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잃어버린 김치를 찾아서

생지와 묵은 지, 익은 지에 깃든 어머니의 손맛, 숨결

  • 김화성│동아일보 편집국 전문기자 mars@donga.com│

잃어버린 김치를 찾아서

2/4
김치는 생지, 익은 지, 묵은 지가 있습니다. 생지, 익은 지, 묵은 지는 김치를 담글 때부터 다릅니다. 절이는 것도 다르고, 소금을 넣는 양도 다릅니다. 생지는 소금을 약간 넣지만, 몇 년씩 삭힐 묵은 지는 생지보다 소금 넣는 양이 훨씬 많습니다. 생지는 하루나 이틀 정도 절이지만, 묵은 지는 보통 열흘 이상 푹 절여야 합니다.

장독대, 헛간, 대밭

보관하는 곳도 다릅니다. 좀 일찍 먹을 생지는 장독대 김칫독에 넣어둡니다. 겨우내 먹을 익은 지는 어두컴컴한 헛간 독에 보관합니다. 뒤란 응달에 김칫독을 땅에 묻고 그 속에 넣어두기도 합니다. 물론 그 위에는 반드시 짚으로 이엉을 이어 덮었습니다. 그 옆엔 구덩이에 숨구멍 하나만 만들어놓고, 무나 배추도 통째로 그대로 묻었습니다. 풋것이 먹고 싶은 함박눈 펑펑 내리는 한겨울, 통무나 통배추를 꺼내 생지나 생채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 맛이란 한마디로 ‘쥑여’줍니다. 한겨울 땅속에 있었던 무 머리에는 연초록 싹이 우우우 돋아 있고, 배추는 병아리 같은 연노랑 색깔이 눈부시게 빛이 납니다.

묵은 지는 시원한 대밭이나 종일 볕이 들지 않는 후미진 곳에 김칫독을 묻고 그 속에 보관했습니다. 땅도 더 깊게 팠고 이엉도 몇 겹으로 이어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김치 묻은 날짜를 적은 팻말을 세웠습니다. 한번 묻은 묵은 지 김칫독은 1, 2년 동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생지는 단순히 무나 배추 겉에 양념을 묻히는 것입니다. 무 배추의 세포조직이 숨죽지 않고 아직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가령 겉절이에는 배추의 풋내와 고춧가루 마늘 생강 등 양념 맛이 제각기 따로 납니다. 한겨울에 먹는 생채무침은 무의 날것 맛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마늘과 생강 맛도 그대로입니다. 바로 그것이 생지 먹는 맛입니다.



아삭아삭 풋것 깨무는 소리도 바스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 같아 참 듣기 좋습니다. 모든 김치는 쇠칼을 대지 말아야 합니다. 가닥째 손으로 찢어 먹거나 통째로 밥 위에 놓고 먹어야 제맛이 납니다. 그중에서도 생지는 더욱 그렇습니다. 쇠칼을 대면 그 쇳내가 역하게 코를 찔러 생지 맛이 한순간에 달아나버립니다.

익은 지는 담근 지 최소 한 달은 넘은 김치를 말합니다. 그쯤 되면 김치에 간이 배기 시작합니다. 무나 배추의 뻐센 성질이 한풀 꺾이고, 소금과 양념 맛이 한데 어우러지기 시작합니다. 소금의 짠맛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해 조금씩 단맛과 신맛이 생깁니다. 양념 맛도 소금과 다른 양념들이 한데 어우러져 그 고유의 맛이 조금씩 변합니다. 그것이 바로 익은 맛이고 삭은 맛입니다.

김치는 역시 익고 삭아야 비로소 김치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얼마만큼 익었느냐, 어느 정도 삭았느냐에 따라 맛도 천차만별입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집집마다 김치 맛이 모두 다른 까닭입니다.

묵은 지는 적어도 1년 넘게 숙성되고 발효된 김치를 말합니다. 남도에 가면 2~3년 묵은 지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4~5년 된 것들도 있습니다. 아주 푹 익고 곰삭아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무나 배추 젓갈 고춧가루 마늘 생강 소금 등 모든 것이 제 고유의 맛을 버리고 새로운 맛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어머니의 놀이동산

모두 한데 어우러져 묵은 지를 만듭니다. 새콤달콤하면서 구수하고 기름이 자르르 흐릅니다. 잘 삭은 홍어 같기도 하고, 푹 익은 홍시 같기도 하고, 조선간장으로 담근 몇 년 묵은 게장 같기도 합니다. 입에 넣으면 금세 사르르 녹습니다. 밥도둑 밥도둑 해도 천하의 이런 밥도둑이 따로 없습니다.

‘호랭이 물어가네.’

40년도 더 전에

우리 할머니 남양 홍씨가

혼잣말로 내뱉던 말씀,

말없이 말없이

할머니로만 살다가

손녀딸 손가락이라도 좀

삐끗하면

빨간 피 몇 방울

비치기라도 하면

손 저으며 눈 감으며

하시던 말씀

‘호랭이 물어가네.’

참말로

그놈의 호랭이가 물어갈

아픈 날들은 가고

호랭이가 물어갈 쓸쓸한 날들도 가 버린

오늘

우리 할머니 남양 홍씨가 마음속에 감춰둔

말씀 곱씹어 보네

아, 호랭이가 물어갈 썩을 놈의 시간들

-이진숙 ‘사랑스런 욕’

2/4
김화성│동아일보 편집국 전문기자 mars@donga.com│
목록 닫기

잃어버린 김치를 찾아서

댓글 창 닫기

2023/06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