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호

감춰온 미친 자아를 드러내시라,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 김갑수│시인, 문화평론가 dylan@unitel.co.kr│

    입력2009-03-06 16: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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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슨 작업을 하는 작업실입니까?” “신경쇠약과 정신착란이 빚어낸 충동의 하모니를 들으며 어린 날에 반했던 살인자의 얼굴을 떠올리지요.” 불을 켜면 선혈이 낭자할 것만 같은 음침한 작업실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갓 내린 커피향이 은은하고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줄라이홀’이다. 주인장은, 누구에게나 작업실을 권한다.
    감춰온 미친 자아를 드러내시라,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마라톤을 하고 있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뭔가 ‘슥’ 빠져나갔다. 그런 감각이 있었다. ‘빠져나갔다’ 외에 그럴듯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돌벽을 빠져나가는 것처럼 저쪽으로 몸이 통과해버렸던 것이다, 라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썼다.

    20여 년째 날마다 달리기를 해온 그다. 빠짐없이 달리기 일지를 기록했고, 여러 대회에도 출전했다.(소설이 아니라 실제 행적이다.) 그러던 중 장장 100㎞를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75㎞를 넘어서던 순간, 그 ‘빠져나가는’ 체험을 했다. 그 뒤로는 몸이 고통스럽지 않았다. 피로에 지칠 만큼 지친 상태였건만 더는 피로하지 않았다. 수많은 주자가 뒤로 처지는 것이 보였다. 일종의 명상 같은 느낌. 이때부터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해변의 풍경은 아름답고, 오호츠크해의 바다 냄새가 났다. 이미 해가 저물기 시작해서(출발한 것은 이른 아침이었으나), 공기는 티끌 한 점 없이 맑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독특한 초여름의 짙은 풀 냄새도 났다. 몇 마리의 여우들이 들판에 무리 지어 있는 것도 보였다.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매우 고즈넉한 심정이었다.’

    한 가지를 오래 한다는 건 참 특별하다. 강조점은 오래 한다는 데 있다. 뭔가 ‘슥’하고 빠져나가는 체험의 배경에 바로 그 ‘오래됨’이 있다. 그러면 20여 년 간 날마다 출근했으니 어느 지하철역에서 뭔가 ‘슥’하고 빠져나갈까? 45년간 밥을 먹으니 어느 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슥? 아니면, 몇십년간 섹스를 했더니 어떤 여인의 허리 위에서 ‘슥’ 하고 뭔가 빠져나갈까? 더는 고통스럽지도 피로하지도 않은 명상 상태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슥’ 하고 찾아와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하루키가 증언하는 ‘슥’ 체험을 내 일상에서는 느껴본 기억이 없다. 그러니까 오래 해야만 찾아오는 그 ‘슥’은 일상의 것이 아니라 특별한 행위를 오래 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 같다. 마치 하루키의 마라톤처럼 말이다. 참아야 할 것을 참고 견뎌야 할 것을 견뎌낸 다음의 어떤 경지가 말하자면 ‘슥’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니 영락없이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느니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느니. 그러나 고생이 낙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인내의 쓴맛은 피하고 열매의 단맛만 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도 하거니와.



    텅 빈 우물을 채워줄 무엇

    내 작업실 ‘줄라이홀’을 찾아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참 부럽네용!” “오메, 멋지네용!”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사람들은 숨어 있을 공간을 꿈꾼다. 그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린 시절 남몰래 벽장 속에 숨던 것 같은 자궁회귀심리를 지하 작업실이 일깨워주는 모양이다. 벽장 안에 숨어서 밀린 숙제를 하지는 않지 않은가. 그런데도 간혹 무자비한 질문을 받는다. “대체 무슨 작업을 하는 작업실인가요?”

    ‘여자한테 작업 거는 작업실’이라는 농담도 진부해서 더는 하지 않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작업실을 갖는 것에만 관심 있었지, 거기서 무슨 작업을 할 것인지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쩌면 작업이란 걸 할 만한 재주를 못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가령 연장을 들고 의자나 책장을 만드는 작업은 어떨까? 그런 건 진정 작업이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신용카드 들고 나가 사버리면 될 것을 왜 구태여 서툰 솜씨로 대패질을 한다는 말인가.

    원고를 쓴다거나 뜬금없이 그림을 그린다거나 악기를 배워보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른바 문화적이고 예술적이며 창조적인 어떤 작업.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근사한 스튜디오를 장만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프로페셔널 영역이다. 그림이나 악기 연주, 혹은 글로 먹고사는 사람의 작업일 터. 내가 받는 보잘것없는 원고료를 위해 이 터무니없이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대체 무슨 작업을 하는 작업실이냐’는 질문은 ‘왜 당신 같은 사람이 작업실을 만들어야 하느냐’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면 모기소리로 답변할 거리가 있을 듯도 하다.

    감춰온 미친 자아를 드러내시라,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악보 해석은 연주자의 몫이다. 빈틈없는 연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우).

    지난 10여 년간 세상에는 행복담론이 많이 떠돌았다. 삶의 질이 향상돼야 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 추구에 있다…. 행복을 떠올려볼 겨를이 없던 삶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났다는 방증이다. 행복담론은 자꾸만 가지를 뻗어나가 재미 추구, 의미와 가치 추구로 진화한다.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지향하며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 같은 생각에 토를 달 이유는 없다. 불행감은 사람을 이지러지게 만들고 건강에도 좋지 않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시간과 비용과 에너지는 삶을 활력 있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행복인가 하는 대목에서 막연해진다. 재미 추구, 의미와 가치 추구가 행복 자체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다.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순간도, 뭔가 보람을 느끼는 일에 참여해도, 집요하게 ‘남는 부분’이 있다. 그 남는 부분의 영향력이 크다. 극도의 행복감보다 더 강력하게 삶을 쥐고 흔드는 요소인 것도 같다.

    나는 그 남는 부분을 텅 빈 우물이라고 표현해본다. 텔레비전 연속극의 단골소재인 출생의 비밀 같은 것이 나에게도 있다면 그것은 텅 빈 우물을 품고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남들은 안 그럴까?) 텅 빈 우물은 떠 마실 물도 없고 얼굴을 비춰볼 수도 없다. 우물에 대고 소리를 지르면 멍멍한 메아리만 되돌아온다. 텅 빈 우물은 텅 비어서 캄캄한데, 그 캄캄함만큼 분명한 실재감이 느껴진다. 어디를 가고 어떤 곳에 있어도 텅 빈 우물은 사라져주지 않는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 그는 텅 빈 우물에 가슴을 담가놓은 채 얼굴과 두 팔 두 다리를 바깥세상에 휘저으며 살아간다. 뭐 이런 것이다.

    꽃이 피었다, 꽃은 피었다

    클라라 하스킬의 피아노 연주 모음집을 틀어놓고 있다. 하스킬의 연주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금세 산속 옹달샘 물처럼 맑고 청아한 음색이 떠오를 것이다. 대부분 할머닛적 모습으로 사진이 남아 있는 그녀는 몸이 구부러지는 척추장애를 안고도 천상의 순수를 건반 위에 구현했다. 사진은 할머니지만 하스킬은 언제나 소녀풍이다. 조금 전까지 1951년에 녹음된 스카를라티 소나타가 흘러나왔다. 스카를라티의 독주곡들은 호로비츠가 피아노용으로 발굴하다시피 했다. 하프시코드 곡으로 숨어 있던 것을 호로비츠가 피아노 독주회 단골 레퍼토리로 삼으면서 유명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차이라니. 고역에서 물방울 튕기는 느낌은 같지만 하스킬의 연주는 호로비츠보다 순하디 순하다. 과잉이 절제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짜릿짜릿하게 다가오는 호로비츠의 초절정인가, 하스킬의 여리고 민감한 느낌인가, 그것은 듣는 사람의 기질이 선택한다.

    스카를라티에 이어 흘러나오는 연주가 좀 웃긴다. 파울 자허가 지휘하는 빈 심포니와의 협연으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이 흐르는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생판 다른 느낌으로 따로 논다. 하스킬은 언제나처럼 겉치레 없이 간결하고 섬세하게 건반을 매만지고 있다. 반면 지휘자가 자아내는 선율은 뭐랄까, 트로트 가요의 꺾기 같은 신파라고나 할까. 감정을 잔뜩 집어넣어 구성지고 애달픈 느낌을 만들려고 애쓰는 듯 다가온다.

    소리의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이 이렇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가령 이것이 ‘꽃은 피었다’로 표현되어보라. 그것은 신파다. ‘꽃이’와 ‘꽃은’ 사이에서 비장한 서사와 느끼한 신파가 갈린다. 엄청난 차이다. 김훈이 설명하고 문학기자 손민호가 주석을 단 이 견해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연주나 노래에서도 바로 이 같은 차이가 흔히 생겨난다. 호흡을 끊어야 할 때 끊지 못하고 좀 더 끌다보면 ‘꽃은 피었다’ 같은 연주가 된다. 문학에서 신파는 철저히 배척받는 반면 클래식 음악에서 신파의 통속적 느낌이 들 때 오히려 좋은 연주로 사랑받는 경우가 제법 있다. 어쨌거나 하스킬과 자허는 기질이 다른 사람임이 분명하다. 연주회가 끝나고 나서 하스킬은 새침한 얼굴로 뒤도 안 돌아보고 총총히 가버렸을 것이다. 냉대를 받은 파울 자허가 화를 냈을까?(내 멋대로 해본 상상이다.)

    호로비츠는 여든 살 너머 죽기 직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한 정력가였다. 스위스 지휘자 파울 자허는 아내가 엄청난 부호여서 남편을 위한 별도의 오케스트라를 설립해주기까지 했다. 아, 그러고 보니 호로비츠의 부인도 세기의 마에스트로 토스카니니의 딸이다. 자허의 부인 못지않았을지 모른다. 하여간 내 멋대로의 상념을 조금 더 이어보자. 호로비츠나 파울 자허 같은 사람은 쓸데없이 거치적거리는 ‘텅 빈 우물’ 따위는 가슴에 지니지 않고 살았을 것 같다. 호로비츠의 피아노 소리는 바늘구멍만큼도 빈틈이 없고 자허의 선율은 구성지고 슬픈, 그러니까 넘쳐서 부글거리는 기름기 많은 도가니탕이다. 그래서 빈 데가 없다. 그렇다고 그 점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정력가나 도가니탕은 빈 우물의 일원이 아니다. 아마 당사자들도 별로 원치 않을 것이다.

    75㎞ 구간에서의 ‘스윽~’

    생김새나 기질은 중립적이다. 잘생기고 못생기고는 가능하지만 올바르게 생겼다거나 옳지 않게 생겼다는 윤리적 판단이 외모에 있을 수 없다. 옳은 기질과 옳지 않은 기질을 분별하는 것 역시 편견의 산물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나 자신의 생겨먹은 꼴에 자꾸만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 올바르게 생겨먹지 못했다는 자책감. 가슴에는 망망한 텅 빈 우물이 들어차 있는데, 그래서 허덕이는데, 내 행동, 내 삶의 방식은 호로비츠의 과잉을, 파울 자허의 신파를 닮았다. 그거 아시는가? 울고 싶은데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 하늘로 치솟는 기분인데 땅으로 꺼져버릴 것 같은 육신, 정의로움을 주장하는데 사악한 충동이 속에서 이글거리는 마음. 작업실은 그러니까 숨어서 자기를 감출 수 있는 쉼터다.

    감춰온 미친 자아를 드러내시라,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카르미나 부라나’의 작곡자 카를 오르프.

    무라카미 하루키는 20여 년간 날마다 달렸다. 하지만 “자, 모두 함께 매일 달리기를 해서 건강해집시다” 같은 말을 떠벌리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저 ‘나라는 인간에게 계속 달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자문자답하느라 계속 달렸다고 한다. 하루키는 그 와중에 소설을 썼고 번역을 했고 방대한 장르의 음악을 들었고 세계 도처를 여행했다. 여행지에서도 달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굳이 비견하자면 하루키의 달리기가 내게는 음악 듣기였을 것이다. 평생 사적인 시간의 대부분을 음악 듣는 일에 바쳐왔다. 연주자의 의도에 공감하며 슬프거나 기쁘거나 격정에 차오르거나 실망에 빠지거나 하는 일은 흔했다. 하지만 75㎞쯤 되는 구간에서의 ‘슥’하고 빠져나가는 경지를 느껴보지는 못한 것 같다. 아직 75㎞에 도달하지 못한 게 아닐까 싶다. 집중을 덜한 것일 수도, 시간을 덜 들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설사 견성의 ‘슥’이 영영 찾아오지 않을지라도 그 ‘언젠가는’의 상태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집요하게 음악을 들어서 행복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선뜻 답할 수 있다. 행복하지 않았다고. 나는 음악으로 도무지 행복해지지 않았다. 만일 행복의 반대말이 불행이라고 한다면 음악 듣기는 내 불행의 풀무와도 같았다. 행불행의 바깥에서 삶을 쥐고 흔드는 그 어떤 남는 부분, 텅 빈 우물 같은 것. 음악소리는 텅 빈 우물의 메아리처럼 멍멍한 울림으로 들려온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어쩌면 영영, 음악 언저리를 맴돌이하는 것은 왜일까? 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음악 속으로 숨어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광기에 사로잡힌 멀쩡함?

    중학교 시절 끝머리였으니까 제법 일찍 시에 눈을 뜬 셈이다. 민음사 ‘오늘의 시인총서’가 처음 나온 무렵이다. 박목월 시인이 창간한 시 전문지 ‘심상’이 화려한 필진을 자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시집과 잡지에 실린 작품들을 외우다시피 했고 파리똥 같은 필체로 열심히 노트에 옮겨 적곤 했다. 그중 초록색 표지의 대학노트에 빽빽이 옮겨 적은 시모음집 한 권이 지금도 곁에 있다. 마종하의 ‘아득한 방에서’, 정현종의 ‘배우를 위하여’, 전봉건의 ‘북 6’, 유치환의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어디서 일일이 옮겨 적었는지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충만한 작품들.

    그런데 노트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 일간지에서 오려 붙인 인물사진이 등장한다. 아무런 설명글이 붙어 있지 않지만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안다. 사진 속의 사내는 살인자였다. 친족을 잔인하게 살해해 사람들을 전율하게 만든 악한이다. 그의 눈매는 강렬하게 짙었고 비웃는 듯한 표정엔 예민한 감수성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얼굴을 신문에서 보고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다. 매혹이었다. 중학생의 나는 상상의 나래와 함께 그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당시 가장 소중하게 품고 있던 노트의 첫 페이지에 사진을 오려 붙인 동기는 악한에 대한 매혹 때문이었다. 그게 내 증세였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멀쩡함(soundness)을 이렇게 풀이한다. ‘건강하거나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탄탄함. 단단함. 약점이나 결함이나 파손된 부분이 없는 상태. 좋은 상태 또는 수리가 잘된 상태. 종교적인 신앙, 정치적 견해 등과 관련된 정통성. 굳건하거나 잘 정립된 원칙 또는 사실과 조화를 이루는 상태 또는 그런 사실. 철저함 완전함….’

    그러니까 멀쩡함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이 멀쩡함에 대해 정신의학자 애덤 필립스는 전혀 다른 견해를 밝혔다. ‘멀쩡한 사람은 자신의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한 권의 책을 통해 필립스는 광기의 정상성, 멀쩡함이라는 자기기만을 설명한다. 옥스퍼드 사전대로라면 결코 ‘멀쩡하게’ 살아갈 수 없도록 태어났다고 믿었던 중학생. 자신의 어두운 충동들이 온통 두렵기만 했던 그 중학생이 애덤 필립스를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사정이 조금 나아졌을까? 살인자의 표정에서 매혹을 느끼던 중학생은 남들은 다 멀쩡한데 자신만 어둡고 잔인하며 흉측한 상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성장기란 광기의 자연스러운 발현기라는 점을 알 리 없었다. 옥스퍼드 사전에서 광기는 이렇게 설명된다.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짓…. 걷잡을 수 없는 분노… 터무니없는 흥분….’ 터무니없고 걷잡을 수 없는 무엇이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에 두려웠다. 게다가 사고로 몸을 다쳐 장기간 입원하고, 요양생활을 거듭한 것도 멀쩡하게 살 수 없다고 믿게 만든 원인의 하나였다.

    성장을 해도 지체가 되는 영역이 사람마다 있다. 결코 멀쩡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나의 지체된 영역이었다. 다만 드러내지 않고 안에 꼭꼭 감추는 기술이 늘었다. 이른바 주 인격과 보조 인격의 분열과 투쟁이 다. 심리학자 리타 카터는 보조인격 혹은 감추어놓은 자아의 징후를 이런 식으로 판별한다.

    -평소의 그 사람과는 공통점이 없는 부분, 또는 ‘경계를 넘어선’ 부분이 있다.

    -어떤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 신통치 않다.

    -이따금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한다.

    -깊게 뿌리박힌 습관을 단기간이나마 쉽게 포기할 수 있다.

    -보통의 취향과 전혀 다른 옷가지가 조금 있다.

    새삼 심리학자의 진단이 필요 없을 정도다. 이런 징후는 일상에서 너무나 흔하게 나타난다. 어쩌면 인격의 다중성은 요즘 사람들의 보편적인 성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숨어있는 어두운 충동으로 인해 언젠가는 모든 것을 산산이 무너뜨리고 저 사진 속 살인자처럼 끔찍한 파탄에 이르고야 말 것이라는 예감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기이함이 발현되는 공간

    ‘카르미나 부라나’를 작곡한 카를 오르프는 속도광이었다. 한밤중에 미친 듯이 집을 뛰쳐나가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속도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다 새벽에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고는 했다. 그의 아내였던 작가 루이제 린저는 ‘카르미나 부라나’의 첫대목 ‘오 운명의 여신이여(O fortuna! )’를 외우며 항상 남편의 죽음을 예비해야 했다고 적었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작업실 기물을 마구 때려 부수곤 했다는 차이코프스키의 행적도 있다. 말러의 아내 알마 말러는 남편이 죽음을 입에 올리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음악 속으로 들어가보면 말이지, 정신없는 자들의 정신없는 충동들이 말이지, 그야말로 화산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 말이지, 신경쇠약과 정신착란의 아슬아슬한 곡예라는 말이지, 그런데 그게 참 아름답더라 말이지…. 터무니없고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의 하모니. 음악을 듣는 나에게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건넨다.

    나는 몇몇 기이한 여자들을 알고 있다. 작업실 고정 방문객들이다. 여자 손님 A는 수다쟁이다. 그러나 그녀가 수다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진중하고 과묵한 인상을 주는 데다 커다란 덩치가 꽤 선이 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인물이어서 세련된 매너에 익숙하다. 작업실 안에서만 발동되는 그녀의 수다는 일단 소파 방정환 선생 얘기로 출발한다. 뜬금없이 웬 방정환? 그런데도 언제나 방정환이다. 방정환 이야기를 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덩달아 나도 그의 행적과 작품들을 외울 정도가 돼버렸다. 홀로 사는 그녀는 방정환을 떠올리면서 성적인 환상을 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방정환은 그렇다 치고,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지 인문학의 인명과 용어가 속사포처럼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가령 밤 12시쯤에 미셸 푸코로 개시를 하면, 마무리에 접어드는 시각은, 놀라지 마시라, 오전 8시경은 돼야 말수가 잦아들기 시작한다. 일종의 지적 고문인데, 미안한 말이지만 무당 내림굿이 따로 없다. 멈출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속사포 앞에서 망연자실의 밤은 무거운 바퀴를 굴리며 지나간다.

    나는 그녀를 분석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내가 분석당하지 않을 테니까. 간혹 찾아오는 그 고문의 밤을 나는 피하지 않는다. 그런 시간은 좋거나 싫거나 하는 판단을 떠나 있는 것이어서 마치 해야 할 일을 하는 듯한 기분으로 맞이한다. 언젠가 영문 모르는 친구가 찾아왔다가 공교롭게 그녀와 합석했다. 예의 인문학의 밤샘이 있었다. 혼비백산, 친구의 표정이 그랬다.

    여자 손님 B가 있다. B를 묘사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프라이버시 문제도 있지만, 표현하는 것 자체가 아주 괴상해지기 때문이다. B도 A처럼 말에 특징이 있다. 수다쟁이는 아니다. 대학원을 나왔고 고소득 직종에 종사하고 인물도 출중하고 성격도 원만하고…. 뭐랄까, 별로 특이한 면이 보이지 않는 평범한 교양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교양 넘치는 여성에게 간혹, 드물지 않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난다. 물론 말할 때 얘기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대체 내가 왜 그녀 이야기를 하려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B는 갑자기 느닷없이 어떤 종류의 용어들을 사정없이 구사하기를 좋아한다. 제3자가 있으면 그를 향해, 단 둘이 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달래서 시작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음담패설이다. 아니다,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냥 말이다. 그 말에 우리가 상식의 공간에서 전혀 꺼내놓을 수 없는 단어가 마구 섞여 있다. 토속어로 분류되는 여성기, 남성기, 혹은 그것이 결합되는 행위를 일컫는 센 단어들. 상대방이 멍해 있는데도 B는 참으로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어간다. 듣고 있다보면 어느 결에 그것이 별로 이상하지 않은 상태에 이른다. 단지 몇 가지 강렬한 단어가 등장할 따름인데…. 말이란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가.

    C와 D, 그리고 E, F, G로 계속 이어지는지 묻지 말라. 알파벳을 다 헤아릴 만큼 다채롭게 사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일회성 출연자는 계속 이어진다. 바로 며칠 전 일이다. 어떤 신문사 여기자가 취재를 왔다. 녹음기를 놓고 마주 앉아 진행된 인터뷰가 끝나가려는데 그녀가 벌떡 일어서며 말한다. “제가 3년 넘게 살사댄스를 배웠거든요!” 그녀는 느닷없이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며 간드러지게 살사를 췄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춤을 추어본 적이 없는 나는 상대역에 동원됐다가 금방 밀쳐지고 물끄러미 구경만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돌연한 순간이 이상한데, 이상해 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나만의 핼러윈데이

    살사댄스든 꺼이꺼이 우는 일이든 작업실 사정은 이렇다. 본래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사람인데 헤아릴 수 있어야만 하는 평지의 존재가 지하 작업실로 내려오면 다시 헤아릴 수 없음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나는 작업실에서만 벌어지는 대책 없고 헤아릴 길 없는 해프닝들을 일종의 핼러윈데이인 양 여긴다.

    문득 새벽 공기의 비린내가 확 느껴진다. 볶아놓은 커피가 7종쯤 있는데 돌아가면서 한 잔씩은 다 마신 것 같다. 참으로 신기한 위장이라 커피로 인한 속쓰림을 모른다. 오늘은 인도네시아산 토라자 칼로시가 각별히 좋았다. 잘 볶아지고 잘 내린 커피를 마실 때는 맥주나 막걸리 들이켜듯 ‘커’ 하는 입소리가 절로 난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맞는 새벽과, 밤을 꼬박 새워 맞이한 새벽은 공기의 입자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밤샘 후의 새벽 공기가 바로 ‘커’한 맛이다. ‘커’한 커피와 새벽공기 속에서 하루키의 울트라 마라톤, A의 방정환과 인문학 폭탄, B의 능청스러운 자지보지, 또는 낯선 여기자의 살사댄스가 마구 뒤섞인다.

    감춰온 미친 자아를 드러내시라,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김갑수

    1959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어국문과 졸업

    시인 및 음악칼럼니스트

    저서 : ‘나의 레종데트르’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시집 ‘세월의 거지’ 등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조금씩 미쳤지만 멀쩡했고, 멀쩡하지만 멀쩡함의 생채기로 약간씩은 미쳤다. 차라리 유쾌하지 않은가? 이렇게 꼬물꼬물 살아서 중학생 시절의 두려움을 다시 두려워하는 마음이. 결국 아무것도 파멸하지 않았으면서 파멸의 예감으로 진저리치던 시간들이. 어디선가 읽었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그렇다. 여기 이 지하실에서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하루키는 남에게 굳이 마라톤을 권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에게 마라톤은 온전하게 자기 자신에게만 귀속되는 행위다. 그렇지만 나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작업실을 권유하고 싶다. 미쳐달라고. 텅 빈 우물 속에서 제발 조금씩은 미쳐버려달라고. 다만 간절하게, 두려움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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