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노조가 지난해 12월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미디어관련법개정안을 반대하는 파업 출정식을 열고 있다.
스마이드(Smythe, 1986)는 이 세상의 온갖 모순이 부각되는 장르가 미디어라고 단정했다. 오늘날 한국의 언론은 ‘전시(戰時) 상황’이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에 이른 10여 년간 정부와 신문, 신문과 신문, 방송과 방송, 신문과 방송 간에는 전면전이 진행 중이다. 총, 칼만 안 들었다뿐이지 언론사와 정권의 존립이 걸린 총력전이다.
최근에는 언론학계와 지식인 집단도 일정 부분 이 전투에 가담하고 있다. 이는 사상의 자유로운 공개토론 수준(marketplace of ideas)을 넘어서는 것으로, 저널리즘을 회복 불능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미디어권력과 네 마리의 개
수십년 군부 권위주의 기간에도 한국 언론은 일정한 힘을 가진 권력기구로 존재해왔다. 군부세력이 물러간 오늘날에는 정치권력, 재벌과 함께 ‘3대 거대 권력기관’으로 정립하고 있다. 강준만은 이를‘권력변환’이라고 단언했다. 미디어권력이 정치권력에 종속적이거나 부수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오히려 정치권력을 유도하고 통제하는 권력으로 변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미디어가 ‘동등한 행위자(equal co-actors)’의 수준을 넘어 ‘우위(dominant powers)’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감시견(watch dog)은 일반인에게 굳어진 전통적인 언론 기능을 설명하는 메타포다. 이른바 ‘제4부(the fourth branch)’ 개념이다. 여기서 감시의 대상은 국가나 권력기관. 권력 감시가 미디어의 매우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기업화된 미디어가 “자사의 이익 증진을 위해 언론이라는 ‘근육’을 사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고도화하는 단계인 현 한국사회에서 언론의 ‘애완견(lap dog)’화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이윤 추구를 위해 지나치게 친정부적이거나, 친기업적인 보도 양상을 보이는 언론이 이에 해당한다. 알철(Altschull, 1990)은 ‘미디어는 파이프를 부는 사람이며 이 사람에게 무슨 곡을 부르게 할지의 권한은 돈을 내는 사람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돈을 내는 사람’은 바로 ‘광고주’를 의미한다.
보호견(guard dog) 개념은 감시견과 애완견을 넘어선 새로운 접근이다. 이 메타포는 미디어가 공동체 전체를 위해 보초를 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스템을 보호해줄 수 있는 충분한 권력을 가진 집단을 위해 보초를 서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이념의 언론사가 특정 이념의 정파세력과 합심 단결하는 양상이 그것이다.
공격견(attack dog)은 언론이 그동안 금과옥조로 여기던 전통적인 ‘객관보도’에서 벗어나 주관적, 해석적인 보도에 치중하면서 나타났다. 언론의 주관적, 해석적 보도는 언론인들을 ‘정치 분석가’로 변모시켰다. 스스로 적극적인 연출가가 되어 어젠다를 통제하려 든다. 공격견의 모습은 선거 보도에서 극대화된다. 정치인은 연기자, 국민은 관객에 불과하다.
언론 전쟁의 끝, ‘신뢰의 붕괴’
한국사회가 민주주의의 공고화(鞏固化)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군부 권위주의 정권에선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 언론이 국민의 생활세계에서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이 나타났다. 지금은 상황이 또 변했다. 이런 미디어권력들이 서로에게 타격을 안기며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공방의 당사자는 ‘신뢰성’이라는 핵심 자산을 잃어가고 있다. 미디어 간 대립이 더 심화될 경우 언론은 민주사회 공동체를 붕괴 위기에 빠뜨리는 주범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