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호

기업 구조조정 IMF 외환위기 때와 2009년의 차이

‘선제적, 거시적 차원에서 구조조정 이뤄져야’

  • 김동환│한국금융연구원 금융회사경영연구실 실장 dhkim@kif.re.kr

    입력2009-03-10 13: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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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 구조조정 IMF 외환위기 때와 2009년의 차이
    우리 경제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최대 보루인 수출을 필두로 투자와 소비 등 내수기반이 주저앉으면서 경제의 성장동력도 식어가고 있다. 분배를 통한 성장, 성장을 통한 분배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세대·계층 간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하면서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청년실업자와 노숙자의 행렬이 다시 길어지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정치와 경제의 주권을 동서열강에 넘겨줘야만 했던 구한말의 비극이 재연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감돌고 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우리 경제를 넘보던 열강들이 미국발(發) 금융위기에 타격을 받아 무력해진 점이고, 다행 중 불행인 것은 열강들이 모두 제 살길 찾기에 바빠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돌봐주기 어렵다는 점일 게다.

    지금은 양치기 소년이 아무리 외쳐봐야 겨울잠을 자고 있는 늑대가 깨어나지 않겠지만, 피곤해진 양들을 돌봐야 하는 소년 역시 한가하게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거짓 경계의 유희를 즐길 만한 여유도 없다. 마을은 늑대가 없어 평화로운 듯하지만 언젠가 발생할지 모를 양들의 집단폐사 가능성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양들이 집단폐사하면 모두들 헐벗고 굶주리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늑대보다 더욱 무서운 장기불황과 경제시스템의 총체적 붕괴 조짐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가운데, 차라리 늑대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일이 있어도 먹고사는 문제로 크게 고민하지 않던 옛날이 그립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여기서 양이란 국내 기업(주로 중소기업)을 지칭하는 대명사다.

    기업 구조조정 IMF 외환위기 때와 2009년의 차이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 있는 기업재무개선지원단 사무실.

    외환위기 때는 방만 경영이 문제

    이상은 현재 진행 중이거나 향후 전개될 가능성이 높은 기업구조조정 상황을 다소 무거운 톤으로 묘사해본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 경제는 환율, 금리 등 주요 금융지표가 비교적 안정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주요 기업의 부실이 대규모로 드러나지 않은 탓인지 실업률, 어음부도율 등도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의 상황과는 확연히 다르다. 10년 전에는 거의 모든 경제지표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바닥 수준에 닿아 있었다. 당시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5%에 가까웠고, 실업률은 7% 수준에 육박했으며, 환율과 금리는 한때 1900원과 30%를 넘어섰고, 코스피 지수는 300선 밑으로까지 떨어졌다. 이렇던 우리나라가 불과 2년 만에 외환위기를 졸업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외환위기는 불투명하고 왜곡된 소유-지배구조를 지닌 일부 재벌기업의 방만한 투자와 차입경영 때문에 발생했다. 위기의 원인이 분명했던 만큼 처방도 비교적 단순했다. 공적자금을 통한 부실채권 매입과 채권은행에 대한 증자지원, 그리고 기업구조조정을 통해서였다. 기업구조조정은 당연 재벌기업의 소유-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고, 소위 ‘5+3 원칙’ 아래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부실기업을 정리해 옥석을 가려내고 재벌기업의 소유-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해 외국 투자자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 무엇보다 수출이 급신장하면서 외환보유고를 만회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중요한 졸업사유였다. 미국, 중국 등 열강이 건재했던 만큼 수출환경이 좋아서 빠른 속도로 경기가 회복되었고, 선진국과 유사한 형태로 경제질서가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5+3 원칙이란 5가지 핵심과제(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상호지급보증 해소, 부채비율 200% 이내로 재무구조 개선, 핵심주력사업으로의 역량 집중, 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강화)와 3가지 보완과제(재벌기업의 금융지배 차단, 순환출자 억제, 부당내부거래 근절)를 의미한다.

    채권은행은 재벌그룹에 속한 55개 기업을 퇴출대상으로 선정해 신규대출 중단, 청산, 매각, 합병 등을 실시했고, 6대 이하 재벌에 속한 부실 대기업 중 존속가치(going-concern value)가 청산가치(liquidation value)보다 크다고 판단되는 기업에 대해서는 워크아웃을 실시했다. 하지만 채권은행을 통한 기업구조조정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부실을 떨어내는 데 목적이 있었고, 미래지향적인 기업구조조정은 우여곡절 끝에 대주주가 책임을 지고 자발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외환위기로 장기 투자 소홀

    구조조정 초기 단계까지만 해도 국민은 경쟁력 없는 기업의 헐값 매각을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수업료 정도로 받아들였다.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글로벌 스탠더드의 시장경제를 배우기 위해서는 그만한 정도의 수업료가 필요하다는 막연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국적 투기자본의 암약으로 경영권 방어에 다급해진 국내기업들이 실물투자를 회피하고 국부(國富)유출 가능성을 문제 삼으면서 경제 내부에서는 적잖은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고 이와 같은 공감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외환위기 당시 기업구조조정의 주요 내용

    ○ 채권금융기관 중심의 부실기업정리 및 재무구조개선

    * 대출금 일부를 출자전환해 부도위험을 낮추는 한편 재무구조를 개선

    * 은행별 중소기업특별대책반을 통해 중소기업 워크아웃을 별도로 추진

    ○ 재무구조개선을 유도할 여건의 조성

    * 금융기관 부채상환을 위한 부동산 처분시 특별부가세 면제 및 취득 자산에 대한 취득세, 등록세 감면

    * 과다차입금(자기자본 5배 이상) 이자 손비 불인정

    * 부동산 임대업 및 개발공급업 개방, 토지공사의 기업보유 부동산 매입규모 확대, 기업구조조정을 위해 매각하는 부동산을 5년 이내 양도시 양도세 50% 감면, 자산유동화법 제정 등

    ○ 부실기업 퇴출제도의 개선

    * 정리절차 기간단축 등 회사정리법 개정

    ○ 기업 인수-합병시장의 활성화

    * 의무공개매수제도(발행주식의 25% 이상 취득시 50%를 초과해 공개매수)와 출자총액제한제도(순자산의 25% 이내) 폐지

    * 합병 차익에 대한 과세이연(기업의 원활한 자금 운용 위해 세금납부 연기 제도) 허용 등 세제지원

    * 외국인의 국내기업에 대한 M&A 전면 허용

    ○ 회계투명성 제고

    * 결합재무제표 도입 및 30대 기업집단 결합재무제표준칙 제정

    * 외부감사인 및 회계관계인에 의한 분식회계와 부실감사 등 회계투명성 저해행위에 대한 책임 강화, 감사인 선임제도 강화

    ○ 기업경영투명성 제고

    * 상장법인에 대한 사외이사 선임 의무화

    * 소수주주권 행사요건 완화

    * 원칙적으로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허용

    ○ 5대재벌에 속한 부실대기업 중 중복 과잉투자가 심각한 7개 업종에 대해 합병, 재벌간 사업교환(빅딜) 추진


    기업 구조조정 IMF 외환위기 때와 2009년의 차이


    새로이 구축하는 경제시스템이 우리에게 맞는 것인지, 경제의 질서를 확립하려다 오히려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들고야 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또 ‘경제질서를 확립’하는 것보다는 ‘경제 살리기’가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주장에 편승이라도 하듯 일부 세력은 열정적인 민족주의자가 되어 국민을 선동하고 또 다른 세력은 냉엄한 시장논리로 국민을 위협하면서 국내 기업의 행보에 족쇄를 채우는 각종 규제를 폐지·완화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은 국내 기업을 외국자본에 대한 대항마로 키워 국부 유출을 막고 경제주권을 수호하며 꺼져가는 성장엔진에 불씨를 지피지 않는 한 한국 경제의 내일을 기약하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을 확산시키기도 했다.

    외환위기는 기업들에 위험(risk)과 수익(return)의 존재와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기업구조조정은 국내 기업의 재무건전성과 수익성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기업은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지나치게 위험을 회피하려 하는 성향이 몸에 배어 장기 설비투자와 기술개발투자에 소홀했다. 그 대신 경영권 방어를 위한 주식투자, 안전자산 확보를 위한 부동산투자, 시장지배력 강화를 위한 금융회사 인수·합병에 열을 올려왔다.

    결국 5+3 원칙 가운데 5가지 핵심원칙은 비교적 충실히 지켜졌지만, 3가지 보완과제는 여전히 추후 보완되어야 할 과제로 남겨졌다. 재무구조가 크게 개선되고, ‘경제 살리기’의 주역으로 각광을 받게 된 기업들은 발언권을 크게 신장했지만, 실물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는 실패했다. 그 후 우리 경제는 시나브로 성장동력을 잃고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갔다.

    구조조정 대상 선정에 소극적

    현재 기업구조조정은 채권금융기관 간 자율협약의 형태로 추진되고 있다. 외환위기 때와는 달리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것도 아니고 대주주에게 특별히 주문하는 일도 없다. 은행은 상시적인 신용평가를 통해 거래기업을 정상(A), 일시적 유동성부족(B), 부실징후(C), 부실(D)의 4 등급으로 구분하고, 주채권은행은 B 및 C 등급 기업에 대한 금융지원 및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한 후 채권금융기관협의회를 거쳐 결정하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 IMF 외환위기 때와 2009년의 차이
    채권금융기관협의회는 금융지원 및 구조조정 방안에 이견이 존재할 경우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을 근거로 설립된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회를 통해 조정하며, 정부와 기업재무개선지원단은 효율적이고 원활한 기업구조조정을 위해 법·제도적 기반을 조성하고 기타 필요한 정책을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다.

    현재 추진 중인 기업구조조정에는 몇 가지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첫째, 구조조정 대상기업 선정이 소극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상시 신용평가 항목의 상당 부분은 평가자의 주관적 판단을 요하는 정성적 요소로 구성돼 있다. 그 때문에 신용평가를 수행하는 은행 간에 신용등급 판별기준에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또한 저축은행, 보험회사, 신용보증기관 등이 협약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것도 문제다. 협약 비가입 금융기관의 채권행사나 담보권행사를 저지할 법적 명분과 제도적 장치가 없어 협약의 구속력과 형평성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신용등급 판별기준이 상이하고 협약 비가입 채권금융기관이 상존하는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구조조정 대상기업을 선정할 유인이 없어지게 된다. 구조조정을 통해 하위(C, D) 등급 기업을 많이 선정한 은행일수록 BIS비율이 낮아지고 대손충당금 부담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둘째, 채무기업의 도덕적 해이나 장기불황 우려 등의 요인이 겹치면서 기업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 곤란해지는 점이다. 구조조정 대상기업이 제대로 선정되지 않아 기업의 옥석 가리기가 어려워지면 자기과실로 인해 자금난에 빠진 부실기업도 은행 문을 두드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향후 실물경기 불황이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그리고 건설·조선업에서 자동차산업 반도체산업 등으로 확산되고 장기화할 것이란 비관적 전망이 속출함에 따라 은행들은 대출부실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정상기업에 대한 신규대출도 주저하게 된다.

    경제의 성장엔진에 비상등이 켜진 가운데 신용경색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게다가 수출이 GDP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볼 때, 세계경기 침체로 인한 수출기반의 붕괴는 구조적 장기불황으로 직결될 공산이 크다. 이를 반영하듯 외환위기 이후 줄곧 감소하던 기업대출 연체율이 2008년에 접어들면서 상승세로 반전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자산건전성이나 자본적정성 등의 측면에서 큰 문제가 없는 은행 입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할 명분이 약할 수밖에 없고,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아 재무구조가 좋아졌거나 발언권이 세진 기업들을 상대하기도 버거운 형편이다.

    게다가 외환위기 당시에는 이미 도산위기(solvency crisis)가 부실채권 형태로 현재화된 소수의 재벌기업만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하면 됐으나, 지금은 유동성위기(liquidity crisis)에 임박한 다수의 중소기업까지 구조조정 대상으로 삼아야 해 부담이 만만치 않다. 채권금융기관을 통한 자율적 기업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확산 중

    외환위기 당시의 기업구조조정은 사후적 미시경제적 구조개혁(ex-post microeconomic structural reform)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이미 많은 기업이 문을 닫은 상황에서 도산의 원인이 된 소유-지배구조 문제를 개선하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현재는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글로벌 신용경색 현상이 심화하고 총체적 신뢰의 위기로 확대되면서 점차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데다, 기업의 유동성위기가 도산위기로 확대되고 있음에도 시장에 잠재하는 과잉유동성(즉 부동자금)이 언제 다시 쏟아져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확산되는 상황에서는 경제의 지속가능 성장(sustainable growth)을 견인할 선제적 거시경제 차원의 구조개혁(preemptive macroeconomic structural reform)이 필요하다.

    기업 구조조정 IMF 외환위기 때와 2009년의 차이
    사후적 미시경제적 구조개혁이 ‘부실기업 퇴출’을 통한 ‘시장의 발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선제적 거시경제적 구조개혁의 초점은 ‘정상기업 살리기’를 통한 ‘경제의 생존’에 있다. 이러한 구조개혁은 신용경색 해소를 통한 신뢰 회복, 공급 측 애로요인 해소를 통한 디플레이션 극복, 탄력적 유동성 지원 및 구조조정을 원칙으로 한다.

    그 첫째 이유는 정상적인 기업이 유동성위기에 몰려 도산하면 결국 시장에 대한 신뢰의 상실로 이어져 경제시스템의 총체적인 파국이 불가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금융위기가 실물경제 침체로 이어지지 않도록 공급 측면의 애로요인을 제거하지 못할 경우에는 경제가 디플레이션 국면에 빠지게 되어 기업도산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이유는 잠재적 과잉유동성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가운데 일방적으로 유동성을 확대하거나 기업구조조정을 지연시킬 경우에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나 자산가격 거품의 형성과 붕괴가 만드는 경기의 산과 골을 더욱 높고 깊게 하여 경제를 매우 불안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는 선제적 거시경제적 구조개혁 방안들에 관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신뢰 회복 급선무

    일시적으로 유동성위기에 처한 기업 가운데 존속가치가 청산가치보다 높은 기업은 적극적으로 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채권은행에 선제적 워크아웃(Pre-workout)을 신청하거나 통합도산법상 회생절차를 밟는 기업의 대출채권을 은행 자산건전성 분류나 대손충당금 설정시 한시적으로 우대해 유동성 지원에 차질이 없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은행의 필요자기자본비율, 대손충당금비율 등을 불경기에는 낮게(반대로 호경기에는 높게) 탄력적으로 운용해 금융규제나 감독 때문에 경기에 발목이 붙잡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즉 금융규제 및 감독의 경기순응성(pro-cyclicality)을 완화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이미 스페인에서는 동태적 대손충당금(dynamic provisioning) 제도가 시행되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한 G-20에서도 금융규제 및 감독의 경기순응성 완화에 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그리고 정당한 절차에 따라 취급한 대출이 부실화하는 경우나 부실대출이 금융기관의 고의나 과실에 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책임을 묻지 않거나 경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신용경색 해소를 위해서는 유동성위기에 처한 모든 기업에 자금을 지원해야 하나? 그렇지는 않다. 유동성위기에 처한 기업 가운데 청산가치가 존속가치보다 높은 기업까지 은행이 계속 떠안고 있을 필요는 없다. 이들 가운데 채권-채무관계가 비교적 단순한 기업에 대해서는 은행이 직접 또는 구조조정펀드를 통해 기업분할, 사업분할매각, 인수·합병 등을 실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채권-채무관계가 복잡하고 도산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기업은 조속히 통합도산법상의 청산절차로 이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수 이해관계자 간의 이해상충 문제를 공정하고 실효성 있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워크아웃과 같은 사적 정리보다는 법정관리가 유효하고, 일단 청산절차에 편입되었던 기업이 재건절차로 이행하는 경우에는 그 반대의 경우에 비해 시장에 좋은 시그널로 작용할 수 있어 이해관계자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기업 살리기

    디플레이션이란 물가와 생산이 모두 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생산이 감소하기 때문에 고용도 소득도 당연히 감소한다. 이때 금리를 낮추거나 유동성을 풀거나 재정지출을 늘려 총수요를 확대하면(즉 케인스식 처방을 쓰면) 생산이 늘지만 물가 역시 상승하게 된다.

    하지만 생산의 증가가 고용이나 소득의 증가로 이어지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에 실업자나 저소득 서민들은 물가상승으로 인해 곤욕을 치르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물가의 급상승을 억제하면서 생산을 더 한층 늘리되, 생산의 증가가 고용증가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총수요와 총공급을 동시에 확대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당분간 수출환경이 매우 어두울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우리 경제의 총공급 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고용유발형 첨단산업을 육성하고, 내수 비중이 높은 서비스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서비스산업의 과잉취업 인구를 일손이 부족한 제조업으로 전직(outplacement)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외환위기 이후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소홀히 했던 것이자 우리나라의 실물산업 기반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공공성과 리스크가 높거나 리스크 평가가 어려운 일들인 만큼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과 시장에만 맡겨서는 제대로 추진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이것말고도 공급 측면의 애로요인은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공공성이 높은 분야로는 지역 및 사회개발, 환경보호, 사회간접자본 확충, 재해 및 불황의 복구, 산업구조조정, 영세 소상공인 및 신용불량자 대책 등이 있다. 그리고 IT· BT·NT 등의 신기술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는 것, 벤처기술력을 상용화하는 것, 혁신형 창업기업을 육성하는 것, 에너지·우주·항공 개발, 남북경제협력 등은 리스크가 높거나 리스크 평가가 어려운 분야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공급 측면의 애로요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책금융기관(국책은행 및 신용보증기관)의 적극적인 투융자와 보증이 필요하다. 기업구조조정 등을 위한 펀드의 조성과 운용도 정책금융기관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일 중의 하나다.

    기업 구조조정 IMF 외환위기 때와 2009년의 차이

    경제수장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2월10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목이 타는 듯 물을 마시고 있다.

    특히 경쟁력 있는 중소·벤처기업을 육성하는 것은 우리 경제의 지속가능 성장과 생존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선제적 거시경제적 구조개혁의 모토인 ‘정상기업 살리기’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 및 사업 특성별로 적합한 금융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책금융기관과 상업금융기관이 신용공여와 리스크를 분담하는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컨대 창업단계 기업에 대해서는 투자·보증의 복합지원이, 성장단계 기업에 대해서는 융자·보증의 복합지원이 바람직한데, 특히 투자·보증 복합지원의 한 형태인 보증연계투자는 창업기업이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을 뛰어넘어 영업기반을 공고히 하고 중견기업으로 성장해가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그리고 신용공여와 리스크는 정책금융기관이 종자돈(seed money)을 제공하고 나머지를 상업금융기관이 제공하는 식으로 분담하면 좋을 것이다.

    금융지원의 규모가 충분하다고 해서 경쟁력 있는 중소·벤처기업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과의 불공정거래 때문에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중소·벤처기업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중소·벤처기업이 대기업과의 하도급거래를 선호하는 것은 안정적 판매망 확보를 통해 매출액의 변동을 줄이고, 독자적으로 판매망을 구축해야 하는 비용을 절약하며, 하도급 거래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연구개발(R&D) 등과 관련된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메리트는 경제의 글로벌화와 더불어 하도급 거래선을 해외로 이전하는 대기업이 늘어남에 따라 점차 줄어왔다. 또한 거래선 이전 과정에서는 단순히 구매·판매망이 이전될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 또는 공동으로 개발·보유하고 있는 지적재산권이 부당하게 이전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경쟁력 있는 중소·벤처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이들 기업이 국내외 구매·판매망을 다각화하고 지적재산권을 보호받으며 신제품 개발능력과 기회를 확대할 수 있도록 새로운 네트워크금융을 모색하는 데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는 기업구매자금대출, 네트워크론과 같은 기존 네트워크금융의 지원범위를 중소·중견 구매기업으로 넓히고, 금융의 지원목적을 독자 또는 공동의 구매·판매망 및 R&D체계 구축을 위한 경우 등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탄력적 유동성 지원

    위기가 진정되는 장래 시점에 유동성을 회수할 수 있는 탄력적 유동성 지원 수단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RP(환매조건부채권) 거래다. 이미 한국은행은 RP거래 대상 채권에 은행채를 포함시켜 은행에 유동성을 지원하고 있지만, 신용경색 현상이 확산되는 속도나 범위에 따라서는 일정 등급 이상의 기업어음과 회사채를 포함하는 방안도 강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은행 역시 성공보수형 금리조건부 대출, DDS(debt-debt swap) 등과 같이 경기 및 차입기업의 자금사정을 감안하면서 유동성을 조절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출 필요가 있다.

    참고로 DDS는 기업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을 때 단기차입금의 일부를 자본적 성격의 장기후순위채로 전환해 동 기업의 재무구조를 건전하게 해줌으로써 신규 차입을 가능하게 하며, 반대로 자금사정이 좋을 때는 장기후순위채를 단기차입으로 전환해 유동성을 회수하는 수단이다.

    외환위기 당시의 기업구조조정은 은행이 부실채권을 처리하는 과정과 맥을 같이했고, 은행의 부실채권 처리방식은 예상손실분에 대해 대손충당금을 쌓거나 부실채권을 매각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형태의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은행과 기업은 모두 손해를 보았고 경기도 상당 기간 침체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까닭은 부실채권이란 형태로 함몰된 기업의 경영자원이 재활용되지 못한 채 사장된 데에 크게 기인한다. 기업구조조정 역시 위기가 진정되는 장래 시점에 이들 기업의 경영자원을 되살릴 수 있도록 탄력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잃어버린 10년’ 동안 일본에서 인구에 회자되던 ‘패자부활’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또 기업구조조정은 부실자산 처리형의 소극적 방법에서 경영권을 획득하고 적극적으로 경영에 개입하여 기업가치를 높이는 기업개선형 방법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따라서 향후 정부나 은행은 부실채권이 발생한 다음 사후 정리하는 형태의 ‘채권 회수형 강제적 구조조정’보다 부실화우려 기업을 선제적으로 처리하는 ‘경쟁력 강화형 자발적 구조조정’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이미 우리나라 은행들은 외환위기 경험으로부터 경쟁력 강화형 자발적 구조조정의 성공요건인 고객네트워크, 자산운용 및 관리서비스 기능 등을 체득하고 있지 않은가.

    기업 구조조정 IMF 외환위기 때와 2009년의 차이

    채권단의 1차 구조조정 신용평가 결과 퇴출대상인 D등급으로 분류된 C&중공업.

    또한 부실채권의 형태로 함몰된 기업의 경영자원을 재활용하는 방법으로 DIP 파이낸스가 있다. DIP 파이낸스는 워크아웃을 포함해 재건형 도산절차를 밟고 있는 기업(점유채무자, debtor in possession)의 경영권을 인정하면서 같은 기업의 현금흐름(cash flow)을 변제재원으로 해 유동성을 지원하는 수단이다. 일반 대출에 비해 고금리, 단기, 소액의 특성을 지니게 되며 사전심사 및 사후관리 능력이 뛰어난 은행에 비교적 안전하면서도 수익성이 높은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물론 재건형 도산절차를 밟는 기업이라 하더라도 재건신청을 전후로 한 시기에는 유동성위기에 몰릴 가능성이 있고, 또한 동 시기에는 어음의 부도나 외상매출금의 회수곤란으로 인해 납품업자 역시 연쇄도산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DIP 파이낸스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DIP 파이낸스 채권을 자산건전성 분류나 대손충당금 설정시 우대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낭비할 시간 없다

    지금은 늑대의 출현을 경고하는 양치기 소년에 신경 쓰기보다 양들의 집단폐사를 막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또한 향후 기업구조조정은 정상적인 기업을 살려 경제를 생존케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기업 구조조정 IMF 외환위기 때와 2009년의 차이
    金東煥

    1960년 서울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일본 도쿄대 경제학 박사

    산업연구원 연구원

    금융발전심의회 위원, 은행법학회부회장

    現 한국금융연구원 금융회사경영연구실 실장

    저서: ‘일본경제의 위기와 시사점’ ‘은행시스템의 진화에 관한 연구’, 역서 ‘아담 스미스’ 등


    그렇다고 해서 ‘경제 살리기’를 ‘경제질서 확립’에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제질서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후진국의 기업이 국제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을 수 없듯이, 경제질서를 확립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키워 경제주권을 수호하고 경제를 바로 세우는 초석이 된다.

    다만 ‘경제 살리기’를 도외시한 채 ‘경제질서 확립’의 당위성만을 강조할 경우에는 자칫 공허해지기 쉽고, ‘경제질서 확립’의 필요성을 망각한 채 ‘경제 살리기’만을 고집할 경우에는 자칫 맹목에 빠지기 쉽다.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 이후 지속되는 경제수업을 마치고 명실상부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기 위해서도 공허하고 맹목적인 주장의 소모적 다툼에서 하루바삐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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