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쿼티론 남발한 미국 부동산금융, 위기 예견됐지만 아무도 믿지 않아
- 디플레이션보다는 익숙하고 통제 가능한 인플레이션이 낫다
- 실현되지 않은 이익에 세금 때리는 한국은 ‘기본이 안 된’ 나라
- 프랑스 같은 나라 만든다? 망해가는 나라 따라가는 이상한 대한민국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마친 이 대표는 우리 나이로 30세이던 1992년에 이미 세계적인 투자은행 ‘크레디트 스위스’의 한국지사 대표를 맡았다. 이듬해엔 크레디트 스위스 본사로 날아가 아시아부문 시니어 리스크 매니저가 됐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그의 이름(마이클 리)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36세이던 1998년에는 세계 최대 금융회사 중 하나인 메릴린치의 재무컨설팅 담당 임원이 됐는데, 이곳에서 한국의 외환위기를 지켜봤다. 1년 매출액이 250조원에 달하는 세계 1위 식품회사 네슬레, 세계 최대 제약회사 노바티스 등의 재무컨설팅을 담당했고 지금도 경영 자문을 하고 있다. 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PSIC는 크레디트 스위스와 메릴린치에서 함께 일한 동료들과 합심해 스위스 취리히에 세운 투자컨설팅 회사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 대표가 들려주는 ‘세계 경제위기 분석’은 흥미로웠다. 인터뷰 내내 그가 쏟아놓은 얘기들, 예를 들어 미국 경제위기의 원인과 실태,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국제 금융시장의 시각 등은 대학교수 등 학자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경제이론’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철저히 돈이 돌고 도는 시장의 논리와 판단을 근거로 한 분석을 내놨다.
이 대표는 먼저 현재 처해 있는,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우리나라가 택할 수 있는 위기 극복 방법을 묻는 질문에 “인플레이션으로 갈지, 디플레이션으로 갈지를 먼저 선택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어차피 둘 중 하나는 피할 수 없어 보인다”는 게 그의 생각. 이 대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디플레이션보다는 인플레이션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 왜 인플레이션이 디플레이션보다 낫다는 건가.
“교과서에도 그렇게 씌어 있다. 인플레가 디플레보단 낫다고. 고통의 강도라는 면에서도 그렇다. 인플레는 최소한 돈으로 컨트롤이 된다. 그러나 디플레가 오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진다. 그리고 인플레는 익숙하다. 디플레는 사실상 경제가 멈추는 거니까. 디플레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넘어가면 그때는 정말 끝장이다. 돈을 충분히 찍어내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 돈을 찍어내 위기를 탈출한다?
“그렇다. 돈을 얼마나 찍어내는지에 따라 위기탈출 가능성, 탈출시기가 모두 달라진다고 본다. 일단 (경제의) 심장이 뛰게 해놓고 다른 부분은 나중에 생각하는 게 좋다. 경제이론으로 보면 논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돈을 만지는 실무자 관점에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보는 게 정상이다. 물론 무작정 찍어내선 안 된다. 일관성을 가지고 예측가능하게 찍어내야 한다. 인플레니 뭐니 지금은 그런 것 신경 쓸 만큼 한가한 때가 아니다.”
이 대표와의 대화는 자연스레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경제위기의 원인과 해결책으로 옮겨갔다. 학자가 아닌 실물경제 전문가의 시각. 그의 주장은 독설에 가까웠지만 논지가 뚜렷했다.
▼ 지난해 불어닥친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은.
“한마디로 탐욕이 눈을 가린 결과다. 금융기관의 부도덕성이 가장 큰 문제였다. 미국은 이미 1980년대에 부동산 가격 하락의 고통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래서 부동산과 관련해선 비교적 안전장치가 잘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런 일(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이 또 벌어졌다. 미국의 부동산-금융 전문가들은 지금에 와서야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왜 그랬을까’ 후회한다. 한마디로 지난 몇 년간 월가를 비롯한 국제 금융전문가들이 집단 최면에 걸려 있었던 것 같다.”
▼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위험성은 충분히 예측됐던 것 아닌가.
“그렇다. 이미 2007년 말부터 경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라스베이거스가 망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 것도 2007년 초였다. (미국의) 작은 로컬 부동산금융사들까지 에쿼티론(주택 구입가격을 토대로 1차 담보대출이 이뤄진 후 이를 제외한 나머지 주택의 가치를 다시 담보로 해 추가 대출을 받는 이른바 2차 대출)을 팔기 시작하면서 눈치 빠른 사람들은 ‘막장이다’라고 느꼈다. 이즈음부터 일부 국제 금융기업들은 가지고 있던 자산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번 위기를 비교적 잘 극복하는 JP모건 같은 기업이 대표적이다. 물론 일반인은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얘기를 해도 믿지 않았다. 기본에 충실했다면 그때부터 위기에 대비했어야 했다. 유럽의 경우 최소한의 준비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방어가 됐다.”
▼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나.
“다르지 않았다. 나도 2007년 중반쯤 한국의 한 시중은행 임원에게 2008년 경제위기 가능성과 유가 폭등을 얘기했는데 믿지 않더라.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이 미국 서브프라임 상품에 투자해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2007년 말부터 ‘주식 팔고 채권 사라’고 했는데 한국시장에서는 이런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대신 주가가 2000포인트를 넘긴다거나 심지어 3000포인트 간다는 장밋빛 청사진만 쏟아져 나왔다. 돈이 없어서 투자를 못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번 돈으로 미국 뉴욕 한복판에 건물을 산 (국내 금융) 기업도 있고 부동산에 재투자해 이익을 냈던 금융기관도 있다. 이제 화려한 시절을 보낸 대가를 치를 시간이 온 것일 뿐이다.”
1월8일 오전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지하벙커에서 열린 첫 비상경제 대책회의를 마치고 상황실을 둘러보고 있다.
“현재 위기의 본질은 파생상품에 있다. 그런데 파생상품은 규모를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손실규모를 예측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이게 가장 큰 위험요소다. 어느 나라에도 파생상품에 관한 통계는 없다. 올 상반기가 고비다. 위기의 실체나 규모가 상반기 중에 드러날 것이다. 무너질 기업들이 확인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대표는 파생상품을 두 가지로 분석했다. 하나는 금융파생상품이고 또 하나는 정부규제라는 것이다. “규제가 많을수록 규제를 피하기 위한 새로운 시장(파생시장)이 생겨나게 마련이다”라는 것인데 그것이 결국 경제를 왜곡한다고 이 대표는 주장했다.
“예를 들어, 환율시장에 정부가 뛰어들면 금융기관들은 환리스크를 극복하기 위한 상품을 개발한다. 시장을 막으면 암시장이 생기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생기는 시장에는 경제에 도움이 안 되는 돈이 모이게 마련이다. 헤지펀드만 모여든다. 지난해를 봐도 정부가 환율 잡겠다고 쏟아 부은 천문학적인 돈이 다 어디로 갔나. 외국 금융기관들 주머니로 가지 않았나.”
인터뷰 도중 이 대표의 입에서는 우리나라 정부의 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환율정책, 재정정책에 대해서도 이 대표는 불만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강조한 것은, 우리 정부가 예측가능하지 않은 정책으로 투자자(특히 외국자본)들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세금체계’를 첫 번째 문제로 꼽았다.
▼ 외국 자본이 우리 정부를 믿지 못한다?
“사실 한국은 국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상한 나라’다. 예측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가장 그렇다. 예를 들어, 세계 어느 나라도 실현되지 않은 이익에 대해선 세금을 매기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는 그런 세금이 있다. 종합토지세 같은 게 대표적이다. 외국 자본들은 이런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상식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불법이다. 사실 세금이 높고 낮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득 대비 세금이 50%를 넘긴다 해도 그것이 상식적이라면 문제가 없다. 외국 전문가들은 한국에 대해 ‘기본이 안 된 나라’라는 말을 많이 한다.”
▼ 다른 문제는.
“과도한 노사분규, 정치적 불안정도 문제다. 솔직히 나는 이 두 가지만 해결돼도 한국이 금방 일류국가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또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재편되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학자들은 어떻게 보는지 모르지만 돈을 만지는 실무자 처지에선 그렇다. 수년간 한국 정부는 ‘최근 10년간 우리나라가 많이 성장했다’고 주장해왔지만 사실 그건 착시효과다. 같은 기간 우리와 비교되는 선진국들이 발전한 것을 생각하면 분명히 뒤처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항상 ‘프랑스 같은 나라 만들겠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웃었다. ‘너희 나라 대통령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프랑스는 망해가는 나라다. 유럽에선 프랑스가 ‘복지정책 쓰다 망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나라를 배우겠다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요즘 프랑스는 수백년 된 성(城)을 뜯어서 미국에 팔고 있다. 우리로 치면 종합토지세가 비싸서 부자들이 아예 집과 땅을 팔고 외국으로 떠나는 나라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취임 일성으로 ‘부자들이 돌아오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 것이 바로 그런 상황을 빗댄 것이다. 요즘 ‘메이드 인 프랑스’ 물건 본 적 있나.”
▼ 노사분규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유독 심하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요구수준도 너무 높다. 한국에 투자하고자 하는 외국 자본을 이해시키기가 힘들 정도다. 한국의 노조는 회사가 돈을 벌면 돈을 나눠달라고 데모한다. 물가가 올라도 월급 올리자고 데모한다. 그런데 회사가 돈을 못 벌어 경영이 어려워지면 반대로 노조는 회사에 돈을 내나. 노조가 경영참여를 주장하려면 권리에 앞서 책임도 같이 져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을 한국의 노조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사용자와 근로자가 모두 서로의 직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본다. 계약에 의해 고용된 사람들이 왜 경영에 참여하나.”
▼ 앞으로 더 예상되는 위기 요인이 있다면.
“일단 미국 경제가 더 나빠지는 것이 한국으로서는 가장 안 좋은 시나리오다. 당연한 얘기지만 (미국의) 카드대란, 기업파산, 실업으로 연쇄적인 이동이 가장 무섭다. 이미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 불안하다. 미국 같은 신용사회에서 직업이 없어진다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다. 물론 미국의 경우 카드대란이 난다고 해도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우리나라가 과소비로 인한 사태였다면 미국은 생계형 대란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생되는 영향도 제한적일 수 있다. 그러나 위험요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얼마 전부터 미국 TV 토크쇼 프로그램에 카드문제를 상담하는 미국 소비자들의 사연이 올라오고 있다. 실업률이 급격히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문제다.”
▼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때문인지 일본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많은데.
“일본자본이 우리나라를 잠식할 것이란 분석, 나도 봤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그보다는 중국경제 편입 가능성이 더 높다. 일본 엔캐리의 규모를 과대 해석한 것 같다. 아직 우리나라는 달러에 기반을 둔 경제다. 엔화 자본이 갈 곳이 그리 많지 않다. 투신이나 저축은행 등에 들어온 일본자본 등을 보고 걱정하는 것 같은데 그건 실물경제를 잘 모르고 하는 얘기다. 우리나라가 그 정도로 취약한 구조는 아니다. 게다가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국민감정도 있어서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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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면서 이 대표는 난데없이 한국의 교육 문제를 입에 올렸다. 경제구조가 왜곡된 바탕에 바로 교육, 특히 비정상적인 사교육시장이 있다는 게 그의 주장. 아직 미혼인, 자녀가 없는 그가 교육 문제에 열을 올린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바로 교육이라고 본다. 연봉 1억원이 넘는 직장인도 교육비 걱정을 해야 하는 나라는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다. 영어만 잘하면 비즈니스를 잘할 것이라고, 성공할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미국 거지가 우리나라 사람보다 비즈니스 잘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영어를 잘하니까. 안 그런가. 가만히 보면 우리나라는 교육의 목적도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