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어느 때보다 ‘부자 되는 법’에 솔깃해지는 시기다. 그러나 사람들의 부(富)에 대한 관심은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있었고, 부를 축적한 자는 예외적인 대우를 받기 일쑤였다. 물질을 좇기보다 명분을 추구한 선비들의 삶을 높이 산 ‘사기열전’의 맨 마지막은 부자와 돈벌이 얘기다.
그리고 또 한 곳, 동대문 새벽시장이다. 동대문 새벽시장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상인들로 북적인다. 주 고객은 옷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다. 대형 쇼핑센터에서 조금 떨어져 그 풍경을 바라본다. 밤새 산 물건들을 대형 가방에 담고, 춘천 대구 청주 같은 지역명을 표시한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리고,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사람은 돈을 향해 모여든다. 이것은 매우 화려하고도 단순한 삶의 이치다. 사람들이 모여든 곳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꿈틀거린다. 서로 적당한 가격에 사고파는 에너지의 근본은 바로 생명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 움직이는 역동적인 모습은 경건하며 상인들이 사들인 옷처럼 아름답다.
새벽시장에서 구입한 의류를 자신의 가게에서 팔아 이문을 남기는 이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새벽 내내 분주히 움직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바로 화식(貨殖)이다. 화는 재산이고 식은 불어난다는 뜻이니, 사마천의 ‘화식열전’은 재산을 불리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사마천은 춘추 말부터 한나라 초까지 상공업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화식열전’은 말하자면, 한 시절을 풍미한 장사꾼과 기업인 열전이다.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는 공자의 뜻을 받들어 공부하는 선비들이 세상의 중심에서 움직였다. 농사는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경건한 노동으로 여겨진 반면, 상업을 하는 장사꾼은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게 당시 세태였다. 상업은 천한 일로 여겨졌으며, 학문하는 사람이 돈을 밝히는 것도 추하게 비쳐졌다.
1970년대 중반 현대정공을 둘러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왼쪽에서 세 번째)과 정주영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된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뒤, 한국의 경제사정은 매우 열악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이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누구보다 돈의 소중함을 잘 알았다. ‘경제 대통령’으로서 박정희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나 공(功)과 과(過)는 있는 법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할 정도의 인기를 누렸으나, 부하 직원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된다. 문화대혁명으로 온 나라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중국 경제를 후퇴시켰던 마오쩌둥에 대해 훗날 덩샤오핑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날의 과실을 모두 마오쩌둥 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객관적으로 마오쩌둥을 평가해야 한다. 공은 우선이고 과오는 둘째다. 우리는 마오쩌둥의 올바른 사상을 계승해야 하고, 그의 과오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은 ‘국가 경제발전’이다. 과오는 마오쩌둥과 같은 권력 집착이었다. 하여간 1975년 여름이었다. 박 대통령이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급히 불러,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다.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오라. 만약 임자도 못 할 것 같으면 나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묻는 정 회장에게 박 대통령은, 1973년 석유파동 이후 중동국가들에 달러가 넘쳐나고 있다, 그 돈으로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어하는데도 너무 더운 지역이라 선뜻 해보겠다고 나서는 국가가 없어 한국에 의사를 타진해왔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이 급히 정부 관리들을 파견했는데, 2주 만에 돌아와 하는 얘기가 너무 더워서 낮에는 일을 할 수 없고 건설공사에 필요한 물이 부족해 공사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듣고 정 회장은 바로 중동행(行) 비행기를 탔다. 5일 만에 돌아온 정 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이런 보고를 했다.
공자 부처 노자(왼쪽부터)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작자 미상의 ‘상교도’.
중동이 사막지역이라 물 걱정을 하는 대통령에게 정 회장은 물은 어디서든 실어오면 된다고 답했고, 더운 나라이므로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말과 행동을 하는 정 회장에게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정 회장 말대로 한국의 개미 같은 일꾼들이 낮에는 자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일했다. 세계가 놀랐다. 달러가 부족했던 시절, 30만명의 노동자가 중동으로 몰려나갔고, 보잉 747 특별기편으로 달러를 가득 싣고 돌아왔다.
정주영 회장의 현대를 비롯한 대기업이 이 시절 빠르게 성장했다. 박 대통령과 더불어 기업인들에게도 공과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공’을 먹고산다. 정경유착과 같은 과오는 절대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입고 먹는 것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가 바로 재산이다. 풍부한 재산은 엄청난 위력을 갖는다. 물론 그것을 잘 다루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사마천은 말했다.
재산 갖고 다투는 정치는 쓰레기
“귀와 눈은 아름다운 소리와 아름다운 모습을 한껏 즐기려 하고, 입은 소와 양 따위의 좋은 맛을 다 보려 하며, 몸은 편하고 즐거운 것을 좋아하고, 마음은 권세와 유능하다는 영예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풍속은 백성들의 마음속까지 파고든 지 오래다. 그러므로 미묘한 이론을 가지고 나와 집집마다 깨우치려 해도 도저히 교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가장 잘 다스리는 방법은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이익을 이용하여 이끄는 것이며, 그 다음은 가르쳐 깨우치는 것이고, 또 그 다음은 백성들을 가지런히 바로잡는 것이며, 가장 정치를 못하는 것은 ‘재산을 가지고’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기를 원한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공자 할아버지가 와도 소용없다. 사흘 굶은 사람에게 공자의 인(仁)이나, 부처의 법열에 대해 말한들 귀에 들어오고 행동으로 옮겨질 리 없다. 백성은 안락함을 추구하며, 그것을 보장해줄 위정자를 원한다. 사마천은 재산을 갖고 백성과 다투는 정치는 쓰레기라고 했다. 재산을 갖고 백성과 다투는 정치란 어떤 것일까? 부정부패, 치부(致富)를 위한 권력남용, 과중한 세금 부과 등 백성의 재산을 갖고 장난치는 일련의 나쁜 행위들을 가리킨다. 사마천은 부를 논하되 ‘돈만 벌면 된다’ 식의 논조를 펴지는 않는다.
‘장자’ 내편(內編) ‘소요유’에 상업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있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지만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 그런 모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장자’의 거대하고 비범한 다른 이야기들과 비교할 때 이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다. 송나라는 춘추시대에 번성했다.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는 문화국가였으나 가난하고 보잘것없었다. 신흥국가 월나라는 야만적이어서 아름다운 모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송나라 사람이 어리석었던 것이다. 장자를 전공한 철학박사 강신주는 말한다.
“방금 읽은 짧은 단편으로 장자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송나라 상인이 되어 아주 천천히 그리고 끈덕지게 이 글을 읽어 내려가야 한다. 우리가 월나라에 가려고 한 이유는 그 나라에서도 모자가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리는 억만장자가 될 기대에 부풀어 월나라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월나라는 송나라와 달라도 너무 다른 나라였다. 월나라에서 사회적 위상을 나타내는 것은 모자와 같은 예복이 아니라 문신이었다. 이곳에서 모자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이제 우리는 상인이면서 동시에 상인이 아니게 된 것이다. 모자를 팔려고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상인일 수 있지만 모자를 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상인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월나라 저잣거리에서 모자 꾸러미를 든 채 우리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찔한 현기증은 우리 자신의 자아동일성이 와해될 때의 느낌이다. 상인이면서 동시에 상인이 아닐 때 오는 현기증, 이것이 바로 ‘차이’를 경험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차이’에 돈이 걸려 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차이’를 알아야 한다. 세상에 차이가 존재하기에 너와 나,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왕과 신하도 있을 수 있었다. 사람마다 먹는 것, 사는 것, 자는 것이 다르다. 사람들의 생김새만큼이나 각 나라의 풍습도 다르다. 이 차이를 잘 알아차리고 이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자가 되는 법이다. 송나라 상인은 이 차이를 알지 못했다. 월나라와 송나라의 차이, 이 간단한 차이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바로 부자와 빈자의 차이다. 부자가 될 사람은 새로운 문신 기술을 배워 월나라에 갔을 것이다.
사마천은 부를 축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상업이라고 했다. 장사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팔고, 여기에서 사서 저기에서 파는, 아주 간단한 ‘차이’의 연금술이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 늘 차이를 보고 느낀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겨울이 깊으면 봄이 가깝다. 돈의 흐름 역시 자연의 현상처럼 움직인다. 사마천은 말했다.
동양제철화학 창업주 송암 이회림.
이러한 차이를 잘 아는 자에게는 ‘때’가 보이게 마련이다. 어느 시기에 투자를 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다.
“여보게 사업은 말이야 늘 잘되는 게 아니야. 누구나 살다 보면 좋은 운이 몇 번 찾아오게 마련이지. 열심히 산다면 말이야. 그렇게 사업이 잘되면 낮이 짧고 밤이 너무 길어. 자금이 들어오는 게 보이는 낮이 얼마나 짧은지 몰라. 그래서 새벽에 일찍 눈을 떠서 아침을 기다리지. 부지런한 사람은 낮이 짧은 사람들이야.
그런데 말이야. 자본이 쌓이면 그때부터가 중요해. 보통 사람들은 탕진하기 쉬워. 세상에는 돈 쓸 일이 많으니까. 그때 관리를 잘해서 허랑방탕하게 쓰지 않고 잘 모아두어야 해. 사업이나 개인이나 일이 안 될 때가 있는 거니까 그때를 대비해야 돼. 잘 운영한 자금으로 기회를 기다려야 해. 그러다가 다시 기회가 오면 투자를 하는 거지. 참 많은 사람이 이걸 몰라요, 하지만 난 몇 번 온 기회를 잘 잡고 운영해서 우리 기업을 만들었네.”
작고한 송암 이회림 회장(동양제철화학의 창업주)이 생전에 지인에게 한 말이다. 송암은 개성상인 출신으로 척박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기간산업 분야에 과감한 투자를 한 경제인이다. 어쩌다 인연이 되어 고인이 쓰던 집무실 책상 위를 본 적이 있다. 아직도 기억에 남은 것이 돼지 저금통을 비롯한 여러 개의 저금통과 동전들이다. 이 작은 단위의 동전들이 거대한 부의 근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암은 종로에서 작은 점포를 운영하던 시절에 ‘차이’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거래가 없어 한가한 시간이면, 종로통에 지나다니는 물건들의 흐름을 파악한 것이다. 어느 집에 어떤 물건이 들어가는지, 얼마만큼의 물건이 움직이는지를 보면 종로통의 경기를 알 수 있었다. 이 버릇은 훗날 대기업을 운영할 때도 없어지지 않았다. 고속도로에서 물자를 싣고 이동하는 대형 트럭을 유심하게 관찰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돈과 물건의 유통이 물의 흐름과 같이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시대는 달라도 부자들의 정신세계는 일맥상통하는 모양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의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이가 바로 도에 이른 사람이다. 학문이건 예술이건 기업이건 간에 이러한 경지에 올라야 대성할 수 있다.
물건과 돈은 유수(流水) 같아야
2006년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인 갑부 6인. 미국 및 세계 갑부 순위는 매번 달라진다.
구천왕은 해박한 지식으로 자연의 움직임을 살폈다. 어느 시기에 풍년이 들고 수해가 발생하는지 자연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미리 준비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재물을 비축해 물가가 폭등하는 것을 막고, 물자를 잘 유통시키면 백성이 왕을 따르게 마련이다. 이렇게 10년 정치를 하니 월나라가 부강해졌다. 그 힘으로 20여년을 기다려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인 오나라를 점령했다.
훗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붙잡는 구천왕을 뿌리치고 월나라를 떠난 범려는 스승인 계연의 가르침을 따라 장사에 나섰다. 월나라는 계연의 일곱 가지 계책 중 다섯 가지를 써서 뜻을 이루었는데, 범려는 ‘이것을 집에서 써보아야겠다’고 작심하고, ‘도’라는 지방에 가서 이름을 주공으로 바꾸고 대부호가 됐다.
정치인 범려는 경제인 도주공으로 변모하여 중국인들에게 존경받았다. 그는 많은 재산을 가난한 친구들과 먼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부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자손들도 아버지의 재산을 잘 운영해서 거부가 됐다고 한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부를 확산하는 자손들이다. 그룹 삼성을 떠올리게 된다. 이병철 회장의 대를 이어 이건희 회장은 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한 나라를 움직이는 경제 논리는 한 가정을 움직이는 경제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가정을 움직이는 경제 논리는 한 기업을 움직이는 경제 논리이기도 하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중요한 건 중심 잡기와 어떻게 적용하느냐다. 기술과 문명은 진보하고 발전하지만, 본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중국 고대 장사꾼이나 21세기 장사꾼이나 성공한 사람들은 여기에서 사서 저기에서 파는 ‘공간 차이’와 오늘 사서 내일 파는 ‘시간 차이’를 적절히 이용하는 지혜를 가졌다. 공간 차이는 이제 국가 간 거래로 확대된다. 무역은 결국 공간적인 차이를 잘 이용하는 것이다. 시간 차이는 환 차익이나 주식투자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이용된다.
드라마로 제작된 ‘상도’.
1년이 넘는 기간 후배는 현금을 만져보지는 못하고, 온라인상의 수치로만 부자 경험을 한 것이다. 한술 더 떠 후배의 친구는 한때 원금의 100배 가까운 이익을 올렸으나 지금은 후배와 같은 처지가 됐다고 한다. 후배의 친구는 그나마 원금 외에 외제차 1대와 1억원을 남겼는데도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임기응변, 결단력, 신의
사마천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도 ‘시세 변동에 따라 새처럼 민첩하게 사고팔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후배는 새처럼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욕심 때문이다. 조금만 더 벌면 일확천금이 들어올 것이라는 욕심이 그 몸을 하마처럼 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우(愚)를 범하지 말라고, 사마천은 주나라 사람 백규를 예로 든다.
백규는 시세 변동을 살피는 데 귀재였다. 그는 풍년과 흉년이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를 살펴 물건을 사고팔았다. 막대한 부를 이뤘지만, 옷을 검소하게 입고 일꾼들과 함께 즐거움과 고통을 나누었다. 인간적으로 성숙한 그는, 장사꾼으로서는 시기를 판단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사나운 짐승이나 새처럼 빨랐다. 백규는 말했다.
“나는 사업을 운영할 때 마치 이윤과 여상이 계책을 꾀하고, 손자와 오자가 군사를 쓰고, 상앙이 법을 시행하는 것과 같이 한다. 그런 까닭에 임기응변하는 지혜가 없거나, 일을 결단하는 용기가 없거나, 주고받는 어짊이 없거나, 지킬 바를 끝까지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내 방법을 배우고 싶어해도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겠다.”
사마천은 백규를 가리켜 ‘대체로 천하에서 사업하는 방법을 말하는 사람들은 백규를 그 원조로 보았다’고 썼다. 백규는 경제경영통이면서 동시에 ‘통섭의 인간’이다. 장사꾼으로서는 이윤과 여상을, 군사적으로는 손자와 오자를, 법률적으로는 상앙을 보고 배웠다. 장사를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전인격적 수양이 갖춰져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장사는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다양성의 통합이다. 자연과 인간에 통달하면 부자 되기는 어렵지 않다. 약속 잘 지키고, 어질고, 용기 있는 사람에게 돈이 흘러간다.
조선시대의 부자들은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활동을 하며 ‘화식열전’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산업혁명 이후의 경제활동엔 광고, 홍보, 마케팅 전략 등 복잡하고 미묘한 상술이 등장한다. 부의 축적 방법은 그 시대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사람들이 뭘 원하는가? 바로 거기에 돈이 모이는 게 당연하다. 빌 게이츠의 부는 21세기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공기나 물과 같으니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는 빌 게이츠에게 돈이 몰리는 건 당연지사다. 부자들의 눈에는 거리에 돈이 굴러다니는 게 보인다는 속설이 있다. 그걸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인데 돈이 보인다는 건, 정보가 보인다는 얘기와 같다.
산업화 시대 이전 최고의 부자는 왕과 왕실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권력을 기반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조선시대 왕과 가족들은 당대 최고의 부자였다. 그들의 부는 토지 소유를 통해 이뤄졌다. 조선 왕실의 일부인 궁실과, 왕실에서 분가한 왕자와 공주들을 가리키는 궁가를 통틀어 궁방이라고 하며, 이들에게 지급된 땅을 궁방전이라고 한다. 궁방전에 대한 기록을 보면, 1623년 인조 시절에 면세를 받은 궁가의 전결이 수백 결이다. 20년 뒤인 효종 시절에는 한 궁가의 전결이 200~500결에 달하고, 현종 초에는 한 궁가가 1400결을 넘게 가졌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궁방전의 면세 결수가 3만3444~3만7500결에 이르니 전국 토지 면적의 약 2.5%다. 부의 고른 분배는 예나 지금이나 요원한 일이다.
조선의 전설적인 부자들
사마천은 부자들을 일컬어 소봉(小封)이라고 했다. 소봉은 무관의 제왕이라는 뜻으로, 비록 왕의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지만,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마치 왕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왕처럼 지낸 전설적인 부자들이 있었다. 소설 ‘상도’로 널리 알려진 18세기 후반의 임상옥은 인삼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가 인삼교역권을 따내기 위해 왕실 사람에게 접근하고 막대한 뇌물을 바치기는 했지만, 단순히 권력에 아부만 해서 큰 부를 이룬 건 아니다. 장사꾼으로서의 지혜와 대담한 전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인삼교역으로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그 이름을 날렸으니, 오늘날 기업인의 모델이 될 만한 인물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변승업이라는 부자 이야기가 나온다. 엄청난 재산가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 1만호에서 그와 거래를 했다고 하니 당시 경제 규모로 보아 대단한 부자였음에 틀림없다. 사농공상의 시대 분위기에서도 이런 부자는 예외적인 대접을 받게 마련이다. 그는 중인 출신의 역관이었다. 조선시대 역관 중에 부자가 많았지만 변승업이 단연 탁월했던 모양이다. 그는 부인이 죽었을 때 관에 옻칠을 했다. 당시엔 국왕의 장례에만 관에 옻칠을 했는데, 사대부도 아닌 중인 신분으로 무척 대담한 행동이었다. 부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데다, 무엇보다 부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일이 문제가 되자 수십만금을 풀어 관리들을 입막음했다.
임상옥과 변승업은 부잣집 자식이었다. 그들은 가진 자본을 바탕으로 부를 확산시켜나갔다. 지금의 재벌가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일푼으로 시작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에게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개성에서 가난한 점원으로 출발한 이회림 회장과 고향에서 소 한 마리 끌고 나와 기업을 일군 정주영 회장의 경우가 그렇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인물들이 있었다.
최봉준은 19세기 말에 함경도에서 태어나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몸살을 앓던 조선을 살아낸 인물이다.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열두 살에 고아가 되어, 엽전 스무 냥과 보리쌀을 조금 챙겨 두만강을 건넜다. 러시아 설원에서 늑대 밥이 될 위기를 넘기고, 야린스키라는 러시아 귀인을 만나 그 밑에서 열심히 일하고, 유산도 물려받았다. 이 돈을 종자돈으로 주식에 투자하고, 성진항과 원산항을 중심으로 무역업에 나서 거부가 됐다. 한국을 넘어 해외로 진출한 사업가들의 모델로 최봉준을 생각한다. 그러나 최봉준은 러시아 국적을 갖고 러시아인으로 경제활동을 했다.
사람이 사는 이유
사람은 인생의 가치를 추구한다. 물질적 부에 연연하지 않고 고고하게 학문이나 예술의 길을 걷는 삶이 있는가 하면, 아비규환의 속세를 사는 중생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기 위해 수도하는 사람도 있다. 힘들여 번 전(全) 재산을 사회에 내놓고 가난을 자처하는 사람도 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은 대부분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화식열전’은 ‘사기열전’의 맨 마지막에 붙어 있다. 사마천은 ‘사기열전’을 ‘백이열전’으로 시작한다. 백이와 숙제는 명분을 위해 굶어죽었다. 사마천은 이들을 정직한 선비의 표상으로 여기고 존경했다. ‘자객열전’ 역시 부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얘기다. 사마천은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상을 자신의 관점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 러시아의 부자 톨스토이는 사랑을 이야기했으나,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어진 사람이 묘당에서 도모하고 조정에서 논의하며 신의를 지켜 절개에 죽고, 동굴 속에서 숨어 사는 선비가 높은 명성을 얻으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것은 부귀로 귀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렴한 벼슬아치도 시간이 오래되면 더욱 부유해지고, 공정한 장사꾼도 마침내 부유해진다. 부라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라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얻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건장한 병사가 전쟁에서 성을 공격할 때 먼저 오르고, 적진을 점령하여 적군을 물리치며, 적장을 베고 깃발을 빼앗으며,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끓는 물과 불의 어려움도 피하지 않는 것은 큰 상을 받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정치인 군인 기업인 외에 의사 도사 공무원 도둑 강도 사기꾼 도굴범 지폐위조범 제비 꽃뱀 타짜 등 온갖 인간 유형이 뒤엉켜 사는 것은‘부를 추구하는 인간 본성’ 때문이다. 도둑처럼 부정적으로 부를 모으는 이들은 남에게 베풀지 못한다. 부자라도 같은 부자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부자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 단순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한 사람을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 사마천은 베푸는 부자들을 중심으로 ‘화식열전’을 기술했다.
한 가지 일에 진심을 다하라
공자의 제자 중 최고 부자였던 자공은 조나라와 노나라 사이에서 무역업을 했다. 자공은 사두마차를 타고 비단과 같은 물건을 들고 제후들을 찾아갔으므로 왕들이 예로써 극진히 대접했다. 사마천은,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자공이 공자를 모시고 다니며 도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공자는 물질적 부로 감히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성인이다. 사마천은 그러한 성인들 밑에서 피죽도 못 끓여먹으면서 대의만 논하는 백수 선비들을 경멸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가난하고 천하게 살면서 인의를 말하는 것만을 즐기는 것 또한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더불어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일반 백성들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열 배 많으면 몸을 낮추고, 백 배 많으면 두려워하며, 천 배 많으면 그의 일을 하고, 만 배 많으면 그의 하인이 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다.”
아! 이 엄정한 사물의 이치를 진작 알았어야 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부를 이룰 것인가? 사마천은 상업을 최우선으로 삼는 길을 꼽았다. 하지만 따로 정해진 직업은 없다. 상업이 최선의 길이되, 자신의 재능에 맞는 분야에서 최고의 길을 찾아야 한다.
조나라 사람인 탁씨는 철을 제련해 부자가 됐다.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양나라 사람 공씨는 철을 가공해 부자가 됐다. 제나라 사람 조간은 생선과 소금을 팔아 부자가 됐다. 그밖에 농업 목축 공업 벌목 행상 등의 분야에서 각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 거부가 된 사람도 부지기수다. 자신의 온 힘을 던지는 진심과 열정이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다. 어떤 일을 하건 간에 그렇다. 사마천은 말한다.
“대체로 아껴 쓰고 부지런한 것은 생업을 다스리는 바른 길이다. 그렇지만 부자가 되는 사람은 반드시 기이한 방법을 사용했다. 밭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재물을 모으는 데는’ 졸렬한 업종이지만, 진나라의 양씨는 이것으로써 주(州)에서 제일가는 부호가 됐다. 무덤을 파서 보물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전숙은 그것을 발판으로 일어섰다. 도박은 나쁜 놀이지만 환발은 그것으로 부자가 됐고, 행상은 남자에게 천한 일이지만 옹낙성은 그것으로 천금을 얻었으며, 술장사는 하찮은 일이지만 장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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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으로 천만금을 얻었다. 칼을 가는 일은 보잘것없는 기술이지만 질씨는 그것으로 제후들처럼 반찬 솔을 늘어놓고 식사를 했다. 양의 위를 삶아 말려 파는 것은 단순하고 하찮은 일이지만 탁씨는 그것으로 기마행렬을 거느리고 다녔다. 말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대단찮은 의술이지만 장리는 그것으로 종을 쳐서 하인을 부르게 됐다. 이것은 모두 한 가지 일에 진심한 결과다.
부유해지는 데 정해진 직업이 없으며, 재물 또한 정해진 주인이 없는 게 분명하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왓장 부서지듯 흩어진다. 천금의 부자는 한 도읍 군주와 맞먹고, 거만금을 가진 부자는 왕자와 즐거움을 같이 한다. ‘그들이야말로 이른바 소봉(무관의 제왕)이라고 할 만한 자들이 아닌가?”
*다음 회 예고
다음달에는 ‘사기열전’의 첫 번째 편인 ‘백이열전(伯夷列傳)’을 이야기합니다. ‘화식열전’이 ‘사기열전’의 꼬리라면 ‘백이열전’은 머리인 셈이지요. 사마천은, 나라가 바뀌자 주나라 곡식은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백이를 통해 역사 속에서 어찌하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와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충절을 지키는 데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백이. 그는 신념의 충신이었을까요? 아니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무능한 자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