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을 탓하거나 여건에 불만을 갖기 시작하면 결국 무너지는 건 나 자신이다. 반면 작은 배려에 감동하고 소소한 변화에 감사할 줄 알면 기대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골프도 마찬가지다. 냉랭하게 받은 전화 한 통이 그날의 좋은 기운을 일시에 흐리기도 하고, 캐디의 능청스러운 응원이 벙커에 빠진 공을 홀컵에 밀어 넣기도 한다. 골프도 삶도 긍정의 힘이 절실한 때다.
요새는 ‘해잘공’도 있다. ‘해방 이후 가장 잘 친 공’이다. ‘참잘공’은 ‘참여정부 들어와서 가장 잘 맞은 공’인데 정치 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참 잘 친 공’으로 풀이한다. ‘손오공’도 있다. ‘이 골프장에 온 손님 중에서 오늘 제일 잘 친 공’이다.
이처럼 잘 친 공에 대한 과장된 표현이 자꾸 생겨나는 것은 골퍼들이 그 샷에 그만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특히 80 중반 정도의 실력을 지닌 주말 골퍼에게는 특별히 잘 맞은 ‘오늘의 샷’에 대한 쾌감이 집에 돌아갈 때까지 이어진다.
이 ‘참잘공’은 사람에 따라 사정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드라이버 샷에서 주로 나오고 어떤 사람은 벙커 샷에서 나온다. 미국 LPGA에서 선전하고 있는 김미현 선수의 경우 ‘참잘공’이 주로 우드에서 나온다. 김 선수는 신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5번 아이언보다 긴 아이언을 모두 빼내고 우드를 6개나 가지고 다닌다.
고수는 ‘아이언 샷’ 하수는 ‘벙커 샷‘
‘당신이 가장 자신 있는 샷은 어떤 겁니까?’ 고수들은 주로 ‘아이언 샷’이라고 답하는 반면, 하수는 주로 ‘벙커 샷’이라고 답한다. 벙커마다 출근부를 찍다 보면 자주 벙커 샷을 하게 마련이고, 그중 잘 맞은 것만 떠올리면 이런 답이 나올 수밖에.
‘그러면 어떤 샷이 가장 어렵습니까?’ 고수들은 ‘퍼팅’이라고 답하는 반면, 하수는 여전히 ‘벙커 샷’이라고 답한다. 고수들은 아슬아슬하게 놓친 퍼팅을 생각하지만, 하수들은 벙커에서 퍼덕이던 일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 중에 유독 트러블 샷에 강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멀쩡한 페어웨이를 놔두고 주로 좌우 산비탈로 공을 보낸다. 재미있는 것은 왼쪽 산비탈로 티샷이 가면 계속 왼쪽 언덕으로 치거나, 지그재그로 치면서 묘하게 페어웨이를 피해 다닌다.(캐디의 운동량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얼마 전 라운드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파5홀에서 드라이버 샷이 왼쪽 언덕에 박히더니 세컨드 샷까지 왼쪽 언덕으로 날아갔다. 지금까지의 스킨스 게임(홀 매치) 상금이 모두 쌓여 있는 이 홀에서 이 친구는 우드 5번을 잡더니 그 어려운 비탈에서 공을 그린에 올려놓아 동반자들을 경악케 했다. ‘오잘공’ ‘참잘공’ ‘손오공’ 소리를 들으며 그린에 오른 그의 말이 걸작이다. “내가 제일 자신 있는 샷이 비탈길 샷인 거 알지?” 이게 바로 자신감의 힘이다.
골프나 인생이나 너무 위축되면 스스로 무너지게 마련이고 자신감이 있으면 살아날 수 있다. 비슷한 능력을 가졌더라도 자신감이 있는 사람과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성과에서 큰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험블비 타입’ vs ‘닭 타입‘
언젠가 이어령 교수님과 골프를 하면서 들은 말이다. 역시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이라고 했다. “험블비(Humble Bee)라는 꿀벌이 있어요. 몸통은 크고 날개는 작아서 기체 역학적으로 도저히 날아다닐 수가 없는데 잘만 날아다녀요. 과학자들이 정밀하게 분석해보고 내린 결론이 바로 자신감이었어요.”
험블비는 ‘나는 벌이다. 고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이 나는 것이라는 추정이다. 반면에 닭은 몸집에 비해 큰 날개를 가지고 있어 충분히 날아다닐 수 있는데도 ‘나는 닭이다. 고로 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걷는다는 것이다. 닭이 충분히 날 수 있다는 건 개가 갑자기 달려들 때 ‘장거리 비행(?)’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골프장에 나오면 험블비 타입과 닭 타입을 볼 수 있어요. 일단 자신이 닭이라고 생각하면 그날 스코어는 망가지게 돼 있습니다. 윤 교수는 지난 번 라운드할 때는 닭이었는데 오늘은 완전히 험블비네요.”
나는 이날따라 퍼팅감이 좋아서 ‘긴 것은 붙이고 짧은 것은 다 넣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퍼팅이 잘 되니까 기분까지 좋아져서 드라이브 샷과 우드 샷도 자신 있게 날렸다. 평소에는 페어웨이 중간에 있는 벙커를 피해서 쳤는데 이날은 피하지 않고 과감히 쳐서 넘겨버리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거침없는 하이킥’의 연속이었다.
얼마 전 친구들과 라운드할 때 험블비 같은 친구를 발견했다. 스윙 폼은 신통치 않은데 연속으로 파를 잡는 친구였다. 구질은 일단 공이 페어웨이 왼쪽을 완전히 벗어났다가 크게 커브를 그리면서 다시 페어웨이로 들어오는 패턴이 반복됐다. 동반자들은 ‘OB구나’ 생각했다가 공이 다시 페어웨이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는 어프로치 샷을 깃대에 맞히는 등 승승장구했다.
“어, 3개월 전 그분이 아니네, 어떻게 이렇게 변신한 거야?”
“나 그동안 전지훈련 다녀왔어.”
이 기고만장한 친구에게 나는 험블비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네야말로 험블비야, 스윙 폼이나 구질로 봐서는 도저히 파 세이브가 어려운데 자신감이 있으니까 극복하는 거라고!”
그런데 바로 다음 홀부터 문제가 생겼다. 이 친구의 티샷이 갑자기 망가지더니 벙커 샷 두 번에 어프로치까지 왔다갔다하면서 양 파를 하고 말았다. 자신감을 잃으면 이렇게 갑자기 추락할 수 있다.
“왜 갑자기 험블비가 닭이 된 거야?”
친구의 답변이 걸작이다.
“야, 닭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나 오늘 날개 빠진 벌 됐다. 앞으로 골프장에서 벌 얘기 하는 놈은 2벌타 매기자고!”
행복한 골프를 위한 조건
행복한 골프를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첫째는 그날의 동반자, 둘째는 골프장, 셋째는 운동하기 좋은 날씨, 넷째는 바로 캐디다. 그렇다면 골퍼를 행복하게 해주는 캐디는 어떤 타입일까? 골퍼에 따라 다르겠지만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표정, 언어, 정보, 책임감, 서비스. 나는 이 다섯 가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첫째, 표정이 밝은 캐디. 표정도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이 있다. 밝은 표정-어두운 표정, 우호적인 표정-적대적인 표정, 반가운 표정-귀찮다는 표정, 존중하는 표정-무시하는 표정, 실로 인간의 표정은 다양하다. 캐디를 처음 보는 순간 표정이 밝으면 일단 기분이 좋아진다.
둘째, 긍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캐디. 유독 ‘부정형’이나 ‘금지형’ 언어를 많이 쓰는 캐디가 있다. “티잉 그라운드에 두 분이 올라가면 안 돼요.” “지금 치시면 안 돼요.” 이런 말을 긍정형으로 바꾸기가 어렵지 않다. “티잉 그라운드에 한 분은 조금 있다 올라가시죠.” “조금만 있다 치시죠.”
골프는 멘탈 스포츠이기 때문에 심리적 영향을 많이 받게 마련이다. 따라서 부정적 언어를 들으면 마음이 심란해져 공이 잘 안 맞을 수 있다. 언젠가 한 친구가 티샷한 공이 슬라이스가 나면서 오른쪽 OB라인 근처에 떨어졌다.
“이거 OB난 거 아냐?”
“잘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자 캐디가 단호하게 말했다.
“완전히 죽었어요.”
“조금 굴러내려온 것 같은데….”
“꿈도 꾸지 마세요. 확실하게 나갔다니까요.”
18홀 내내 “안 돼요” “하지 마세요” “죽었어요”만 외치고 다니는 캐디한테 걸리면 그날은 그야말로 ‘죽는 날’이다.
셋째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캐디. “거리가 얼마나 돼요?” “180야드쯤 되는 것 같은데요.” “길지 않을까?” 우드 5번을 휘둘렀더니 OB가 나고 만다. 캐디는 거리, 방향, 벙커, 해저드, 그린 상태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끔찍한 캐디는 정보의 일관성이 없는 경우다. 캐디가 거리와 방향을 몇 번 정확하게 일러줬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잘못된 정보를 주면 골퍼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넷째, 책임감이 강한 캐디. 언젠가 동반자가 앞 홀에 아이언 하나를 놓고 왔다.
“아이쿠,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지. 벙커 옆에 채를 놓고 그냥 왔어. 내가 요즘 건망증이 심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잘 챙겼어야 하는데 빨리 찾아오겠습니다.”
이런 캐디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러프에 들어간 공을 포기하지 않고 정확하게 찾아내는 캐디를 만났을 때도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아직도 버디 가능하십니다”
다섯째, 서비스 좋은 캐디. “오늘 즐겁게 라운드하시라고 작은 선물 하나씩 준비했습니다.” 캐디가 주는 것을 받아보니 예쁜 리본을 단 롱티였다. “롱기스트 보는 홀이라서 거리 나시라고 박하사탕 한 알씩 드리겠습니다.” 이런 캐디를 만나면 골프가 정말 즐거워진다.
겨울철에 골프장에 가면 대부분 일회용 핫팩을 제공한다. 지난 겨울 경기도 여주의 한 골프장에 갔더니 캐디가 핫팩을 따끈따끈하게 만들어서 건네주었다. 비닐포장을 제거하고 잘 흔들어서 충분히 따듯해진 상태였다. 핫팩이야 골프장에서 마련한 거지만 캐디의 마음처럼 따뜻하게 덥혀져 있어 모두 즐거워했다.
지난 주말엔 그야말로 ‘충전형 캐디’를 만났다 티샷이 빗맞을 때 하는 얘기가 재미있다.
“그래도 투온 가능하십니다.”
공이 그린에 겨우 올라 홀까지 10m나 남아 있을 땐 이렇게 말했다.
“버디 가능하십니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스킨스가 다섯 개나 걸려 있는 18번 마지막 홀에서 동반자 세 명 모두 그린에 공을 올렸는데, 내 공만 아슬아슬하게 벙커 턱을 맞고 흘러내렸다. 바짝 긴장한 내 귓가에 캐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버디 가능하십니다.”
‘그래 아직도 버디 가능하다. 한번 잘 쳐보자.’ 이렇게 마음먹고 벙커에서 친 공은 15m쯤 날아오르더니 깃대를 맞고 그대로 홀에 꽂혔다. 묘하게도 다른 동반자들은 모두 파로 마무리했다. “오늘의 승리는 윤형이야!” 축하 말을 들으며 나는 캐디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귓가에는 아직도 그녀의 응원이 맴돌고 있다. “아직도 버디 가능하십니다.”
미국 텍사스대와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연구진이 의학전문지 ‘심리학과 노화’에 재미있는 연구결과를 실었다. 이들은 건강한 노인 1558명을 대상으로 7년에 걸쳐 체중감소, 보행속도, 피로감 등 체력 변화를 분석한 결과 낙관적인 태도가 인체 내 화학성분의 균형을 변화시켜 육체적, 정신적 노화를 지연시킨다는 결론을 얻었다. 낙천적으로 살아야 젊게 살 수 있다는 말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낙천주의와 희망이 비관주의와 절망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희망을 갖고 즐겁게 업무에 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사에 무기력하거나 냉소적인 사람이 있다. 누가 성공할지는 자명하다.
‘돈비족’이 되자
최근 우리나라는 이 ‘희망’이라는 정신적 자원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희망을 갖고 낙천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위기감만 강조하고 문책만 일삼으면 성공 가능성이 줄어든다. 경제 발전에 대한 희망과 민주화의 희망을 대신할 새로운 희망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최근 자살률의 증가는 우리 사회의 희망 결핍을 여실히 보여주는 지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전쟁이나 전쟁 이후의 궁핍을 경험 못한 ‘결핍 이후의 세대’다. 이들은 겁이 없고 낙천적이며 동시에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실직에도 겁을 내지 않고 어떻게든 먹고사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기성세대는 전쟁, 가난, 독재를 경험하고 외환위기를 겪었다. 무한경쟁 환경 속에서 또다시 위기를 맞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신세대를 일명 ‘돈비족’이라고 부른다. ‘Don‘t worry, Be happy’를 줄인 표현이다. 기성세대는 ‘워리워리족’으로 불린다. ‘Worry and worry’를 줄인 말이다. 세대 차가 날 수밖에 없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위기’라는 말을 한다. 위기국면으로 비칠 수 있는 정치 경제적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나이 든 분들의 걱정이 특히 더하다. 골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이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걱정만 한다고 세상 일이 달라집니까? 운동할 때 열심히 운동하고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합시다! ” “골프장에서만큼은 우리도 돈비족이 됩시다.”
골프장에서만큼은 ‘워리워리족’보다 ‘돈비족’이 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나의 주장에 동의하는 분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분도 있다. 그러나 라운드 결과는 ‘돈비족’이 훨씬 우수하다. 골프도 기업경영도 국가경영도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근원적 기분을 ‘불안감’이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공포심(fear)을 이용해 사람을 움직였다. 질책, 처벌, 협박, 공갈이 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육 경제 인권의 수준이 올라간 후에는 공포심 대신 희망(hope)이 사람을 움직이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서도 이제는 희망의 바이러스, 긍정의 바이러스가 더 많이 확산되어야 한다.
홀컵을 직접 노린 김미현 선수의 절묘한 벙커 샷.
“요즘 뭘 연구하고 있어?”
“음, 신경과 호르몬 관련 자료를 보고 있어.”
자율신경계를 망가뜨리는 부정의 힘
이 친구의 주장은 대략 이런 거였다. 많은 사람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음식, 수면, 운동을 생각한다. 잘 먹고, 잘 자고, 적당히 운동을 하면 건강해진다는 믿음 때문에 전문가로부터 식단이나 운동을 처방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요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경계통과 호르몬 체계다.
인간은 아주 복잡하고 정교한 생체 정보시스템을 갖고 있다. 1억3000만개쯤 되는 망막의 감각세포는 각종 영상을 찍어내고, 귀의 고막과 연결된 섬세한 신경은 각종 소리를 뇌에 전달한다. 그리고 50만개쯤 되는 피부 촉점과 25만개쯤 되는 냉점은 공기의 감촉을 뇌에 전달한다. 이처럼 신체의 여러 감각기관이 뇌에 보낸 정보를 두뇌의 정교한 정보처리 시스템이 종합검토해서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런 과정에서 정보 과부하가 걸리거나 부정적이고 충격적인 자극이 들어오면 신경계통과 호르몬 체계는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다.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기도 하고 과소 분비되기도 하며 이 경우 살이 찌거나 빠지고 면역력도 떨어진다. 인간의 신경체계나 호르몬 체계는 늘 일정한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며 자율신경계통이 이를 조정하는데, 이게 망가지면 몸도 망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연구하는 거야?”
“골프 좀 잘 쳐보려고.”
“아니 골프를 근육과 멘탈로 친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호르몬으로 친다는 소리는 처음인데?”
“그 멘탈이라는 게 실은 신경계통과 호르몬이야. 신경계통이 무너지고 호르몬 양이 달라지면 구질이 달라진다니까!”
어쨌든 이날 이 친구의 구질이 평소와 다른지라 나머지 동반자들은 모두 주눅이 들었다. 그런데 잘나가던 이 친구가 8번 홀에서 그린 벙커에 공을 빠뜨리더니, 첫 번째 벙커샷은 도로 벙커에 내려앉고, 두 번째 벙커샷은 홈런을 날리고, 어프로치 실수에 퍼팅까지 흔들려서 무려 8타를 치고 말았다. 양 파를 한 것이다. 동반자들은 모두 경악했다.
“아니, 왜 갑자기 호르몬 체계가 바뀐 거야?”
“조금 전에 전화 받더니, 뭐 심각한 일 있어?”
“라운드 중에 전화 받으면 안 된다고. 친구한테서 전화 오면 한 타, 직원한테서 전화 오면 두 타, 마누라한테서 전화 오면 세 타 깨먹는다는 농담도 못 들어봤어?”
“글쎄 말이야, 막 세컨드 샷을 하려는데 전화가 오기에 받았더니 대출 필요하냐는 거야. 그래서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하라고 하니까, 웃으면서 자기도 바쁘다지 뭐야. 이 소리 듣고 신경이 쓰여서 세컨드 샷한 공을 벙커에 빠뜨렸는데, 이번에는 벙커샷하려는 순간 그 사람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어. 언제쯤 다시 전화하면 좋겠느냐는 거야. 그 다음에 나는 완전히 망가진 거지.”
8번 홀 스트로크 게임은 배판이었는데, 이 친구는 지금까지 딴 돈을 다 내놓아야 했다. “그까짓 돈 몇 푼 갖고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래도 네 주장이 맞다는 건 확실히 증명했잖아? 지금은 호르몬 잘 분비되고 있어?”
‘골프는 양심을 배우는 스포츠’
내가 골프를 더 잘 이해하고, 더 담담하게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운 좋게 훌륭한 골프사부를 만났기 때문이다. 골프채를 잡은 지는 20년이 넘었지만 초기 몇 년 동안은 골프의 룰도 제대로 모르고 제대로 된 스윙도 못하면서 그냥 지인들 만나 자연 속에서 스트레스 푸는 정도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그야말로 필드의 귀인을 만났는데, 바로 고려대 체육학과 박영민 교수다. 이분과는 공군장교 선후배 사이라서 금방 친해졌고, 경기 남부에 있는 골프장에서 자주 골프를 했다.
‘탱크’ 최경주 선수와 캐디 앤디 프로저씨.
이분과 한 3년 라운드를 계속했는데, 내 골프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회였다. 이분의 골프 명언 중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들이 있다. ‘골프는 양심을 배우는 스포츠다.’ ‘최단시간 내에 자신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가장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골프다.’ ‘필드를 누비는 골퍼들이 룰을 철저하게 지키는 날이 우리나라 도덕성이 회복되는 날이 될 것이다.’
이분은 자기 자신이 룰을 철저히 지킬 뿐만 아니라 동반자가 룰을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지적을 한다. ‘룰을 모르고 골프를 하는 것은 교통법규를 모르고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시 나는 골프 룰에 대해서는 무지에 가까웠다. ‘이럴 때는 룰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보세요. 정답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마치 개인지도하듯 나에게 룰을 가르쳐주었다. 룰뿐 아니라 에티켓도 배울 수 있었다. 햇볕을 가리기 위해 옷깃을 세우는 건 좋지만 사진 찍을 때는 옷깃을 내리고 맨 위 단추까지 단정하게 채워야 하며, 티는 나무로 된 전통적인 것만을 써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서 끈으로 주렁주렁 묶어놓은 티를 쓰는 것은 일종의 편법이지요.’
티샷 순서를 기다리는 타이거 우즈와 캐디 스티브 윌리엄스.
법과 원칙, 예의의 중요성
박 교수에게 골프 룰과 에티켓을 지도받을 때는 한 타라도 더 줄이고 싶은 욕심에 스윙레슨을 더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골프 칼럼을 쓰고 골프 방송진행도 하면서 비로소 엄청 귀한 교육을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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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서 룰을 지키는 것이 곧 사회의 법과 규범을 지키는 일을 배우는 것입니다.’ 요즘 사회 곳곳에서 ‘법과 원칙’의 실종을 걱정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필드에서 그토록 골프의 룰과 에티켓을 강조하던 박영민 교수가 새삼 그리워진다. 진정한 골프 사부는 골프스윙을 지도하는 사람이 아니고 ‘룰과 매너’를 지도해주는 분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박 교수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내가 낙제생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골프 사부님 안녕하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