 조짐이 있었죠. 영수회담을 제의한 것도 그렇고. 그래서 영수회담 때 정치적으로 적당히 타협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6월23일과 26일에 연합집회를 세게 하기로 계획했어요. 결국 24일 영수회담은 합의된 게 아무것도 없이 결렬됐죠.”

6월26일 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한 국민평화대행진엔 전국 30여 개 지역에서 100만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다. 6·10대회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결과적으로 이날 시위는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최후의 항전이 됐다.

4/6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목록 닫기

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댓글 창 닫기

2022/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