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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첫 중국인 난민 우전룽

“중국 민주화는 한국 통일의 지름길”

  • 이혜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ehappy@donga.com│

첫 중국인 난민 우전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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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중국인 난민 우전룽
■ 1965년

1949년에 태어난 나는 중학 졸업 전해 ‘강호협객’이란 제목의 글을 매일같이 써서 친구들 앞에서 읽어주다 벌을 받게 됐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싸우는 협객’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난 2주간 비판을 받았는데, 정풍운동이 일어 자유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때여서 비판의 강도가 더 심했다. 교사들은 생각의 독을 없애야 한다면서 질책하고,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타 지역에 가서 세수를 하니 피부가 더 좋아진다고 말한 아이’는 ‘자유사상의 소유자’라는 이유로 추방되기도 했다.

학교에선 날 집에 못 가게 하고 가둬둔 채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겁 많은 나는 선생님과 학생이 퇴출되는 걸 보고 나락으로 떨어질까 두려워 남 탓을 했다. 토지개혁운동(50년대) 시절 역사반혁명분자 판결을 받은 작은아버지, 공산화되기 전 국민당의 촌장이었던 외삼촌에게 화살을 돌린 것이다. 그 뒤부터는 진실한 생각을 발표하면 혼날 것 내 안에 같아 감추며 살았다.

■ 1967년

문화대혁명 시절 나는 홍위병(조반사령부에서 정치위원)이었다. 난 진심으로 활동했다. 문화대혁명으로 학교가 파괴돼 공부할 데도 마땅찮은데다 당시 겨우 초중(한국의 중학교)을 졸업한 나로서는 ‘대분화, 대와해, 대개조’라는 3대 구호가 마음에 들었다. 이 구호를 통해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공산당 없애자는 말도 나와 내심 기뻤다.



그러나 홍위병이 둘로 나뉘며 갈등이 시작됐다. 소수파이던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런데 다수파 사람들이 자꾸만 와서 회유했다. 내가 천안문 광장에 가서 마오쩌둥을 보고 온 리더급이었기 때문일까. 난 다른 견해를 가진 조직을 인정하지 않는 조직이 싫어졌다.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다음, 공산당을 비난했던 공산당지부위원회의 한 사람인 학교당지부 서기관이 도끼로 자신의 골을 찍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금 마음속의 이야기를 하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1968년

그렇게 진행되는 문화대혁명이 싫어서 인민해방군에 지원해 정치교관으로 근무했다. 문화대혁 때는 전 중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다 문을 닫았기 때문에 진학할 수도 없었다. 당시 초중(중학교)만 졸업했는데도 지식층으로 인정해줬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현실에서 19년간 도피한 셈이다. 대신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교관에겐 자유 시간과 개인 공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연구할 여유는 얼마든 있었다. 게다가 감시도 소홀했다.

마르크스, 엥겔스, 헤겔, 칸트 같은 고전을 읽고, ‘문화대혁명은 양당제를 포용하지 못하므로 실패한 것’이란 내용의 글도 썼다. 그러나 후폭풍이 무서워 글을 쓰면 땅속 깊이 파묻었다. 이것이 무용지물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의견을 개진할 날이 올 거라 믿었다.

■ 1987년

‘장제스 국민당’ 출신이자 동향인 사람(브라질 국적 소유자)을 소개받았다. 그를 따라 브라질에 가면 기존에 내가 써놓은 책을 얼마든지 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운이 없어 그 사람의 사업이 갑자기 잘못되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됐다. 결국 난 산시성 기계연구원이 돼 기존의 일을 계속 하기로 했다.

■ 2002년

자식 사업을 도와주다 이렇게 해서는 내 책을 영원히 출판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홍콩의 유명 사회과학서적 출판사에 편지를 부쳤다. ‘내 책은 양심의 소리인데, 중국 정치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출간이 가능하겠느냐’는 게 요지. 혹시 몰라 가명으로 보냈다. 그날이 2002년 2월15일이었다. 3월14일, 기다리던 답장은 안 오고 국가안정국 공안들이 연거푸 찾아왔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됐단 걸 알았다. 일이 악화되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내 말을 듣고 가족은 울기 시작했다. 그날 이 말을 하고 나와 지금껏 가족을 만나보지 못했다.

“울기는 왜 울어, 망하면 나 혼자 망한다, 걱정마라.”

■ 2002년 11월

이후 난 한국행을 택했다. 가까운 데다 민주화가 잘된 나라라고 여겨서다. 한국에 온 목적은 ‘중국 민주화 23개 조항’ 서안문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 서안엔 ▲일당제가 아닌 다당제가 돼야 한다 ▲언론 개방하라 ▲국민에게 자유를 돌려달라 ▲재야 정치범을 석방하라 ▲당내 민주화 실현돼야 한다 ▲군대는 공산당의 소유물 아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인사라 나를 만나줄 거라 믿었다. 다섯 번 죽다 살아남고 6년 동안 감옥에 갇혔고 10년간 망명한 분이지 않은가. 그래서 청와대 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중앙 일간지에서도 우리 의견을 받아주지 않았다.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프랑스대사관에서도 정치망명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결국 경찰서 조서를 받은 끝에 출입국관리소에 가서 난민 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 2004년 3월18일 이후

그때부터 지금까지 360편 정도의 글을 인터넷에 발표했다. 기존에 있던 것을 정리해 옮기기도 하지만 중국에서 가지고 온 것이 얼마 안 돼 다시 쓰는 경우가 많다. 운 좋게 이곳저곳에서 인정을 받아 중국 민주화를 이끄는 지도자 100인에 뽑히기도 했다. 다만 그 인터넷 사이트는 폐쇄돼 증명할 수 없는데 당시 화면을 출력한 것은 보관하고 있다.

반체제인사 웨이징성이 이끄는 중국민주운동해외연석회의 한국지부장을 맡아 6·4운동 기념 규탄식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 조직은 해외에서 중국 민주화운동을 하는 가장 큰 조직이다. 연고가 없어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다행히 중국동포 교회의 도움을 받아 난민 인정 소송을 진행하며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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