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우리 경제를 넘보던 열강들이 미국발(發) 금융위기에 타격을 받아 무력해진 점이고, 다행 중 불행인 것은 열강들이 모두 제 살길 찾기에 바빠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돌봐주기 어렵다는 점일 게다.
지금은 양치기 소년이 아무리 외쳐봐야 겨울잠을 자고 있는 늑대가 깨어나지 않겠지만, 피곤해진 양들을 돌봐야 하는 소년 역시 한가하게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거짓 경계의 유희를 즐길 만한 여유도 없다. 마을은 늑대가 없어 평화로운 듯하지만 언젠가 발생할지 모를 양들의 집단폐사 가능성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양들이 집단폐사하면 모두들 헐벗고 굶주리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늑대보다 더욱 무서운 장기불황과 경제시스템의 총체적 붕괴 조짐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가운데, 차라리 늑대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일이 있어도 먹고사는 문제로 크게 고민하지 않던 옛날이 그립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여기서 양이란 국내 기업(주로 중소기업)을 지칭하는 대명사다.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 있는 기업재무개선지원단 사무실.
이상은 현재 진행 중이거나 향후 전개될 가능성이 높은 기업구조조정 상황을 다소 무거운 톤으로 묘사해본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 경제는 환율, 금리 등 주요 금융지표가 비교적 안정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주요 기업의 부실이 대규모로 드러나지 않은 탓인지 실업률, 어음부도율 등도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의 상황과는 확연히 다르다. 10년 전에는 거의 모든 경제지표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바닥 수준에 닿아 있었다. 당시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5%에 가까웠고, 실업률은 7% 수준에 육박했으며, 환율과 금리는 한때 1900원과 30%를 넘어섰고, 코스피 지수는 300선 밑으로까지 떨어졌다. 이렇던 우리나라가 불과 2년 만에 외환위기를 졸업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외환위기는 불투명하고 왜곡된 소유-지배구조를 지닌 일부 재벌기업의 방만한 투자와 차입경영 때문에 발생했다. 위기의 원인이 분명했던 만큼 처방도 비교적 단순했다. 공적자금을 통한 부실채권 매입과 채권은행에 대한 증자지원, 그리고 기업구조조정을 통해서였다. 기업구조조정은 당연 재벌기업의 소유-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고, 소위 ‘5+3 원칙’ 아래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부실기업을 정리해 옥석을 가려내고 재벌기업의 소유-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해 외국 투자자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 무엇보다 수출이 급신장하면서 외환보유고를 만회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중요한 졸업사유였다. 미국, 중국 등 열강이 건재했던 만큼 수출환경이 좋아서 빠른 속도로 경기가 회복되었고, 선진국과 유사한 형태로 경제질서가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5+3 원칙이란 5가지 핵심과제(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상호지급보증 해소, 부채비율 200% 이내로 재무구조 개선, 핵심주력사업으로의 역량 집중, 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강화)와 3가지 보완과제(재벌기업의 금융지배 차단, 순환출자 억제, 부당내부거래 근절)를 의미한다.
채권은행은 재벌그룹에 속한 55개 기업을 퇴출대상으로 선정해 신규대출 중단, 청산, 매각, 합병 등을 실시했고, 6대 이하 재벌에 속한 부실 대기업 중 존속가치(going-concern value)가 청산가치(liquidation value)보다 크다고 판단되는 기업에 대해서는 워크아웃을 실시했다. 하지만 채권은행을 통한 기업구조조정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부실을 떨어내는 데 목적이 있었고, 미래지향적인 기업구조조정은 우여곡절 끝에 대주주가 책임을 지고 자발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