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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소"

98세 베스트셀러 철학자 김형석의 ‘쿨한’ 행복론

  • 정현상 기자|doppelg@donga.com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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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나이 ‘쉰셋’이라고 하자 김 교수는 “흐흐흐흐” 하며 웃으신다. 그 웃음의 의미를 처음엔 몰랐으나 인터뷰를 마친 뒤에야 문득 깨달았다. ‘쉰셋이라니 얼마나 좋은 나이인가.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라네. 열심히, 멋지게 살게나’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한국 나이 98세인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는 서울 연희동 주택에서 혼자 산다. 20년간 병중에 있던 아내와 13년 전 사별했고, 6남매 중 가까이 사는 자식과 손주가 이따금 찾아오지만 그는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하다. 음식 장만과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기에 큰 불편은 없다고 한다.



놀라운 뇌력

그가 가끔 들르는 인근 교회의 카페에서 9월 9일 토요일 오전에 만났다. 카페 주인에게 커피를 주문했는데, 김 교수에겐 진한 커피를 내왔다. 김 교수와 마주 앉자, 진한 커피 향이 풍겨왔다. 정말 진한 인생 아닌가, 98세에 베스트셀러 저자라니. 가지런하지는 않지만 튼튼해 보이는 치아를 내보이며 소년처럼 웃는 그가 부러우면서도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했다.

그 나이에 김 교수는 죽음을 앞둔 정적인 삶을 이어가는 게 아니다. 요즘도 일주일에 몇 번은 강연회를 다니고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이다. 보청기나 지팡이에도 의지하지 않는 건강한 노년. 수십 년 동안 수영을 해온 결과이기도 하고, 아침에 달걀과 사과 같은 건강식을 하는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단순히 수영을 몇 번 하고 근력을 기른 결과만은 아니다. 사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정신력이다. 정말 대단한 뇌력을 갖고 있는 듯하다. 강인한 뇌력과 신체적 절제가 지금의 건강한 그를 만들었다. 두 시간의 인터뷰 내내 그는 목마를 때 잠시 커피를 입에 댔을 뿐 막힘없이 자신의 삶을 풀어놓았다. 무엇보다 가치 있고, 목적 있는 삶이었다. 삶에 대한 강고한 철학이 없었다면 이처럼 풍성한 100세를 맞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나이에 제 자랑 같아서 좀 부끄러운데요. 9월에 강연이나 공식석상에 나가는 일이 거의 매일같이 있습니다. 10월에 책 한 권이 나올 예정이고요. 내년 초와 그다음 해에 또 한 권이 나옵니다. 지금 그나마 정신이 온전할 때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니 부지런을 떨어야 해요. 어제는 대전에 갔다 왔는데 210석 강당이 가득 찼어요. 강연을 마치고 나오니 많은 사람이 저 때문에 행복하다며 고마워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더군요. 저 때문에 행복해지는 사람이 남아 있으니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답니다.”


건강과 장수의 비결

100세에 가까워지면서 그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 뭔가요?”다. 당연한 질문이지만, 사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 그는 조금 부끄럽다. 어려서부터 그는 남달리 건강하지 못했다. 한때는 그의 부모도 그의 건강에 대해선 단념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신체적 과로나 무리한 상태를 피했다. 좋게 보면 절제였다. 지금도 신체나 정신적 무리는 하지 않는데, 그것이 지나고 보니 장수의 한 비법이었다. 50세가 넘어서야 그는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언제나 바쁜 인생이었다. 그래도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한 가지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자유로운 시간에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수영을 택했다. 이 운동이 몸에 맞아 대학 정년을 맞은 이후엔 거의 매일 수영을 했다. 외국에 여행을 가면 수영장이 있는 호텔을 예약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세 번쯤은 수영장을 찾았다.

“수영이 꼭 필요하긴 한데, 이젠 좀 부담도 됩니다. 일주일에 1, 2회 정도 해요. 수영장에 가도 다리운동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90이 넘으면 제일 힘든 게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일어나기 위해 한 30분 준비해야 해요. 오전 11시쯤 지나서야 몸이 정상으로 돌아와요.

그리고 정신력이 뚜렷하게 쇠퇴하는 걸 자꾸 느낍니다. 이성적 판단은 약화되고 감정이 자꾸 노출돼요. 알면서도 화 안 낼 걸 화내고 그래요. 그래서 90 넘게는 살라고 얘기 안 해요, 허허. 그만큼 나를 조절하는 게 힘들거든요.”

운동은 건강을 위해 필요하지만, 건강은 무엇을 위해 필요한가. 김 교수에게는 일을 위해 필요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건강을 유지해준다고 믿고 있다. 일을 사랑하고 열심히 일하는 동안 그 일 때문에 어떤 인간적 에너지가 작용해 건강을 도왔다는 것이다.

젊어서는 신체적 건강이 정신적 건강을 이끌어주지만 나이 들면 정신적 책임이 신체적 건강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그의 조언도 되새김질해볼 만하다. 이 말은 젊어서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늙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과도 연결된다. 노년기에 필요한 지혜가 뭘까.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을 읽거나 공부해서 지식을 넓혀가는 일입니다. 50대 후반이나 60대 초에 직장에서 은퇴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제2의 인생을 잃어버립니다. 그때 재출발하면 80대 중반까지도 제2의 인생이 있다고 생각해요. 60대가 되면 꼭 공부 시작해라. 안 하면 네 인생 없다. 네 손해다. 누구와 비교하지 말고 네 행복에 대해 공부해라.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둘째, 50대까지 못했던 취미 활동을 해야 해요. 그러면 50대 이전보다 더 행복하고 성공률이 높아요. 60세가 넘으면 무조건 일을 계속해라, 정 할 일이 없으면 봉사활동을 해라, 그러면 80대 중반까지 제2의 인생을 살게 되고, 그러지 못하면 잃어버린다. 저는 그것을 경험했고, 가깝게 지내던 김태길 교수, 안병욱 교수, 김수환 추기경, 현승종 총리도 60 이후 인생이 더 귀했어요. 이제 의료 혜택도 좋고, 장수할 텐데 60세에서 90세까지 제2의 마라톤을 마음놓고 뛰어봐요. 우리가 성장하는 만큼 나라도 성장하니까요. 이건 나만을 위한 욕심이 아닌 거지요. 다행히 이 나이까지 일하고 있는 저도 있습니다. 허허허.”



진리를 향한 그리움과 겨레 사랑

노(老) 교수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한 세기를 지나며 그는 일제강점기와 공산치하를 겪었고, 탈북과 전쟁, 가난 속에서의 공부, 여섯 남매 뒷바라지와 20년간 병중의 아내 뒷바라지 시간을 보냈다. 1920년 평남 대동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3년부터 연세대 철학과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시작해 30여 년간 후학을 길렀다. 전공은 윤리학과 역사철학 분야.

그의 책 가운데 특히 1962, 63년 비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였던 ‘영원과 사랑의 대화’ ‘고독이라는 병’은 지금도 읽히는 고전이다. 지난 7월엔 ‘영원과 사랑의 대화’가 재출간됐다. 전공인 철학 분야에서 ‘철학의 세계’ ‘종교의 철학적 이해’ ‘역사철학’ 등을, 기독교 분야에서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등을 냈다.

그의 긴 삶을 짧게 요약해보라고 한다면 그 스스로가 표현한 다음 몇 문장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93세 되는 가을, 나는 자다가 깨어나 메모를 남기고 다시 잠들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향하는 그리움과
겨레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지난해 출간돼 9월 현재까지 11만 부가 팔린 그의 책 ‘백년을 살아보니’에 나온 글이다. 깨달음을 얻은 노선사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남긴 말 같다. 김 교수는 이 글을 자신의 묘비명에 새겨달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해뒀다.

학자로서 진리를 향하는 그리움은 평생 계속됐다. 그 시작은 평양 숭실중 3학년 때였다.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학교가 문을 닫을 상황이었다. 신사참배를 하고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인가, 아니면 신사참배를 거부하기 위해 학교를 떠나야 하느냐는 고민을 해야 했다. 같은 반에 다니던 윤동주 시인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북간도로 떠났다. 김 교수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했다.

당시 정모 교장은 숭실중의 500명 조선학생을 일본 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 자신만 신사참배를 하고 학교를 지키겠다고 했다. 17세 김형석은 등교하는 것처럼 부립(府立)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보고 학교가 파하는 시간에 귀가했다. 그때 손에 잡힌 철학책을 읽으면서 제대로 이해는 못했지만 철학자 이름도 알게 되고 철학이 어떤 문제를 취급한다는 것을 짐작하게 됐다.

그해 가을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선생이 감옥에서 병이 심해 가출옥했을 때였다. 도산 선생의 고향은 김 교수의 고향에서 6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도산 선생이 어느 토요일 저녁 시골 사람들에게 강연을 한다고 했을 때 그도 그 강연장에 참석했다.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면 가지 못했을 상황이었다.



인생의 스승 도산과 인촌

“감수성이 예민했던 때라 애국심을 고취한 도산 선생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화를 받았어요. 그때 두 가지를 생각한 것 같아요. 철학 공부를 꼭 하고, ‘작은’ 도산이 돼 당신의 생애를 따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도산 선생을 동리 밖에까지 배웅하는데, 어린 저도 끝까지 따라가 배웅했습니다. 그런데 4, 5개월 뒤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참 복잡한 마음이 들더군요.”

상해임시정부가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위기에 처했을 때도 도산의 인격과 애국심이 그 조직을 살렸다고 증언하는 이들이 있었다. 도산은 임시정부를 이끌어간 분이라기보다 뒤에서 걱정하며 지원해준 분이었다.

“나라를 위해 교육에 헌신하며 일할 때는 행복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깨져서 되지 않을 때는 사실 걱정하는 세월이 더 힘듭니다. 도산은 그렇게 걱정해주는 사람이었어요.”

도산과 더불어 큰일을 도모하고 걱정해주는 또 다른 인물로 그는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을 꼽았다. 김 교수는 1947년 월남해 서울 중앙중 교사로 일하면서 인촌을 만났다. 그는 뒤에 교감까지 지내며 가까이서 인촌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분은 앞장서서 나서지 않았어요. 고려대, 중앙학원, 경성방직, 동아일보를 다 뒤에서 도왔어요. 유능한 사람을 뽑아서 도와주니 네 가지 일이 다 성공했지요. 그런데 나라 일이 잘 안되어 나이도 어린 저에게 항상 걱정을 토로했어요. 그 마음이 도산의 마음과 꼭 같다고 여겼습니다.”


‘내가 나를 키워야 한다’

나라가 안되는 걸 뒤에서 걱정하는 마음이 더 어렵다는 말은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그 역시 배후에서 조용히 연구하며 우리가 잃어선 안 되는 가치를 지켰다. 민주화 투쟁의 전면에 나선 것도 아니다. 모두가 앞장서서 구호를 외칠 순 없다. 큰일은 더더욱 일이 진행되도록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그분들에게서 저도 그런 마음을 간접적으로 영향 받은 것 같아요. 사실, 철학이나 학문을 한다지만 별로 한 것 없고, 또 교육계에 있으면서 나라와 교육 걱정 별로 한 것 없어요. 그래도 제 나름의 걱정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학생들을 사랑하고 교육계를 사랑해서, 한편으론 부끄럽지만 도산 사상을 본받아서 나라를 사랑하니 그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자다가 깨 그런 메모를 했습니다.”

김 교수는 교육자다. 평생 제자를 길러왔다. 대학에선 바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갖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길렀다. 지금은 사회에서 저술 활동과 강연으로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를 교육하고 있다. 그처럼 대학교육과 사회교육을 실천하며 스승의 모범을 보인 공으로 2017년 인촌상을 받았다.

“교육은 인촌과 도산이 살았던 시대에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나 중동 국가를 여행해보면 100년 지나도 희망이 없는 사회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본주의 신앙 외엔 제대로 된 교육이 없어요. 우리 사회의 국민소득은 그런대로 많이 올랐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 60대 이상 어른들이 ‘내가 나를 키워야 한다’고 하는 책임의식이 없어요. 지성인들은 그런 의식이 있지만, 대부분 자기 스스로를 키우지 않아요. 국민적인 성인교육이 필요한 때입니다. 학교교육도 갈팡질팡하고 있고요. 제가 걱정한다고 크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야 하니까요.”



‘50 전엔 인생 평가 말라’

6남매를 석사, 박사까지 공부시킨 그는 자녀교육에서 ‘말하지 않는 교육 방침’을 세웠다.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자녀들 모두 중·고교 성적은 높지 않았으나 대학에 가서 성적이 좋아졌다. 자신들이 원하는 학과목에서 사고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지금 공교육의 문제는 생명력 있게 자라야 할 학생들을 교육부가 행정적 규범과 울타리 안에 가두어 키우려고 하는 것이라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자녀를 어떤 가치나 목표를 갖고 교육시켜야 할까.

“자녀들이 평범하게 자라 최선을 다하고 맡은 일에서는 전문가나 지도자가 되라는 교육관을 갖고 있어요. 인생은 50 전에는 평가해서는 안 돼요. 그래서 자녀들이 50쯤 됐을 때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성공한 사람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유명해지기보다 사회에 기여하는 인생이 더 귀하니까요.”

많은 어려움을 겪은 그의 눈에 요즘 청년들은 어떻게 보일까. 어느 세대보다 더 괴로움과 외로움을 호소하는 요즘 세대들 아닌가.

“요즘 청년들은 무엇보다 선배들 잘못 만나 혼란스럽고, 복잡한 세상에 사는 게 힘들다고 해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일제시대를 살았고, 2년 동안 공산치하에 있었고, 6·25전쟁을 겪었고, 민주화운동기를 거쳤다. 그 어려움을 겪는 동안 우리가 다 성장했다. 그런 시련 없었으면 성장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장한 나라들을 보라. 독일과 일본은 패전을 딛고 재기했다. 나라를 잃었던 이스라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의 핵심 국가가 됐다. 외국에선 한국도 전쟁을 겪은 뒤 급성장했다고 한다. 그러니 시련을 겪는 젊은이가 행복하고 보람 있는 거다. 어려움을 힘들다고만 하면 약자가 된다’라고요.”

청년들은 또 대한민국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4강국에 끼여 존재의식이 너무 없다고 한숨짓는다. 하지만 김 교수는 희망적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진 그랬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겁니다. 주변 4강보다 더 좋은 친구가 유엔입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발언권이 아직은 세지만, 그들이 입김을 불어낼 때 인류의 희망과 장래를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고 봐요. 그런 시기가 다가오고 있고, 한국 같은 중견 국가의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행복은 보람 있는 삶의 대가

김 교수는 청년 세대에게 문화시대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후진사회 때는 무력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그다음 정치와 경제가 사회를 지배한 뒤 문화사회가 온다고 한다.  

“세계에서 문화적으로 인류에게 혜택을 준 문화 강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등 다섯 나라밖에 없어요. 이들 나라의 문화가 없었다면 인류가 어떻게 살았을까요. 한때 풍성한 문화를 갖고 있었던 러시아는 공산주의를 선택하면서 100년을 잃어버렸어요. 이들 문화 강국은 국민이 100년 이상 독서한 나라입니다. 일본은 정말 무섭게 독서하는 나라입니다. 중국 문화를 학문적으로 가장 깊이 연구한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입니다. 그리스 문화도 그리스가 아니라 독일과 영국이 가장 많이 연구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청년이라면 문화운동과 가치관을 일으켜 세워 100년 뒤에는 아시아의 문화는 한국과 일본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소설가 한강이 맨부커상 받은 것, 절대 낮게 보지 마세요. 우리에게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거든요. 요즘 우스갯소리로 그럽니다. 이젠 고생스럽게 더 오래 살고 싶진 않지만 당신들이 문화 강국 만드는 것 보고 싶어 한 백 년 더 살고 싶다고 말해요. 허허허.”

김 교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값진 것 중 하나가 그의 행복론이다.

“다른 모든 것은 원하는 사람도 있고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행복은 누구나 원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습니다. 젊어서는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뭐든지 즐거운 것을 추구합니다. 연애나 본능적인 것, 출세 같은 것이 행복이라 여기고 살아요. 그런데 60이 돼서 생각해보면 그건 즐거움일 뿐입니다. 참 행복은 보람 있게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대가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행복은 내 삶의 대가로 오는 겁니다. 즐거움은 나에겐 좋지만 다른 사람에겐 좋지 않을 수 있어요. 보람 있게 산다는 말은 나도, 남도 행복해진다는 거지요.

또 다른 단계가 있는데요. 소유를 위해 사는 사람은 즐거움밖에 몰라요.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은 즐거움과 행복을 반반 느껴요. 보람 있게 사는 사람은 인격적인 행복을 느낍니다. 그렇게 보면 60쯤 되는 나이는 즐겁게 사는 인생에서 행복하게 사는 삶으로 전환하는 나이가 아닌가 해요.”



동기보다 목적이 중요

김 교수는 물질욕, 권력욕, 명예욕, 성욕 같은 것들은 ‘소유’에 해당하기 때문에 상실하면 고통과 불행으로 바뀐다고 말한다. 이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면 소유의 노예가 돼 정신적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욕구가 어느 정도는 있어야 동기부여도 되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김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기업체 교육을 많이 했는데요. 하버드대에서 행동과학 연구를 하면서 동기부여라는 개념을 많이 썼어요. 그런데 이건 사장과 경영주가 동기를 부여해서 근로자를 더 잘 이용하기 위해서 나온 말이에요. 수준이 낮은 사람에겐 동기를 부여해야 하지만, 인격을 갖춘 사람에겐 목적의식을 줘야 해요.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이 뭐냐, 그것이 더 중하다는 겁니다. 경영자는 근로자에게 우리 회사가 한국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목적의식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건 경영학보다는 인문학에서 나온 성찰입니다.”

그의 강의는 포털 사이트나 유튜브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념적으로는 보수지만, 열려 있는 사고가 인상적이다.

“아쉽게도 우리 사회 지도자들의 정신이 비어 있어요. 지도자로서 알아야 할 세계관도 역사관도 없어요. 제일 필요한 건 세계 속에서 우리 민족을 이끌어가며 살 가치관인데 그것이 없다는 겁니다. 요즘 중소기업 하는 사람들에겐 ‘이젠 늙지 말라’고 하고, 교수들에겐 자기만의 좁은 학문 영역을 벗어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라고 당부합니다.”

그의 강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결론보다는 문제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참석자들이 긴 시간 강의를 즐겁게 들으면서 많이 받아가도록 하기 위해 그가 나름대로 고안한 방법이다. 잔잔한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것도 매력 포인트다. 거기에 정서를 자극하는 내용도 가미된다.


철학자 수필가 트로이카

“어제 대전 강연에서 저와 안병욱, 김태길 선생의 우정에 대해 얘기했더니 많은 사람이 눈물을 닦아요. 우리들의 우정은 좀 특별했거든요. 60이 될 때까지는 서로 공부와 학문적인 일에 열중했어요. 그러다 60을 넘기면서부터는 언제나 사회와 겨레를 위해 걱정했고, 정성을 쏟아 국민이 행복할 수 있게 하자는 게 우리 우정의 바탕에 깔려 있었어요. 사회가 요청해왔기에 셋이 다 90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다 김태길 선생이 떠나고 난 뒤 어느 날 안병욱 선생이 전화를 했어요. ‘우리 셋이 삼각형으로 살았는데, 김태길 선생 가도 두 각은 남을 줄 알았어. 그런데 한 각이 없어지고 나니 삼각형은 다 없어지고 마네.’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신마저 먼저 가게 될 것 같다는 아쉬움을 전한 거지요. 못다 한 일의 마무리를 제게 부탁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몇 해 뒤 안 선생도 떠나고 말았습니다.”

김 교수는 1920년생 동갑내기인 김태길(2009년 타계) 전 서울대 교수, 안병욱(2013년 타계) 전 숭실대 교수와 더불어 1960~70년대 철학자이자 수필가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 옆에는 안병욱·김형석 두 분의 기념관인 ‘철학의 집’이 있다.

김 교수는 크리스천이다. 종교에 대해서도 걱정이 많다. 그는 3·1운동 때부터 6·25 때까지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많은 혜택을 줬지만 지금은 오히려 종교가 사회에 걱정을 안겨주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가다 보면 기독교나 불교 같은 종교는 이제 사회에서 버림받을 것 같아요. 우리는 아직 제대로 인식을 못 해요. 인도나 중동 국가가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신앙의 근본주의 때문입니다. 자신의 종교에 매달려 그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저는 적어도 그런 좁은 식견에선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들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파스칼의 ‘팡세’,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같은 책도 좀 읽어봐야 해요. 신학자 리버의 책도 읽고, 그들의 사상을 뛰어넘어야 해요. 그런데 많은 목사님이 성경만 읽고 또 읽기만 해요.”


문재인 정부의 근본주의

문재인 정부의 모습에서도 그는 ‘신앙 근본주의’의 징후를 읽어낸다.

“국민소득 3만 달러면 경쟁 사회에서 복지사회, 사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도 그럴 시기가 된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니 그쪽으로 가기 위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는데요. 문제는 사회민주주의가 아니고 인민민주주의 방법밖에 모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운동권 출신 사람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내놓는 정책들이 인민민주주의와 비슷해져가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은 약, 주사, 수술 등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런데 북한은 모순 논리에 따라 중간은 없고 무조건 수술을 앞세웁니다. 그러면 환자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우리 정부도 흑백논리로 사안들을 보는 게 아닌가 하고 우려됩니다.

문 대통령은 북한 핵 문제를 풀기 위해 대화를 강조하는데, 북한을 제대로 봐야 해요. 북한은 적화통일 가운데 한 방법으로 핵을 개발하고 있어요. 김구 선생은 광복 뒤 김일성을 만나 이용당했고, 김대중 대통령의 선의의 햇볕정책은 김정일이 핵을 만드는 데 이용됐습니다. 문 대통령이 북한에 대화하자고 할 때 김정은 위원장이 또 이를 이용할 구실을 줘선 안 돼요.”



사회에 무엇을 남겼는가

김 교수는 최근 인촌상 수상 이후 특별한 결단을 내렸다.

“90 중반을 넘기고 나니 내가 하고 싶은 일 외에 후배나 제자에게 물려줄 유산이 뭘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그들에게 큰 희망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저의 단점이지요.

그런데 올해 고맙게도 인촌상(상금 1억 원)과 유일한상(상금 1억 원)을 받으며 큰돈이 생겼어요. 그건 제가 노력해서 번 돈은 아니고, 밖에서 온 것이니 제가 쓸 수는 없어요. 제자들에게 ‘상금을 맡길 테니 사회에 정신적으로 도움 되는 일을 좀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내가 인문학 분야에서 일했으니 1년에 한 번쯤 그와 관련된 행사를 한다든지, 그도 어려우면 어린이들 병원비로라도 내면 좋겠다고 했지요.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어요.”

김 교수는 자신의 책에도 이렇게 썼다. ‘인생의 나이는 길이보다 의미와 내용에서 평가되는 것이다. 누가 오래 살았는지를 묻기보다는 무엇을 남겨주었는지를 묻는 것이 역사다.’ 그가 남긴 값어치 있는 유산은 상금뿐 아니라 진리를 찾고, 겨레를 걱정하며, 사랑으로 어려움을 견뎌내는 지혜를 우리에게 전한 것 아닐까. 김 교수가 100세를 넘겨 대한민국이 문화 강국이 되는 날을 꼭 보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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