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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별곡─한국의 碑銘문학 7

한국 근대유화 거성 이인성과 이중섭

두 천재의 극과 극 인생궤적 예술은 가고 브랜드만 남았다

  • 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한국 근대유화 거성 이인성과 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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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색’과 친일 논란

한국 근대유화 거성 이인성과 이중섭

망우리공원의 화가 이인성의 묘. 무덤과 비 모두 깔끔하고 화려하다.

그런데 이인성의 삶을 담은 많은 자료는 전람회를 누가 주최했는지에 관해서조차 밝혀놓지 않았고, 또 잘못된 내용이 담긴 경우도 적지 않다. 무심코 남의 글을 옮겨 적은 것이 대부분이고, 심지어 인터넷에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전람회’라는 잘못된 정보가 나돈다. 이 전람회의 기획자 중 한 사람인 소파 방정환과 이인성이 같은 공원묘지에 잠든 것을 바라보면서 사람 사이에 얽힌 연(緣)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인성은 1930년대에 마라톤 영웅 손기정이나 무용가 최승희보다 더 유명한 존재였다. 그의 제자 손동진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어른들은 그림 그리는 아이에게 “너 이인성 될라고?” 하며 농을 건넸다 한다. 그 시대에 이인성은 화가의 대명사이자 아이콘이었다.

여기에서 드는 의문은 이렇게 천재 화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 왜 사후에는 그림이나 예술에 관계하는 몇몇 이를 제외하곤 그 이름 석 자도 들어본 적이 없는 존재가 돼버렸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가 추정컨대 이는 이인성과 관련된 광복 후 친일 논란과 무관치 않다. 물론 그가 실질적이고 뚜렷한 친일활동을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가 조선화가들이 만든 서화협회 전시회(協展) 등에는 작품을 내지 않고,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만든 조선미술전람회, 즉 관전(官展, 鮮展)에만 참여했다는 게 논쟁의 단서가 됐다.

같은 망우리공원에 묻힌 위창 오세창(1864~1953)은 당대 최고의 서화가로, 선전에는 단 1회만 참가하고 이후 출품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선전 출품이 일본의 의도에 부응하는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인성의 지속적 선전 출품과는 대비되는 대목. 당시 선전이 향토색 짙은 작품을 선호했다는 사실도 논란거리가 됐다. 이인성을 친일파로 모는 이들은 “당시 향토색의 추구는 식민지 피지배자를 과거에의 향수, 현실도피, 소시민적인 안일, 쇠락과 퇴폐로 유도하는 정책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선전의 향토색 추구 경향에 순응한 예술가는 현실주의, 출세지향, 체제순응적인 친일파라는 결론이 나온다. 예를 들면 1936년 일본 최고의 문부성미술전람회 입선작인 ‘한정(閑靜, 원작 망실)’에는 조선 고유의 황토색 바탕에 조선의 상징인 흰옷, 그리고 태평소, 고무신 등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이인성이 심사위원에게 자기 그림이 조선 향토색이 강한 것임을 어필하기 위한 의도에서 그렇게 그렸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인성이 입선을 위해 의도적으로 향토색을 집어넣었다 해도(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향토색을 드러냈다고 아무나 입선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또 명예를 얻은 자에 대한 시기심이 당시 화단에도 만연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비록 출세주의자라는 논란은 일으킬 수 있지만 이를 딱히 친일행위로 간주할 수는 없을 듯하다. 생전에 그 어떤 명예도 얻지 못한 이중섭이 이런 모든 논란에서 자유로웠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일제가 향토색 취향의 그림을 선호했다고 해서 향토색 짙은 그림을 그린 화가를 모두 친일파로 몰아간다면 일제가 3·1운동 후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허용한 한글신문을 발행하거나 거기에 가담한 사람도 모두 친일파로 규정돼야 한다. 민족성을 유지하려는 개인의 노력이 일제의 문화정치에 순응한 협잡행위로 치부된다면 이 또한 논리의 자가당착인 셈이다. 역으로 민족성 말살정책에 맞서 향토색 찾기에 참여하지 않은 묵인행위야말로 친일행각이라는 논리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인성의 제전 입선 소식을 실으면서 “향토색 내기에 힘쓸 터”라는 그의 인터뷰 내용을 부제로 뽑았고(1932.10.25), 개인전 기사(1938.11.04.)에서는 그에 대해 ‘우리 양화계의 거벽’으로 칭찬하고 있음을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인성을 향토색을 잘 표현한, 그래서 선전과 제전에도 입상할 정도로 훌륭한 화가이자 큰 자랑으로 여긴 듯하다.

‘환쟁이’의 황당한 죽음

이인성의 이름이 우리에게 낯설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남다른 성격과 가정사일 수도 있다. 그가 일본 유학 때 만난 부인 김옥순은 대구의 의사 집안 딸로, 학력이 일천했던 이인성은 주위의 추천으로 그와 어렵사리 결혼했다. 그 후 대구에서 양화 연구소를 열고 예술다방 ‘아르스(ARS)’도 운영하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쳐나갔지만, 부인이 병사한 후 폭음을 일삼고 걸핏하면 주사(酒邪)를 부리고 다녔다 한다.

불행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1941년 재혼했으나 부인이 아이를 낳자마자 가출해버린 것. 광복 후에는 이화여중과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치면서 세 번째 결혼(1947년)을 하고 1949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 심사위원에 위촉되는 등 안정되고 활발한 활동을 하는 듯했지만 6·25전쟁 때 어이없게도 경찰과의 시비로 유명을 달리했다. 38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작가 최인호는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라는 제목의 에세이(한국일보 1974.6.5)에서 이인성이 죽게 된 상황을 상상력을 보태 써놓았는데, 옮겨보면 이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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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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