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단골 소재 중 하나가 복수다. 억울하게 당한 주인공이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악한에게 되갚음할 때, 관객은 통쾌하다. 그러나 복수가 늘 성공하는 건 아니다. 또 정당한 복수, 합리적 복수라는 게 있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복수를 꿈꾼다. 자비롭게 용서하라지만 쉽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박찬욱 감독의 복수3부작, ‘올드보이’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왼쪽부터).
- 이진명,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복수’의 사전적 의미는 ‘원수를 되갚는다’다. 원수를 갚는 것, 그러니까 복수와 용서는 한 끗 차이다. 상처 받은 영혼이 등장한다. 아이를 잃거나, 처절하게 버림받아 자존심이 상했거나, 부모나 친구를 잃은 사람들. 대개 ‘복수’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상실을 전제로 한다. 만일 노력해서 복구가 가능하다면, 그러니까 이전 상태로 회복이 가능하다면 사람들은 복수를 꿈꾸지 않을 것이다. 복수란 내가 잃어버린 만큼 상대도 무엇인가를 잃기 바라는 마음, 그래서 그 상실의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고 싶은 마음이다. 상처의 열평형 상태, 복수는 회복이 아니라 상처의 전이를 위한 노력이다.
회복할 수 없는 어떤 상실 앞에서 복수를 다짐하지 않는다면, ‘용서’의 이름으로 그것을 지워내는 방법이 있다. 이는 상대방을 구원하는 것이라기보다, 나 자신을 결핍과 상실의 고통에서 견인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으로부터 나를 놓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용서란, 극한의 노력을 요구한다. 용서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했을 때, 하나밖에 없는 나의 부모를 괴롭혔을 때,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에게 해코지를 했을 때, 그래서 그들과의 행복했던 순간이 다시는 맛볼 수 없는 과거완료형이 되고 말았을 때, 어떻게 쉽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최근 강호순이라는 연쇄살인범 때문에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그는 여러 가족에게서 딸 혹은 어머니를 무참히 앗아갔다. 함무라비법전을 따르지 않는 한, 상처를 똑같이 되돌려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미 산술적으로도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영화나 문학에서 ‘복수’는 아주 오랫동안 다뤄진 소재 중 하나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많은 이야기는 자신의 남편을 바람나게 한 여자들에 대한 헤라의 복수이고, 자식을 빼앗아간 제우스에 대한 복수이며, 여러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복수 성격의 형벌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것을 되갚기로 다짐한 햄릿은 복수극의 고전적 영웅임에 틀림없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누명을 쓴 채 지하 동굴에 갇힌 몽테크리스토 백작 역시 복수를 이야기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과연 회복할 수 없는 상실에 맞닥뜨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복수와 용서, 둘뿐이라면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일까?
‘브레이브 원’
‘복수’에 관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영화는 아마도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일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지는 복수 3부작은 각각 자신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어떤 것을 잃은 주인공들의 대응을 처절하면서도 독특하게 그려내고 있다.
먼저 ‘복수는 나의 것’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히고설킨 복수의 고리를 보여준다. 신부전증을 앓는 누이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청각장애가 있는 동생은 자신의 신장을 팔려고 나선다. 하지만 장기매매 사기꾼에게 걸려들어, 신장을 빼앗기고 돈도 잃는다. 누나에게 맞는 신장을 구하러 나섰다가 수술비조차 잃고 만 것이다.
공교롭게도 때마침 누나에게 맞는 신장이 구해진다. 동생 ‘류’는 수술비를 얻기 위해 애인의 권유에 따라 ‘착한 유괴’를 계획한다. 돈이 많은 가정의 아이를 유괴한 뒤, 수술비만 받고 아이를 돌려주기로 말이다. 돈 많은 사장의 도움으로 누나의 목숨을 살린다는 계획은 언뜻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문제는 실행 과정이 계획처럼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은 데 있었다.
‘밀양’은 자신의 아이를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애쓰는 한 여자(전도연 분)의 이야기다.
‘복수는 나의 것’에는 복수와 원한만 있을 뿐 완성이 없다. 류의 상실은 또 다른 시행착오를 낳고, 박 사장은 류의 목숨을 빼앗지만 자신도 죽고 만다. ‘1+1=2’가 아니라, ‘1+1=-2’라는 희한한 연산이 반복된다. 그들의 복수는 계속된 손실과 상실을 불러왔다.
이러한 연산은 ‘올드 보이’에서 반복된다. 누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완벽한 퍼즐을 준비해두었던 이우진은 마침내 복수에 성공한다. 이우진은 복수에 성공하고 나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오히려 ‘살아가야 할 이유가 더는 없다’고 판단,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에게 복수란 고통의 근원이었지만, 고통이야말로 그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 실존적 감각이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연작 가운데 마지막 편인 ‘친절한 금자씨’는 용서와 복수, 그리고 자기 구원이라는 주제를 다소 복잡하면서도 헐겁게 이어가고 있다. 금자는 자신을 아이로부터 분리시키고 감옥에 가게 한 백 선생에게 복수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으로 인해 아이를 잃은 유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금자는 용서를 구함으로써 백 선생의 죄를 가중시킨다. 금자 자신은 용서를 구하지만, 백 선생은 용서받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 파렴치한이기 때문이다. 개와 합성한 백 선생의 모습은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의 이미지를 구체화한다. 하지만 용서란, 그리고 자기 구원이란 대체 무엇일까? 용서받고 싶은 마음과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 이 두 갈래 길은 과연 동궤를 이루는 감정일까?
복수는, 피해자 처지에서만 가능하다. 반면, 용서는 자신이 가해자임을 자인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구원이다.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인 금자의 선택은 복수와 용서 사이의 복잡한 함수관계를 떠올린다. 복수 3부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복수’가 매우 사적인 형벌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복수하려는 이들은 법에 호소하기보다, 직접 가해자를 처단하고자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복수의 핵심은 바로 그 되갚음에 있는지도 모른다.
느려터진 법, 가볍기만 한 처벌
영화 ‘브레이브 원’의 이야기는 이렇다. 라디오 프로그램 ‘스트리트 워크’의 진행자 에리카 베인(조디 포스터 분)은 직접 마이크를 들고 도시의 소리를 취재한다. 그녀에게 소음 가득하고 먼지 낀 뉴욕은 사랑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영화의 흐름이 빠르다. 파스텔 톤의 옷을 입은 에리카 베인은 섹시한 애인에게 전화해 청첩장 색깔을 의논한다. 이들 뉴욕 커플의 일상은 우리가 뉴욕에 대해 상상하는 양화들 그 자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밝고 상큼한 일상이 마치 백일몽처럼 빠르게 지나쳐간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는 신속히 포장을 벗겨내고, 폭력적 도시의 일면을 공개한다.
결혼 계획에 들뜬 두 연인은 도심 한복판 공원에서 불량배들을 만나 폭행을 당한다. 여자는 3주간 혼수상태에 빠지고, 그 사이 약혼자는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사고 후 여자의 삶은 전과 확연히 다르다.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 에리카의 몸은 회복되었으나, 영혼의 상처는 회복이 불가능해 보인다. 죽은 약혼자가 되돌아올 리 없으니 말이다. 에리카는 여러 차례 경찰을 찾아가 범인 검거를 종용한다. 하지만 법은 느려터진데다 비합리적이기까지 하다. 경찰에게 이런 살인 사건은 그렇고 그런 뉴욕 시내의 범죄 행각에 불과하다.
결국 에리카는 불법으로 총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도시의 악을 직접 처단하기 시작한다. 죄 없는 노인을 괴롭히는 지하철 건달, 창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 돈의 힘으로 법망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그녀의 처단을 뉴욕 시민들이 환대한다. 법을 통한 처벌이 매우 불합리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시민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레저베이션 로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등장한다. 아이들과 여행을 다녀오던 중, 자신의 아들이 눈앞에서 뺑소니차에 치여 죽는 모습을 목격한 아버지.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자동차 번호판은커녕, 차종도 기억하지 못한다. 뚜렷한 증거가 없으니 경찰은 이 사건을 박스 한구석에 밀쳐둔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범인을 찾아내 마땅한 벌을 받게 하고 싶지만, 법이 도와주지 않는다. 더욱이 뺑소니차량 운전자에 대한 최고형이 구금 10년형에 불과하다는 것도 성에 차지 않는다. 이제 아버지는 직접 범인 잡기에 나선다.
닐 조던 감독의 ‘브레이브 원’이나 테리 조지 감독의 ‘레저베이션 로드’는 모두 개인의 상실감을 전혀 다독이지 못하는 경찰과 법의 한계에 주목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브레이브 원’의 그녀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레저베이션 로드’의 아버지는 복수를 못한다. 못 한다기보다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치고 달아난 범인을 찾아내지만 죽이지 않고 놓아준다. 그리고 남아 있는 가족에게 돌아간다. 아버지는 뺑소니범을 마주하고, 아들의 죽음이 ‘고의’가 아닌 ‘실수’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느꼈다. 역시 아이들의 아버지인 범인은 사고 후 죄책감에 시달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복수를 그린 영화 ‘세븐데이즈’.
닐 조던 감독 역시 복수를 감행하는 과정에서 달라진 자신을 느끼는 주인공에게 주목한다. 에리카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되뇌지만,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혼란을 느낀다. 에리카는 거울을 보며 ‘이제는 멈춰야 한다’고 하면서 또 한편으론, ‘사회악을 가만둘 수 없다’며 복수를 종용한다. 담당 형사 머서에게 접근하는 까닭도 유사하다. 그녀는 자신의 범죄에 대한 수긍과 동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복수는 또 다른 상실이라는 윤리적 문제를 불러오게 마련이다. 상대방에게 나의 상실감을 고스란히 안기는 것이 복수가 될지언정 구원이 되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레저베이션 로드’의 아버지가 가해자를 다른 아이의 아버지로 보고 용서할 때, 그 용서에는 복수 이상의 무엇이 담겨 있다. 물론 구원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를 잃은 그 가족은 아이의 빈자리로 인해 무시로 고통스러워할 것이고 상대방을 볼 때마다 복수하지 않은 자신을 미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 촉매제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연을 쫓는 아이’는 복수에 대한 독특한 시선을 담은 영화다. 흥미롭게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시선으로 서술되는 작품이다. 가해라고 하지만 그리 대수로운 폭력은 아니다. 한집에서 형제처럼 자란 아미르와 하산. 아미르는 주인집 아들이고 하산은 우리식으로 하면 행랑방 머슴의 아들쯤 된다. 형제처럼 자랐다고는 하나 실상 하산이 아미르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관계다. 하산은 아미르가 동네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처하자 목숨을 걸고 구한다.
그러나 하산이 불량배들에게 강간을 당할 때 아미르는 도망을 친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 일 없었던 듯 행동하는 하산에게 물건을 훔쳤다고 누명을 씌우고, 집에서 내쫓는다. 이후 그들의 고향 아프가니스탄은 혼란에 빠지고, 하산은 힘겹게 살아간다. 그리고 아주 오랜 후에 아미르는 하산이 자신의 배다른 동생이며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미르는 용서를 구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하산의 자식을 구해내 하산에 대한 잘못을 대속하려 한다.
아미르가 하산을 배신하고, 모함으로 곤경에 빠뜨리는 장면은 섬뜩하리만큼 사실적이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대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각성시키는 상황이나 사람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종종 죄를 빌고 용서를 구하기보다, 되레 더 큰 곤경에 몰아넣곤 한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지만, 아미르는 하산에게 구하지 못한 용서를 그의 아들에게서 구하려고 한다. 진정으로 용서를 구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한다. 어떤 점에서 진정한 복수란, 가해자로부터 진심 어린 사죄를 받는 것일 테다.
위험한 복수, 그 시작과 끝
영화 ‘밀양’은 자신의 아이를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고자 애쓰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그녀는 종교에 기대어, 곧 하느님 말씀, 용서와 자비, 사랑이라는 규율에 기대어, 자신의 소중한 아이를 뺏어간 가해자를 용서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가해자는 자신의 죄를 이미 하느님이 씻어주었다고 말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를 잃은 자신을 보살피는 하느님이 파렴치한 범죄자도 구원해줬다니, 여자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하느님은 불공평하다. 용서도 같은 용서여서는 안 되고, 저런 파렴치한은 구원받아서도 안 된다. 세상에 정의가 있다면, 하느님의 율법이 진정 존재한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여자는 신에게 묻고 또 묻는다.
사랑하는 가족, 아이, 아버지, 어머니를 잃었을 때 법도 신도 사실 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역시 위안의 장소이자 의지처일 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에게 근본적 치유와 망각을 주지는 못한다. 그것이 바로 복수와 용서, 용서와 구원 사이에 놓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자 아이러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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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 영화 붐을 일으킨 ‘세븐 데이즈’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철저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복수를 감행한다. 동굴 속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아내를 유린하고 아들을 죽인 황제에게 검을 겨누는 검투사 ‘글래디에이터’, 아내를 빼앗고 자신을 감옥에 보낸 비리 판사를 죽이기 위해 매일 면도날을 가는 이발사 ‘스위니 토드’. 복수의 이야기는 넓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상실과 아픔을 핏빛 복수로 수놓는다.
하지만 복수는 언제나 추락으로 치닫는다.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를 알아보지 못한 스위니 토드처럼 말이다. 결국 복수는 그것이 비롯된 감정이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잊게 만든다. 사랑을 위해 선택한 복수는 마침내 복수를 위한 복수로 왜곡되고 만다. 용서라는 행위가 불완전할지언정 복수보다 나은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복수에는 파괴의 에너지가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