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호

‘조폭수사 대부’ 조승식 전 대검 형사부장 토로

청탁받은 법무장관, “검찰조직 위해 ‘순천주먹’ 불구속하라”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8-04-07 2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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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주먹 대부 이육래 수사에 대한 여당 중진의원의 ‘관심’
    • 김태촌 검거 현장에서 의문의 사복경찰에 불심검문당해
    • 안기부 실력자와 칠성파 두목 이강환의 ‘우정 어린’ 현찰거래
    • 영도파 두목 천달남 구속하자 검찰 고위인사 “깡패 아닌데…”
    • 호남주먹 친분 의혹 검찰 고위층의 노골적 인사차별
    • 김대중 정부 때 르네상스 맞은 조폭들, 노무현 정부 들어 위축
    • 대선자금수사 당시 검찰 지휘부, 수사팀의 ‘삼성 강공’에 제동
    ‘조폭수사 대부’ 조승식 전 대검 형사부장 토로
    ‘주먹 잡는 검사’ 조승식(趙承植·56) 전 대검 형사부장이 검찰을 떠났다. 동기가 검찰총장에 오른 경우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떠나는 ‘용퇴’ 전통에 따라서다. 이로써 검찰 조직폭력배 수사의 대부는 전설로 남게 됐다.

    그는 부임하는 곳마다 현지 폭력조직을 소탕해 주먹계에서 악명을 떨쳤다. 군산파(전주지검 군산지청), 논산 한실파(대전지검 강경지청), 광양 라이온스파(광주지검 순천지청 ), 안산 원주민파(수원지검 강력부), 김천 연주파(대구지검 김천지청)…. 간부가 돼서도 평검사처럼 주먹 수사 일선에 나섰다. 폭력세계에서 ‘광복 이후 최고의 악질 검사’로 불리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내로라하는 주먹들도 그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 호남주먹의 대부 이육래·김태촌씨를 구속했고, 부산주먹계의 거물 이강환·천달남씨를 감옥으로 보냈다.

    특히 국내 최고의 깡패로 불리던 김태촌씨 검거 작전은 조폭 수사의 전설로 남아 있다. 당시 그는 현장에서 권총을 차고 체포작전을 지휘했다. ‘큰놈을 잡을 때는 직접 움직여야 마음이 놓인다’는 나름의 원칙 때문이었다. 공중전화 추적으로 영도파 우두머리 천달남씨를 잡을 때도 그랬다.

    ‘신동아’는 2001년 11월호에서 그의 활약상을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당시엔 현직 검사 신분이라 다 밝히지 못했던 얘기를 들어봤다.

    사법시험 19회인 그의 검찰 재직기간은 28년6개월. 사표 낼 당시 사시 동기생인 박상길 부산고검장, 안영욱 법무연수원장과 함께 현직 검사 중 최장 근무기록이었다. 세 사람을 포함한 임채진 검찰총장의 사시 동기생 5명은 모두 3월초 사직했다.



    그는 1979년에 검사생활을 시작했는데, 첫 근무지가 서울지검이었다. 평검사가 고위 공무원으로 대우받던 시절이었다. 당시 전국의 평검사 수는 300명밖에 안 됐다.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서울지검과 대검 검사 전원이 청와대로 문상을 갔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대검 형사부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인사발령을 22회 받았고 18개 검찰청을 돌았다. 소감을 묻자 “홀가분하다”고 했다. 미리 물러날 준비를 했기 때문이란다.

    ▼ 고검장 못해 봐 아쉽지 않습니까.

    “별 아쉬움이 없어요. 검찰에서 검사장은 관리자입니다. 수사는 하지 않고 지휘만 하지요. 관리자가 되면 수사에 직접 관여하지 못하니 수사팀에 끼지 못합니다. 저는 수사를 할 만큼 했기에 여한이 없습니다. 검사들 중에는 자리 욕심을 내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그거 다 소용없습니다. 검찰 직위가 나중에 변호사 할 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간성으로 판가름 나게 됩니다.”

    ▼ 퇴임 소식을 듣고 ‘주먹’들이 기뻐할 것 같습니다.

    “부산지검 강력부에 근무할 때 일입니다. 인사 때 조폭들이 축전을 보냈더라고요. ‘축 개업’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발령이 나지도 않았거든요. 옷 벗고 나가서 변호사 개업하라는 자기들 희망을 담은 축전이었던 거죠.”

    ‘조폭수사 대부’ 조승식 전 대검 형사부장 토로

    조폭수사의 대부로 불리던 조승식 전 대검 형사부장. 법무법인 한결의 공동 대표변호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 요즘 조폭 수사가 더 힘들어졌다고 하던데요.

    “범죄의 질이 바뀌었어요. 강력범죄에서 경제범죄로 바뀌었습니다. 조폭들이 ‘범죄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내성이 생긴 거죠. 주가조작 등 경제범죄는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범죄의 피해가 쉽게 눈에 띄지 않죠.”

    ▼ 검사들도 조폭 수사 잘 안하려 하죠?

    “경제범죄는 고소가 없으면 수사할 수 없습니다. 검사들이 조폭 수사를 기피하는 건 사실이에요. 정치적 사건은 성과와 상관없이 수사하는 것 자체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BBK사건을 보더라도, 무혐의 처분으로 기소도 안 했지만 검찰 지휘부와 수사라인 검사들이 유명세를 치렀잖아요. 깡패 수사는 해봐야 빛도 안 나고 힘만 들어요. 깡패들이 돈을 많이 벌어 거물 변호사를 선임합니다. 예전보다 방어력이 세진 거죠. 몇 년 전 나OO(옛 서방파 조직원)를 대구지검에서 구속할 때도 처음엔 영장이 기각됐습니다. 검찰 고위직을 지낸 K변호사가 선임됐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동그라미 하나 더 붙여서…”

    ▼ 조폭 수사에 남다른 열정을 갖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나요.

    “2학년(두 번째 발령) 때 군산(전주지검 군산지청)에 가보니 깡패가 많더군요. 하나하나씩 수사하면서 ‘정말 나쁜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사과정에 온갖 음해를 하더군요. 그때부터 깡패들을 척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군산에서 수십명의 폭력배를 구속한 그는 한동안 수사 일선을 떠났다. 독일 유학을 갔다 오고 법무부 파견근무(법무심의관실)를 했다. 깡패 수사를 재개한 것은 서울지검 특수1부 소속이던 1989년. 대검의 민생침해사범 특별수사 지시가 계기였다. 당시 특수1부장은 ‘강골 검사’의 상징인 심재륜 검사(현 변호사)였다.

    1980년대 후반은 조 전 검사장의 표현에 따르면 깡패의 전성기였다.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공을 세운 주먹들이 정치권력과 결탁해 온갖 이권에 개입했다. 일송회니 화랑신우회니 덕우회니 하는 연합폭력조직이 결성되는가 하면, 이강환, 박종석씨 등 거물 주먹들이 일본에 건너가 야쿠자 조직과 결연의식을 치르는 일까지 벌어졌다. 안기부 실세이던 엄삼탁씨는 주요 조직의 두목들을 조종해 우익단체를 결성하게 했다.

    조 전 검사장은 1990년대 초 부산지검 강력부장 시절 국내에서 단일 조직으로는 가장 크다는 칠성파 두목 이강환씨를 구속했다. 그때 이씨한테 들었다는 얘기다.

    “이강환이 무슨 행사를 하는데 안기부 지역 간부가 참석했습니다. 그가 이강환에게 엄삼탁의 금일봉이라며 500만원을 줬다고 해요. 이강환이 말하길 ‘그 사람이 준 돈은 국고에서 나온 돈’이라며 ‘우리는 받은 돈에 동그라미 하나 더 붙여 돌려준다’고 하더군요.”

    그 시절 폭력조직에 대한 안기부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폭력배들의 이권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이 같은 사실은 1990년대 초 ‘범죄와의 전쟁’ 당시 조 검사가 호텔 파친코 이권에 개입한 조직폭력배들을 수사하는 과정에 확인됐다.

    “파친코 업소 운영을 둘러싸고 조직폭력배들 간에 분쟁이 생기면 안기부에서 개입해 지분을 조정하는 등 ‘교통정리’를 했습니다. 어느 정치인이 겪은 일입니다. 가까운 기업인이 관광호텔을 짓는다고 해서 파친코 영업권을 줄 수 없냐고 부탁했대요. 그런데 그 기업인이 말하길 ‘호텔은 내 건물이지만 파친코는 안기부에서 관여하기 때문에 나한테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하더랍니다. 조사받은 폭력배들 얘기가 ‘안기부에 진짜로 그런 권한이 있는 줄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공직자 앞에선 ‘매너 좋은 사업가’

    서울지검 특수1부 시절 조 검사가 구속한 대표적인 주먹은 호남주먹의 배후로 통하던 이육래씨다. 전남 보성 출신인 이씨는 한때 국내 주먹계를 휘어잡았던 김태촌(범서방파), 이동재(OB파)씨로부터 선배 대접을 받고 있었다. 전국 규모의 우익단체인 호청련(호국청년연합회·총재 이승완) 간부이기도 했다. 구속사유는 이권 갈취. 부산의 100억원대 매립지 이권을 갈취한 혐의였다.

    이씨를 수사할 때 여당 중진 의원이 심재륜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와 ‘관심’을 나타냈다. ‘봐달라’는 소리는 안 했지만, 무언의 압력이었다. 심 부장과 조 검사는 늘 그랬듯 무시해버렸다.

    “고위공직자가 깡패와 개인적으로 만나면 깡패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그 사람은 깡패가 아니다’라고 옹호합니다. 이는 조폭의 속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권이나 밥그릇 싸움이 벌어질 때나 깡패의 근성이 드러나거든요. 고위공직자 앞에서는 깡패가 아니라 매너 좋은 사업가죠.”

    ▼ 이런저런 인연으로 청탁이나 압력이 들어오면 뿌리치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조폭사건뿐 아니라 모든 사건에서 청탁이나 압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검찰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에서도 상하 동료들의 청탁을 받을 수 있지요. 단순히 사건을 문의하거나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선처를 바란다는 점잖은 청탁이 있는가 하면 하소연, 혹은 읍소형의 부담스러운 청탁도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경우 떼를 쓰기도 하고요.

    중요한 것은 청탁을 받는 검사의 자세입니다. 청탁도 사람을 봐가면서 합니다. 해봐야 효과가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 상대에게는 안 하죠. 거절하거나 무시하기 어려울 거라는 판단이 들 때 하는 거죠. 단지 문의전화를 했을 뿐인데도 그 사람이 자신의 출세에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하면 부담을 느끼고 사건 처리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제 경우 청탁을 압력으로 여긴 적이 없고 원칙대로 처리한 편이었습니다. 청탁하는 사람의 숨은 의도를 눈치 채고도 모른 척하면서요. 향후 내 인사에 나쁜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도 내가 불이익 당하고 말지, 잘못된 결정으로 조직에 누를 끼치지는 말자는 신념으로 검사생활을 했습니다.”

    ▼ 검찰 내 비호세력의 방해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내가 대가 세서인지 대놓고 봐달라고 한 사람은 없었어요. 청탁이라는 게 나한테는 안 통하니까. 이육래를 구속할 때도 그가 자신과 친분이 있다고 지목한 검찰 간부들 중 누구도 저한테 전화 한 통 건 적이 없습니다. 설사 얘기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 통해 들어가게 하지 저한테 직접 하지는 않았어요. 부산지검 재직 시절 천달남(영도파 두목)을 잡아넣을 때 검찰 고위직 인사가 이런 얘기를 했다더군요. ‘천달남은 깡패가 아닌데, 조승식이 깡패로 만들었다’고.”

    ‘정체불명’ 경찰관의 불심검문

    이육래씨 사건은 그에게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사건이다. 당시 조 검사는 이씨에게 자술서 100장을 쓰게 했다. 이씨는 자술서에 그간 살아온 얘기를 일대기 식으로 기술했다. 얼마나 자세히 썼던지, 조 검사가 “이육래 자술서에서 깡패 수사의 요령을 배웠다”고 말할 정도였다. 조 검사는 이씨의 자술서를 정리해 검사들에게 수사교재로 돌렸다.

    자술서에는 이씨와 친하다는 몇몇 호남 출신 검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뒷날 김대중 정부 시절 검찰 고위직에 오른 두 사람이 포함돼 있었다. 조 검사에 대한 이들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이씨는 구속된 후 검찰 상부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조사과정에 고문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일로 대검에서 감찰조사를 하려 했으나 심재륜 부장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됐다.

    이처럼 그는 재직 중 여러 차례 진정을 당하거나 음해성 투서에 시달렸다. 대표적인 게 술집 여자와의 관계, 조직폭력배와의 골프 회동, 피의자 구타 등이다.

    다 헛소문이었지만, 피의자 구타는 실제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파견 경찰관의 행위에 대한 지휘책임이었다. 1989년 서울지검 특수1부에 있을 때 보험사기사건을 수사한 적이 있는데, 피의자가 고문을 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낸 것이다. 법원은 “성명불상의 경찰관이 구타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3000만원 배상판결을 내렸다. 1994년 수원지검 강력부장이던 조 검사가 대전고검 검사로 좌천된 데는 이 사건이 영향을 끼쳤다.

    1990년 5월 서울지검 강력부가 탄생했다. 강력부장은 심재륜 검사였고, 조 검사는 수석검사였다. 조 검사가 당시 국내 최강의 깡패로 불리던 김태촌씨를 구속한 것이 강력부의 첫 작품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당시 조 검사를 비롯한 수사팀이 현장에서 정체불명의 경찰관에게 검문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체포현장은 서울 동부이촌동 모 아파트 주변 사우나탕 앞. 수사팀은 조 검사를 비롯해 6명이었다.

    “김태촌을 체포하기 직전이었어요. 수사관 2명은 김태촌을 따라 사우나탕 안에 들어가 있었고, 4명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난데없이 사복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경찰이라면서 검문을 하더라고요. 우리가 ‘검문하려면 먼저 신분증을 내보여라’고 요구하자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용산경찰서 양모 경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신분을 밝히고 ‘범죄자 잡기 위해 잠복 중’이라고 하자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용산경찰서에 그런 경찰관이 없는 겁니다. 지금도 의문이에요. 혹시 김태촌을 보호하려는 정보기관 끄나풀이 아니었는지. 당시 안기부에서 검찰의 수사진행과정을 수시로 점검했거든요.”

    김태촌씨를 구속한 후 부산지검 강력부로 옮겨간 조 검사는 대전지검 강경지청장을 거쳐 1992년 광주지검 순천지청 부장검사로 부임했다.

    “그런 꼴통은 그 자리도 과분해”

    휘하 검사 한 명이 순천의 유력인사인 김모씨를 부동산 투기혐의로 수사했다. 김씨는 순천 일대 주먹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주임검사가 구속을 건의했고 조 부장도 동의했다. 하지만 상부의 압력이 대단했다.

    “상부에 보고하자 검사장(지검장)이 지청장을 통해 ‘봐줄 수 없냐’면서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사실 일반인이라면 불구속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하지만 ‘깡패’라는 점을 감안해 한번 강수를 둬 본 거죠. 그런데 김씨가 검찰에 출석하지도 않고 밖에서 구명 로비를 하는 바람에 자존심을 건 싸움이 돼버렸습니다. 그가 ‘검찰은 절대 나를 못 잡아넣는다’고 큰소리친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주임검사가 열 받았죠. 나는 지청장을 통한 검사장의 불구속 지시를 거부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법무부에 있는 모 검사장이 요청해왔습니다. 역시 거절했어요.”

    외압의 정점은 장관이었다. 법무부 장관이 직접 지청장에게 전화를 걸어와 선처를 부탁했던 것. 장관에게 청탁한 사람은 그 지역 출신의 유력한 3선 국회의원이었다.

    “장관은 ‘김씨를 불구속하면 그 의원이 정기국회에서 법무부를 괴롭히지 않고 적극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며 불구속을 주문했습니다. 이에 ‘구속 이유서’를 팩스로 보냈습니다. 며칠 후 장관이 다시 지청장에게 전화를 걸어와 ‘K씨를 불구속해주면 야당에서 애 안 먹이고 협조하겠다는데, 법무·검찰 조직을 위해 한번 봐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어요. 앞서 말했듯 구속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사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장관의 뜻을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지청장에게 ‘장관이 이 지경으로까지 얘기하는데, 불구속하자’고 했어요. 하지만 기소는 했죠. 우리가 굽힌 게 아니라 ‘원안대로’ 처리된 거죠. 위에서는 아마도 벌금형을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됐어요. 집행유예가 나왔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는 이 사건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선처를 부탁했던 법무부 검사장 K씨와의 악연 때문이었다. 이육래씨의 자술서에도 등장했던 K씨는 뒷날 검찰 최고위직에 올랐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듯싶습니다. 중견간부인 선배 검사가 전해주기를, K씨가 나에 대해 무척 분개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공공연하게 자기를 ‘깡패 비호세력’이라고 떠들고 다닌다면서 ‘조승식, 나쁜놈’이라고 욕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말 한 적이 없었어요. 깡패들이 이간질했나보다 싶었죠. 실제로 K씨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수사해보니 사실로 드러난 게 별로 없었습니다. 뒷날 내가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인사철이 돼서 희망부서를 적어냈는데, 연수원 고위관계자가 K씨의 반응이라며 전해주더군요. ‘그런 꼴통은 그 자리(사법연수원 교수)도 과분하다’고.”

    “블랙리스트에 이름 올라”

    노무현 정부 들어 대검 강력부장이 되기 전까지 그는 흔히 말하는 한직만 돌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특히 심했다. 퇴임사에서 그는 인사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관리자가 된 이후 18차례 보직을 받으면서 남이 보기에 빛이 나는 자리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중략… 저는 보직에 대한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고 어느 자리에서든 항상 당당하고 즐겁고 보람 있게 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인터뷰에서도 그는 “인사는 인사권자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보직이 주어지든 만족하고 아쉬움이 있더라도 참고 살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성인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불만이 없을 수 있으랴. 그는 “딱 하나, 서울지검 강력부장을 못한 건 억울하다”고 털어놓았다.

    1997년 2월 그는 사법연수원으로 발령 났다. ‘전공’과 어울리지 않는 인사였다. 이전 보직은 인천지검 형사1부장. 인천지검에 있으면서 그는 은근히 다음 인사를 기대했다. 대검 강력과장을 거쳐 서울지검 강력부장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직후 친한 선배인 검찰 고위인사가 티타임에 진지하게 말했다.

    “서울지검 강력부장 꿈 접어라. 그들이 불안해서 너를 시키겠냐. 그쪽의 블랙리스트에 네 이름이 올라 있다더라. 절대 앉히면 안 된다고.”

    김대중 정부 시절 호남주먹과 권력층의 유착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에 대해 오랫동안 야당 생활을 하는 동안 불가피하게 맺어진 인연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호남 정치인들이 궁핍하고 핍박받던 시절 호남주먹들이 음으로 양으로 도왔다는 것이다. 조 전 검사장은 ‘르네상스’라는 표현을 썼다.

    “1980년대는 조폭의 황금기였어요. 경제성장과 민주화 바람을 타고 조폭들이 날뛰었지요. 특히 1987년 대선 이후 정치권력과 결탁해 위세를 부렸습니다. 반면 1990년대는 침체기였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으로 두목급 조폭들이 대부분 구속돼 조직이 큰 타격을 입거나 와해됐거든요. 물론 뒷전에 있는 놈들은 노출되지 않았지만.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조폭들이 부활했습니다. 가히 조폭의 르네상스기였습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김대중 정부 때 호남주먹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권력실세의 휴가에 동행해 파워를 과시하는가 하면 갖가지 권력형 이권에 개입해 대형 게이트의 단골로 등장했다. 태권도협회를 비롯한 주요 체육단체도 이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1970년대부터 주먹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박종석, 이승완씨 등 거물급 주먹들이 각종 체육단체의 고위직을 차지했다.

    1970년대 ‘신사 주먹’으로 통하던 정학모씨는 권력실세인 김모 의원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까지 맡았다. 그는 진로그룹에서 부사장과 사장을 지낸 기업인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주먹계에서는 “정학모가 주먹계 최고 실세”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이에 대해 정씨는 기자와 만나 “억울하다”고 말했다. 자신은 그 세계를 떠난 지 오래됐으며, 자신을 둘러싼 소문은 그쪽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은 데 따른 음해라고 해명했다.

    깡패 피해 한적한 골프장으로

    다시 조 전 검사장의 얘기다.

    “골프장과 사우나탕에 문신한 놈들이 얼마나 설쳐대는지…. 나는 골프를 자주 치지도 않지만, 치더라도 깡패들이 안 찾는 골프장에서 쳤습니다. 이 얼마나 우스운 꼴입니까. 깡패 잡던 검사는 깡패 피해 골프를 안 치거나 한적한 골프장을 찾는데, 그 검사 때문에 도망가거나 숨던 깡패들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골프를 치니…. 한심한 일이었지요.”

    그의 분석으로는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깡패들의 위세가 많이 꺾였다.

    “DJ 정부 때 막강했던 조폭들이 노무현 정부 들어와선 힘이 빠졌어요. 노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정치권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세력이었습니다. 깡패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던 거죠. 노무현 정부 때는 적어도 정치권과 드러내놓고 친분을 과시하는 깡패는 사라졌습니다.”

    그가 검사장이 된 것은 2003년 8월. 전국 검찰의 강력수사를 지휘하는 대검 강력부장. 수사에 직접 관여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그의 명성에 걸맞은 자리였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그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검찰은 대선자금수사로 시끄러웠다.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중수부의 거침없는 수사는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대통령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여야 대선자금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안대희 중수부장이 이끄는 수사팀은 역대 최강이라는 평을 받았다. 물론 송광수 총장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성과 현대만 구속하자”

    그런데 어느 순간 검찰 수사에 이상기류가 흘렀다. 수사팀과 지휘부의 갈등설이 나돌았다. 이상기류의 원인은 삼성이었다. 검찰 지휘부는 수사 방향을 두고 대검 간부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느 날 대검 차장이 조 부장을 불렀다.

    “차장에게 ‘나는 강경파가 아니라 타협파’라면서, 삼성과 현대만 구속하자고 건의했습니다. 원래대로 하면 하위 기업들의 경영자도 구속해야 맞죠. 하지만 한국 정치의 현실과 관행을 생각해 (대선자금) 액수가 가장 큰 두 기업의 책임자를 본보기로 구속하자고 얘기한 겁니다. 이 기회에 비자금 관행을 털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당시 수사팀은 삼성에 대한 강공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압수수색과 이학수 부회장 구속이 핵심이었다. 수사팀이 삼성 채권의 대선자금 잔금과 당선축하금의 꼬리를 보았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그 기세로 계속 파헤친다면 대통령도 조사대상에 포함될 판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임기 초부터 검·경수사권 조정, 공직자비리수사처, 상설특검제 카드로 검찰을 압박하고 있었다. 어차피 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기소를 못한다는 점에서 수사의 실효성이 없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삼성에 대한 강경론에도 제동이 걸렸다. ‘강직한 검사’로 통하는 안 중수부장은 2004년 3월8일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춰볼 때 책임질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운을 남겼다.

    조 전 검사장은 당시 상황에 대한 기자의 거듭된 질문에 “내가 하지 않은 수사에 대해 말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라며 곤혹스러워했다. 하지만 대선자금수사는 아직도 불씨가 살아 있는 국민적 관심사가 아닌가.

    “내가 대검 차장에게 건의한 건 원칙대로 수사해야 한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삼성을 처벌하자는 건의는 이건희 회장이 아니라 이학수 부회장을 구속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범죄행위가 확인된 범위 내에서 법률적으로 책임질 사람을 구속해야지, 무조건 총수를 구속할 수는 없는 거죠. 바지사장이든 아니든 일단 이 부회장을 구속하는 게 맞다고 본 겁니다. 자기가 대선자금을 건넸다고 했으니. 그런데 나 같은 ‘강경론’이 우세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결론이 그렇게 내려진 걸 보면.”

    2005년 1월 그의 직책은 대검강력부장에서 마약조직범죄부장으로 바뀌었다. 강력부의 이름이 마약조직범죄부로 개칭됐기 때문이다. 그해 4월 서울서부지검장으로 발령 났다. 2006년 2월엔 인천지검장으로, 2007년 2월엔 대검 형사부장으로 전보됐다. 그해 11월 동기인 임채진 법무연수원장이 총장에 올랐다. 검찰을 떠날 때가 온 것이다.

    ▼ 검사가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어릴 적부터 옳지 못한 걸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농촌(그는 충남 홍성 출신이다)에서 살면서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힘들게 사는 걸 보면서 나에게 힘이 주어지면 그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법대에 진학하고 검사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즐겨 쓰는 인터넷 닉네임 중 하나가 ‘일지매’예요. ‘일지매’는 조선시대 때 탐관오리를 혼내고 그 재산을 빼앗아 서민에게 나눠주던 의적으로 검술의 고수였습니다. 나타난 자리에 꼭 한 떨기 매화꽃가지를 놓고 종적을 감춰 ‘일지매’라 불렸지요. 검사가 된 이후 나름대로 약자의 편에 서서 불의를 응징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젓가락으로 파리 잡아

    ▼ 유난히 조폭수사에 매달린 걸 보면, 학창시절 계기가 될 만한 사건이 있지 않았나 싶은데요. 영화 보면 그렇잖아요.

    “특별한 건 없었고요. 주먹서클과 좀 어울리긴 했습니다. 왜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는 애들이 주먹 쓰는 애들과 친하잖아요. 제가 그 경우였어요. 폭력서클의 ‘고문’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검도를 배운 덕분에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어요. 검도를 하면 눈이 빨라져 싸움을 잘한다고 하잖아요. 흔히 칼끝이 손끝보다 빠르다고 하죠. 원초적 정의감 같은 게 있었어요. 지나가다 싸움하는 걸 보고 말리다 싸움에 휘말리곤 했습니다.”

    ‘일지매’의 영향인 듯 그는 검도 유단자다. 대전고등학교에 다닐 때 전국 단위의 시합에 출전하는 등 검도 선수로 활약했다. 그때만 해도 검도장이 귀해 경찰학교 교육용 무도장에 가서 훈련을 하곤 했다.

    “한창때는 중국집 탁자 위에 있는 파리를 젓가락으로 때려 잡아본 적도 있어요. 그런데 검도의 고수는 젓가락으로 파리를 집어서 잡거든요. 그만큼 눈과 손놀림이 빠르다는 얘기죠. 한때 검도 고수의 꿈을 꾸었으나 고시공부를 하면서 포기했습니다. 검찰에 있으면서 틈틈이 도장에 나가 수련을 계속했습니다.”

    검도 5단인 그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스키가 수준급이고 스킨스쿠버 자격증도 갖고 있다. 수영 실력이 검도 못지않다. 두 팔을 사용하지 않고 한강을 건널 정도라고 한다. 그밖에도 취미가 다양하다. 색소폰 연주 실력이 밤무대 뛸 정도이고, 스포츠댄스에도 일가견이 있다. 변호사로서 자리가 잡히는 대로 할리데이비슨을 구입해 주말마다 달리겠다는 상쾌한 꿈도 안고 있다.

    그에게 교과서적인 질문인 ‘향후 인생계획’에 대해 묻자 교과서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사회적 약자 등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인생을 살겠습니다. 50대 후반까지 출퇴근 시간 지키느라 러시아워에 고생했습니다. 이제는 시간과 스케줄에서 해방돼 마음의 여유를 갖고 취미생활을 즐기고 세상 곳곳을 두루 쳐다보며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우직한 성격에 어울리는 답변이다. 그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때 ‘조폭수사의 전설’은 ‘자랑스러운 전설’로 검찰사에 남을 것이다. 3월4일 그가 검찰 내부통신망인 이프로스(epros) 게시판에 올린 ‘사직인사’에 대한 후배 검사들의 열광적인 반응만 봐도 그렇다. 160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이프로스가 생긴 이래 신기록이라고 한다. 그의 새로운 직책은 법무법인 한결의 공동 대표변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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